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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2018년 10월 14일 주일 설교
2018-10-1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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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81014 오순절 스물한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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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9~13,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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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59) 본문 13절의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아름답게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 수요 성경 강해 시간 중에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가 잠깐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익히 알고 있는 ‘여호와’ 혹은 ‘야훼’라는 이름은, 실은 “나의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네, 하나님의 이름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름이란, 누군가 나에게 붙여주는 호칭인데, 부모가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 이전에 누군가 있을 수 없고, 또 아담에게 하나님이 에덴의 생명들에 대해 이름을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다스리는 행위를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누군가 지어 부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존재’로서 너희가 말하는 그런 이름을 가지지 않는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줄여 히브리인들은 ‘여호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물론 그 이름조차도 너무나 거룩한 이름이라 여겨 차마 부르지 못하고, 단지 ‘나의 주’라는 뜻의 ‘아도나이’라고 에둘러 불러, 처음의 정확한 발음도 잊히게 됐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하나님의 진짜 이름은 따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의 영원한 이름이라고 하시면서 소개한 이름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께도 이름이 있다면, 그건 ‘누구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낳으면, 자신의 이름이 사라지고, ‘누구 아빠,’ ‘누구 엄마’라고 불리는 것처럼, 하나님도 마찬가진 겁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은영이 아빠’, ‘종우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기령이 아빠’라고 불리기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불리기 원하시고,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 헤아리실 수 있으시겠는지요?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하나님으로 불리길 기뻐하시듯,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 딸들임을 늘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뻐하고, 자랑하며, 그 이름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같은 어떤 특정한 한 개인이 아니라, 어떤 공통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그룹이나 공동체를 지칭하여, ‘어떤, 어떤 사람들의(을 위한) 하나님’이라고, 따로 정해 놓으신,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 같은 경우나, 오늘 말씀에서 다루게 될 ‘나그네를 위한 하나님’이라는 표현들이 그러합니다.
성경을 꾸준히 묵상하는 것의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고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는 것인데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거쳐 오면서, 또 QT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나그네들의 삶을 주목하시고 그들과 가까이에 계신지에 관해 깨닫고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은 단지 나그네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편을 들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나그네를 택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시는, 즉 ‘나그네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나오는, ‘손’이라는 표현은, 다 아시겠지만, 단지 집에 찾아 온 어떤 ‘손님’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찾아 온 손님 잘 대접해라, 이런 뜻이 아니라, 여기 ‘손’은, 나그네, 이방인과 같이 낯선 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손을 대접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가 ‘필록세니아’인데요, 낯선 사람을 의미하는 ‘xenos’(a stranger)와 사랑, 호의라는 의미의 ‘philos’가 더해진 말로, 그냥 이것이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거기에 ‘힘쓰라’는 동사 ‘디오코’를 연결시킵니다. 뒤쫓다, 추구하다, 라는 의미인데요, 그러니까 단순히 나그네가 찾아오면 그를 환대하라는 의미를 넘어, 주위에 그런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라는 뜻이고, 더 나아가 나그네를 대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 ‘디오코’가 고대 종이 주인의 식탁을 섬기며, 먹을 것을 챙기는 그 단어에서 유래했음을 고려할 때, 특별히 낯선 이들의 먹을 것을 챙기고 돌보는 것이 그 일차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사실 손을 대접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 나그네, 손은 결코 우리와 친숙한 어떤 누군가를 의미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일 수도 있고, 우리와 언어나 피부색이 다를 수 있고, 또 우리의 종교나 성적 취향도 다를 수 있으며, 때로는 우리를 이용하거나 (극단적으로는) 해하려는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다음 단락인 14절 이후에 나오는 말씀이 바로, 그와 같은 ‘손’, 해를 입힐 목적으로 다가오는 나그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 이방인들에 대한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반응은 당연히 두려움과 회피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집에 있을 때 갑자기 누가 문을 두드리거나 초인종을 누르면 반가운 마음이 드십니까, 아니면 두려운 마음이 드십니까? 기다리던 택배가 있다면 모를까, 사실 우리는 예정되지 않은 사람의 소리에 깜짝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그런 시대 속에 살아갑니다. 치안이 매우 안전하다는 나라인데도 그렇습니다.
저도 사실 개인적으로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트라우마 비슷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어릴 적 부모님이 저와 제 여동생만 남겨 두신 채 교회에서 주무시고는, 결국 새벽예배까지 드리고 아침에 집으로 오셨던 적이 많았는데요, 저희 집의 그런 상황을 아는 누군가가 늦은 새벽 저희 집을 털기 위해 찾아온 일, 아마 제가 여러분께도 말씀드린 적이 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도둑이 같은 집 두 번은 털기 위해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부모님은 오히려 덤덤하게 넘어갔다는 이야기도 했었지요.
대학생 때는 교회에서 야학을 운영하다 수업이 다 끝난 자정 무렵, 품에 칼을 들고 찾아 온 한 낯선 남자 분을 만난 적도 있습니다. 한참의 대화 끝에 겨우 그 칼이 제 손으로 넘어오긴 했습니다만, 제 인생에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었습니다. 결혼 후 연희동에서 사역할 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아내와 제가 모두 출근을 하고, 그래서 낮에는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누군가 알았는지, 집에 도둑이 들어, 저희 모든 결혼 패물을 다 도둑맞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집에 돌아와 먼저 그 상황을 확인했는데, 사실 아내보다 제가 더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가 개척을 하고, 일산에 살 때, 와 보신 분들도 계신데, 저희 집이 오피스텔 2층이었지요. 상가 바로 위 2층이다 보니 가끔씩 술 취한 사람이나 주소를 잘못 아는 낯선 사람들이 그냥 무작정 저희 집 번호 키를 누르는 일이 왕왕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 저와 아내가 자고 있는데, 그렇게 번호 키를 누르는 소리가 나면 정말 그 공포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점점 그 소리에 예민해져갔고, 잠도 깊이 들 수가 없었고요, 그래서 결국 어느 순간부터, 제가 침대 맡에 늘 망치를 올려두고 자곤 할 정도였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경험들이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어, 저와 아내는 요즘에도 벨만 울려도 깜짝 놀라곤 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목양실에 제가 혼자 있다 보면, 외부에서 누가 들어올 때 자동문이 열리는 유난히 큰 그 소리에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낯선 이들에 대한 환대, 사랑은 사실 대단히 우리의 실존과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런 여유도 부족하고, 넘어야 할 감정의 벽도 매우 높습니다.
그러니까 실은 우리가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나그네를 찾아가는 섬김이 더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찾아가면 두려움이 적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힘쓰라’는 건, 그런 뜻입니다. 기다리고 만나면 반가움보다 두려움이 더 커지니까, 늘 주변을 살피고, 먼저 다가가는 노력으로 나그네를 섬기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자리, 또 우리 교회의 주변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속에 나그네를 향한 주님의 마음과 사랑이 담기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낯선 사람의 어려움을 그냥 넘어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할 때, 과연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나그네를 환대해야 합니까? 그 기준이 어느 정도일까요? 구약의 율법에서는 주로 ‘학대하지 말라’, ‘압제하지 말라’는 식의 부정적 명령이 많아서, 그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추수할 때 땅에 떨어진 낟알들을 다 쓸어 담지 말라고, 나그네가 지나가다 그거라도 가져갈 수 있게 그렇게 추수하라는 말씀 정도가 긍정의 명령일 겁니다.
그래서 하루는 한 율법교사(랍비)가 예수님께 찾아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자 랍비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다시 묻습니다. “(과연) 내 이웃이 누굽니까?”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인데요, 그 내용은 익히 아실 겁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들을 만나 거의 죽을 만큼 맞은 채 길에 버려졌습니다. 제사장이 보고도 그냥 ‘피하여 지나쳐’ 가고, 또 레위인도 똑같이 피하여 지나쳐 가고, 후에 (정작 유다 사람들은 상종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 극진히 치료하고 먹여주며, 자기 비용으로 모든 걸 돌봐줬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그 말씀 끝에 주님이 랍비에게 물으시지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이 대화에서 우리가 1차적으로 주목할 것은, 랍비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이 그 처음 관점부터 다르다는 점입니다. 랍비는 내가 사랑을 베풀어야 할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고,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 곧 사랑이 필요한 자의 이웃이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랍비는 내가 돕는 입장이라고 전제한 후 그 이웃의 범위를 나 중심에서 생각한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가 도움을 받는 상황이라면 어디까지가 이웃이기를 기대하겠느냐고, 그럴 때 어디까지가 이웃이면 좋겠냐고 질문하신 겁니다. 랍비가 내민 질문의 창끝을 그대로 다시 랍비에게 되돌려준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나그네일 때, 그가 원하는 이웃의 범위는 무한대일 겁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든, 외국인이든, 또 다른 나그네든, 우리를 발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웃이어야만 하겠지요.
네, 예수님은 우리가 나그네로서, 강도 만난 자로서, 이웃에게 받고자 하는 그만큼의 호의를 나그네에게 베풀라고 말씀합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지요. 우리는 늘 결코 그런 일은 우리에게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내가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삽니다. 그래서 입장을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을 찾아온 랍비처럼 말입니다. 어째서 다른 누구도 아닌 사마리아인만이 강도 만난 자를 돕는 것입니까? 사마리아인만이 진정으로 나그네 됨을 경험했고, 나그네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했기 때문일 겁니다.
주중에 하나 자매가 추천해준 책에서, 김선우 시인의 『이런 이유』라는 시를 읽었는데, 시인이나 되어야 주님의 마음을 가지게 되나 봅니다. 시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옵니다. “그 걸인을 위해 몇 장의 지폐를 남긴 것은/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닙니다/ …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잘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돈은 그에게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나에게 어쩌면 미래의 당신에게/ 얼마 안 되는 이 돈을 잘 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도 나그네 될 수 있음을, 아니 우리 모두가 그런 나그네였고, 또 나그네 될 것임을, 그래서 그 선행이 결국 나를 위한 것임을 담담히 노래하는 거지요.
나그네 마음은 결국 나그네가 알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으로 나그네를 택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택한 이들이 나그네의 경험을 하게 하시고, 그 나그네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묵상해 온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내용이자, 성경의 큰 주제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이스라엘도 다 같은 경험, ‘나그네의 경험’을 (제대로) 합니다. 그들은 말끝마다 자신들이 나그네라고 고백합니다. 모세는 아예 자기 아들의 이름을 나그네라는 뜻의 ‘게르솜’이라고 지으면서까지 자신이 나그네임을 드러냅니다.
어째서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으로 살게 되었습니까?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우리가 다 알 수 없으나, 그 목적은 분명히 성경에 드러납니다. 나그네였던 경험, 종 되었던 경험을 통해 나그네들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목적이 하나님의 율법 안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지요.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9) 너희가 나그네였으니,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고(출 23:9), 그들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율법에 가득합니다. 마치 그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일부러 나그네로 만들어 방황하게 하신 것인 양,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나그네입니다. 하나님께 이방인입니다. 우리가 이번 달 암송할 말씀 다시 보십시오.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아멘) 우리는 본래 그리스도 밖에 있는, 하나님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었고, 비로소 나그네가 주의 나라에 정착하며 살게 된 겁니다. 이걸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내가 죄인이었을 때, 내가 하나님께 이방인이었고, 천국의 나그네였고, 심지어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예수께서 친히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셔서, 나를 대신하여 모든 값을 치르고 나를 살려 나를 돌보셨다는 믿음, 그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라는 이들이, 나그네를 학대하고,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십니다. 요즘 계속 묵상하고 있는 예레미야 말씀은, 참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아픈 말씀들인데요, 유다를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이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에게 하시는 책망의 핵심은, 다른 게 아니었지요. 나그네를 압제하고 고아와 과부를 학대한 거기에서 모든 하나님의 분노가 시작됨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종교적 행위를 책망하시는 게 아니었습니다. 나그네를 대하는 태도와 무관심에 대해 하나님은 공의로 갚으신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그네에게 함부로 했으니, 나도 너희를 함부로 하여 너희로 나그네 되게 한다, 그 관점이십니다.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나그네와 예수님을 동일시하시기까지 하시지요. 구약의 ‘나그네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젠 아예 나그네가 곧 주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필요를 돌보고 베풀지 못한 우리의 삶을, 예수님께 드리지 못한 삶으로 규정하십니다. 나그네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예 나그네이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신앙생활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본문에는 짧게,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만 나오지만, 사실 많은 서신서에 나그네를 귀하게 섬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특별히 목사(감독)나 교회의 리더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격 중 하나가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일입니다. (디모데전서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아직 집에 나그네를 들여 먹이고 입힌 적이 없는 저 같은 사람은, 그러니까 목사로서 아직 부족함이 많은 것입니다.
나그네에서 땅 주인이 되고, 가진 자가 되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금방 우리는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지난 월요일 말씀에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는 것,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로 형통함의 축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22:16)고, …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그들을 변호하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거기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형통이 온다고 강조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유다 멸망의 원인은, 나그네의 하나님을 가진 자의 하나님으로 바꾸어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으로 하나님을 믿겠다고 나선 것이 문제였던 겁니다.
세계적으로 난민 문제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캐나다처럼 어떤 나라는 조금 관대한 반면, 또 어떤 나라는 매우 엄격하고 배타적입니다. 한국이 여러 이유로 난민 인정률이 세계 최저 수준인 것은, 높은 기독교인 비율을 고려할 때, 그래서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그네를 외면하는 나라는 결국 망할 것이고, 다시 나그네의 심정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국가가 아직 미성숙하거나 혹은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난민이나 이방인들에게 친절하지 않고, 배타적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이나, 단일민족이라는 정서, 또 계급 간의 차별 의식이 강한 우리의 실정에서는 이 문제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함이 옳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성도들이, 그런 입장, 그런 태도이면 안 됩니다. 설사 정치적으로는 배타적일 수 있지만, 신앙적으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들에 대한 도움의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이 가능하도록 노력하는 방향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난민들의 폭력성이나 그들의 종교, 곧 이슬람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혐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들이 그러한 반응을 부추깁니다. 마치 그들이 들어오면 우리나라가 무슬림화 될 것처럼 말하고, 일자리가 줄어들고, 심각한 범죄가 발생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물론 낯선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들어오니, 잠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금방 냉정을 찾아야 하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나그네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합니다.
무조건 그들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모든 난민을 다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형편과 여력에 따라 할 수 있는 만큼만, 말씀대로 ‘힘쓰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드러내는 분명한 표지가 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괜한 두려움과 혐오, 그리고 가짜뉴스들을 만들어내는 일을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는 안 됩니다.
이 민족만큼 나그네의 경험이 많은 나라도 또 없습니다. 그래서 더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약소국이었을 때, 얼마나 많은 나라에 나그네로 가서 일해야 했습니까? 간호사로, 광부로, 건설 노동자로, 군인으로, 온 세계에 흩어져 외화벌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이 땅에 수많은 교회와 성도가 탄생했습니다.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너희가 나그네였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형통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습니다. 이미 나그네의 세대가 다 지나가고, 정착하고 가진 자의 세대가 되어서인지, 또 살아가는 삶이 너무 힘들어서인지, 이 나라와 국민, 성도들의 마음은 너무나 강퍅합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이, 교회가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정말 무슬림 난민을 받아들이면 그래서 이 나라가 무슬림화 된다면, 여러분 정말 그렇게 될 거라면 교회는, 우리의 신앙은, 얼마나 무력한 것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신앙이, 그처럼 무능한 것입니까? 그런 기독교라면 과연 수천 년을 이어올 수 있었을까요?
무슬림들이 주인으로 있는 땅에 지금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나그네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선교도 하는데, 이 땅에 들어온 이들은 얼마나 좋은 선교의 기회인가요? 나그네로 그들의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과 우리 땅에 들어온 나그네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운 일이겠습니까?
몇 주 전 제가 존경하는 동기 목사님이 한국에서의 목회를 정리하시고, 인도네시아에 선교사로 가셨는데요, 오랜 기간 한국에서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공부하고, 정말 누구보다 준비가 잘 된 상태로 가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서 내내 하시는 일이 그냥 어학원 다니며 언어 배우고, 그 나라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몇 년을 살고 섬겨야 복음의 기회가 생길 지, 그것조차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엄청난 시간과 돈, 그리고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 선교 비용에 비한다면, 제 발로 찾아온 난민을 돌보고 섬기는 비용이 훨씬 더 경제적인 것 아닌가요?
실제로 제주도에서 목회하고 있는 제 동기 목사이자, 신학생 시절 한 방을 같이 썼던 한 목사는, 제주도에 온 예멘 난민 청년들과 같이 축구하고, 대화하고, 함께 식사하며, 말 그대로 한국에서 이슬람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발 만나보지도 않고 그들을 강도 취급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여러분, 먼 타지에 나가서 나그네가 되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선교지만, 우리 땅에 머무는 나그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똑같은 선교, 아니 훨씬 더 쉬운 선교이며,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한 선교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기독교의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민족에게 주신 너무나 소중한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초대교회에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크게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타자에 대한 감수성, 타자에 대한 환대의 마음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인의 타자였습니다. 유대인들 자체가 우리만큼이나 큰 배타성을 가진 민족인데다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타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 극심한 배타성을 나그네에 대한 환대의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가 곧 교회의 승리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팍팍하고 힘든 일상이 우리의 영적 감수성을 너무 메마르게 한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에겐 주님의 마음이, 그리고 여유와 넉넉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우리의 하나님이 누구의 하나님이신지를 기억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나그네를 위한 성도, 나그네의 교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 맺습니다. 오늘 사도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그 일이, 다름 아닌 우리 공동체를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씀합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명령하기 전에 사도는, 먼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는 말씀부터 시작합니다. 형제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사랑, 형제의 사랑, 곧 ‘필라델피아’가 ‘필록세니아’의 출발점입니다.
사실 우리도 여전히 서로에게 낯선 존재이지요. 서로에 대해 무지하고, 두려움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 교회 성도, 지체를 돌보는 일 없이 나그네를 대접하겠다고 결단하는 건 뭔가 잘못된 것일 겁니다. 서로의 필요가 무엇인지, 꼭 있어야 하는데 필요한데 말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 더 깊이 관심을 기울이고, 부디 그 필요가 우리 안에서 채워지는, 진정한 구원의 경험이 우리 교회에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의 끔찍한 일은 악한 인간들의 행위에 의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선한' 인간들의 무관심과 행동하지 않음으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토마시 할리크).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나그네를 볼 수 있는 눈과 여유, 그리고 넉넉한 마음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늘 기억하며, 부디 나그네의 하나님을 이 땅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그런 형통한 삶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