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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 2018년 5월 27일 주일 설교

2018-05-27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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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7  오순절 후 첫 번째 주일 메시지 -------------------------------------------------------- 로마서 10장 1~4절,  하나님의 의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roman40.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된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40) 본문 3절의 ‘하나님의 의’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스라엘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서론적인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지만, 그 열심은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고 했고, 그 올바른 지식이란, 3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도 간단하게나마 설명을 드렸는데요 …, 이스라엘이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성품으로서의 의로움, 곧 하나님이 거룩하시며, 정의로우시며, 또한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뜻에서의 의로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의’는 어떤 부분이라고 했었지요? 네, 의롭지 못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의로울 수 없는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열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것이 또 다른 중요한 ‘하나님의 의’라고 했고, 바로 그런 의미의 ‘하나님의 의’를 이스라엘이 놓쳤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부분은, ‘하나님의 의’ 가운데서도 ‘義’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인데요, 사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만이 아니라, ‘의’ 그 자체를 모르는 것임을 먼저 좀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의’는 단지 죄가 없는 상태나 죄를 용서받은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아무 죄도 범하지 않은 그런 거룩한 상태에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의롭게 하시기 위해, 심지어 종의 모습으로까지 낮아져 섬기는 모든 열심과 수고와 인내와 희생까지 포함된 의로움으로, 죄 없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적극적이고 관계적인 의로움인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는, 소위 이신칭의(以信稱義) 역시, 단지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고 그래서 죄가 없다, 하는 의미에만 머무르는 게 결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또 죄로부터 자유한 상태, 여러분 이건 의로움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앞서 ‘하나님의 의’가 보여주는 대로, 죄 없는 중립지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정반대편으로 가는 겁니다. 타인을 용서하고, 더 낮은 자를 섬기고, 얽매인 것들을 풀어주고,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그렇게 누군가의 자유를 위해 내 자유를 포기하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의’이고, 하나님의 의를 통해 드러난 ‘의’의 실체인 것입니다. 전통적인 이스라엘 백성이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큰 오해가 바로 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율법이나 또 성도의 양심에 따른 계명을 어기지 않는 것, 어겼더라도 제사나 회개를 통해 죄를 용서받는 그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죄에서 자유한 것만이 아니라,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성도에겐 중요한 부분입니다. 죄 없는 깨끗한 백지 상태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위에 의로움이라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물론 시커멓게 칠해진 죄를 결코 내버려둘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구원은 죄에서 진정으로 자유하게 되어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 시작할 때 우리가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데요, 그때 주로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리게 되나요? 시간이 별로 길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보통은 내가 지난 한 주 무슨 죄를 지었나, 무슨 악한 마음을 품었었나 생각하고 또 고백하게 되지요. 그런데 우리의 회개가 늘 거기에만 머무르면 안 되는 거지요. 죄에만 골몰하면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4:17의 말씀처럼, 성경은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가 또 무슨 죄를 지었나?’ 하는 답답한 질문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의인으로서, 과연 나는 어떤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았는가?’하는 용기 있는 질문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율법에 저촉되지 않는 상태, 어떤 죄를 범하지 않는 상태가 의로움이 아닙니다. 본래 구약의 율법 자체도 그런 상태에 우리를 머물게 하는 규정이 아닙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착각이 거기서 시작됩니다. 율법의 목적이 결국 사랑이기 때문에, 토라에 기록된 3백 몇 가지의 그 계명이 율법의 전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규정들일 뿐입니다. 온전한 의로움은 절대로 자기중심적이지 않습니다. 내가 의로워지기 위해 자기 안에 고립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죄 없는 중립지대로 도망가지 않습니다. 내가 의로워져야 되기 때문에 타인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는 나를 생각합니다. 내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타인을 위해 선한 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을지 몰라 두려워하며 율법의 조목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주눅 들어 있거나 움츠러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 본을 보이셨지요. 사랑하기 위해 율법의 계명을 넘어갑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아야 하니 방구석에 틀어박혀 옴짝달싹 못하지 않습니다. 율법이 지향하는 바(율법의 텔로스, 율법의 마침, 4절,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곳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이란 그런 것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 그런 기사를 보셨을 겁니다. 고속도로에서 어떤 차량이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은 채 멈추지 않고 빗길을 위험하게 계속 달리고 있는 걸 보고, 뒤따라가던 어떤 운전자가 자신의 차량으로 앞질러 가서 일부러 사고를 내고 가까스로 그 차를 멈추게 했습니다. 확인해보니 앞서가던 차의 운전자가 지병으로 의식을 잃었는데, 차가 계속 달리고 있었던 거였지요. 하마터면 정말 큰 사고가 날 뻔 했는데, 참 귀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분명 고의로 교통사고를 냈으니 법을 어겼고 그럴 경우 형사입건 되는 것이 현행법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의 행동을 의로웠다고 말합니다. 벌이 아닌 상과 영광을 주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서 그 영광을 누리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가 율법에 저촉한다는 이스라엘의 해석에 의해 끝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불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워진 성도들이 담대하게 의를 행할 수 있는 이유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함께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 9절부터 11절까지 함께 읽습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아멘. 본문은 믿고 시인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인데요, 예수를 주로 시인해야 하고, 또한 뭔가를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곧 예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왜 부활을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까? 의인이 그 의로운 행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저주를 받아 죽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반드시 살리시고, 11절 말씀처럼, 결단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며, 그것을 참으로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성경이 말씀하는 ‘의로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땅을 하나님이 공의로 다스리시며, 정의로 심판하시며, 의인을 영광 가운데 다시 살리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이자 선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우리가 죽어도 살아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를 주로 인정하는 우리가 예수의 그 길을 뒤따라 걸어갈 때,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의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자기 안에 고립되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기 위해 담대하게 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선을 행하는 데 담대한 자입니다. 잠언 28:1의 말씀처럼,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합니다. 저를 따라해 보십시오.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한 번 더,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물론 사자라고 늘 담대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동물의 왕국’ 같은 TV 프로를 참 좋아하는데, 거기 보니까 체면 구기는 사자들도 참 많습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사자와 같은 의인의 담대함으로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으로 거듭나게 하셨고, 의의 종으로 우리를 부르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아마 우리 교단이 지금 한 대형교회의 세습 문제로 인해 작년부터 계속 혼란스럽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던 작년에 그와 같은 일이 벌어져서, 다시 한 번 교회가 언론을 통해 세상 앞에서 큰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결정을 저지하기 위한 많은 양심 있는 분들의 의로운 노력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교회를 세습하는 (아들) 목사의 청빙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당시 서울 동남노회의 부노회장도 계셨는데요, 결국 그 일로 인해 차기 노회장으로 정해졌던 그분은 출교, 파문을 당했고, 새로운 노회장을 선출했습니다. 다행히 예장 통합 교단의 재판국에서 이 문제에 개입을 했고, 세습에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이러한 노회의 결정이 부당하다고, 노회장 선거 무효 판결을 내린 겁니다. 그러나 서울 동남노회는 이러한 판결에 불복하고, 결국 이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지난 4월 23일 이 문제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는데요, 서울중앙지법은 결국 총회 재판국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그러나 세습을 한 아들 목사의 청빙안에 관한 소송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둘러싸고 지난해 10월, 해당 노회의 노회원 14명이 노회를 정상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대위를 조직했는데요, 노회는 이들을 불법 단체로 규정했고, 비대위에 속한 목사들을 역시 출교와 견책 등으로 징계했습니다. 노회 분쟁을 심화하고 서울동남노회를 비난하여 교계에 부정적 이미지를 퍼뜨려 전도를 방해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도대체 누가 전도를 방해한 건지 …). 이렇게 출교당한 네 분의 목사님 중에 제 동기 여성 목사님이 계신데요, 그분의 SNS에 올라온 글의 내용을 잠시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예장통합교단 서울동남노회에서 총회 헌법을 위반한 청빙 청원안을 두고, 적법한 절차를 따라 교단 법을 지키려던 김수원 당시 부노회장의 노회장 승계를 막고 노회규칙도 무시하며, 힘의 논리로 불법적 불신임투표를 밀어붙일 때...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도저히 잠잠할 수 없었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여성이고, 목사 안수 받은 지도 몇 년 채 안 되고, 작은 미조직 교회를 섬기는 부목사지만...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예는 예다, 아니오는 아니오다 하라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불법적 행태에 대하여 불법적이라고 외친 것이, 비정상적으로 파행되어 한 교회의 뜻에 따라 이리저리 맥없이 휘둘리는.. 사랑하는 서울동남노회를 지켜보며 아파하며 ‘서울동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활동을 한 것이... ‘불법단체 조직 및 불법행위’라는 죄목에.. 견책과 출교 판결로 돌아왔네요.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서울동남노회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이 모든 불의한 일들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며 기도하시고, 목소리를 내시고.. 함께 하시는 많은 목사님들, 장로님들이 계십니다. 맘몬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동체로 광야에 당당히 서 있는 많은 작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비대위 활동을 하며 보이는게 전부가 아님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비록 노회 구조적 문제(노회 총대 구성 등이 소수의 대형교회에 좌우되기 쉬운 구조)로 이 분들의 목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지만..! 주님은 다 보시고 알고 계시고... 오늘도 일하십니다. 총회재판국에 정식으로 상고할 것이니 너무 염려 마시고! 기도로 함께 해 주세요.” 주님은 다 보시고, 알고 계시고, 오늘도 일하고 계시다는 말씀, 그리고 오히려 염려하는 주위 사람들을 위로하는, 정말 사자 같은 의인의 담대함에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듯, 살아계신 하나님의 의를 믿고 의지하며 묵묵히 의의 길을 걸어가는 그 삶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담대한 사자를 보는 듯 아름답고 경외스럽기까지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은 죄 없는 자가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의인이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아멘이십니까? 또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아멘이십니까, 여러분? 주님은 죄를 짓지 않아야 천국에 간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의로워야 합니다. 율법을 가장 잘 알고, 그 율법에 저촉되지 않는 길을 가장 잘 아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의로워야 합니다. 즉 어떻게 하면 율법을 어기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그런 의로움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없는 의로움, 어떻게 하면 선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그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여러분 주목하십시오. 고속도로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내 차를 포기하거나 거대한 권력이 만든 불의 앞에서 자기의 삶을 내던지는, 그런 대단한 의로움이 꼭 아니어도 됩니다.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6:8)이면 됩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열심은 그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한 열심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의 의를 알고, 그 하나님의 의에 복종할 수 있는 의로움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열심’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러면 나는 천국 못 가겠구나.’ ‘나는 틀렸구나.’ ‘나는 죽어도 그렇게 못해.’ ‘아, 내가 어떻게 그런 의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탄식이 나온다면, 그는 구원의 입구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얻는 첫 번째 단계가, 우리 자신의 의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칼뱅). 우리가 가진 의로움으로 그렇게 살아지는 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죄의 종을 의의 종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임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이사야 37:32) 우리의 ‘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일,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그 일을 행하며, 한 발 한 발 주님의 인도하심에 반응하면 됩니다.  오늘 예배 시작 때 기원의 말씀으로 시편 37편을 읽었는데요, 다시 읽어드립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내 성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을 우리의 먹을거리로 삼으라 하십니다. 우리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고,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우리의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우리의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를 의지할 때, 그에게 맡기고 선을 행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의가 정오의 빛처럼 밝게 드러나게 하실 것임을 믿으십시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구약의 엘리야라는 선지자를 잘 아시지요?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로,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아하시야 시대에(B.C. 876-852년경) 당시 만연한 우상 숭배를 타파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신약의 세례 요한의 예표적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엘리야 하면 생각나는 것이 갈멜 산 위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850명)과 대결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낸 사건(왕상 18장)이지요. 극심한 가뭄 속에서 어떤 신이 비를 내리게 할 것인가를 두고 각자가 믿는 신에게 기도하여 정말 비가 내리는 것으로 승부를 내는 그런 대결이었습니다. 자그마치 1:850의 대결이었고,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써 승리하고, 우상을 섬기는 모든 선지자들을 기손이라는 시냇가에서 모두 죽입니다. 정말 엄청난 승리였지요. 그러나 그렇게 승리했지만 실상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게 없었습니다. 오히려 여왕 이세벨이 엘리야를 협박하지요.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천벌을 받을 것이다.” 너무나 두려워진 엘리야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갑니다. 얼마나 열심히 도망갔냐면, 북이스라엘에서 남유다 끝까지 도망갑니다. 남유다 끝이 어디지요? 네, 창세기 강해에서 묵상한 대로 브엘세바입니다. 대결이 펼쳐진 갈멜산이 북이스라엘에서도 한 참 북쪽이니까, 북쪽 거의 끝에서 남쪽 끝으로 간 겁니다. 심지어는 거기서도 두려워서 엘리야가 자신의 시종 혼자 거기 남겨두고, 사막으로 도망갑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걸어가서 지칠 대로 지친 엘리야가 어떤 로뎀 나무(싸리나무) 아래에 앉아 하나님께 절망하며 기도하지요. “주님, 이젠 다 끝났습니다. 내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 왜 절망하지 않았겠습니까? 목숨을 걸고 의를 위하여 싸웠지만 결국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으니까요. 그렇게 죽기를 기다리는 엘리야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지요? 네 기도하다 잠든 엘리야를 천사가 어루만지며 그를 깨우지요. “엘리야야, 일어나서 먹으라.” 깨서 보니,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이 있어서, 그걸 먹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눕지요. 그러자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말합니다. “갈 길이 고될 터이니 일어나서 (좀 더) 먹어라.” 엘리야가 일어나 또 먹고 마시고, 그렇게 힘을 내서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결국 한 산, 모세가 율법을 받은 그 호렙산(시내산)에 이르게 되지요. 호렙산에 도착하여 한 굴을 찾아 거기 들어가 머물고 있을 때,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이번엔 하나님이 엘리야를 굴 밖으로 나오라 하시고, 그가 나오자 하나님이 다시 (세미한 음성으로) 그에게 물으십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도 똑같이 대답하지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하나님이 그런 엘리야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자세히 설명하시며 말씀하시는데요,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자기 혼자만 남아서 이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고, 내 ‘열심’이 정말 특별하다고, 그렇게 말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너와 같은 이가 칠천이 있다고, 내가 그들을 남겨둘 거라고, ‘너의 열심’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 일을 이루는 거라고, ‘하나님의 의’를 믿고 의지하며 복종하는 이들이, 수많은 엘리야가 여전히 이 땅에 살아 있음을 하나님은 엘리야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바울에게도 같은 말씀이시겠지요. 바울 혼자만이 아니라, 로마에도 수많은 바울이 있다고, 그리고 그들 안에 ‘하나님의 열심’이 역사하고 있다고 주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이실 겁니다. 의를 행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들을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때마다 먹이시고 일으키시며, 그렇게 그들을 남겨두시며, 같은 길을 걷는 이들이 함께 가게 하심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열심’, ‘우리의 의’, ‘우리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과 의지’로 우리를 끝내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며 사자처럼 담대하게 세상 앞에 서십시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통해 의의 열매로 맺혀질 때까지, 주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고백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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