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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 안에 있는' 2018년 11월 25일 주일 설교
2018-11-2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81125 오순절 마지막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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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4:13~23, 오직 성령 안에 있는
* 설교 음성파일 : 오늘은 음성 파일이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로마서 강해 65) 본문 17절의 ‘오직 성령 안에 있는’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아름답게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 본문도 계속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에 대한 메시지인데요, 믿음이 서로 다른 여러 지체들이 함께 모여, 함께 자라갈 때, 어떤 부분을 유념해야 할지, 또 무엇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지, 큰 틀에서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를 본문에서도 사도는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지난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이 내 실력이 아니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것, 예수님이 우리를 그대로 받으시고, 또 천국에서도 우리를 영접하실 것과 같이, 그렇게 서로를 받고 용납하는 그것이 결국 우리가 가진 믿음의 실력이라고 말씀하고, 또 세상과는 달리 믿음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약한 사람의 눈치를 보고, 그래서 그 약한 자의 믿음이 실족할 일을 만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도 말씀합니다. 또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은 없지만 속되다고 여기는 이에게는 그것이 이미 속된 것이니, 그로 하여금 믿음의 양심대로 정직하게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줘야 하며, 그런 서로간의 배려와 섬김이 하나님나라라고, 교회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 주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말씀까지, 표현은 다르지만 지난주와 거의 대동소이한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그 어조는 사뭇 놀랍도록 더 강해졌습니다. 13절에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라고 해서,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강조합니다. 사도가 얼마나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고 보면 이 문제를 바울 사도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다뤄왔습니다. 13절 후반부에서 사랑의 빚에 대해 이야기한 뒤로, 계속해서 이 문제입니다. 14장 전체가 이 하나의 주제이고, 15장으로 가서도 한동안 이 문제가 반복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을 다룬 로마서 12장부터 15장까지의 내용에 있어 가장 핵심이 바로 이 문제인 셈입니다. 다른 지체의 믿음의 양심과 그로 인한 결단을 비판하지 않고 존중하여 받아들이고 배려하는 것, 이것이 다른 그 어떤 신앙의 윤리보다 우선시 되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는 왜 이렇게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걸까요? … 우선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의 신앙이 이런 서로 간의 비판이나 갈등으로 인해 얼마든지 약해질 수도 있고, 또 아예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5절에 보면,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이라고 해서 서로를 근심하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같은 절 마지막에는,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고까지 되어 있습니다.
또 20절에도 보면,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 ‘사업’이라고 옮겨진 단어(‘에르곤’)는 ‘작품’으로도 옮길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독일어 성경)에서는 이걸 ‘하나님의 작품’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작품’, 그러면 생각나시는 거 있지요? 네, 에베소서 2장 10절 말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에서 ‘만드신 바’가 창조적 작품, 예술적 작품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작품을 무너지게 할 수 있고, 심지어 망가뜨릴 수 있는 힘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며, 그 힘은 다름 아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믿음의 가치에 있다는 것, 내가 하나님을 더 잘 믿고자 애쓰는 과정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믿으러 나오는 것이지만, 사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람과의 관계가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교회에 왜 나가는가, 왜 나가지 않게 되는가를 결정하는 핵심이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신앙의 양심에 걸림이 되어 교회를 멀리하기도 하지만 그냥 기분이 나빠서 멀리하게 되는 일도 많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받습니다. 물론 사랑하니까 상처도 받겠지요. 우리를 가장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부모에게 상처를 받는 것이 사람이고, 밤낮없이 사랑을 말하는 교회에서 상처를 받는 게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무례하면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 말씀처럼, 사랑의 중요한 성품이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달리 상대의 신앙이나 마음의 근력이 연약할 수 있음을 염두하고 항상 예의바르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이나 조각 작품은 아예 만지지도 못하게 하지 않습니까? 서로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작품임을 인정하며, 조심스럽게 감상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우리 고백교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실 사도가 이처럼 이 문제를 강조하는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우리가 결국 혼자서는 예수를 믿는 여정에 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혼자 도를 닦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말 속에 이미 ‘모이고 함께 한다’는 단어, ‘會’가 포함되어 있지요. 성도(聖徒, 무리)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리’로 모여야 온전한 성도입니다. 왜 주님이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 계시겠다고 하셨을까요? 성찬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예식, 혼자서는 먹을 수 없는 식탁이 성찬의 식탁입니다.
함께 모이지 않는 공동체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늘 모이기에 힘썼다고 되어 있지요(2:46). 십자가 사건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과 성도들을 로마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함께 모였고, 성령은 그 모인 곳에 임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힘써야만 모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먼 길 오시기 위해 힘쓰셨을 겁니다. 그냥 모여지지 않습니다. 요즘은 장례식장에나 가야 산 사람들이 모입니다. 요즘만 그런 게 아니라,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그때도 모이는 게 힘들고 부담스러우니 그냥 한 자리에 모이지 말고 따로 각자의 집에서 예배드리고, 신앙생활 하자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럴수록 서로 격려하며 더욱 힘써서 모였다고 성경은 기록하지요. 모이기 힘든, 모일 수 없는 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교회가 시작됐고, 교회가 교회다워졌습니다. 비록 물리적으로 멀리 있지만, 그럴수록 모이기를 힘써서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가 성도다워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문제가 왜 중요한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을 해 보면요 …, 본문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기독교의 핵심 가치가 등장하는데요, 17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 번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아멘. 한 번 더 읽고 아예 암송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이 표현은 로마서에 단 한 번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이 본문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하나님나라’인데, 로마서에는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신기하고, 그 한 번이 바로 이러한 내용의 맥락 속에서 등장한다는 것도 역시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 17절은 중요한데요 …,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이 본문이 강조하는 바를 이해하려면, 여러분 본문의 맥락을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사도는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나라를 설명하는 게 아닙니다. 이 17절만 따로 떼어서 “하나님나라는 어떤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곤란합니다.
사실 17절만 따로 생각하면 별로 이해하기 어려운 게 없습니다. 고기와 포도주를 먹고 안 먹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나라일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건 여기 ‘의와 평강과 희락’의 세 가지 내용 그 자체가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핵심은 ‘성령 안에서’입니다. 물론 의와 평강과 희락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의와 평강과 희락은 사전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에, 조금만 설명을 덧붙이려고 합니다.
아주 거칠게 요약해서, 복음이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의’이고, 이것을 조금 풀면 하나님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의 관계로 회복된 상태,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의로움을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시작된 새로운 관계를 한 마디로 ‘의’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는 선한 행동을 하면 그걸 의롭다고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걸 의롭다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강, ‘샬롬’ 역시 본래 관계적인 단어입니다. 단순히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 걱정이 없는 평안한 상태가 평강이 아닙니다. 조금 어렵게 말해 ‘샬롬’은 의가 자라서 맺은 열매입니다. 시작된 관계가 자라고 충만해진 상태, 그 관계를 통해 서로가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샬롬입니다. 여호와가 내 목자이셔서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다윗은 평강, 샬롬을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충만한 만족과 쉼을 누릴 때의 상태, 그게 샬롬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부부 간의 관계가 샬롬이라는 뜻은 그냥 아무 다툼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화목의 관계가 되어(義), 각자의 역할과 도리를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는 상태, 그래서 서로에게 만족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부부가 결혼을 통해 한 몸의 관계로 새로워진 것이 ‘의’라면, 이제 함께 하는 삶 속에서, 남편은 아내를 내 몸처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그리스도와 같이 존경하며 인정하는 것, 그것이 이루어진 상태가 하나님나라의 샬롬, 평강입니다. 하나님나라의 평강은 하나님과 우리가 그런 충만한 관계 속에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희락은 그 샬롬이 충만하여 흘러넘치는 상태입니다. 의의 열매가 샬롬이라면 샬롬의 열매가 희락입니다. 평강이 넘침으로 그 주변까지 물들이는 것이 희락입니다. 단순한 쾌락에 의한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온전한 관계의 열매로서 나타나는 기쁨,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희락입니다. 그러니 의와 평강과 희락, 모두 관계에서 나오는 열매입니다. (*)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이런 세 가지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강조하려 하는 건 사실 다른 데 있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 정말 중요한데, 이 내용은 사실 로마서 전반부에서 이미 다뤄진 것입니다.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저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기도 한데요,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전반부가 바로 의와 평강과 희락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로워진 관계와 그 충만함과 흘러넘치는 기쁨에 관한 메시지가 로마서의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후반부의 핵심은 뭐냐, 그 의와 평강과 희락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입니다.
사도는 로마서의 후반부에서 바로 그 하나님나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의 성도들의 관계가 이토록 강조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나라의 그 의와 평강과 희락이 어디 안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까? 네, 오직 성령 안에 있습니다. 사도가 본문에서 정말 강조하려는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입니다.
하나님나라와 성령, 이 둘은 무슨 관계인가요? 마태복음 12:28의 말씀,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처럼,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이 사실 하나님나라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는 성도의 삶,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맺혀지는 삶이 곧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첫 열매가 뭐죠? 네 사랑입니다. 성령은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관계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 서로의 관계 가운데로 끌고 가시고, 그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성도간의 관계를 강조하는 본문의 맥락 속에 성령이라는 말이 갑자기 등장하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지만, ‘성령’이라는 말은 사실 대단히 갑작스럽게 등장한 단어입니다. 오늘 14장에 이 부분 외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입니다. 더 나아가 13장에도, 12장에도, 11장과 10장에도 성령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즉 본문의 ‘성령’이라는 단어는 로마서의 지금의 흐름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단어인 셈입니다. ‘성령’ 안에 있다는 말은 단지 성령 안에 하나님나라가 있으니 성령을 받아라, 이런 의미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성령 안에 있습니다. 그럼 성령은 어디 계십니까? 이 질문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물론 성령은 저와 여러분, 성도 각 사람 안에 계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써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또 우리 몸과 삶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시지요.
그런데 성경은 성령이 믿는 성도들 가운데 곧 ‘우리 가운데’ 계시다고도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관계 속에 계십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우리의 관계 자체가 성령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걸 강조하는 대표적인 본문이 우리가 함께 한 해 동안 암송한 에베소서 2장입니다. 우리가 한 성령 안에서 구원을 받았고, 성령은 또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하나로 연결하여 하나의 교회로, 성전으로 건축하여 가십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평안, 곧 평강이라는 띠로 우리를 묶어 하나가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여 교회가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본문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성령은, 그러니까 본문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바로 그 성령이심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나라가 단순히 한 개인의 신앙적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을 함께 성전으로 지어져가게 하시는 성령 안에, 곧 ‘우리’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결국 하나님나라는 성령 안에, 곧 저와 여러분을 연합하게 하시는 그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과 우리 각 성도들 사이의 관계 안에 있는 의, 평강, 희락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 평강, 희락을 의미합니다. 각 사람 안에 계신 성령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언제 임하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님이 답하시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이때 ‘너희 안에’[엔토스 휘몬 에스틴]라는 이 표현은 이중성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각자 속에’라는 뜻과 ‘저와 여러분의 관계 속에’라는 뜻, 두 가지입니다. 영어로도 ‘within you’와 ‘among you’ 이렇게 두 가지로 번역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 중에서 ‘among you’를 강조합니다.
하나님나라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의 의미는, 그러니까 단순히 먹고 마시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홀로 하나님과 맺는 관계,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자유로운 결단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하나님나라가 거기에 있는 게 아니라, 성령 안에, 곧 우리 가운데 계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저와 여러분이 각자 어떤 믿음의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의 결과를 각자의 몸과 삶에 채우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관계 안에, 즉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 무엇이 채워지느냐, 거기에 하나님나라가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즉 내 안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느냐 그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무엇이 이루어지느냐, 그것이 하나님나라를 결정합니다.
여러분, 하나님나라는 한 개인의 인격과 삶에 깃든 나라이기 이전에 저와 여러분의 관계 속에, 사랑과 섬김으로 맺어진 이 관계 속에 존재함을 믿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비로소 실체를 갖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같이 나타난다는 18절 말씀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은데 사람과의 관계는 좋지 않다는 건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수평의 관계만큼 각 성도와 하나님과의 수직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수직의 관계는 쉬운데 수평은 어려운 게 아니라, 수직이 좋지 않으니 수평이 어려운 것입니다. 오직 수평을 통해서만 수직의 사랑이 드러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뤄지는 하나님나라를 누리지 못하는 한, 그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경험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내 안에 있는 나라가 천국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혼자 도를 닦는 게 아니라 했습니다. 함께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예배도 성찬도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서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혼자 믿고 혼자 성숙해지는 그런 기독교 신앙은 가짜입니다. 부대끼고 힘들어도 서로 함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드린 예배가 얼마나 진정한 예배인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인지 아닌지는, 이 예배가 끝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교제하는 그 순간에 달려 있습니다. 그 시간을 귀히 여기십시오.
교회를 다니니 마시고, 교회가 되십시오. 그것을 할 수 없을 만큼 우리의 삶이 너무 바쁘다면 그 분주함과 싸워야 합니다. 이건 대단히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그냥 예배만 드리고 끝나는 관계가 될 것인가, 아니면 서로 부대끼며 계속 교제하며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우리는 선택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무슨 신앙의 결단을 하고, 무엇을 먹기로 하고, 무엇을 먹지 않기로 했는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여러분의 지체들에게 여러분을 맞춰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이 되고, 상대가 주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최근 들어 한국의 여러 교단들이 통합을 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교단이 워낙 많으니 신앙과 신념이 같다면 연합하자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거의 잘 안 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다 자기를 중심으로 통합하자고 하기 때문입니다. 다 자기 교단 중심으로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름도, 임원도, 재정도 자기들 교단이 주가 되어야 한다고 하니 연합이 될 리 없습니다. 내가 중심이 되면 연합은 불가능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여러분의 소리를 줄이고, 상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연합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나라를 맛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 그게 상대를 받는 것이며, 상대를 주와 같이 여기는 것이며, 상대를 주와 같이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시면 그걸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존귀하고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저 교회를 다니는 게 아니라, 고백교회로서 함께 교회가 지어져가고, 함께 교회가 되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그래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