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2018년 11월 18일 주일 설교
2018-11-1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81118 오순절 스물여섯 번째 주일 메시지
----------------------------------------------------------
로마서 14:1~12,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64) 본문 3절의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아름답게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규복 형제가 좋아하는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보면, 여주인공 그루센카가 어린 시절 들었던 우화를 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옛날 옛적에 선행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참 못되고도 정말 못된 한 여인이 죽었습니다. 죽고 보니 이 여인은 정말 착한 일을 한 게 아무 것도 없어서, 악마들이 그녀를 붙잡아서 불바다 속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너무 불쌍한 마음에, 이 여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선행을 한 게 정말 없는지 열심히 찾아봤습니다. 결국 천사가 여인이 세상에서 했던 딱 한 가지의 선행을 기억해내고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살아생전 그녀가 기르던 양파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뿌리를 뽑아서 구걸하던 여인에게 준 일이 있다고, 그걸로 은혜 베풀어주시길 구합니다. 천사의 애원에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너는 바로 그 양파를 들고 가서 불바다 속의 그녀에게 내밀어서, 그녀가 그걸 붙잡고 나오도록 해라. 만약 그녀가 그 양파를 붙잡고 거기서 나오면 낙원으로 갈 것이고, 만약 양파가 끊어진다면 그녀는 계속 거기 남게 될 것이다.”
천사가 급히 불타는 호수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여인에게 달려가 양파를 내밀었습니다. “자, 어서 이걸 붙잡고 올라와요.” 여인이 양파를 꽉 붙잡았고, 천사가 조심스럽게 양파를 잡아당깁니다. 이제 천사가 거의 다 끌어올렸을 때 즈음, 여인이 호수 밖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 그곳의 다른 많은 죄인들이 같이 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녀를 붙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소리를 지르며 몸을 움직입니다. “안 돼! 이건 나를 끌어올려주는 거야! 이건 내 양파란 말이야!” 여인이 이 말을 하기가 무섭게 양파는 힘없이 ‘툭’ 끊어지고, 결국 그 여인은 다시 불속으로 떨어져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 데는, 그저 양파 한 뿌리의 선행이면 족하다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잡는 믿음이면 족하다고 작가는 말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정말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 구원의 순간에서조차 우리는 그 구원의 은혜를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다고 또한 작가는 이야기합니다. 왠지 양파가 끊어질 것 같은 불안감 속에, 우리는 마지막까지 나 자신만을 생각하게 되고, 마치 나는 나머지 사람들과는 달리, 구원에 필요한 충분한 자격과 실력이 있는 것처럼 착각할 때, 바로 그때가 바로 우리가 그 구원을 잃어버리는 순간이라고 작가는 지적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과 강한 사람(15:1)이 함께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살아갈 때, 어떤 문제들이 있고, 또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그리고 그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는 믿음의 실력이 어떤 것인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 안에는 채소만 먹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채식주의자여서 그랬던 게 아니라, 시장에서 파는 고기가 문제였습니다. 시장에 나오는 고기 중 상당 부분이 로마 사람들이 믿는 여러 신들에게 바쳐져서 제사에 사용된 후 다시 시장으로 나온 그런 고기였기에, 그걸 먹는 것을 신앙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성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기야 없어서 못 먹지 왜 그런 걸 먹지 못하나, 싶은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만, 사실 당시의 제사나 종교 의식을 생각하면 이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네팔에 여행을 갔다가, 힌두 신전으로 유명한 덕친칼리라는 곳에 갔던 이야기를 여러분께도 했던 적이 있는데요, 들고 온 짐승을 그 자리에서 큰 칼로 직접 잡아서, 피를 뿌리고, 그걸로 우상에게 바쳐 제사하는 장면을 직접 보니 저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피 냄새며 죽어가는 동물의 모습이며, 제사의 여러 장면들이 계속 생각에 남았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직접 보시면 상당한 충격을 받으실 겁니다. 더구나 그렇게 제사를 드리고 나온 고기를 먹으라고 한다면, 분명 호불호가 갈릴 겁니다.
그래도 어떤 분은 그게 무슨 문제냐, 우상이란 본래 없는 것, 없는 신인데, 제사 음식이든 뭐든 못 먹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먹지 못한다면 우상을 인정하는 꼴이니 꼭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는 예수님의 말씀도 있듯이, 그걸 먹지 않는 게 더 문제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굳이 그것까지 먹을 필요가 있나, 엄연히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예배한 의식에서 나온 것이니, 그것을 먹지 않음으로써 내가 우상을 인정하지 않음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주는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결단하고 먹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성도로서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신앙의 입장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이 중 어느 한 쪽은 믿음이 약하고 또 다른 한 쪽은 강하다고 합니다. 둘 중 어느 쪽 믿음이 더 강한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네, 그냥 신경 쓰지 않고 고기든 뭐든 다 먹는 사람의 믿음이 더 강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기하지요? 뭐든 안 먹고, 안 하는 게 강한 믿음이 아니라, 뭐든 다 먹고, 다 할 수 있는 게 강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할 게 있습니다. 그게 어떤 부분이냐면 …,
(잠깐 그 전에 생각해볼 것은 …) 바울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바울은 자신이 믿음이 강한 자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약한 자라 생각했을까요? 네, 강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15:1을 잠깐 보시면,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해서, 자신이 믿음이 강한 자에 속해 있고, 그렇게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지,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네, 강하다는 건 그만큼 책임이 뒤따르는 거예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책임 말입니다. 어릴 적 형과 동생이 싸우면 잘잘못을 따지는 것과는 별도로 일단 형은 형으로서 꾸중을 당합니다. 동생의 약함을 배려해주지 못한 책임, 형 노릇하지 못한 책임에 대해 부모가 묻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다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먹을 수 없는 사람의 약함을 담당해야 한다고, 즉 그를 배려하고 그 믿음을 지켜줘야 할 책임이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게 세상과 다른 거죠. 세상은 약자가 강자의 눈치를 봅니다. 그런데 주님의 나라에서는 강자가 약자의 눈치를 봅니다. 강자에게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믿음이 있고, 오래 믿었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믿음이 좋다, 하는 분들은 믿음 약한 사람들 눈치를 봐야 합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혹 나로 인해 그 약한 믿음이 흔들리지는 않을까, 늘 조심해야 하고, 자기만족과 기쁨을 내려놓는 방향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나는 다 먹을 수 있으니 괜찮아,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아, 이런 식은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이상하게 받은 겁니다. 이건 본문이 말하는 강한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술도 마시고, 우상 제물도 먹고, 할 거 다 하는 게 다 강한 믿음의 증거는 아닙니다. 이것저것 먹고 마시는 건 믿음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냥 육체의 욕심을 따라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고민의 결과로 먹는 게 아니라 그냥 술을 좋아하고 고기를 좋아해서 다 먹는 사람도 있어요. 지금 사도는 그런 사람을 향해 믿음이 강하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이야기의 대전제가 6~8절의 말씀이에요. 함께 읽겠습니다. “6.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아멘.
핵심이 명확하지요. 먹든 먹지 않던, 마시든 마시지 않던, 어떤 절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든 하지 않던, 그 이면의 목적은 똑같아요. 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본문에 나오는 모든 권면의 대전제입니다. 그냥 육식이 좋아서 먹는 거 말고, 그냥 술이 좋고 취하는 게 좋아서 마시는 거 말고,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믿음과 태도에 관한 거예요.
미국의 정치인이자 과학자인 벤자민 프랭클린이 맥주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맥주는 신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증거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나는 감사함으로 먹겠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절제하며 먹고 마시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또 세상에서 사람들 만나고 사회생활을 하려면 술 한 잔 함께 하는 건 꼭 필요한 것이고, 그래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업무도 더 잘 감당할 수 있고, 그래야 복음을 전할 기회도 생긴다고 믿는 사람들의 자유, 본문은 지금 그런 자유, 그런 강한 믿음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한 먹지 못하는 성도들은 먹을 수 있는 성도들을 타락한 신앙이라고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라고, 비판하지 말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사실 강한 믿음과 약한 믿음을 구분했지만, 비판은 스스로가 강하다는 생각, 내가 적어도 상대방을 평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실은 둘 다 자기가 옳으며 자기가 더 강한 믿음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똑같은 모습이고, 그래서 같은 책임이 있습니다. 서로를 받아들일 책임 말입니다.
사도는 그렇게 서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고, 서로 받으라고 말합니다. 1절 말씀이지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여기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의 원래 의미는 시비 거리로 삼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문제로 삼지 말라는 것이지요.
대신 서로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이 ‘받다’라는 동사[프로스람바네스타이]는 본래 ‘자기 집으로 데려가다,’ ‘집으로 초대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기 집에 데려갈 만큼 환영하고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가 요한복음 14장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도 사용됩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에서 ‘영접하다’라는 단어가 바로 이 ‘받다’라는 동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천국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영접하시는 것, 그게 ‘받는 것’입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이요, 실력이라고 성경은 강조합니다.
여러분 일단 서로를 받으십시오. 묻고 따지지 말고 일단 받으십시오.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고 있고, 하나님을 위하여 나름 힘껏 노력하고 있으니, 먼저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그 약함을 여러분의 강함으로 채울 수 있는 길을 찾으십시오. 10절에 보니, 그를 일컬어 ‘네 형제’라고 지칭하지요? 네, ‘형제’요, 내 가족입니다. 자기 부모나 형제의 약함이나 흠을 비판하는 그런 가족 보셨습니까? 내 가족의 흠은 일단 덮고 보실 겁니다. 그가 자라고 바뀔 때까지 기다리실 겁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헤아리며 오히려 남들 앞에서는 편까지 들어주실 겁니다.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그렇게 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심지어 4절 말씀처럼, 그를 세우려고, 즉 고치려고 하지도 말라 하십니다. 무서운 말씀이지요. 그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고치실 거랍니다. 남의 하인을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는 것은 그 주인을 무시하는 대단히 무례한 행위입니다. 그 종의 문제는 그 주인이 알아서 합니다. 자기 주인에게 꾸중을 듣든, 얻어맞든, 그건 오롯이 그의 주인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를 새롭게 하는 권리가 나에게 있는 게 아니라, 그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리스도께서 그를 영접하셨고, 그를 세워가고 계십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9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십니다. 주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다는 말씀은, 그가 직접 그의 종들을 지금도 세워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의 권능으로 믿음이 약한 자들을 친히 변화시켜 가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게 주님의 일입니다.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역사(役事), 토목이나 건축 따위의 공사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열심히 일하십니다. 우리의 인격과 신앙을 새롭게 하시는 엄청난 대공사를 지금 진행 중이십니다. 연약한 지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지금도 일하시는 주님을 우리는 신뢰하고, 그를 경외해야 합니다.
지체의 약한 믿음에 대해 굳이 따지려고 하면 누구에게 따져야 합니까? 네, 종인 서로에게 따지지 말고, 그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께 따지셔야 합니다. 욕을 하던 불평을 하든, 주님께 해야 합니다. 그가 지체들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럴 자신 있으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여러분이 서로를 고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받으십시오. 그게 저와 여러분이 할 일이고, 그게 이 땅에 교회가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지체를 받아들이는 것,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성도의 믿음이고, 그것이 성도의 실력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게 우리의 실력이 아니라, 남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진짜 실력임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 누군가를 평가하고 비판하면 그것이 내 실력인 줄 착각합니다. ‘저 사람 왜 저래? 왜 저렇게 행동하는 거야? 도대체 뭐가 문제야? 정말 한심해.’ 뭐 이런 평가가 곧 나의 실력이라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누구나 자기 실력과 상관없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야구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도 야구 중계를 보며 선수들을 평가할 수 있고,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정치에 대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비평할 수 있습니다. 직접 맞서 두면 상대도 안 되는 제가 바둑 TV를 보면서 ‘아니 어떻게 저런 실수를 할 수 있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 실력인 건 아닙니다. 진짜 실력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제가 오랫동안 존경해온 한 문학비평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윤식 교수라고 제가 대학시절 참 많이 좋아해서 강의도 많이 듣고 쓰신 글들도 찾아 읽으며, 그렇게 영향을 많이 받은 분입니다. 이분의 비평에는 남다른 점이 있는 것이, 작가와 작품을 살려내는 비평이었습니다. 소설을 읽고 그 소설의 나쁜 점, 부족한 점을 꼬집는 게 주가 아니라, 어떻게든 그 작품의 좋은 점, 의미 있는 점, 새로운 점을 찾아내서 그걸 평가해주는 비평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제게는 신선함을 넘어 충격이었습니다.
이분은 모든 작가들의 모든 소설을 빼놓지 않고 읽습니다. 이름 있는 작가의 작품만이 아니라, 이제 막 등단한 새내기 작가의 작품까지 다 찾아서 읽고 그에 대한 비평을 씁니다. 자신의 커리어와 명성에 필요한 작품만 골라서 읽는 게 아니라 모든 소설을 전부 읽습니다. 여러분, 비판보다 무서운 게 무관심이잖아요? 내가 글을 썼는데, 노래를 했는데, 그림을 그렸는데, 아무도 봐주지 않고 들어주지 않는 것보다 절망스러운 게 없잖아요? 그런데 이분은 그 많은 소설을 다 찾아서 읽고 거기에 평을 써주는 겁니다.
그러니 작가들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없는 겁니다. 내 작품을 꼼꼼히 읽어주고, 평가해주고, 거기에 작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의미까지 찾아내어 이야기해주는, 그래서 그것을 진정한 의미의 작품이 되게 만들어주는 일이란 너무나 가치 있는 일인 거지요. 작품의 평가가 원래 그렇잖아요? 작가 자신도 모르는 작품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 가치를 누군가 발견하고 인정해주면 비로소 그것이 작가의 실력이 되어 다음 작품에서도 표현할 수 있게 되지요. 진짜 비평은 그런 것입니다.
저는 그분의 비평을 읽으면서 그 비평에 나오는 작품을 찾아서 읽게 됐습니다. 하도 평이 좋고 중요하다고 하니까, 그제야 읽게 되는 겁니다. 순서가 바뀐 것이지요. 작품을 보고 비평을 보는 게 아니라, 비평 때문에 작품을 보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것이 진짜 비평, 진짜 실력인 겁니다. 비판이 비평이 아니라, 그건 어지간한 비평가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전문가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거지요 … 그게 아니라, 작품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세워주는 것, 그래서 누군가 그 작품을 다시 한 번 보게 만들고, 작가로 하여금 더 아름다운 것을 쓸 수 있게 해주는 비평, 그것이 진짜 비평이요, 실력임을, 그리고 그 비평을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작가들 중에는 비평가의 혹독한 비평에 좌절하여 절망하고 낙심하다 일찍 절필을 하거나 짧은 삶을 마감한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세계적인 작가들 중에도 그렇게 살아생전에는 꽃도 채 다 피워보지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 주중에 제가 홈페이지에 에밀리 브론테(Emily Jane Bronte)의 시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녀도 그랬습니다. 그녀가 나이 서른에 폐 질환으로 죽었는데요, 치료도 거부한 채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세상과 담을 쌓은 채 혼자 쓸쓸히 죽었어요. 결정적인 이유가 그녀의 작품에 대한 세상의 혹평에 좌절한 거예요.
우리가 잘 아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작품이 결정적이었어요. 평단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작품이라고 혹평을 한 거예요. 그녀의 시와 소설이 모두 세상의 외면을 받았고, 결국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한 나머지 결국 의사의 치료도 거부하고 죽어갔어요. 훗날 20세기가 되어서야 그녀의 작품이 재평가를 받잖아요? 우리가 잘 아는 버지니아 울프 같은 작가들이 ‘폭풍의 언덕’을 극찬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영어로 쓰인 최고의 소설로 평가 받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왔습니다만, 여러분, 성도의 비평은 하나님의 작품인 다른 지체의 영혼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지체들을 살려내는 존재이길 원합니다. 그냥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니라, 본인도 생각하지 못했던 삶의 여러 행동들의 의미를 발견하고, 평가해주는, 그래서 이후에 더 나은 삶의 작품을 쓸 수 있도록 위로하는 그런 믿음의 비평을 서로에게 해 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금 우리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서로의 뿌리만 보고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 뿌리만 보고 그 나무가 얼마나 크게 자랄지, 그 꽃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판단할 수 있습니까? 상상조차 불가능하지요. 그것이 자라서 마침내 꽃이 되고 나무가 되어야 우리는 그 실체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는 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랄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영접하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겁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진짜 믿음의 실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그런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십시다. 부디 하나님의 작품을 깎아내리는 비평이 아니라, 그 숨은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내는 비평, 그래서 주님이 시몬에게서 베드로를 발견해내고 이끌어내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끌어내는 그런 비평을 하십시다. 누구든 비판하기 전에 먼저 받아들이고, 영접하고, 세워주는 진짜 믿음의 실력으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까지 성숙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