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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시간을 살라!" 2014년 4월 4일 새벽기도회 설교 (사순절27)

2014-04-0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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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4 금요일 새벽기도회  ----------------------------------------------------- 요한복음 9장 24~34절, 사순절(27)  영생의 시간을 살라! * 설교 음성 : http://www.4shared.com/mp3/XJJ3hUWBba/20140404__27_.html 사순절 스물일곱 번째 말씀으로, ‘영생의 시간을 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계속해서 실로암에서의 맹인 치유 사건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시겠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이 사람의 치유는 초막절, 빛의 축제에 와 있던 사람들 사이에 매우 큰 혼란과 소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요는 주님이 고의적으로 일으키신 측면이 매우 강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빛이 감당해야 할 거룩한 책무 가운데 하나, 그것이 바로 어둠을 책망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책망 앞에 놓인 어둠은 어떻게든 그 빛을 덮어보려 합니다만, 오늘 본문이 기록하는 대로, 그것은 아무 의미도 효과도 없는 일일 뿐입니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맹인 되었던 사람의 부모까지 심문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소득이란, 자신들에게 진정으로 유익이 되는 올바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바 빛을 퇴색시키고 가리우는 일이었습니다만, 결국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사람을 불러 본문 24절 말씀처럼,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고 말합니다. 17절에서 이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이 선지자라고 했던 그 고백을 다시 주워 담으라는 협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으로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야 한다는 논리 앞에서, 우리는 정말 바른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오늘날 모든 성도, 모든 교회는 다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인데 과정은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라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를 인정하지 않고, 예수가 걸었던 고난과 십자가를 외면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논합니다. 바로 오늘 바리새인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볼 뿐, 복음의 참다운 길은 결코 보지 못하는 참 맹인들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예수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드러난 바,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을 받으시는 지를 보고 믿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길을 떠난다면 우리도 여기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영광을 핑계로 내 욕망을 채우고, 예수의 십자가를, 한갓 십자가 목걸이처럼 내 삶 어딘가에 걸어두고 즐기는 그런 액세서리로 만들기에 급급한 예수 사기꾼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주님을 만나 구원을 얻은 이 사람의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바리새인들의 심각한 추궁 앞에서 이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다거나 흔들리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당당하고 자유롭게 자신이 믿는 바를 증언합니다. 자신이 하는 말을 들으려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심문하고 따지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는 오히려 답답하다는 듯 안타까움을 표출하기까지 합니다. 본문 27절 말씀입니다. “27.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선은 어둠 가운데 있는 불신자들, 거듭나지 못한 이들에게는 기적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기적도 믿음이 있을 때 믿어지고 받아들여집니다. 믿지 않으면 기적을 보아도 실질적인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잠시 놀라고 충격을 받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실질적인 회심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숱한 기적을 경험하면서 주님을 따라다니던 그 수많은 군중들이 결국 예수를 죽이라 외쳤던 그 군중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기적은 믿는 사람에게만 기적일 따름입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기적으로 인정되지만, 믿지 않는 이에게는 어떤 기적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처럼 기적에 대한 이 뚜렷한 차이를 만들어 내심으로써, 주님은 빛과 어둠을 가르고 구별하는 심판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39절에 보면 아예 명시적으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27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 사람의 실질적인 신앙고백을 듣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 자신은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마음먹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제자로의 부르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주님을 믿는데 제자는 될 수 없다, 이런 것은 없습니다. 주님을 좋아하고,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도 알겠고, 그분이 하신 일도 다 믿는다. 그런데 그분을 뒤따라가는 것은 좀 어렵겠다, 이것은 신앙 안에 불가능한 현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진실로 거듭났다면 제자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는 믿음, 그것은 거듭난 믿음이 아닙니다. 기적을 맛보고 주님을 경이롭게 바라보아도, 심지어 자신이 죽다 살아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어도, 주님을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참다운 믿음은 주님을 뒤따르는 삶의 고백이 있는 믿음이며, 그분의 삶이 또한 나의 삶의 모습이라고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말과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어떤 순차적인 변화가 아닌 하나의 사건인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느냐’는 이 사람의 당돌한 질문에 바리새인들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어디 감히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주제에 거룩한 바리새인들을 가르치려 드느냐는 태도로, 욕을 합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의 태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30절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상하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군림해왔던 바리새인들을 오히려 책망하며 가르칩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의 선택은 이 빛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34절 말씀입니다. “34.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어둠이 빛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 정도이지요. 여기 쫓아내어 보냈다는 말은 결국 이 사람이 회당에서 버림받고 유대공동체로부터 축출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예수를 따르며 사는 사람들이 결국 이렇게 됩니다. 뭐, 그렇다고 두려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다시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을 따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 무시무시한 바리새인들의 정죄 앞에서도 당당하게 주님을 고백하게 만들었습니까? 두 말 할 것도 없이 그것은 그가 예수를 온전히 아는 믿음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가지 동사가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24절 끝에,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에서도, 25절에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에서도, 29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에서, 그리고 이어지는 ‘알지 못하노라’에서도, 또 30절에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에서도, 그리고 31절에서도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에서도, 온통 한 가지 동사로 본문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바로 ‘안다’는 동사입니다. 이 숱한 ‘앎’의 중복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앎이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어지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앎이 바로 빛과 어둠을 가르는 작지만 예리한 경계선입니다. 또한 주님은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알고 믿는 것 자체가 이미 영생의 증거요, 영생 그 자체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이 땅에서의 삶을 살다가 끝나면 다시 영생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알고 그분을 온전히 따르는 지금, 여러분의 영생은 이미 시작되었고, 여러분의 삶은 영생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빛과 어둠의 삶은 결코 조화되거나 희석될 수 없는 극명한 차이를 가집니다. 지금도 우리는 겉으로는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을 보고 있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영생의 삶을 사는 사람들과 사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분명히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 땅에서의 내 삶이 영생의 한 부분이며, 영원에 잇대어 사는 삶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그 삶을 나의 삶이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시간을 살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주님을 알고 믿는 영생의 시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으로 치장된 사망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참으로 영생을 살아내는 거듭난 사람이라면,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 오늘 본문의 치유 받은 맹인과 같이 담대하고 당당하며 거침없는 모습인지를 되돌아보십시오. 욕설과 폭력, 그리고 이어지는 차별과 축출, 이 모두가 예수를 주라 시인한 이들이 겪어야 할 삶의 모습이요 이 땅에서 영생을 살아내는 이들이 마주하게 될 현실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바가 참된 그리스도인지, 아니면 오늘 바리새인들과 같이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인지, 이제 여러분의 삶으로 보여주십시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고백교회가 이 땅에서 영생을 살아내는 담대한 믿음의 고백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