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본받지 말고' 2018년 8월 19일 주일 설교

2018-08-19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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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9  오순절 열세 번째 주일 메시지 ---------------------------------------------------------- 로마서 12:1~2,  본받지 말고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romans51.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파일 용량으로 인하여 첨부해 드리지 못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로마서 강해 51) 본문 2절의 ‘본받지 말고’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아름답게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지난 주일 말씀 혹시 기억나시는지요? (너무 무리한 요구인가요? ^^) 네,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자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것을 실제(존)적으로 받아들일 때,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할 수 있고, 또 살아낼 수도 있다고 했지요. 여러분, 그렇게 지난 한 주를 보내셨는지요? (계속 무리한 요구가 이어지네요.) 혹 너무 바쁜 일상 속에서 그 말씀을 기억하고 생각할 삶의 여유가 없지는 않으셨는지요? (말씀의 유통기한이 너무 짧지요?) 괜찮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됨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들을 분별하고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말씀을 전한 후에도 이번 한 주, 저 역시 개인적으로 계속 하나님께 같은 질문을 여쭙고,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지금 저에게, 또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뭘까 …? 금방 알 것도 같은데, 한편으로는 명확하게 분별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면 할수록, 그런 제 마음의 중심과 방향 그 자체를 하나님이 이미 기뻐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기도 어렵고, 또 알아도 순종하기는 더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런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 내가 정말 하나님의 기쁨이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있다는 것을 조금씩 더 확실히 알아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죄와 유혹으로부터도 조금씩 더 멀어지는 일상을 보는 일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보너스 같은 축복이었다는 것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권면 드립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기쁨이며,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우리의 일상이 많이 바쁘고 힘들지만, 그런 일상 속에서도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유통기한이 조금 더 길어지면 좋겠습니다. 그건 우리가 주신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는 거겠지요. 얼마나 그 말씀을 잊지 않고자 하느냐, 그리고 얼마나 적극적으로 그 말씀에 반응하느냐에 그 열매가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엡 2:8, 암송구절). 그리고 그 은혜는 단지 구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성화와 영화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역사하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문제들 앞에 완전히 수동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성경에 명령이나 권면이 있을 필요가 없었겠지요. 심지어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있을 정도입니다(빌 2:12). 우리 자신이 반드시 감당해야 할 신앙적 노력과 영적 싸움이 있다는 뜻이지요. 물론 그 노력은 다시 하나님의 더 큰 노력 안에 있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 두 절 속에도 이런 두 가지의 노력, 두 가지의 의지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절에 나오는 명령을 정리해보면 크게 세 가지인데요, 1)본받지 말라, 2)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를 받아라, 3)분별하라, 등입니다. 여기에도 우리 스스로의 능동적 역할도 있고, 또 ‘변화를 받아’처럼 하나님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역할이 동시에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실 여기 ‘본받지 말고’나, ‘마음을 새롭게 함’이라는 부분에 사용된, ‘본받다’와 ‘새롭게 하다’라는 이 두 동사는, 우리말로는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실은 둘 다 중간태라는 헬라어의 독특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이나 영어에서는 능동태와 수동태 두 가지가 있지요. “고양이가 쥐를 잡았다.”와 “쥐가 고양이에 의해 잡혔다.”처럼. 그런데 헬라어에는 그 두 가지 외에 중간태라는 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중간태라는 건, 양쪽 모두가 그 행위에 영향력을 끼치는, 그래서 양쪽이 다 능동과 수동 모두의 역할을 하는 그런 상태를 의미합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았다고 할 때나 쥐가 고양이에 의해 잡혔다고 할 때는 사실 두 표현 모두 고양이가 행위의 중심에 있습니다. 단지 고양이가 본능대로, 상식대로 쥐를 잡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중간태로 표현된다면, 거기엔 뭔가 특별한 상황이 개입됩니다. 아무래도 고양이에게 잡힌 쥐의 역할, 쥐의 태도가 의미를 갖게 되겠지요. 쥐가 평소답지 않게 방심을 했다든가, 아니면 정말 말도 안 되게 고양이에게 대들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쥐의 특수한 행태가 그 결과에 영향을 끼친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중간태는 양쪽 모두의 역할이 의미를 가지는 상황을 표현합니다. 어느 한쪽이 주어이고, 다른 한쪽은 대상인 것이 아니라, 둘 다를 주어로 만드는 것이지요. 감이 오셨겠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세상과 우리의 관계가 사실은 거의 대부분 중간태입니다. 관계라는 게 본래 그런 것이지요. 완전히 능동, 완전히 수동인 그런 ‘관계’는 언어 속에나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에서는 하나님의 능동이 강조되지만, 일단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깊어지면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참여’하는 대등한 파트너로서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힘껏 순종도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스스로 시험하며 도전합니다. 물론 그런 노력 모두가 다시 더 큰 하나님의 노력 안에 있다는 것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우리의 의지가 우리의 삶과 신앙 안에서 연합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고 내 의지와 노력이 소멸되지 않고, 내가 열심을 내어 뭔가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는 매순간 확인하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신앙은 어떤 한 극단으로 안 됩니다. 중간태를 잃어버리고, 완전히 수동적이 되거나, 또는 완전히 능동적이 되면 곤란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고 말하면서 나 자신을 그 은혜 속에 방치해버린다든가, 모든 것이 우리의 책임인 것처럼 혼자서 너무 비장해서도 안 됩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하나님의 리드에 맞춰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몸치입니다만, 하나님의 리드에 따라 혼자 추는 춤이 아닌, 함께 추는 춤을 추는 게 우리의 신앙입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중간태를 회복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반응하게 하고 그 관계를 생동감 있게 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열심을 내되 하나님의 더 큰 열심 안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열심 안에 있지만, 그렇다고 받은 달란트를 땅에 숨겨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런 신앙으로 퇴보하지도 마세요. 부디 주님과 함께 즐거운 춤을 추듯, 여러분의 신앙이 그 중간태의 밸런스를 잘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 바울은 본문에서 영적인 예배, 곧 가장 합당하고 합리적인 예배는 우리의 몸과 삶을 예배의 내용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마음(누스, not heart but mind)을 새롭게 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는 데까지 이른다고 했지요. 그런데 이 2절의 명령을 보면,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도 있고, 또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해야 할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는 것이고, 또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둘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일단 순서대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권면에서부터 생각해보면 …, 영적 예배, 가장 온전한 예배에 있어 제일 먼저 요구되는 권면의 내용이 바로 이것인데요, 바울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에서부터 참된 예배가 시작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솔직히 이리 말하기조차 참 부끄럽습니다. 교회를 향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말하기보다는, 세상을 향해 교회를 본받지 말라, 이렇게 말해야 할 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부정성에 매몰될 필요는 없습니다. 지난주 호식 형제가 기도한 것처럼, … 이 땅에는 아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또 그것을 행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남은 교회’와 ‘남은 성도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자기비하와 무력감에 굴복하지 않고 힘껏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본래 본받는다는 것은, 어떤 훌륭한 사람을 본받고 싶다, 하는 말처럼,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가 포함된 행위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그런 의지적인 본받음과는 정반대의 것이라는 점을 주의해야 하는데요, 아마 의지적으로 세상을 본받으려는 크리스천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핵심은, ‘의지를 가지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겁니다. 즉 경계심을 풀고 무기력하게 세상을 닮아가지 말라, 의지를 가지고 그 물결에 저항하라, 하는 뜻입니다. 네, 실제로 여기 ‘본받다’로 옮겨진 동사(수스헤마티조)는 어떤 훌륭한 모습을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기존의 형식이나 틀에 나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스키마’(schema)라는 말을 혹시 들어보셨을 텐데요, 정해진 틀이나 형식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주물(틀)에 쇳물을 넣고 찍어내면 결국 똑같은 모습의 제품이 계속 나오게 되는데요, 그렇게 일정한 틀에 따라 나오는 모습을 ‘본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기성품들처럼 되지 말라는 것, 이 세상이 나에게 강요하는 그 틀을 분별하고 거부하라는 말씀입니다. 죄는 우리를 획일적인 틀 안에 가두어 넣고 그 모습을 반복하게 만듭니다. 죄를 본받게 합니다. 최근에 묵상하는 QT 본문 열왕기하 말씀에서 계속 반복해서 등장하는 구절이 있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의 왕들을 소개할 때마다, 성경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갔다’고 기록합니다. 이 부분을 새번역 성경은 ‘그 죄를 본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여로보암을 통해 드러난 죄의 주물 틀에서 그대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죄를 범하며 살았다는 것이지요. 신기하게도 사람은 그걸 싫다고 하면서도 죄를 보고 배워 그대로 행하며 살아갑니다. 제가 요즘 수요 강해를 위해 출애굽기를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은,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일이, 애굽의 틀(스키마)을 벗겨내는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십계명에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거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들이 다 애굽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하나의 틀, 하나의 本이었습니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애굽에서 그들은 종으로서, 노예로서 늘 쉼 없이 일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출애굽을 했는데, 하나님이 충격적인 명령을 내리십니다. 안식일은 일하지 말고 온전히 쉬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쉬어도 먹을 수 있고, 쉬어도 살 수 있는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안식일에도 만나를 구하려 광야로 나가잖아요. 몸이 애굽에서 밴 습관의 틀을 본받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그 틀을 분별하고,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을 향한 합당한 예배가 시작된다고 가르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이 분별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놓인 세상의 틀을 분별하고 그 죄의 힘(본성)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것이 다름 아닌 구원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 속에서 뭔가 이색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초대교회와 성도들이 관심을 기울인 게 이 부분입니다. 당시 세상이 강요하는 삶의 방식을 분별하고 그 틀을 거부한 거예요. 예수님의 모습도 그러셨잖아요?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이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고 평하는데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뭔가 다른 존재였던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 방향으로 인도합니다. 성도와 교회는 세상 가운데, ‘어, 이 사람 뭐지, 이 사람들 뭐하는 거지, 왜 뭔가 다르지, 이 교회 뭐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세상이 강요하는 틀이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만약 이런 말들과 무관하다든가, 이 세대에 너무 잘 적응돼서 전혀 구별되지 않는 모습이라면, 혹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맛을 잃은 건 아닌가, 의심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와 성도가 제일 민감해야 할 단어가 ‘관행’인 것 같습니다. 다들 그렇게 하더라, 원래 이런 거다, 하는 말에 우리는 좀 더 민감해지고,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예컨대 이런 거겠지요. 돈과 상관없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 일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돈이 되는 일에는 반드시 사람이 모이고, 돈이 안 되면 관심도 시들해집니다. 물론 성도도 돈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돈이 되지 않아도, 아니 오히려 돈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거기에 거룩한 열심을 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열심을 품고 하는 것 중에 돈이 안 되는 일이 혹 있는가, 오히려 내 것을 내어주어야 하는 일인데도 열심히 하는 것이 있는가,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요 여러분,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해서, 그렇다고 이 세상을 등지고 세상 밖으로 나가서 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또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장 삶의 모습을 다 뒤엎으라는 게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의 삶을 살아내지만, 그러나 세상의 틀을 늘 거부하는 새 길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회개와 열매를 촉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때 사람들이 요한에게 질문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회개입니까,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하면 되는 겁니까?” 질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세리나 군인도 있었는데요, 두 직업 모두 로마의 편에서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사람들이지요. 여러분이 요한이라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당장 세리를 그만두고 군인도 그만두고 좀 더 거룩한 일을 하라고, 독립투사가 되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요한은 그리 말하지 않습니다. 세리에게는, 법으로 부과된 세금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에게는, 사람들을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그냥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고 살라고 합니다. 직업을 바꾸고, 그 자리를 떠나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삶을 유지하면서도 상식과 거룩함을 살아내라 합니다. 이 말을 한 세례요한 본인이 실은 그런 삶의 ‘본’(모범)이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이었던 아버지에 의해 어릴 때 소위 쿰란(에세네)이라는 사해 근처의 공동체에 입양되어 살면서 세상을 등지고 광야에서 살았지만 그는 어느 순간 다시 세속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선포하는 메시지 역시 광야로 가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도저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룰 수 없으니 어디 동굴이나 산속으로 가서 살자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는 것, 힘들지만 세상 가운데서 세상의 틀을 거부하며 살아가자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틀에서 벗어난 ‘기이함’이 꼭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기이함은 단지 기괴하다는 이상함이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고유함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세상을 등지는 기이함과는 구별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세상이 만들어준 그 ‘틀에 넣어 찍어낸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틀에서 벗어난다는 것의 핵심은, 결국 고유한 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는 겁니다. 찍어낸 상품 같은 존재가 아니라, 창조되고 구속된 존재로서, 그 모습의 고유함을 지키고 이루어가는 삶, 그것이 성도의 기이함이며, 그것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저항입니다. 여러분, 이번 달 암송구절 엡 2:10의 말씀을 한 번 더 함께 외워봅시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여러분 여기 앞쪽에 ‘그가 만드신 바’라는 부분에서 ‘만드신 바’라는 단어가 헬라어의 ‘포이에마’라는 명사입니다. 어느 출판사 이름이기도 한데, 많이 들어본 말이지요? 영어의 ‘poem’(詩)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왔습니다. 그래서 ‘만드신 바’는 ‘제품’, ‘상품’이 아닌 ‘작품’을 뜻합니다. 물론 포이에마도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지만 대량으로 생산해 낸 공산품이나 복제품이 아니라, 예술 작품처럼, 각각의 고유함을 가진, 대체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건, 결국 그 ‘만드신 바, 작품’으로서의 내 모습을 회복하고, 그 고유한 삶을 살아내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숙제이지요.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고유하고 유일하게 창조된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 말은 쉽지만 그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허락한 신앙의 길, 자유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의 틀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세상의 틀과 다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아, 내가 또 뭔가에 얽매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순종할수록 우리 자신이 더 존귀한 존재임을 느끼게 되고, 순종할수록 더 큰 자유함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세상을 다스리는 자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 3절을 잠깐 보면,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지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여러 은사들, 은혜의 선물들을 나열하는데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이라고 성경은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축복하신 모습 그대로, 그 믿음의 분량대로만 살아내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게 가장 아름답고 가장 존귀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를 창세전부터 택정하시고 계획하셔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기쁨도 거기 있습니다. 어느 예술가도 자신의 시가 공장의 상품처럼 취급받는 걸 원치는 않을 겁니다. 한 영혼이 어째서 천하보다 귀합니까? 천하가 덜 귀하다는 게 아니라, 한 영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 천하 만물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각자의 고유한 빛깔이 있습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아름다움과 영성의 빛깔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그것 아닐까요?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한 그 모습을 회복하는 것, 참 고준석으로, 진짜 고준석으로 살아가는 것, 거기에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이 있지 않을까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성형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도 이 세대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중요한 틀인데요 …, 상처나 장애와 같이,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저 강남에 넘쳐나는 성형외과의 성형이란, 결국 내 몸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되돌릴 수 없도록 영원히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자기 포기) 그리고 그건 단지 우리의 외모만을 바꾸는 게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나만의 형상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니까요. 비단 외모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이나 우리의 생각, 마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세상은 계속 우리에게 삶의 성형, 생각의 성형을 요구합니다. 돈이 많아야 잘 사는 거라고 가르치고(이게 도대체 무슨 궤변인지요), 쉼 없는 자기계발로 남을 이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기계발보다 자기 확인, 자기 이해가 먼저 아닐까요? 그러려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따라 고유한 아름다움으로 빚으셨다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의 온전한 모습을 확인하고 지켜가야 합니다. 그렇게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의 삶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거스르는 삶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그런 서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축복하는 것, 그것이 성도의 연합이고 교회일 것입니다. 제가 한 주 동안 말씀을 묵상을 하면서, ‘가장 저다운 게 뭘까’, ‘가장 고준석스러운 그 무언가, 고준석다운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게 뭘까?’를 참 많이 생각했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제일 잘 알거라고 생각했는데, 해보니 막상 쉽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저도 세상의 틀에 많이 익숙해지고 길들여졌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놓지 않고 계속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저는 제 존재가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세상이 원하는 대로,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며,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아졌습니다. 아울러 죄가 더 싫어지고 미워지는 것은 역시 큰 보너스였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을 생각해보니, 그 고유함이라는 것을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겠더라고요.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존귀하게 창조하셨는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결코 다른 누군가와 비교되거나 대체될 수 없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나 자신의 고유함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타인보다 더 무지한 것 같습니다. 내 안에 정말 아름답고 탁월한 모습이 있는데 정작 자신은 모르는 거지요. 반대로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자기만 주장하는 장점이나 탁월함도 있을 겁니다. 세상이 강요하고, 남과 비교하여 얻은 그런 모습 말이지요. 그래서 믿음의 관계가 중요하고, 그래서 우리의 신앙도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씀하시나 봅니다. 여러분 ‘트루먼 쇼’라는 영화, 혹시 보셨는지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세상이 24시간 생방송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한 남자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연출한 감독의 지도 아래, 엄청 큰 세트장을 지어놓고, 연출된 사람과 상황 속에서 주인공의 삶을 관찰하는 겁니다. 영화의 설정이긴 하지만 참 무서운 거예요. 요즘 우리나라 예능의 대세 중 하나가 그런 생활 관찰형 프로그램이잖아요? 어쨌든 주인공은 조금씩 자신의 삶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는데요, 결국 그가 자신의 세상이 실재가 아니라 모두 허구요 만들어진 세트장임을 발견해가는 것처럼, 그래서 그 세상의 틀 밖으로 과감히 걸어 나갔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틀을 깨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필요하다면 이 시대의 종교와 교회의 틀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결국은 유대교의 틀을 깨뜨리신 것이니까요. 저는 이러한 노력이 정말 중요한 신앙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다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이 세대의 교회들이 정해준 소위 ‘좋은 믿음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채, 신앙의 개성과 빛깔을 잃어버린 것을 보면 저도 깊은 책임과 유감을 느낍니다. 아닙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이고, 요한은 요한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빛깔과 사명대로 살면 족합니다. 그 모습 자체를 내가 사랑하고 인정할 때, 거기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 세상이 우리에게 붙여준 타이틀, 그들의 틀에 잘 적응했다고 붙여준 등수나 영광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다. 남들이 나를 부르는 그 무언가에 너무 연연하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다. 그냥 세상의 틀에 얼마나 잘 적응했는가 하는 평가일 뿐입니다. 목사라는 타이틀, 남들이 내게 부여한 가치, 지위, 뭐 그런 것들은 모두 다 진짜 내 모습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런 것들이 정말 나다운 모습이 무엇인지를 놓치게 할 때가 많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자기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방향을 본받아 사십시다. 어렵더라도 관행이 아닌 역행의 길을 걸어가십시다. 세상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러나 뭔가 색다르고 뭔가 기이한, 그런 성도의 삶을 사십시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과 내 삶을 남과 비교하지 말고, 힘껏 보듬고 사랑하며 사십시다. 아울러 그것을 위해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빚어가고 계심을 인정하는, 그런 중간태의 믿음을 가집시다. 말씀을 맺습니다. 19세기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 중에 ‘내가 쓸 수도 있었던 시’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의 삶은 내가 쓸 수도 있었던 시였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살 수도, 말할 수도 없었네.” 아마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하는 가장 큰 후회가 있다면, 그건 나 자신으로서, 나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 것이지 않을까요? ‘너는 왜 고준석으로 살지 못했니?’, ‘너는 왜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신 너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켜내고 자랑하지 못했니?’ 하는 탄식이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아쉬움이 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이 정해주는 틀에서 진짜 나를 지켜내십시다. 하나님의 포이에마로서, 한 편의 시처럼 사십시다.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영원 전부터 택정하신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임을 우리가 인정하고,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십시다. 부디 이 세대가 부여한 틀과 환상을 뚫고 저와 여러분 각자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진실에 닿을 수 있기를, 그래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는 삶을 회복할 수 있기를, 그리고 저와 여러분, 우리 공동체가 그 모습을 함께 인정하고 함께 빚어져가는 그런 생명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