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2018년 7월 29일 주일 설교

2018-07-29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3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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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9  오순절 열 번째 주일 메시지 ---------------------------------------------------------- 로마서 11:25~36,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romans49.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된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49) 본문 29절의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아름답게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을 오늘 본문을 통해 정리하면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작고 나약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택하셔서 온 인류를 축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택하셨고, 그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만드시고 이루셔서’, 그들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많은 영적 선물과 축복 곧 은사(God's gift, 29절)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토라를 주셨고, 그것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수많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눈에 보이는 놀라운 기적들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민족을 특별히 귀히 여기셨고, 필요한 은혜와 축복을 때마다 부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목적은 오롯이 세상을 축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 가운데 알려지시기를 계획하셨고, 당신의 아들도 그들의 얼굴과 피부색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느 한 순간 동시에 온 인류에게 나타나시고 하나님을 믿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먼저 택하심을 입었고, 세상의 복이 되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앙적 성공과 실패, 그들의 역사적 승리와 패배, 그들의 은총과 고난을 통해서 세상을 축복하셨습니다. 물론 지금도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통해서만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시고, 구원을 베푸시고, 복을 이어받게 하십니다(벧전 3:9).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명’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알리고 드러내고 영원한 생명과 복을 베푸는 일이 이 시대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아브라함들) 가운데 사명으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특별한 은혜와 선물을 공급하십니다. 신령한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시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때마다 말씀하시고 위로하십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는 이유, 로마의 성도들을 보고자 했던 이유도 그러한 영적인 축복들을 나눠줌으로써 그들을 견고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말씀을 로마서 1장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관되게 세상을 축복하십니다. 먼저 당신의 택한 자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을 통해 복을 이어 받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시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것이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는지, 우리는 그 답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33절 말씀처럼,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영역이고, 알고자 하여도 그 길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복음의 역사를 통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이 얼마나 분명하며 확실한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9장부터 11장에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명확한 의지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택하신 이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주신 사명을 기어이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고집과 인내를 봤습니다. 당연히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은 같은 모습으로 인도하십니다.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진 저와 여러분 돌감람나무 역시 본래 참감람나무에게 공급되는 모든 축복을 함께 누리고 있고, 더불어 그 참감람나무에 기대되던 모든 열매 또한 우리를 통해 보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택하고 부르셔서 우리에게 은혜와 능력을 주신 것은 오롯이 우리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복’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 최초의 이스라엘이었던 야곱, 그가 이집트의 파라오를 만나 축복하는 장면이 창세기의 클라이맥스라고 수요 강해 시간에 말씀을 드렸는데요, 험악한 세월을 살아내고 한쪽 다리까지 절뚝거리는 노년의 야곱이, 세상의 패권과 모든 부를 가진 이집트의 파라오를 ‘감히’ 축복하였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딸들이 물질과 권력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을 하나님의 복으로 당당히 축복하기를 소망하시고, 그 길을 향해 우리의 삶을 지금도 여전히 인도하고 계심을 여러분 믿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 복이 형통하고 평안한 삶으로 이루어지고 베풀어지는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복을 많이 받아서 세상의 복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복이라는 걸 믿고 그 복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우리를 복이 되게 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험악한 세월’은 불가피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너나 복을 받아라. 남에게는 복이 되면서 정작 너는 박복하구나.” (험악한 세월의 길은 두 갈래입니다. 요셉의 길, 야곱의 길. 13년과 130년의 여정) 어쨌든 보통의 야곱들, 보통의 이스라엘들이 걸어가는 길은 험악한 세월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탄식하며 바라볼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들으신 말씀이 그런 겁니다.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0~43) 이때 예수님이 잠깐이라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가, 그들의 뺨을 한 대 후려치시고 다시 십자가로 올라가셨다면 …, 그랬다면 얼마나 통쾌하고 시원했을까 …, 싶지만 주님은 그렇게는 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복이 되는 길은 그런 통쾌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우리 삶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남들은 복을 받게 하고, 또 남들을 부요하게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은 가난하고 깨어진 채 살아가는 험악한 삶일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너무 기이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어쨌거나 저와 여러분이 세상의 복이 될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가장 크고 중요한 약속입니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지 명령이 아닙니다. 이 둘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처음 아브라함더러 그렇게 살아라, 세상이 복이 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게 아닙니다. 복이 되게 하는 주체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복이 될지라.” 복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복이 되어라.”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스스로 복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복이 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복이 되게 하심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은 복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복이 되게 하신다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미 복이라는 그의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좇아 그 복의 길을 하루하루 걸어가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세상의 복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여러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될 것을 믿으십니까? 만약 지금 그런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다시 믿음의 맨 처음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결과이지 다른 게 아닙니다.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셨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건 이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걸 믿으신다면 여러분 자신이 복이라는 것을 믿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내가 어떤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있느냐에 대한 확신이지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내가 ‘복다워 보여서’ 복인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를 짓고 살고, 여전히 믿음은 부족하며, 여전히 나밖에 모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어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만 세상을 복 되게 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인간적인 자신감, 나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자랑과 신뢰가 무너지기를 기다리시며, 우리가 불순종하는 순간을 인내하십니다. 32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십니다.” 인간이 주장하는 모든 자기 의로움과 자기 자랑을 소멸시키시기 위해서 주님은 불순종의 자리에 우리를 가두어두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짓도록 만드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실체를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불순종의 경계에 가두신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바닷물이 해변을 넘어가지 못하고 해변을 적시고 다시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경계선까지 우리를 허락하시며 동시에 가두셔서 우리의 실체가 드러나게 하십니다. 복이 되는 일이 내 힘으로가 하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되는 것임을 기어이 가르쳐 보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스스로 인정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나에게는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다고 인정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지 우리의 결단이나 노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만을 신뢰하고, 그 믿음을 통해 세상의 복이 되는 길을 지금 저와 여러분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복이 될 수 있다는 마음, 내가 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온전하다는 마음이 인정되고 부인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험악한 세월은 그래서 시작되고, 그래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가장 험악한 세월을 살아낸 민족 중 하나일 것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것처럼,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래서 그들의 신실함을 통해 세상의 복이 되는 길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실패를 더 큰 은총의 기회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계획들이 로마서 9장부터 11장의 내용이었습니다. 그 설명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대들보가 바로 오늘 본문 29절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어 은혜로운 선물을 허락하시고 세상의 복이 되게 하시는 그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심이 없다고 하십니다. ‘후회 안 할 거야, 내가 하나님인데, 나는 후회하면 안 돼!!’ 이게 아니라, 이런 결심이 아니라, 후회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언입니다. 물론 이 짧은 말씀의 뒤로 엄청난 크기의 배경화면이 하나 그려져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단언합니까? 후회할만하다고 여겨지는 조건이 충분히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저들을 택하고 저들을 복으로 세웠을까? 내가 왜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인내하여 여기까지 왔을까? 내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그들을 사랑했을까? 내가 왜 아무개를 내 제자로 삼았을까? 내가 왜 고준석을 목사로 세워 나의 일을 맡겼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그렇게 후회하고 탄식할만한 충분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 생각할 수 있는 우리의 삶이기에, 하나님은 단언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하나님이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두 가지 실제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이 취소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후회하심이 없다’는 표현, ‘아메타멜리토스’( ← 메타멜러마이, 후회하다, 뉘우치다)를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취소되지 않는’(취소불가능의, 변경불가능의, 되돌릴 수 없는)이라는 뜻의 ‘irrevocable’로 옮겼습니다. 민수기 23:19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또한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깊이 사랑하고 인정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어떤 결정에 대한 후회 속에서도 그것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 ‘내가 저 사람과 왜 결혼을 해서 …’ 그렇게 후회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며 삽니다. 하지만 후회하면서 사랑하고 함께 하는 것과 후회 없이 사랑하고 함께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후회 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축복하시되 후회 없이 그리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후회에 갇혀 어색하고 민망하게 살게 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서 모든 죄를 소멸시켜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으로 우리를 채우십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후회 없이 사랑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주님은 우리를 죄 많은 종으로 대우하실 생각이 없습니다. 탕자는 아들이지 종이 아닙니다. 후회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가 속히 하나님의 자녀들답게, 세상의 복답게 당당함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언제 돌이키고 회복하여, 언제 결심하며 복으로 살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의 후회 없는 사랑을 누리는 것, 그건 내 모습이 부끄러워 더 부끄러운 짓 하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망가진 인생, 될 대로 돼라.’ 하는 자포자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주님은 후회 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향한 우리의 태도 역시 후회 없는 새로움이어야 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후회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후회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후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후회거리 모두를 합력케 하여 선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을 하나님은 기어이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롬 8:28~30) 네비게이션에 의지해서 운전을 하다 보면, 그런 일이 왕왕 있습니다. 가르쳐주는 길로 제대로 가지 못해 예정된 길에서 벗어났을 때, 네비게이션은 다시 거기서 최적의 길을 찾아주지요. 보통은 그렇게 되면 원래 도착 예정 시간에서 다만 몇 분이라도 늦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 차이가 거의 없거나 오히려 더 빠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만으로, 우리의 잘한 일들만으로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 가신다는 생각을, 성도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한 것만을 가지고 선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세상의 인과율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의 실패와 죄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선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성공으로 해야 할 일들을 이루어내셨습니다. 기어이 이스라엘이 복이 되는 길을 찾나내시고, 이루어내십니다. 문제는 지금 여기서 내가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로 선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내 믿음과 내 신실함과 내 온전함으로 세상의 복이 되려는 그 마음도 한편으로는 큰 교만입니다. 결국 우리는, 어떻게든 내가 충분히 복이 될 만한 존재였음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아니요, 성경의 증언은 다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존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두신다는 표현을 하는 겁니다. 내 힘이나 내 의로움, 내 인격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가 복이 됩니다. 우리의 후회 속에 우리의 또 다른 교만이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고민들, 거기에 더하여 그것들에 담긴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의미들을 우리가 다 이해하고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33절 말씀처럼, 우리는 다만 ‘깊도다!’ 탄식할 따름입니다. 우리에게 확실한 것들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가 딛고 설 수 있는 근거,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복으로 부르셨고, 후회함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그 길로 계속 인도해 가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계속 전진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조금 더 온전한 모습으로 날마다 빚어가고 계십니다. 그 일하심에 열심히 반응하십시오. 바로 오늘까지의 삶이 어떠하였든, 바로 지금 하나님의 복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 그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임을 믿습니다. 우리 자신이 세상의 복으로 살고 있음을 늘 기억하며 소망 가운데 겸손히 주님의 사랑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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