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율법의 마침' 2018년 6월 10일 주일 설교

2018-06-1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3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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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0  오순절 후 세 번째 주일 메시지 -------------------------------------------------------- 로마서 10장 1~4절,  율법의 마침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romans42.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된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42) 본문 4절의 ‘율법의 마침’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우선 이 자리를 통해 저희가 함께 꼭 좀 축하해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요, 이번 학기 혜영 자매의 대학 영어 강의가 드디어 종강을 했습니다. 영어로 강의를 듣는 것도 대단한 건데, 처음으로 한 학기 동안 많은 외국 학생들을 상대로 영어로 하는 강의에 도전하고, 결국 마무리를 해낸,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진심을 담아 다시 한 번 격려와 축하의 박수를 보냅시다. 저도 영어를 잘 못합니다만,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어려움 중 하나가 바로 영어 스트레스지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해외 연수에 이르기까지, 공부한 시간과 사용한 자원에 비하면 우리의 영어 실력은 거의 재앙에 가깝습니다. 여러분도 공감이 되시지요? 요즘 제 아내도 일주일에 두 번, 회사 일이 다 끝난 저녁 시간에, 회사에 남아 영어 회화 수업을 따로 또 듣고 퇴근하고 있는데요, 체력도 체력입니다만, 그 스트레스로 인해 보통 어려워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그렇게 해도 잘 늘지 않는다고 매번 속상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영어를 잘 못하는 민족이었던 건 아니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영어 교육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 제가 본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조선 말 우리나라 사람들의 영어 구사 능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영어 선생님들은 주로 선교사나 외국인들이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하는 수업 방식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서, 철저하게 말하기 중심이었던 거지요. 그래서 조선 사람들의 영어 수준은 동아시아에서도 이미 정평이 났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에 왔던 일본인들이 조선의 영어 실력을 인정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조선이 아시아에서 가장 외국어를 잘 하는 민족이다.”라고요.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영어 교육이 점차 일본식의 영어 교육으로, 즉 문법을 강조하고, 필기시험을 보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다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 아닌 문법에 얽매게 되고, 점점 더 영어를 두려워하게 된 겁니다. 제가 대학 1학년 겨울 방학 때 영국 캠브리지로 어학연수를 갔습니다. 당시 저의 영어 class에는 남미, 유럽 등지에서 온 다양한 학생들이 있었는데요, 아시아 출신 학생으로는 제가 유일했습니다. 재미도 있었고, 나름 성과도 있었지만, 거기서도 여전히 영어 수업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희 반 담임선생님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Daniel이라는 이름의 백인이었는데요, 그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제게 별명을 하나 붙여 줬습니다. 그 별명이라는 게, ‘Grammar King’이었습니다. ‘문법 왕’이지요. 어쨌거나 ‘King’이 붙었으니, 저는 당시 그게 별로 기분 나쁜 별명인 줄도 몰랐는데요, 금방 소문이 퍼져서 학교 대부분의 학생들이 저를 그렇게 부르곤 했습니다. 하지만 연수가 다 끝날 무렵에는 저도 알게 됐지요. 그것이 얼마나 저를 비하하는 별명이었는가, 하는 걸 말입니다. 말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정작 문법에 대해서는, 자신들도 잘 가르치지 않는 내용까지 알고 있다는, 그런 비아냥거림이 들어 있는 별명이었던 겁니다. 언어에 있어서 문법은 중요합니다. 말을 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지요. 저의 설교를 지금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 건 제가 문법을 지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법을 모르거나 무시한다면 상대와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법을 안다고 제대로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Grammar King이어도 소용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법이 말보다 더 중요한 게 될 수는 없습니다. 말을 하기 위해 문법을 배우는 것이지, 문법을 공부하기 위해 말을 배우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이 삶을 위한 수단이듯, 문법은 말을 위한 수단인 겁니다. 그래서 문법을 배우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역설적으로 말을 먼저 배우는 겁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언어를 배우는 방식이지요. 엄마, 아빠를 따라 처음엔 단어부터, 그리고 곧이어 짧은 문장에서 긴 문장으로, 계속 말을 배우고 반복하여 연습하다 보면, 문법은 자연스럽게 몸에 익숙해져, ‘체화’됩니다. 말 그대로 몸에 새겨지는 거지요. 당연히 처음엔 문법에 서툴고, 많이 틀리기도 하겠지만, 사실 조금 틀려도 괜찮습니다. 말이 늘고, 계속 대화를 하다 보면 결국 잘못된 문법은 자연스럽게 고쳐지게 되니까요. 그런데 이런 순서가 바뀌면, 즉 문법을 먼저 배우고 말을 배우게 되면, 이상하게 말이 더뎌집니다. 문법이 자연스럽게 체화되지 않고 말을 자꾸 방해하는 거지요. 몸이 문법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머리가 문법을 기억하면서, 문법에 대한 지식이 오히려 말을 방해합니다. 그 방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수치심이라는 큰 장벽을 또 하나 넘어가야 합니다. ‘너 지금 법을 어겼다고 …,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우리 안에서 자체 검열이 시작됩니다. 가뜩이나 말도 어려운데 수치심의 장벽까지 있으니 그만큼 말을 배우기가 더 어려워지는 거지요. 더 무서운 건 일단 이 순서, 즉 문법에서 말로 배우기 시작하면, 중간에 그 방향을 바꾸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말과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체화되지 못하고 머리로 이해된 법은, 결국 두고두고 우리의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다루는 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믿음의 문제’를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게 되어버린 인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단절되어 하나님나라의 이방인이 된 우리, 그래서 하나님나라의 언어를 잃어버린 우리 인간에게 주신 일종의 문법책입니다. 그걸 토대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도록 주신, 일종의 기본 언어 교재인 셈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 이전에 먼저 말을 걸어오시고,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을 통해 드러난 믿음의 의라는 것이지요. 믿음은 율법 이전에 시작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문법 이전에 시작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입니다. 그런데 일단 율법에 얽매면 정작 하나님과의 소통에서는 더 서툴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야말로 하나님나라 문법의 도사입니다. ‘Grammar King’이지요.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정작 하나님과 대화하는 실력, 하나님과 교제하는 실력은 점점 약해집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율법을 자연스럽게 체화하지 못하고, 율법을 통해서 말을 배우고 문화를 배우려 하다 보니, 도무지 자신 있게 말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열심’이 문법 실력을 더 강조하는 거죠. 원래 없던 문법까지 더 세부적으로 만들어 강조하는 겁니다. 말은 점점 줄어들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은 언어 ‘선생’을 자처하지요. 남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고, 율법을 가르칩니다. 예전에는 중고등학교 영어 선생님들이 영어 회화를 잘 못하시던 때가 있었는데요, 학교나 시험이 요구하는 내용에 회화가 거의 없었으니 선생님들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딱 그렇게 됐습니다. 말은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그 말을 가르치는, 실제로는 말이 아닌 그 말의 법을 가르치는, 하나님나라 언어 선생 노릇을 자처한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엄한 선생이었습니다. 문법에 조금만 틀려도 아예 입을 막아버려 말을 배울 기회조차 없애버립니다. 본인도 정작 말을 잘 못하지만, 충분히 그런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언어를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영어야 원어민이라는 게 있지만, 하나님나라는 그런 게 없으니까요. 어차피 다 모르는 상황에서, 문법만 잘 알고 지키는 것도 충분히 자랑이 되고, 의로움이 되는 거지요. 그러나 문법은 결국 ‘관계’를 빼앗아 가고, 자유를 빼앗아 갑니다. 소통은 더뎌지고 행동은 부자연스럽습니다. 말 한 마디 못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고, 혹시나 하나님 앞에 죄가 될까, 늘 두려워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법을 지키면서도 법에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자유는 체화된 법에서 오는 건데,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체화된 게 아니거든요. 율법은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아닙니다. 율법을 어겨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건 일단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제하며, 그 과정에서 법을 배우고 이루어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이 ‘율법이라는 문법의 마침’이십니다. 율법을 완성하고 더 이상 거기에 얽매지 않도록, 그 율법의 쓰임을 본래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수단으로 바꾸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실 수 있는 건, 그가 하나님나라의 말을 하고, 그 언어의 뜻과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그 문자를 직접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오셔서 법에서 자유하나 법을 이루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언어로 대화를 시작하시고, 입을 열어 말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문법은 잠시 잊자고, 일단 나를 따라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고, 사랑하는 걸 먼저 배우자고 하시며, 그 방법으로 율법을 자연스럽게 완성하시는, 그 길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몸과 마음과 생각으로 이 땅의 삶을 직접 살며 그 나라의 말을 가르치셨습니다. 마치 외국에 나가 영어를 가르치는 원어민 선생님처럼, 주님은 그렇게 삶 속에서 말을 깨우치게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필요를 다 이룰 수 없어 주님은 성령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지요. 성령 하나님은 그러니까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나라 원어민 선생님입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 부르기만 하면 우리를 친히 부요케 하십니다(12절).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의 잘못된 발음을 하나하나 교정해 주시고, 더 고급스럽고 더 의미 있는 말을 할 수 있도록, 매순간 우리의 느낌과 표현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 지난 시간에도 잠시 말씀드린 대로 본문 4절의 ‘율법의 마침’이라는 구절에서 ‘마침’이라는 단어 ‘텔로스’는 단순히 ‘끝’(end)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 모든 과정을 온전히 마치고 동시에 그 목적을 다 이루고 완성한 ‘끝’을 일컬어 ‘텔로스’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율법의 마침’이라는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이 저는 개인적으로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어떤 경주(race)에서 중간에 기권하고 레이스를 끝냈을 때, 그때는 ‘텔로스’가 아닙니다. 그 경주의 결승선까지 모든 과정을 다 마쳤을 때, 그때의 끝이 바로 ‘텔로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율법을 폐하신 게 아닙니다. 율법의 목적지까지 완주하면서도 율법이 더 이상 목적이 되지 않도록, 율법을 갈무리하신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곧바로 연이어 나오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말은 못하고 문법만 아는 문법박사인 바리새인들보다 의롭게, 즉 Grammar King보다 말을 유창하게 해내면서 그 문법도 온전하게 지켜내야 하는 숙제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모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문법보다 말부터 배워 하나님나라를 알게 된 존재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토라의 율법을 모른 채 예수님부터 먼저 알게 되고 믿게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존재들이지요. 우리 안에 임재하신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나,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 대로, 하나님나라의 옹알이를 시작하며 말을 배우게 된 존재들이 바로 이 땅의 교회와 성도인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이스라엘도 회복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들을 버리신 게 아니라, 이방인들을 통해, 즉 하나님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면서 그렇게 율법을 지켜내는 이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시샘하고 질투하며, 그들 또한 예수와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도록, 하나님은 바울 같은 이방인의 사도들을 부르시고, 열방에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나라의 말과 법을 더 온전하게 지켜내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조금 더 빨리 말을 배우고 익힐 수 있겠습니까? 네, 주님과 더 많이 말하는 것입니다. 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과 더 많이 말하고, 또 그 말을 누군가에게 전하여 함께 말하는 것이지요. 그 출발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이제 성도의 관건은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성도의 모든 실력이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비롯됩니다.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을 사모하고 의지하는 것, 거기에 우리의 영적 실력이 오롯이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기억하시지요?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우리가 이미 말을 잘 하는 어른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문법을 잘 알고 있다는 마음도 내려놓고, 말 그대로 처음 언어를 배우는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끊임없이 주님을 사모하며 주님께 말을 거는 것입니다. 말을 배우는 아이들이 부모를 귀찮게 하는 거 아시지요? 바로 그런 방법입니다.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교제하며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바른 ‘열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셨으니, 더는 우리에게 ‘열심’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열심’이 필요 없는 게 아니라, 다른 방향의, 바른 ‘열심’이 필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제 막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막 옹알이를 시작한 어린아이에 불과함을 잊으면 안 됩니다. 열심히 말을 따라 하고, 열심히 엄마, 아빠를 부르고 흉내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도 못하고, 문법도 모르는, 반벙어리 같은 이상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맙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건 그런 의미입니다. 단번에 배우는 언어란 없고, 또 아무리 외국어가 능숙한 사람도 사용하지 않고 그냥 한국말만 쓰고 살면 금방 그 언어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날마다 쉬지 말고,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뜻 앞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언어는 고정되어 있나요, 시대에 따라 변해가나요? 네, 변합니다. 사용하지 않는 말들은 점점 古語가 되고 死語가 되어 사라집니다. 반면에 새로운 언어, 신조어도 계속 생겨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면 달라지는 믿음의 길, 믿음의 생활들이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수천 년 전의 문법대로 말을 하면 아예 못 알아듣는 일도 생깁니다. 성도는 그래서 늘 부지런히 고민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오늘날 또 어떤 단어, 어떤 표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가, 늘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말만 잘 한다고 그 언어를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인 건 아닙니다. 우리말 못하는 한국 사람은 없지만, 국어를 잘 하는, 좋은 국어를 쓰는 사람은 적고, 그것으로 문학적인 글을 쓰는 사람은 훨씬 더 적습니다. 말은 유창한데 그 말이 뭔가 모르게 저속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을 배웠으면, 그 다음은 그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의 품격이 나타나야 합니다. 자유롭지만 저속하지 않고, 격을 지키지만 또한 한없이 열려 있는, 아름다운 시구(詩句)처럼 성도의 삶이 그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언어로 말하고 글을 쓰는, 하나님나라 시인이 되십시오. 그저 평생 옹알이만 하는 어른처럼 살지 말고, 말과 글을 배우며, 거기서 진리의 탄식이 맺혀 나오는 하나님나라의 시인이 되십시오. 우리는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그저 예수를 알고 믿어 구원을 얻었으니 다 된 것처럼, 말을 멈추고 붓을 꺾고, 다시 주님 나라의 이방인처럼 살아가지 말고, 보다 온전한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그래서 누구나 그 언어를 한 번 배워보고 싶게 만드는 그런 삶을 살아내십시오. 주님은 우리더러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되라는 게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됐으니, 그 맛을 내고, 그 빛을 비추라고 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당신의 ‘열심’으로 그것을 완성하실 것을 확신하면서, 서툴고 부족해도, 열심히 맛을 내고, 빛을 비추며, 그렇게 아름다운 시구 같은 삶을 살겠노라, 다시 한 번 선택하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주님을 의지하고 동행하심으로, 저와 여러분의 삶이 세상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복 된 삶 되기를 바랍니다. 시인의 언어처럼, 자유하나 법을 지켜내고, 수수하고 간결하나, 그 깊이와 그 아름다움 앞에서 누구나 한 번쯤 자신도 시인이 되어 보기를 꿈꾸게 하는, 그런 아름답고 고상한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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