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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의 합당한 예절' 2019년 1월 13일 주일 설교

2019-01-1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9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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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3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 메시지 ------------------------------------------------------- 로마서 16:1~16,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72) 본문 2절의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을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곧 우리의 삶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로마서 강해도 마지막 한 장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만, 사실 바울은 로마서를 15장에서 마무리할 수도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15장의 마지막 절(33절)이 일종의 축도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도 목사의 축도로 끝나지요. 그래서 제가 어릴 적 가장 좋아한 기도가 목사님의 축도였는데요 …, 바울의 다른 서신서들이 그렇게 축원의 기도로 끝나는 것처럼, 로마서도 그렇게 15장으로 마무리를 했어도 별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15장까지 기록한 바울의 마음에 강한 감동이 있었습니다. 뭔가 빠뜨린 것 같고, 뭔가 더 써야 할 것 같은, 성령의 강권하심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감동에 의지하여 여기 마지막 16장을 천천히 기록해 나갑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너무나 존귀한 성도들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적어 내려감으로써, 바울은 그렇게 로마서에 한 장을 보탭니다. 그런데 그렇게 추가한 안부 인사치고는 내용이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신약성경 스물일곱 권의 책 가운데 약 절반에 해당하는 열세 권을 바울이 썼는데요, 모두 편지의 형태입니다. 따라서 열세 권 모두 마지막에는 인사와 안부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여기 로마서의 인사말이 다른 어떤 편지보다도 압도적으로 길고 또 자세합니다. 말 그대로 작정하고 쓴 안부 인사가 됐습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이름은, 1절과 2절에 걸쳐 소개된 ‘뵈뵈’라는 이름의 여성입니다. 이름이 조금은 특이한데요 …, 이 자매 뵈뵈는, 3절 이하에 소개된 다른 스물여섯(혹은 이름은 없지만 존재는 명확한 루포의 어머니와 네레오의 자매를 포함하여 스물여덟 명) 명에게 ‘문안의 인사’가 있는 것과는 달리, ‘추천의 인사’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6장 도입부는 일종의 추천서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울이 뵈뵈를 추천했다는 것은, 이 로마서 두루마리를 들고 로마까지 직접 가지고 간 사람이 바로 이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들고 가는 이 뵈뵈를, 로마 성도들이 잘 영접해 주기를 부탁하기 위해 이 추천의 인사말로 16장을 시작합니다. 1절에서 소개하는 것처럼, 뵈뵈 자매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입니다. 겐그레아는 그리스 남부에 있는 고린도에 속한 항구 도시로, 그리스 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였습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에 개척한 교회가 거기 있었고, 그가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 위해 배를 탄 곳도 여기였습니다(행 18:18), 바울이 나실인 서원을 위해 (한 달 이상) 길렀던 머리카락을 이곳에서 자르고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 서원을 완성한 곳으로도 유명하지요. 뵈뵈 자매는 바로 그 교회의 일꾼이었습니다. 여기 ‘일꾼’이라는 말에는 주석이 하나 달려 있는데요, 아래를 보면, ‘또는 집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문에는 ‘집사’라는 명사가 아니라 ‘(집사로서) 섬기고 있는’이라는 분사(디아코노스)가 사용됐습니다. 당시는 교회 안에 이러한 직분들이 정해지고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뵈뵈는 여성 집사였고, 아직 목사나 장로와 같은 사역자가 세워지기 전의 겐그레아 교회를 주도적으로 섬기던, 그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음을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로마서를 들고 직접 로마까지 갑니다. 여분의 로마서 사본이 따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이 편지를 맡길 만큼 바울이 깊이 신뢰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겐그레아에서 로마면 결코 짧은 여정이 아닙니다. 중간에 배를 타고 아드리아 해도 건너야 하고, 육로로도 1,200km 이상을 이동해야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배를 타고 지중해를 멀리 돌아서 로마로 갔으리라 생각이 듭니다만, 어쨌든 여성의 몸으로 직접 이 편지를 들고 로마까지 간 걸 보면, 바울이 뵈뵈를 정말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 역시도 이런 여행에 나름 익숙했던 사람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본문 2절은, 그녀가 바울은 물론 여러 사람의 ‘보호자’였음을 언급합니다. 여기 ‘보호자’라고 번역된 단어 ‘프로스타티스’는 우리가 보통 ‘후견인’이라고 해서 어떤 사람의 신변이나 재산을 책임지는 사람을 뜻하는 명사입니다. 당시 뵈뵈 집사가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그녀가 나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적이고 안정된 위치에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만 놓고 보면, 그녀가 이렇게 여러 사람의 후견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 ‘뵈뵈’(포이뵈)라는 이 이름은 당시에는 흔한 이름으로, 주로 한때 노예였다가 자유민이 된 여성의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어떤 과정을 통해 그와 같은 지위와 역할을 가지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바울은 이 뵈뵈 집사로부터 사역과 삶에 있어 큰 도움을 받았음이 확실합니다. 로마로 가는 그녀를,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고, 그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도와주라고, 로마의 성도들에게 부탁하고 있고, 이 ‘영접’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 숙식 등 필요한 것을 제공하여 돌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로마 성도들인데, 어디 뭐라도 맡겨둔 것 같지요. 여러분, 우리는 이 대목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 즉 거룩한 백성으로서, 같은 성도에게 취해야 할 합당한 예절이 있다고 하는 이 이야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예절과 법도가 있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바울은, ‘성도에게 합당한 예절’도 있음을 강조합니다. 성도에게 합당한 예절, 그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기꺼이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낯선 이방인에 대한 ‘진심어린 환대’입니다. 예전에도 한 번 이 ‘환대’에 대한 말씀을 나눈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이러한 환대야말로 당시 초대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도의 모습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과 구별하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신앙의 본질이 이 환대의 모습에 그대로 녹아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구상에 흩어진 모든 교회와 성도는, 비록 종파와 교단은 달라도, 2절 말씀처럼, ‘주 안에서’ 한 몸 된 지체들입니다. 그 거대한 하나의 교회를 일컬어 사도신경에서는 ‘공 교회’[‘ἐκκλησια καθολικη’ (universal church)라고 이야기합니다. 같은 신앙의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이며, 그 머리요, 주 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와 성도는 다른 지역 교회의 성도들을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고, 형편에 따라 필요한 것을 제공하여 섬길 거룩한 책임을 가집니다. 요즘처럼 각각의 교회가 서로 경쟁하는 듯 무관심 속에 지내는 것은 사실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먼저 찾아가지는 못하더라도, 오늘 본문 말씀처럼, 필요한 것을 도와주는 환대의 예절만이라도 회복하는 것이, 사실 교회의 시급한 영적 과제입니다. 오늘 두 분 간사님이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만, 저희 교회는 규모에 비해서, 외부의 사역자나 다른 교회의 성도님들도 비교적 자주 오셔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편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못 오셨지만, 매주 수요일마다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는 한덕수 목사님도 그렇고 …, 과거에도 방문해주시는 목사님들이 꽤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수요일 밤이던가요, 아내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명도 있는 것 같다, 사역을 준비하거나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준비하는 분들을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고 섬겨야 하는 사명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 그랬습니다.  단순히 우리에게 나타나는 어떤 현상들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번 정책 회의 때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고백교회가 세워질 때 품었던 존귀한 소명 가운데 하나가, ‘교회를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우리고백교회의 여덟 번째 비전이 “크고 넉넉한 교회보다, 교회를 섬기는 작은 교회를 지향한다.”인데요, 생각해보면 대단히 모순적이고 불가능해 보이는 비전이기도 합니다만 …, 어쨌든 우리에게는 주님 주신 그러한 거룩한 부르심이 있음을 늘 잊지 않기 원합니다. 아직 자립하지 못한 교회나 어려움에 처한 교회, 또 이제 막 시작을 준비하는 교회를 향한 주님의 간절함 마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하고, 그래서 성령의 추천서를 들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들을,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고 섬기는 우리고백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섬기려는 성도의 삶이 절대 곤궁해지지 않는 것처럼, 섬기려는 교회는 결코 흔들리지 않음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 가운데 바르게 설 때, 주님은 반드시 감당할 능력과 필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우리가 조금 더 밝고, 넉넉한 모습이면 좋겠습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뵈뵈 집사를 위해, 그녀가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여 도우라고 부탁하는 바울의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삶으로 고백되기를, 그래서 우리고백교회는 물론이고,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이 이 땅의 교회와 사역자들을 품는 거룩한 보호자로서, 하나님의 놀라운 형통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3절부터 16절까지에는 로마 교회 안에 있는 여러 성도들, 특별히 바울이 주 안에서 사랑하는 지인들에 대한 안부 인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과 함께 기록된 내용들을 살펴볼 때, 여기 이름이 기록된 모든 분들은, 앞서 말씀드린 바로 그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교회와 성도들을 섬긴 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꽤 많은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  어떻게 보면, 이 이름들은 우리에게 낯설고 지루한 이름들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본문들을 통해 친숙한 이름도 별로 없지요. 방금 살펴본 뵈뵈 집사님 역시 성경에서 단 한 번, 오직 본문에만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여기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이름들이 그렇습니다. 맨 앞에 나오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 정도가 우리에겐 익숙한 이름이지요. 하지만 여러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믿음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본문 1절에 나오는 ‘교회’라는 단어 ‘에클레시아’는, 사실 로마서에서 여기 처음으로 등장하는 표현인데, 16장에만 5번이나 등장합니다. 바울이, 여러 동역자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안부를 묻는 이 대목에서 비로소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교회의 본질은 어떤 건물이나 기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고, 또한 ‘그들의 삶’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당시의 교회는 대부분이 가정을 중심으로, 누군가의 가정집에서 모였던 형태였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뵈뵈도 그러했겠지만, 5절에 보면, “저의(복수형, 브리스가와 아굴라)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고 해서, 누군가의 집이 오픈되어 교회로 사용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14절에, ‘…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이라는 구절이나, 15절에 ‘…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라는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있다’는 말은, 가족은 아니지만, 작은 성도 그룹이 누군가의 가정에서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 당시의 교회는 그저 가정집이라는 공간만 빌린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가족들이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가족 관계나,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1절의 헤로디온은 바울의 친척이었습니다. 또 브리스가와 아굴라. 빌롤로고와 율리아 등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물론이고, 어머니와 아들, 형제와 자매, 또 가족과 권속과 친척까지, 당시 성도들은 정말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는 말씀 그대로, 자신과 그 가족, 그 집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가족이 그냥 교회만 함께 다닌 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 형제와 자매, 권속과 친척들이 믿음 안에서 함께 신실했기에 그렇게 이름이 거론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이 그 가정 안에서 삶으로 고백되고 확증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가족이 믿음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기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서로가 너무 가깝고 너무 편하여 더 어렵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신앙을 인정받는 것, 저 먼 곳에서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 가장 진실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부터 복음이 인정되고, 고백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삶으로 고백하려는 인내의 노력이 계속될 때에만 비로소 맺히는 열매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 우리의 가정 안에서 신앙과 구원이 선포되기를 축복합니다. 여기 나오는 이름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특징은, 이름들 중 상당수가 여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세어보니, 1/3은 넘고 절반에는 조금 못 미칩니다(26명 중 최소 9명/ 뵈뵈와 브리스가, 마리아, 유니아, 드루베나와 드루보사, 버시, 루포의 어머니, 율리아, ‘네레오의 자매’ 등)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감이 더 대단합니다. 뵈뵈도 그랬고, 브리스가도 그랬고, 여성들이 교회의 리더였습니다. 실제로 브리스가는,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바울의 가르침과 관련해서, 아볼로 같은 실력 있는 신학자를 가르치고 그가 가진 신학적 오류를 바로잡아 줄 정도로 말씀의 깊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행 18:24~26). 7절에 유니아라는 여인의 이름이 나오는데요, 그녀는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는 여인이었고, 바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 유니아 역시 ‘여성 사도’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본래 그리스, 로마의 문화가 결코 여성을 존중하는 쪽이 아닌데, 복음의 사역에서는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두드러집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여성 리더십을 존중하고 인정한 종교였음을 알 수 있고, 성령은 그러한 남존여비의 문화적 한계 속에서도 차별 없이 역사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 안에서도 장로와 같은 리더들의 자리에 여성들이 많이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어 가고 있지요. 그래서 서로에 대한 오해와 혐오에 물든 이 세대의 젠더 문화 속에 건강한 대안과 동역의 모델을 제시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 이름들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이들 중 상당수가 노예이거나, 노예였던 사람의 이름이라는 사실입니다. 앞서 뵈뵈도 그랬지만, 8절의 ‘암블리아’나 9절의 ‘우르바노’, 12절의 드루배나, 드루보사와 버시, 14절의 허마 등과 같은 이름은 당시에 보통 노예나 자유민이 된 노예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성도들 중에는 신분적으로 매우 낮은 지위의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10절의 아리스도불로처럼 황족의 이름을 가지고 있거나, 11절의 나깃수와 같이 부유한 세도가로 세간에서 유명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노예와 자유민, 종과 주인, 가난한 자와 부자, 세상에서 귀한 자와 천한 자 모두가, 한 교회 안에서 그 높은 신분의 장벽을 뛰어 넘어 주님의 몸 된 지체로 연합했다는 뜻입니다. (또 출신도 다 다릅니다. 그리스 사람의 이름이 압도적으로 많고, 로마식 라틴어 이름이 그 다음이며, 히브리 이름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어디 출신이냐가 성도의 연합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상황을 생각하면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도 교회마다 주된 정치적 분위기와 이념적 흐름이 있습니다. 아예 교회의 전체적인 성향 자체가 한쪽으로 쏠려 있는 경우도 대단히 많습니다.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고, 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의 교회는 비슷한 사람들의 연합이 아니라,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연합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집에 가면 주인과 노예인데, 그런데 같이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이들의 연합이 어떤 인간적인 기준에 의한 연합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3, 7, 9, 10절), ‘주 안에’(8, 11, 12, 13절) 이루어진 연합이었기 때문입니다. 내 입장에서도 아니고, 네 입장에서도 아니고, 함께 ‘주’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연합하려 했기에, 초대교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일 수 있었습니다(갈 3:28).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연합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지향하는 어떤 정치적인 입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주 안에서 연합합시다. 물론 주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끈기 있게 노력하고 대화하며, 그렇게 주님 안에서 우리가 함께 지어져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기 있는 이름들을 보면, 바울에게는 참 많은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사람들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평생 한두 사람의 친구만 있어도 행복한 삶이라는데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 귀한 동역자들이 많았습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만 많은 게 아니라, 정말 깊은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신 목을 내놓겠다고 했던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로부터 시작해서, 루포(예수님을 대신하여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의 어머니(13절)처럼 남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말하는 일도 있었고, 함께 옥에 갇혀 동고동락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7절, 안드로니고). 가볍고 넓은 관계가 아니라, 깊고 무거운 관계였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만남이 주님 안에서 날마다 더 깊어져 가기를 소망합니다. 서로와의 관계를 향한 두려움을 그리스도의 사랑이 몰아내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긴 이름의 나열을 지루하게 읽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이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을 위하여 그들의 삶과 생명을 바쳐 믿음을 지켜냈고, 그 믿음의 유산을 우리에게 전해준 장본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작년에 개봉한 영화 ‘바울, 그리스도의 사도’을 봤습니다. 개봉 소식을 듣고, 계속 볼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로마서를 강해하고 있는 목사로서, 그래도 강해가 끝나기 전에는 꼭 한 번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보게 됐습니다. 영화로도 좋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당시 로마의 모습, 또 그곳 교회와 성도의 삶을 볼 수가 있어 그것이 더 감동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바울이 이 로마서를 기록한 후 약 10여 년 후 로마입니다. 바울은 결국 우여곡절 끝에 로마에 도착했고, 황제 네로에 의해 두 번째 옥고를 치릅니다. 감옥 밖에서는 황제와 로마의 핍박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처참한 삶이 그려지고, 갇힌 바울과 고통당하는 성도들 사이를 오가며, 그 상황을 어떻게 견디고 이겨내야 할지, 계속 고민하고 기도하는 의사 누가의 모습에 카메라의 초점이 맞춰집니다. 당시 로마 교회의 성도들은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런 분위기의 표현들이 다수 발견되는데요, 4절에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다.”는 말이나, 6절의 ‘많이 수고한 마리아’, 또 7절의 ‘나와 함께 갇혔던’이라는 표현, 그리고 12절에 ‘주 안에서 수고한’, 계속해서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 등, 고단한 그들의 신앙과 삶이 본문 곳곳에 묻어납니다. 여러분 본문의 이런 표현들은 단지 어떤 비유가 아닙니다. 실제로 그들은 목숨이 위태했으며, 그들의 목을 내놓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결국 바울이 참수를 당하여 순교하는 장면인데요, 목을 옆으로 누인 채 형이 집행됩니다. 네, 그런 자리를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대신하려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 설상가상 네로의 광기가 더해지고,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밤을 밝히는 촛불이 됩니다.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높은 횃대 위에 묶어놓고 거기에 불을 붙입니다. 그냥 보통의 저잣거리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여기저기서 사람이 타들어가는 불꽃이 타오르고, 그들의 비명 소리가 적막한 로마의 밤을 가득 채웁니다. 감옥에 갇힌 그리스도인들은 때마다 원형 경기장으로 불려나가 로마의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맹수들의 밥이 되어 사라집니다. 아이와 여인들은 헐값에 노예로 팔아넘겨지고, 바울처럼 시민권이 있거나 운이 좋은 사람들도 채찍질, 매질을 당하다 결국 참수를 당합니다. 그것이 이 로마서가 기록된 삶의 자리입니다.  그 고난과 박해를 피해 성도들은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했고, 함께 모여 숨을 집이 필요했습니다. 그 일을 감당했던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 3절에서, 여러 사람들의 가장 앞자리에 그 이름이 등장하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브리스가는 실로 모든 로마 그리스도인들의 보호자였습니다. 2절에 뵈뵈가 겐그레아 교회의 보호자라고 한 건 그런 이야기였을 겁니다. 고난과 핍박 가운데 처한 성도들을 숨기고 먹이던 사람, 그가 뵈뵈 집사였던 것이지요. 브리스가 부부는 오래 전부터 로마에 거처를 정하고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에 살다 황제의 칙령으로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우연히 바울을 만나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함께 사역한 후 그들은 다시 로마로 건너와 로마 교회의 성도들을 돌보았습니다. 영화에서도 브리스가는 로마를 특별히 사랑하는 것으로, 그래서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로마를 떠나지 않고, 그곳의 사람들을 끝까지 돌보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렇게 그녀와 아굴라의 헌신 속에서 많은 로마 성도들이 목숨과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적인 이름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여기 있는 이름들을 존귀하게 여기셨고, 그래서 이곳에 적어 하나님뿐 아니라 믿음의 모든 후손들이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의 이름 옆에 무슨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까? 성경은 그들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예수 믿어 성공했고, 건강해졌고, 예수 믿어 부자 됐다는 말이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 믿고 그 자녀가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취업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그들의 외모가 출중했다거나, 그들이 말을 잘 했다거나, 외국어 실력이 어떠했다거나 무슨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까? 엊그제는 하루 종일 인터넷에 ‘연봉 탐색기’라는 검색어가 검색 순위 1위에 올라있더군요. 내가 받는 연봉이 전체 중에 어느 정도 위치가 되는가, 뭐 그런 걸 알려주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는 모양입니다. … 네, 여러분, 많이 벌면 좋지요. 좋은 직장, 많은 수입이면 더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것, 하나님이 자랑하시는 것은, 그것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은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방식으로 기억하시거나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진실하게 묻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저와 여러분을 이처럼 어떤 편지 속에 소개하며 기록한다면, 과연 이름 옆에 어떤 말로 우리를 설명하게 될까요? … 만약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누군가에게 소개하고 문안한다면, 주님은 뭐라고 적으실까요? 여러분, 부디 주님이 기억하시고, 자랑하실 수 있는 이름이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로마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분명히 우리에겐 믿음의 대가가 요구됩니다. 과거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가 섬기는 주가 누구인지, 명확히 드러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견뎌내고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 안에서 온전히 하나가 되어, 오늘 이 본문의 스물여섯 명의 성도들과 같이, 주님이 영원히 기억하시는 존귀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이 갇힌 옥의 간수장에게 복음을 전하며 하는 이야기로 오늘 설교를 마칩니다. “당신 앞에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시오. 손을 아래로 뻗고 물속에 넣어서 바닷물을 떠 모으는 겁니다. 분명 바닷물은 손가락 사이로 조금씩 빠져 나가 결국 손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겠지요. 이 물이 바로 사람의 생명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명은 그렇게 미끄러지듯 그렇게 우리의 손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과 함께 사라지지요. 그러나 제가 말하는 나라는, 우리들이 향하는 곳은, 바다에 있는 물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물을 위해 살아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끝없이 넓은 바다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끝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저와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며, 서로에게 성도에게 합당한 예절로 대하며, 그렇게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흘러넘친 주님의 사랑이 다른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흐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