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원하는 바, 구하는 바' 2018년 5월 13일 주일 설교
2018-05-1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80513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 설교
------------------------------------------------
로마서 10장 1~4절, 원하는 바, 구하는 바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romans3802.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된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38) 본문 1절의 ‘원하는 바, 구하는 바’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꼭 우리 모두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돌이켜보면, 앞서 9장을 시작할 때 바울은 대단히 강하고 격정적인 어조로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심정을 토로했었는데요, 마찬가지로 바울은 여기서도 동일한 마음을 표현하면서 이번 10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표현은 조금 달라졌지요. 1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다가 저도 모르게 두 구절에 밑줄이 그어졌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한 ‘내 마음에 원하는 바’ 그리고 ‘하나님께 구하는 바’, 이 두 곳입니다. 여기 밑줄을 긋고는 거기서 더 아래로 읽어 내려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여기 ‘하나님께 구한다’라고 할 때의 동사 ‘데이시스’는 신약성경에서 ‘기도’를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또 ‘원하는 바’[유도키아]는 보통은 의지, 즐거움, 선택 등으로 번역되는 말이고요. 그런데 여러분, 내 마음의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 이 둘을 구별하는 의도가 뭘까요? 9장으로 돌아가서 보면, 3절 끝에, ‘원하는 바로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이때 ‘원하다’라는 동사[유코마이]는, 10장 1절의 ‘원하다’[유도키아]와는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9장의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다’라는 뜻의 단어에요. 그러니까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 얻기를 기도했다는 뜻이고요, 이걸 우리말 성경은 그 의도를 조금 누그러뜨려서 번역을 한 거지요. 그랬던 바울이 오늘 10장 본문에서는 이 둘을 아예 구분을 해서 더 명확히 한 것이고요.
그럼 여러분 다시 질문해 봅시다. 바울은 어째서 마음의 소원과 하나님께 구하는 것(기도), 이 둘을 굳이 구별해서 이야기하는 걸까요? 간절히 기도한다고, 또 간절히 원한다고, 그렇게 어느 쪽이나 하나만 강하게 강조하며 표현해도 될 텐데, 굳이 마음이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를 나눠서 함께 사용하는 것에는 분명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겁니다.
우선 바울에게는 늘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원하는 것과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하는 그런 마음이요. 네, 둘은 분명히 다르지요. 일단 뭔가를 얻으려면 말을 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 얻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원하는 것이 없는 게 아니라, 구하지 않아서 얻지 못한다는 이 말씀이 혹시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는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우리는 다 마음에 원하는 바(所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씀드린 대로 원하는 바가 있다고 그것이 다 하나님께 구하는 바가 되는 건 아니지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원하는 바가 그냥 원하는 바로 끝나고 맙니다. 또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기도 제목을 우리가 나누곤 하는데요, ‘내 기도 제목이 뭘까’ 한참 생각을 해서 말을 하고, 함께 나누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내가 정말 원하는 무언가인지, 왠지 확신이 서지 않는 아는 경우도 경험하게 되지요. 그냥 기도 제목일 뿐 내가 별로 원하지 않는 일도 있지 않나요
사실 우리 마음에는 그런 기대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내 원하는 바를 다 아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이루어주실 것이다.’ 네, 알고 계시지요.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고 주님이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이때 주님의 초점은, 다 아니까 기도하지 말아라가 아닙니다. 뉘앙스가 많이 달라요. 뭐가 필요한지 아니까,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쉽게 말해서,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방인들이 그렇게 우상에게 절하고 기도한 거지요. 정성이 들어가면 더 기도의 효험이 좋아진다고 어떻게든 말을 많이, 또 제물도 많이 드려서 기도한 거예요. 그걸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한 거고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식으로 남들 보는 앞에서 말을 유창하고 많이 하면서 기도하지 말고, 조용히 혼자만의 공간(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요. 바로 그 이야기를 하시기 위해 하셨던 말씀이,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입니다. 다 아시니 기도하지 말라가 아니라, 다 아시니 하나님께 더 친밀히, 더 조용히, 더 은밀히 기도하라는 말씀인 겁니다. 중요한 건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뭐가 필요하고,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하나님은 다 아시지만, 그런데 문제는 당신이 아시는 그걸 우리더러 꼭 표현을 하라고, 기도를 하라고 하신다는 점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병든 이들을 고쳐주실 때, 반복해서 하시는 말씀이 있지요(?)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 주님께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때 주님이 그를 향해,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누가복음 18:41)고 질문하십니다. 설마요, 맹인이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다른 뭔가를 구하기라도 할까봐서요? 당연히 그의 대답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였습니다. 주님은 기어이 그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구하는 바’로 바꾸심으로써 그를 고쳐주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의 입으로 명확히 구하여 기도하도록 가르쳐주신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 보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건, 여러분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으세요? 그 당연하고 뻔한 그것을 굳이 하나님께 구해야한다고 기도를 가르치시는 것에서, 여러분은 거기 담긴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시는지요? 반면에 나는 실제로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늘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우리의 기도, 우리의 원하는 것을 구하는 그 기도 자체보다도, 하나님이 더 원하시는 게 있다는 그런 말씀 아닐까요?
심지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기까지 합니다(에스겔 36:37). 바벨론에 의해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시킬 것을 하나님이 직접 약속하시면서, “나 여호와의 입으로 선포한다. 내가 말하였으니, 내가 이룰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럴지라도, 내가 그렇게 말하였을지라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 하나님의 입으로 약속하신 것을 이루는 것까지도, 결국 우리의 간구를 통해서 하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은 어떻게 다가오시는지요?
이렇게 말씀드려도 사실 기도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원하는 바가 구하는 바가 되는 것, 실로 많이 어렵습니다. 여러분, 기도, 정말 어렵지 않습니까? 요즘처럼 특별히 어떤 결핍을 느끼기 어려운 시대, 그리고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 잘 분별하기 어려운 시대에는 기도가 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의 여러 내용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기도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 진짜로 기도해준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성도가 성도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귀하고 가장 어려운 섬김이 바로 기도의 섬김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기도와 관련해서 진짜 마음에 큰 분노를 느낀 적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괜히 옆에 있는 아내에게 울분을 토한 일이 있었는데 ….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오래된 친구 목사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한 번 보셨을 그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저도 잘 아는 고등학교 동창의 결혼 소식이었습니다. 그 목사 친구가 워낙 다른 여러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 저는 보통 그 친구를 통해 다른 친구들의 소식을 듣곤 하는데요, 이번에도 그 친구의 청첩장을 저에게 링크로 보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고 목사님 아무개 드디어 결혼!!! 기도부탁 ^^” (제가 벌써 마흔 넷이니까 꽤 늦은 결혼이고 당연히 축하해야 할 일인데, 제가 어디에서 화가 났을까요?)
네, 친구의 늦은 결혼이라 반가운 소식이긴 했는데, 마지막에 있는 ‘기도 부탁’이라는 게 좀 제게 거슬렸습니다. 졸업하고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 그 친구의 친구를 위해, ‘기도 부탁’이라니, 그것도 기도라니, 너무나 쉽고 간단한 그 요청이 이상하게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가 답문을 보냈습니다. “ㅎㅎ 잘됐네.. 뭐 기도까지 ㅋㅋ” 그랬더니 조금 있다가 그런 답장이 왔어요. “기도가 많이 필요하나봐. 기도 많이 해달라네!! ㅋㅋ”
‘기도가 많이 필요하나봐. 기도 많이 해달라네’에서 제 마음이 급격히 어려워졌습니다. ‘아니, 기도를 부탁할 거면 직접 연락을 하든가, 아니면 왜 기도가 필요한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 지, 뭐 내용을 좀 이야기를 하고 부탁을 하더라도 해야지. 그냥 무턱대고 기도만 많이 해달라고 이야기를 하니, 좀 답답했습니다.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목사 친구에게 다시 답장을 보냈습니다. “뭐라고 기도해 달래? ㅎ” 그랬더니 답장 오기를, “아 그 생각은 못했네. 물어볼 걸. 그냥 많이 해달라고만. ㅎ”
무턱대고 기도만 많이 해달라는 친구의 친구나, 제대로 기도 제목도 모르고 그냥 기도해준다고 이야기한 친구나, 솔직히 저는 둘 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괜히 마음 상할까 싶어 더는 말을 안 하고, 그냥 웃음 표시 한 번 더 보내고 이야기를 끝냈습니다만, 저 혼자 긴 시간 화를 삭여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 친구가 얼굴은 아는 사이이고, 또 어쨌든 기도 부탁은 받았으니, 정말 딱 한 번 기도해 줬습니다.
한 달 쯤 지나서 설교 준비에 한창이던 어느 토요일 저녁에, 그런 제 마음을 알 길 없는, 그 친구 목사에게 여러 장의 사진이 한꺼번에 전송되어 왔습니다. “아무개 결혼한다.”(결혼식에 가서 찍은 사진을 실시간으로 보낸 겁니다.) 그러면서 사진들에는 또 이런 멘트가 달려 있었습니다. “기도 많이 해주고 축복해줘라. ^^” 제가 뭐라고 답장을 보냈을까요? 정말 제대로 욕을 한 바가지 보내려다가, 그래도 설교 준비하던 참이라, 그냥 꾹 참고 “ㅎㅎ 엉~~~ (나는) 그대를 축복한다. ^^ㅋㅋ”
기도가 무슨 김밥 집 단무지도 아니고, 시장에서 파는 콩나물도 아니고, 어쨌거나 그냥 좀 많이 해 두면 뭐라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저는 좀 답답합니다. ‘기도할게’라는 말이, 실제로는 기도 한 번 하지 않아도 그냥 예수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돼서, 마치 “나중에 밥 한 끼 하자.”는 그런 으레 하는 인사말이 된 건 아닌지, 또 내가 하는 기도도 그렇게 싸구려인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여러 이유로 제 마음이 불쾌해졌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실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제대로 구하지 않습니다. 그냥 마음의 소원이 나의 기도 제목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기도 제목을 가지고 있고, 한 줄 기록한 그것이 실제 내가 기도한 것인 줄로 착각합니다. 나는 기도하지 않으면서 남이 기도하는 것은 아주 가볍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기도는 그렇게 싸구려가 아닙니다. 기도는 그렇게 허망하고 가벼운 무언가가 절대 아닙니다.
사실 누군가 저에게 기도 부탁을 할 때, 그것이 설사 좀 불쾌하고 그래도 그 기도 부탁을 굳이 거절하지 않는 저만의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자의 유익’이 ‘기도를 받는 자, 즉 그 기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얻는 기도 응답의 유익’보다 더 크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제목이 있는 그 사람은 그 원하는 것에 대해서만 응답을 얻지만, 그것을 직접 구하는 사람은 그보다 더 큰 것을 얻습니다. 바로 하나님 그 자체를 얻는 것이지요.
뭐가 필요한지 이미 다 아시는 분이, 그것을 위해 굳이 우리의 입으로 직접 고백하게 하시는 이유, 그것은 그 필요한 것 말고도 더 중요한 것을 반드시 주시겠다는 약속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시고, 새로운 기도를 주시고, 결국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걸 성경은 다른 말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고 기록하지요. 다윗이 기록한 시편 25편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쏘드]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이 구절을 공동변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생각을 털어놓으시고 당신의 계약을 가르쳐주시리라.” 또 새번역은 이렇게요. “주님께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의논하시며, 그들에게서 주님의 언약이 진실함을 확인해 주신다.” NLT 같은 영어성경은, “The LORD is a friend to those who fear him. He teaches them his covenant.”라고,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친구가 되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의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고, 그 친밀함을 조금 풀어서 말한다면 그건, 기도를 통해 우리는, 내가 원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어떤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구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 필요를 위해 기도가 시작되지만, 마지막엔 하나님의 필요로 그 기도가 마무리되는 겁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는 정확한 기도의 제목,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을 분별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로마서 8:26의 말씀 기억나시지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바울은 우리의 가장 큰 연약함이,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변별하고, 기도할 줄 모르고, 또 역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래서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할 그 무언가에 대해서도 무지하다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연약함이라는 겁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바울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는 기도가 결코 쉬운 기도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걸 느끼게 됐습니다. 아시는 대로 유대인들은 바울을 말 그대로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바울 죽일 때까지 단식하겠다는 결사대가 세워질 정도였습니다. 누군가가 그토록 오랫동안 일관되게 나를 미워하는데, 여러분 그런 사람에게 마음이 가지시던가요? 여러분을 정말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가 나오시던가요?
바울이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을 정말 원하고 기도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이방인 선교사로서, 자신의 사역과 이방인들을 위해, 오늘 로마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을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게 된 거고요. 순서가 바뀐 거지요. 원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니 그것이 결국 그에게 원하는 바가 된 거예요. 이스라엘의 구원은 바울의 기도 제목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도 제목, 바울이 기도하면서 깨닫게 된 주님의 마음인 거지요.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면 하나님의 마음에 가서 닿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다 끝나면, 그때 하나님의 기도 제목이 우리의 입술에서 구해지기 시작됩니다. 우리는 거기까지 기도해야겠지요. 그러니까 특별한 기도 제목이 없어도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기도 제목이 없기 때문에 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끝나는 그곳이 진짜 우리의 기도가 시작되는 지점이 되기 때문이지요.
C. S. Lewis가 그의 친구와 나눈 편지에 인용된 작자 미상의 기도문이 있는데요, 비슷한 내용이어서, 여러분과 잠깐 나누기 원합니다. “주님, 그들이 말합니다. 제가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듯 보일 때, 들리는 건 목소리니, 모두 꿈일 뿐이라고. 한 사람이 둘인 척 흉내 내는 것일 뿐이라고. / 분명 그럴 때도 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제 안에서 하고 싶은 말을 뒤졌지만, 보십시오! 제 우물은 말랐습니다./ 그때, 제 우물이 빈 것을 보신 당신께서 듣는 역할을 그만두시고, 어눌한 제 입술을 통해 제가 전혀 몰랐던 생각을 속삭이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께는 대답이 필요하지 않고, 필요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듯해도, 당신께서 영원히 홀로 말씀하십니다. 꿈꾸는 것은 제가 아니라 당신이십니다.”
우리 안에 더 할 말이 없어졌을 때, 우리의 기도의 우물이 다 말랐을 때, 그때 주님이 우리의 어눌한 입술을 통해 우리가 전혀 원하지 않던 그 무언가를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표현하신다는 것, 그때부터 우리의 기도는 더 이상 나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도, 성령의 기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기도해야만 합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의 기도는 지나치게 고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너무 고상해서는 안 됩니다. 일용할 양식도 구해야 하고, 믿음도 구해야 하고, 세속적인 성공과 승리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고, 봄나들이 좋은 날씨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고, 친구의 기도 제목 없는 결혼식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보다 더 위대한 기도는 없고, 기도를 가르쳐줄 수 있는 그 이상의 무엇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늘 좋아서 기도하셨을까요? 성경에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어떻게 묘사하지요? 네, 주님이 ‘습관을 따라’ 기도하러 가셨다고 해요. ‘습관을 따라’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하고 싶지 않아도, 그냥 억지로, 그냥 늘 하던 거니까, 그런 뜻이 아닌가요? 여러분,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뭐지요? 누가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아마추어는 재미가 있어서 하는 거고, 프로는 재미없어도 그걸 해야 되니까 하는 사람이라고요. 그렇지요. 기도의 아마추어는 결국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때에만 어쩔 수 없이 기도하는 사람인 거지요. 주님은 그렇게 기도하시지 않았습니다. 해야 하니까 기도하는, 습관을 따라 기도하는, 그 본을 우리 주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말이 좀 그렇습니다만, ‘기도의 프로’가 되기를, 습관을 따라, 해야 하니까 기도하는, 그런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다시 기도가 회복되고, 오늘이 습관을 따라 기도하는 첫 날이 되게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기도가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운동이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기도도 그렇겠지요. 그런데요, 누군가 옆에서 정말 운동을 하고 건강해지고, 몸이 좋아지는 걸 보면, 어떻게 되지요? 주변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정말 좋아지는 것, 정말 변화되고 효과가 나타난다면,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도 그 방법으로 운동하게 되지 않습니까? 무슨 뜻인가요? 여러분, 결국 기도도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어떤 공동체인가, 정말 기도하고 그 능력을 경험한 사람이 있는가, 아니면 그냥 말만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가, 거기에서 기도는 현실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겁니다. 기도 역시 ‘함께 지어져 가는’ 겁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주님의 마음을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기도 제목을 말씀해 주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한 사람만, 한두 사람만 그리 살아도 기도는 그렇게 전염되고 옮아집니다. 사랑하는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습관을 따라 기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기도 제목이 우리에게 들려지기를, 그래서 우리의 구하는 바가 하나님의 원하는 바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