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선에 속하라' 2018년 9월 2일 주일 설교
2018-09-0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3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80902 오순절 열다섯 번째 주일 메시지
----------------------------------------------------------
로마서 12:9~13, 선에 속하라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romans53.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파일 용량으로 인하여 첨부해 드리지 못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로마서 강해 53) 본문 9절의 ‘선에 속하라’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아름답게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은사, 카리스마]을 통해 서로를 섬기라고 말씀하신 지난주 메시지의 핵심은 두 가지였는데요, 여러분 기억나시는지요? 네, 절제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동시에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남이 대신할 수 없는 은사의 충성으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어 가라고 했었지요. 이제 그 말씀의 기초 아래서 바울은 공동체의 사랑[아가페]에 대해 권면합니다. 9절에서는 사랑의 본질을, 10절에서 사랑하라는 권면을 반복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권면에는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각 절마다 덧붙여져 있습니다. 단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 사랑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야 그 사랑이 세상의 본을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인지, 그 중요한 단서들이 붙어 있습니다. 그 하나는 9절 말씀처럼, 거짓이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0절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술어인, 마지막 부분의 ‘서로 먼저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두 부분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먼저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라는 구절의 헬라어 표현은 사실 (be)동사 없이, 그냥 ‘사랑’[아가페]과 ‘거짓 없는’[아뉘포크리토스]이라는 두 단어로만 되어 있습니다. 중간에 동사(술어)가 없는 건데요, 그래서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라는 평서문도 가능하고,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처럼 명령문으로 해석도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사랑과 진실함이 직접적으로 연합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네, 우리가 삶 속에서 늘 경험하는 것처럼, 진실하지 못한 사랑은 이미 사랑의 충분한 조건이 되지를 못하는 거겠지요. 여기 ‘거짓 없는’이라는 단어는 본래 연극 무대에서 배우가 가면을 쓰고 어떤 가공의 인물[페르소나]이 되어 연기를 하는 모습에서 온 단어입니다. 마치 연극처럼 가식적이지 않은, 정말 진실하고 정직한 사랑이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9절 앞부분을 이해하고 나면, 곧바로 나오는 말씀인,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는 부분과 연결이 조금 어렵습니다. 사랑은 진실해야 한다, 그런데 진실하기 위해서는, 혹은 진실하다면,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한다. 여러분 이해가 가시는지요?
우선 표현에 있어 이 문장은 매우 강한 어조로 되어 있음을 먼저 좀 강조하고 싶습니다. 악을 미워하라[아포스티게오]는 이 표현에서 ‘미워하다’라는 동사는, 성경 전체에서 이곳에 단 한 번 사용된 동사인데요, 정확하게는 ‘혐오하다’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단순한 미움이 아니라, 증오하며 기피하는 그런 마음의 상태입니다. 헬라어에는 일반적인 의미의 ‘미워하다’라는 뜻을 갖는 동사 [미세오]가 따로 있습니다(‘hate’). 그런데 굳이 바울이 여기서 그 단어가 아닌 혐오, 증오의 의미를 가진 [아포스티게오]를 따로 사용한 건(‘abhor’), 그만큼 이 부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성경에다가, ‘미워하고’ 앞에 ‘몹시’라고 써 넣으십시오. (* 표시도 함께)
그리고 선에 속하라는 말씀 역시 원문은 훨씬 더 강한 어조입니다. 여기 ‘속하다’라는 동사가 ‘콜라오’인데요, 어딘가에 포함되고 소속된다는 뜻이기 이전에, 뭔가를 꽉 붙들어서 거기에 매달려 붙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는 고린도전서(6:17)의 말씀에서 주와 ‘합하다’라는 표현이 바로 이 단어입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 부부의 관계처럼, 딱 달라붙어 있는 모습, 그것이 이 ‘콜라오’입니다. 다시 말해 선을 힘껏 붙들고 놓지 않는 사랑이 바로 거짓 없는, 진실한 사랑의 중요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거짓 없이, 가식 없이, 연극처럼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메시지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명령은 솔직해라, 진실해라, 있는 감정에 충실해라(밀당하지 말아라), 뭐 이런 표현이 될 텐데, 본문은 갑자기 선과 악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진실한 사랑이기 위해 바울이 제시하는 메시지가 참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악을 미워하라는 겁니다. 사랑하라고 하더니, 그 속에 미움에 대한 명령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참된 사랑 속에는 어떤 대상을 향한 미움이 있는 겁니다. 악을 향한 미음이 있는 사랑, 그리고 선을 강렬하게 열망하는 사랑, 그것이 본문이 말하는 진실한 사랑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바울이 생각하는 진실하지 못한 사랑, 연극과 같은 사랑의 성격은, 어떤 가식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악에 대한 미움이 없고 선에 대한 열망이 없는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어째서 참 된 사랑이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 네, 9절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부모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인데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사랑이고,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며, 우리가 서로 나눠야 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진리에 속한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라는 뜻이겠지요.
이처럼 바울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사랑의 감정, 사랑의 윤리를, 사랑의 신앙으로 바꾸어 그 제자리를 찾아줍니다. 단지 좋은 마음으로 서로를 위하는 어떤 따뜻한 사랑, 그런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전부가 아님을 분명히 강조합니다. 지난주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단지 호감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각각의 지체로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몸을 온전히 세워가기 위해 각자의 은사대로 서로를 섬기는 사랑을 강조한 것처럼,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서로를 위로하고 축복하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악을 혐오하고 선을 꽉 붙들어서 진실하게,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한다고, 다 좋은 게 좋은 것이 되는 건 아니지요? 사랑하니 모든 것을 줄 수 있지만, 사랑하니 절대 줄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 중에,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그러면 너희에게 주시고, 찾게 하시고, 열릴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곧이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주신다, 그런데 정말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반대로 자녀가 뱀을 달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사랑하니 다 들어줍니까? 아니지요, 사랑하니 절대 줄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에 구하는 모든 것을 주지만, 사랑하기에 절대 안 되는 것도 있는 겁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 ‘좋은 것’의 기준, 그것이 곧 진리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열망하는 진리 안에서, 진리를 쫓아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도 힘든데, 진리를 쫓아 사랑하라니, 너무 힘든 이야기이지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봅시다. 여러분 요즘 저희 교단의 대형 교회가 세습 문제로, 교계는 물론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는데요, 지금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는 신학생들의 수업 거부까지 시작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명성교회 안에서는 어떻습니까? 찬성이 많습니까, 반대가 많습니까? 네, 압도적으로 찬성이 많습니다. 그러니 공동의회에서 통과가 되었겠지요. 여러분, 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세습을 찬성하는 사람들, 물론 그분들은 세습이 아니라 ‘승계’라고 말하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는데요, 그분들 중에서 누가 가장 열렬히 목사님 편에 서서 세습을 찬성할까요? 객관식입니다. 1)교회의 부목사나 전도사, 2)장로님, 3)집사님, 4)그리고 직분이 없는 평신도, 몇 번이겠습니까? (*) 여러분 이걸 다르게 이야기해보면요 …,
제가 김기웅 집사님께 한 번 여쭙겠습니다. 집사님, 저희 고백교회가 앞으로 수적으로 부흥하고 성장해서 제가 은퇴할 나이 쯤 되었을 때 한 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고 치겠습니다. 아마 집사님을 비롯한 지금의 성도님들과 제가 정말 함께 연합하여 열심히 섬기고 사역한 귀한 열매겠지요. 제가 헌법대로 70세에 은퇴를 한다면, 저는 고백교회에서 35년 정도 사역하게 되니까, 20년 이상 한 교회를 섬긴 목사로서 원로 목사가 되어 은퇴하겠네요. 아마 집사님이나 다른 우리 성도들도 ‘원로’라는 직함이 다 붙겠고요.
그렇다면 집사님, 그렇게 저와 집사님과 우리 성도들이 35년을 사역하고 섬기고 또 다들 은퇴를 하면서 그때 제가 제 아들에게 이 교회 담임목사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하면, 그리고 그 아들이 객관적으로도 저보다 더 탁월하고 말씀도 좋다면, 그럼 집사님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절대 안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마 어려우실 겁니다. 아니, 오히려 더 좋다고, 잘 된 거라고 하실 지도 모릅니다. 왜요? 집사님은 단지 그 순간의 관점이 아니라, 긴 세월 속에 켜켜이 쌓인 저와의 관계 속에서 그 문제를 보고 계시니까요. 그 35년의 세월 동안 제가 어떻게 사역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다 아시고, 서로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진하게 배인 그 관계 속에서, 그 문제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교회가 세습을 할 때 누가 가장 찬성하고 누가 가장 그 일을 주도했을지 이제는 답을 아시겠지요? 당연히 그 교회를 오래, 열심히 섬기셨던, 장로님들, 권사님들, 목사님을 잘 알고, 또 알아 왔고,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하는 분들이 그 일을 주도하십니다. 역으로 목사님을 덜 사랑하는 사람들이 반대합니다. 일반적인 ‘사랑’의 의미로서는 말입니다.
여러분, 제가 은퇴할 때, (지금은 있지도 않은 그)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준다고 할 때 정말 저를 막아서고 반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사랑이 선에 속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뱀을 달라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절대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랑하는 성도, 목사이기에, 뱀을 달라는 그 요구를 거절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진실한 사랑, 거짓 없는 사랑입니다.
어째서 세습을 승계라 하며 편법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실은 정말 목사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랑했다면, 정말 그 영혼을 귀히 여기고, 그의 사역과 그의 열매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염려했다면, 아마 그 일을 막아섰을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사랑한 것이 아니기에 그리 하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뱀을 달라고 해도 뱀을 준 것입니다.
잘못된 길로 걸어가고, 잘못된 것을 요구할 때, 누가 막아서야 합니까? 정말 사랑하는 사람, 평소에 좋아하고 관계가 좋던 사람들이 막아서야 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관계가 틀어지고 미움이 쌓인 사람들이 막아서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도 있어야 하고, 진리도 있어야 합니다.
그 교회의 경우에도, 아마 장로님들이 반대하셨다면 그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목사님을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진리에 속하여 그 일을 반대했다면 아마 목사님도 그 조언을 받아들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누가 그 세습을 반대합니까? 평소에 목사님과 관계가 별로 안 좋았던 사람들이 반대합니다. 그러니 목사님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평소처럼 목사를 미워하고 반대에 속한 사랑이라고 여겨버리는 겁니다.
평소의 관계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저 사람이 지금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나의 흠을 드러내고, 나를 무너뜨리려 하는 이야기인지,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평소에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지지했던 사람이, 진리의 책임도 함께 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이 성령의 열매가 됩니다.
지난주 성경공부 시간에 베드로를 중보하며 기도하신 예수님에 대해 배웠습니다만, 그토록 베드로의 편에 계시던 예수님이 때론 얼마나 단호하게 베드로를 꾸중하십니까? 사탄이 제자들을 밀 까부르듯 하려고 할 때, (오직) 너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하셨다고,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말씀하신 예수님은, 다른 장면에서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거짓 없이 사랑하기에, 악을 증오하며 선을 꼭 붙잡고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나쁜 일 할 때 한 편 되기 정말 쉽습니다. 사람은 본래 선한 일보다 악한 일에 더 잘 연합하지 않습니까?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그냥 편하게 사는 일에 연합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거짓된 사랑은 아닌지, 진리 밖에 있지는 않은지, 늘 우리 자신과 서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분별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기에, 늘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을, 그리고 사랑의 용기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본문이 말하는 거짓 없는 사랑에 닿을 수 없습니다.
힘들지만 노력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나치지 말고 서로에게 진실한 권면을 시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사랑하는 관계에서도 서로 진실하게 책망하기 어렵습니까? 기회가 있었을 때, 한 번, 두 번, 그런 것들을 다 넘어갔던 것이에요. 작은 일들 가운데 그냥 한두 번 넘어가면 큰 문제 앞에서는 정말 더 어려워집니다. 사랑한다면, 정말 사랑한다면, 바른 소리를 아끼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 진실한 사랑으로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깊은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는 쓰디쓴 충고와 권면의 말들을 말할 수 있고, 또 감사함으로 들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 그 남은 한 가지를 마저 짧게 나누면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10절에 나오는 서로 사랑하는 메시지의 초점은 ‘먼저’입니다. 여기 ‘먼저’ 하라는 이 말씀은, 본래 경쟁하여 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뒤에서 따라 가지 말고, 마치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듯, 앞서서, 뒤처지지 말고, 그렇게 서로를 먼저 사랑하라고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사랑은 ‘먼저’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자체가 ‘먼저’ 주신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먼저’ 사랑하고 존경하라는 것은, 단지 내가 먼저 하면 저 사람도 나를 그렇게 사랑할 것이다, 하는 뜻이 아닙니다. 순서의 차원이 아니라 가치의 차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를 때,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먼저 사랑을 베푸셨다고 하지요. 그렇다고 하나님이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고 사랑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이젠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갚을 거라고 생각하셔서, 그래서 ‘먼저’ 사랑하신 게 아닙니다.
바울이 서로 존경하고 우애하기를 먼저 하라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은혜로 사랑을 먼저 받았으니, 보상 없이, 대가 없이, 다른 기대 없이, 우리도 먼저 그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세상의 사랑과 구별되는 점은 그 사랑이 얼마나 헌신적이냐, 얼마나 강렬하냐, 이것이 아닙니다. 받지 않아도, 받을 일이 없어도, ‘먼저’ 하는 그것이, 2절 말씀처럼, 세상을 본받지 않는, 세상과 구별되는 길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하십니까? 갚을 수 없는 사람들, 그 사랑에 대해 보답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구제하라고 하십니다. (눅 14:13~14,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그래서 지금 본문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순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울러 구원을 받았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먼저’ 사랑하십시다. 받은 다음에 하려고 하지 말고, 주면 나도 언젠가 받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지 말고, 아주 받을 것을 기대하고 하지 말고, 언제나 먼저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의 감격과 은혜 안에서, 주님 주시는 그 사랑의 힘으로 먼저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다음 주일에는 계속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본문에는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고 하셨는데, 특히 존경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깊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악을 미워하고 선을 붙드는 거짓 없는 사랑을 하되, 존경함으로 대가 없이, 먼저 서로에게 행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이 말씀이 부디 저와 여러분의 인생뿐 아니라, 우리 고백교회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하는 진리의 말씀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