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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2018년 9월 9일 주일 설교

2018-09-09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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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9  오순절 열여섯 번째 주일 메시지 ---------------------------------------------------------- 로마서 12:9~13,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 설교 음성파일 : 설교 음성은 추후 올려드릴 예정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로마서 강해 54) 본문 10절의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아름답게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주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9절 말씀처럼,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 사랑, 곧 진리 안에 있는 사랑이라고 했고, (시간으로 인해 깊게 다루지는 못했지만) 또 한 가지는 10절에 있는 것처럼, ‘서로 먼저’ 하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10절의 ‘먼저 하라’는 말씀의 원문에는, 본래 [프로에게오마이]라는 (조금은 평범하지 않은, 성경에 단 한 번 사용된) 단어를 써서, 리더나 가이드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듯, 그렇게 서로 조금 더 앞서서 사랑하고 존경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단지 순서에 있어 ‘먼저’가 아니라, 앞장 서 사랑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내고, 길을 인도하듯, 그렇게 본을 보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 그리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성도의 사랑이 세상의 사랑과 구별되는 점은 이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렬하고 헌신적인 사랑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랑이든, 그걸 먼저 할 수 있느냐, 받기 전에 먼저 베풀 수 있는 사랑이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너 하는 거 봐서’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받고 싶은 그 사랑을 먼저 주는 사랑, 그것이 성도의 사랑이라고 예수님은 보여주시고 또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아마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하는 사랑’, 말로는 쉬우나, 삶으로는 너무나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먼저’ 받았다는 확신과 고백 없이는, 도저히 순종할 수도 없고, 또 순종할 이유도 없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은 세상의 윤리, 도덕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단지 당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반응을 설명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이유도, 능력도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이 어려운 말씀들이 우리에게 들리고, 이해가 되고, 또 늘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한 번 더 노력하고 애쓰며, 어떻게든 살아내 보고자 몸부림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누리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겠지요. 사랑하는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들리고, 이해되며, 또 힘들지만 우리의 삶에서 한 번 더 고민되고, 씨름하게 하는 말씀이라는 사실이, 저와 여러분의 구원(의 현실)이요, 우리가 받은 가장 큰 복인 줄로 믿습니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이제 사랑의 내용으로 들어가 봅시다.) ‘먼저 하는’ 사랑의 내용은, 10절에 있는 것처럼, 형제의 우애와 존경입니다. 본문 10절을 직역해보면,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입니다. 사실 10절 앞부분에서 강조하는 것은, 실제 혈연관계에 있는 형제, 자매간의 우애로 서로에게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사용된 두 동사, ‘형제를 사랑함’[필라델피아]과 ‘우애’[필로스토르고이] 모두, ‘필로’라는 같은 접두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족 간, 형제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확장된 가족의 형태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 있을 때 다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10절 후반부의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는데요 …, 현실에서의 우리 성도들의 관계나, 그 이면을 생각할 때, 이 말씀 역시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 정도까지는 그럴 수도 있겠는데, 존경이라니 …, 이건 좀 나가도 너무 많이 나간 느낌입니다. 전혀 존경이 안 되는 사람인데, ‘존경해야지!’ 한다고 존경의 마음이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좀 이상해도 이해해라, 맘에 안 들어도 받아들여라, 잘못해도 용서해라, 이런 말씀보다 저는 개인적으로 ‘존경해라’는 이 말씀이 훨씬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그래서 이 말씀을 오래 묵상하게 된 것이고, 설교까지 하게 된 거겠지요). 존경은 상대를 향한 높은 가치 평가가 들어가 있고, 존경할지, 안 할 지의 여부에 대한 평가는, 이미 우리 안에서 판단이 끝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존경하는 것 없이 단지 겉으로 존경을 먼저 표현하라고만 한다면 그건 좀 더 쉬운 것 같습니다. 존경의 예(禮)를 먼저 표해라, 하는 거라면 말이지요. 예컨대 먼저 머리를 숙여 인사해라, 먼저 악수를 청해라, 먼저 미소로 인사해라, 뭐 이런 것이라면 훨씬 더 쉬울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도 쉬운 게 아니고, 상당한 노력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그래도 원만한 관계를 위해 서로 필요한 예를 갖추는 문제라면 그나마 노력해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존경은 말씀드린 대로, 외적 표현이기 이전에 내 마음의 상태입니다. 표현에 억지로 존경을 담을 수는 있겠지만,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그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길 수 있습니다. 존경은 그런 것입니다. 억지로 존경할 수 없습니다. 정말 존경할 만해야 존경이 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서로를 먼저 존경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이 상대방이 존경받을 만한 어떤 행동을 했느냐, 존경스러운 모습이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고, 또한 본질적으로 이 말씀이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과 관련된 문제이며, 존경의 근거가 상대의 상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존경하십니까? 질문이 너무 좀 그렇습니다만, 여러분은 정말 존경받을만한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하시는지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을 생각해보니까, 솔직히 저는 저 자신을 존경할 수 없겠더라고요. 이해는 해도 존경까지는 어렵습니다. 저도 남이 저를 존경해준다면 참 좋겠다고 소망하고 있지만, 그리고 정말 아주 가끔은 그런 말을 들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저 자신을 존경할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설사 존경받을 만한 부분이 조금 있다손 치더라도, 그 부분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서 보면, 결국 거기엔 별로 존경할 만하지 않은 동기나 목적이 또 있다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그러신지요? 여러분, 우리 스스로도 존경하지 못할 우리 자신을 누가 존경해주겠습니까? 그걸 바라는 것 자체가 사실은 어불성설이겠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서로 앞장을 서서 존경의 본을 보이며, 사랑의 길을 내라고 말입니다. 오늘 주보 표지에 보면, 언젠가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루스 그래함 여사의 묘비 비문 사진이 있습니다. 올 2월에 작고하신 미국의 위대한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부인이시지요. 사진을 보면, 맨 위에 한자 ‘의로울 義(믿음으로 말미암는)’가 적혀있고, 그 밑으로 이름과 생몰년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End of construction - Thank you for your patience.”라는 짧은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공사 끝,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도가 되겠네요. 과거에 두 분 목사님 부부가 운전을 하고 가다가 어떤 공사구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그 공사장 앞에 세워진 안내문에 쓰여 있던 글이랍니다. 이제 긴 공사가 다 끝났다고, 그 동안 불편을 드려 죄송했고, 또 감사했다는 표지판,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볼 수 있지요(‘공사 중,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정도는 본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인생이 평생 공사 중이었는데,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불편과 어려움을 주는 삶이었는데, 그럼에도 그 동안 나를 견뎌주고 인내해줘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감사의 인사인 셈입니다.  아마 저와 여러분 모두는 예외 없이 이 ‘공사 중’이라는 팻말을 붙여 놓은 인생일 겁니다. 공사가 이미 완료된 사람은 없겠지요. 그리고 필시 누군가의 불편과 인내가 이어지고 있겠지요. 저도 사실 존경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그저 제가 끼치는 피해가 좀 적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무슨 공사가 그렇게나 한창 진행 중인 겁니까? 어떤 건물을 짓는 공사일까요? 네, 올 한 해 우리가 계속 보고 있는 주제 말씀,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처럼, 성경은 우리 인생의 공사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한 공사라고 말씀합니다. 대공사이겠지요? 거룩한 하나님께서 계실 수 있는 처소, 성전, 예배당, 하나님의 집, 하나님나라가 되기 위한 공사입니다. 여러분 혹시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며, 수천, 수만 개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수놓아진 너무나 아름다운 그런 성당이나 교회 안에 들어갔을 때, 어떤 경외감 같은 감정 느껴보신 적 있으신지요? 유럽의 유명한 성당에 가면 주로 느끼게 되는데요, 그런 곳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입이 쩍 벌어지면서, 왠지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저는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만,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 가족 성당’)이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저는 오직 그 성당을 보기 위해서라도 바르셀로나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은데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한 성당이지요.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성당이 아직도 건축 중에 있다고 하지요. 1884년부터 건축이 시작됐으니, 벌써 130년이 넘도록 공사가 이어지는 셈입니다. ‘참 오래도 짓고 있다’ 싶지만, 저와 여러분의 삶이라는 성전도 만만치 않겠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좀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언젠가 완공이 될 것을 우리가 믿고 있듯이, 저와 여러분의 존재와 삶의 성전도, 결국은 공사가 끝나고 완성될 것임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걸 믿으실 수 있습니까? (*)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의 설계자도, 건축가도, 감리사도, 다름 아닌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설계하고 시공하시기에, 저와 여러분의 이 존재와 삶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정도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거룩한 성전일 것입니다. 수백만 개의 스테인드글라스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찬란한 빛들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 성전을 바라보거나, 그 안에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나 경외감으로 감탄하게 되는, 그런 거룩함으로 가득 채워진 하나님의 처소가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 경제적인 이유로, 그밖에 다른 이유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혹 공사가 중단되고, 완공되지 않을 수 있을지 몰라도 저와 여러분의 성전은 반드시 완공될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 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공에 필요한 모든 값을 이미 다 치렀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도 남을 그리스도의 보혈, 그 피 값으로 시작된 공사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성전은 그만큼 존귀하고 그만큼 영화로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이 완공을 약속하셨고,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심으로 이미 그 완성을 보증하셨기 때문입니다. 완공이 다 되고난 후에 들어오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왜요? 우리가 언젠가 그렇게 영화롭게 빚어져 완성될 것을 우리에게 확증하시기 위함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자신이, 그리고 여러분 옆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별로 존경스럽지 않고, 별 감동을 주지도 못하는 이유는, 아직 공사 중, 건축 중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한창 공사 중인 건물이 때로 더 흉물스러운 것처럼, 지금 우리 자신도 그래서 더 보기에 흉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체는 아닙니다. 그것이 진짜 모습은 아닙니다. 반드시 완공되고, 반드시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이미 보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그 존귀함과 영화로움을 간직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우리 눈에는 아직 기초공사도 끝나지 않은 것 같아도, 그래서 깊게 파인 땅만 보여도, 이게 정말 뭐가 지어지고는 있는 건가 싶어도,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성전으로, 현재가 아닌 미래도 아닌, ‘미래 완료의 모습’으로 저와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시고, 기뻐하고 계시며, 감동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기쁨과 감동으로 나 자신과 타인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 실체를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 범인(凡人)들의 눈에는 그저 한없이 평범하더라도, 그 본질과 아름다움을 간파하는 시인의 안목, 그 안목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몇 번의 지난 설교에서, 저는 하나님은 우리를 마치 한 편의 시(詩)와 같은 작품으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10의 말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에베소서 2:10)에서, ‘만드신 바’, 그것은 ‘포이에마’, ‘시적 작품’이라고 했고, 그래서 절대적인 고유함과 아름다움,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존재의 가치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지금 여기서 서로가 인정하고 드러내고 존중하는 태도, 그걸 성경은 존경이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시인은 그 본질의 아름다움을 간파하는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지요. 일반인들은 볼 수 없는, 그냥 지나쳐버리는 그 아름다움을 시인은 찾아내고 노래합니다. 주중에 읽은 장석남 시인의 시집 중에 ‘세탁기’라는 제목의 짧은 시가 있습니다. “우두커니/ 문 열린 세탁기야/ 때 묻은 하늘이나 넣을까/ 기다림이나 넣을까/ 커피나 한잔 내려 마시고/ 시골 빨래 서울 빨래/ 겨울 빨래나 넣을까// 매일매일 덕을 쌓는 세탁기야/ 해 입벌린 바보야// 천사야// 봄아//” 세탁기를 보며 천사야, 봄아, 노래하는 시인의 가슴, 그 안목에 감탄하게 됩니다. 저희 집 세탁기도 입 벌린 채 늘 열려 있는데 왜 저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못했나 싶습니다. 존재를 기억하고, 의미를 드러내고, 그 존재의 가치를 고백하는, 이런 시인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인들의 시선이 아니겠습니까? 그 시선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렇게 먼저 누군가를 향한 시를 지어 노래할 수 있다면, 우리의 그 공사가 좀 더 원만히, 조금 더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때론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타인의 모습과 행동이 있곤 하지요. 그때마다 잠깐 멈추어 서서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를 향해 흉을 보고 ‘뒷담화’를 하기 전에, ‘그래, 공사가 좀 길어지나 보다.’ ‘높은 건물이 올라갈 때 기초공사가 더 오래 걸린다더니, 저 사람은 정말 대단한 건물인가보다.’ 그리 생각하면 어떨까요? 오래되어 낡은 세탁기도 천사요, 봄이라 노래하는데, 주님 안에서 한 지체된 이들을 우리도 그리 여길 수 있지 않을까요? 정호승 시인이 ‘방문객’이라는 시에서 노래했지요.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방문객’ 全文) 저는 이 시에서,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그리고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이라는 구절이 참 좋습니다. 마치 우리를 보시는 주님의 마음, 성령의 마음 같습니다. 그의 과거와 현재만이 아니라, 그의 미래가 함께 오고 있음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바람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그 모습으로 더듬어 볼 수 있다면, 우리도 서로를 진심으로 환대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 아마 훗날 우리는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이 완성하신 서로의 영화로운 모습에 함께 놀랄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너무 다른 모습, 너무나 존귀한 모습 앞에 할 말을 잃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때로 서로에게서 나타나는 그 영화로운 모습들의 흔적을 문득 문득 보게 된다면, 완성된 그 성전의 일부, 좀 괜찮은 모습, 아름다운 섬김의 모습, 그런 것들을 언제든 보게 된다면, 여러분 서로를 힘껏 존경해마지 않기를, 긍정의 감탄을 꼭 표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지만, 존경은 우리의 영혼을 춤추게 합니다. 사실 존경은 칭찬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칭찬은 어떤 특성이나 행위에 대한 긍정의 감탄이지만,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존경은 존재에 대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긍정의 감탄입니다. 그래서 존경이 칭찬보다 더 본질적이고, 영적입니다. 뭔가를 잘 해서, 도움이 돼서, 훌륭해서, 그래서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존경입니다. 우리는 모두 존재의 존경을 별로 받지 못한 채로 살아왔고, 또 지금도 살아갑니다. 어릴 적부터 성인을 지나 노인이 될 때까지, 사실 현대인들은 존경이라는 말과 참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민폐가 되지 않고, 구박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진심어린 존경을 결혼 이후에 아내로부터 처음 받아본 것 같습니다. 그 이전에는 칭찬이었지, 존경은 아니었습니다. 존경이라고 말은 해도 그 내용은 실상 칭찬이었습니다. 뭔가를 잘 해서, 좋은 모습을 보였을 때 인정을 받았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에게 받은 것도 그런 거였습니다. 뭔가 잘 해서, 칭찬도 받고 상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이유 없이, 단지 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과 존경을 받습니다. 부끄럽지만 우리 남편이 최고라는 말을 저는 매일 듣습니다. 제가 어디 가서 그런 말을 듣겠습니까? 뭔가를 잘 해서가 아닙니다. 실제로 아내는 제게 특별히 어떤 일을 잘한다고 칭찬하는 일보다는 그냥 존재 자체를 인정해줍니다. 설교를 잘 했다던가, 청소를 잘 했다던가 하는 그런 칭찬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냥 저 자신을 인정하고 최고로 존경해줍니다. 사람은 참 이상합니다. 먼저 존경을 받으면 그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왜 그거 못하느냐, 왜 좀 더 잘하지 못하느냐, 책망과 질책으로 변화되는 데는 명확한 한계가 있습니다. 부작용도 많습니다. 그래서 실력 후에 존경이 오는 게 아니라, ‘먼저’ 존경이 있고, 후에 ‘실력’이 따라옵니다. 그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정말 의롭게 빚어 가십니다. 의롭게 만들어서 의롭다 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가르치시고 연단하고 갈고 닦아, 어느 기준 이상이 되었을 때 ‘의롭다’ 인정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통째로 받아들이시고, 인정하시고, 영접하여 주신 후에 우리를 그 모습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세상의 종교와는 다른 점입니다. 내가 수련을 하고 도를 닦아 의로워지는 게 아닙니다. 먼저 의롭다 함이 선포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존경 속에서, 그 의로운 모습을 갖춰갑니다. 세상이 우리를 판단하는 것과 정반대의 순서입니다. 먼저 존경 받고 후에 실력이 생깁니다. 사실 구약에서는 이런 서로에 대한 존경을 강조하는 말씀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은혜를 온전히 실감하지 못했던 시기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신약의 초대교회 공동체로 오면, 오늘 말씀처럼 이 존경의 마음과 태도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교회 윤리 안에 서로에 대한 존경, 나보다 남을 더 낫게, 훌륭하게 여기는 마음이 핵심으로 들어옵니다. 나를 전적으로 의롭다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온전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남을 존경하는 마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그 마음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습니다(빌 2:5). 여러분 부디 그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 귀한 마음을 품고, 여러분 안에 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영화로운 주님의 성전으로 바라보고, 먼저 그것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시인의 마음으로 저와 여러분 자신과 서로를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교를 시작할 때, 성도의 사랑이 세상의 사랑과 구별되는 점은, 그 사랑을 내가 먼저 할 수 있느냐, 받기 전에 먼저 베풀 수 있는 사랑이냐, 하는 문제라고 했습니다. 먼저 존경함으로, 먼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간직함으로,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전임을 스스로 고백하십시다. 의로운 모습으로 빚어져가는 이 공사의 여정이 그래도 조금은 견딜 만하고, 그래도 조금은 더 단축될 수 있는, 그렇게 저와 여러분이 서로 먼저 존경함으로 함께 지어져가는, 주님의 고백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