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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2018년 3월 11일 주일 설교

2018-03-1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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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1  사순절 네 번째 주일 설교  ------------------------------------------------ 야고보서 1장 19~27절, 이사야 58장 1~14절,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80311.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된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   (사순절 묵상 4) 본문 27절의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온전하게 고백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지만, 하나님께 예배를 안 드린다거나, 또 예물을 적게 드린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로 사람을 책망하시는 적이 거의 없다는 데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약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워낙에 예배를 중시하고, 적어도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서 그러기도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예배와 예물에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는 크기의 문제보다는,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그의 일상의 삶이라는 예배의 모습에 대해서, 압도적으로 더 많은 비중을 두어 강조하십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의 예배와 헌신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도 여기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배와 헌신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우리의 동기와 목적을, 그리고 거기에 담겨 있는 우리의 나머지 삶의 고백을 기뻐하시지요. 우리가 뭘 얼마나 드리느냐, 그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드리느냐에 절대적인 초점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욥에게 항변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생명과 호흡과 시간과 물질과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우리가 드리는 모든 것이 실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기에, 예배는 결국 그 주신 것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뭔가가 부족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은 결국 우리의 중심을, 우리의 삶을 주목하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예배하라고,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시고 원하신다고도 말씀합니다. 주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다고, 마음과 정성으로 예배하고, 또 준비된 예물로 예배하라고 말씀합니다. 정작 하나님께는 하나도 필요가 없으심에도 그리 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예배보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이 집중되는 때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이 이보다 더 분명하고 또렷해지는 때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표현되지 않는 사랑이 결국 언제 그것이 있었냐는 듯, 쉬 스러져 소멸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예배를 통해 온전해지지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우리의 마음 깊이 고백하며 이 예배가 주님께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 오늘 이 예배를 통해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마치 우리가 철이 들어 부모님이, 단지 우리의 부모라는 이유만으로도, 우리의 섬김과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함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저희의 예배가 그렇게 주님께 온전히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직장에 다니시는 우리 청년들은 아마 월급이나 아르바이트 비를 받으면 부모님 용돈도 드리고 그러실 겁니다. 우리 청년들이야말로 정말 경제적으로 힘드시겠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첫 번째 계명이 이것이기에, 부모를 공경하는 그것으로 인해 여러분이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이라는 약속이 있기에, 여러분께 다시 권면드립니다. 여러분의 부모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시기 바랍니다. 다 잘 하고 계시겠지만, 여러분이 버는 수입에서, 일정 비율을 정해서 늘 정기적으로 꼭 부모님께 드리십시오. 그냥 생각날 때, 또 명절이나 어버이날에만 드리지 말고, 꼭 의무적으로 매달, 여러분에게 수입이 생기는 때마다 드리십시오. 그렇게 하는 게 마땅한 것인데, 그걸 대단한 것 하듯 하는 건 우리의 큰 교만입니다. 정기적으로, 일정한 액수나 비율을 정해서, 마치 세금을 내듯이, 그렇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섬김이 여러분의 자랑이 되지 않도록, 그렇게 부모를 섬기고 사랑하세요. 자녀를 가지신 성도님들은 자녀들에게 꼭 그렇게 가르치십시오.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자녀들에게, 스스로 정한 것을 부모에게 드리게 하십시오. 그래야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부모가 돈이 많아도 해야 합니다.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녀를 위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에게나, 자녀에게나, 어느 정도 훈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 있는 말씀임을 기억하시고 행하셔서, 주님 약속하신 복 된 가정을 이루어 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갑자기 어버이주일 설교처럼 됐는데요,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도 같은 본질임을 설명하려다보니 그리 됐습니다. 하나님도 찬양과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 온전한 경건은 말씀드린 대로 부모를 섬기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에 강조점이 있는데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더 깊게 나눠보겠습니다. 오늘 이사야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정말 원치 않으시는 것,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크게 책망하시는 것은 우리의 겉으로 드러나는 경건의 모양이 아님을,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58장의 1절이 이렇게 시작되지요.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이 문제가 얼마나 하나님께 중요하면, 예언자에게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는 말씀까지 나옵니다. 목이 터져라, 외치라는 뜻이지요. 2절을 보면,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칭찬인가요, 아니면 책망인가요? 내용만 보면 칭찬인데, 앞뒤 문맥은 아니지요. 2절이 칭찬이 아님은 3절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인데요.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질문의 의미는 결국, 2절의 내용, 곧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그런 모습이 하나님께는 아무 기쁨이 되지를 않는다는 걸 드러내지요. 절기를 지키고 예배하고 금식하며 헌신하는 그것들이 결국 다른 모든 불의를 덮으려는 위선적 행위일 뿐, 그 껍질을 들추면 그 속에는 더러운 탐욕과 불신과 이기심만이 가득하다는 거예요. 혹 오늘 우리의 예배도 그런 건 아닌지 생각해 보세요. 어떤 형식적인 종교 행위 아닌가요? 하나님이 목적이 되셔서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의 삶에 뿌리박힌 죄를 뽑아내고, 그렇게 우리의 전부를 온전히 드리는 그런 예배가 아니라, 오히려 죄의 뿌리를 보존하기 위해, 냄새 나는 우리의 죄악을 어떻게든 덮고 그냥 그대로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 오늘 우리는 예배라는 최소한의 형식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우리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금식, 주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6절부터 7절까지 함께 읽습니다. “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전부 의문문이네요. 무슨 뜻인가요? 이미 너희가 다 아는 내용 아니냐, 내가 이미 수없이 말한 것 아니냐, 하는 뜻이겠지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고, 자유를 빼앗긴 자에게 자유를 되돌려주는 것, 그리고 원치 않는 금식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사람들을 먹이는 것, 특별히 7절 마지막 말씀처럼, 가난한 골육, 곧 가난한 가족과 친척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 참 된 금식은, 스스로가 굶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굶고 있는 이들을 기억하는 것,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된 금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나요? 8절 이하의 말씀처럼,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새벽의 빛처럼, 우리의 삶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라고 주님 약속하십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언제요,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는 금식을 행할 때요. 우리가 매주 찬송하며 서로를 축복하는 찬송의 제목, ‘물 댄 동산’, 하나님이 관리하시는, 그래서 건조한 그 땅에 늘 하나님이 직접 물을 대 주시는 그런 동산이 오늘 본문 11절에 나오지요.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마르지 않는 샘 같으리.” 이 약속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버린다면, 주린 자에게 마음이 움직이고,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케 하면, 그때 하나님은 그 삶을 반드시 물 댄 동산,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그렇게 당신께서 직접 다스리고 책임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이 진정 이러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울러 저희의 삶뿐 아니라, 우리 고백교회 역시 이 시대의 고아와 과부를 위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고아와 과부란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할 수 없는, 누군가 편들어주지 않는 한 결코 자립할 수 없는 존재를 다 일컫는 말입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이 다 고아와 과부인 셈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고아와 과부를 위해 해야 할 첫 사역은, 그들을 도와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교회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의 무게를 더하지 않는 게 우선입니다. 여러분 과부가 드린 두 렙돈과 예수님의 칭찬에 관한 이야기 아시지요?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 본문을 묵상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됐는데요, 그 이야기를 잠깐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마가복음 12장(38~44)에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을 향해 경고하시기를, “긴 옷을 입고 다니며 문안 받기 좋아하고 윗자리 앉기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하시며,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는 주님이 갑자기 연보 궤, 곧 헌금함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시더니, 사람들이 예물 드리는 걸 보고 계셨습니다. 무척 난감하고 이상한 상황이었겠지요?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돈을 넣는 걸 보시던 주님은,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 대략 천 원 정도의 금액을 넣는 것까지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이 과부는 그 구차한 형편에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 여러분 지금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목적이 뭔가요? 과부가 잘했다는 건가요? 과부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나님께 많이 드려야 한다고 하시는 건가요? 두 렙돈이면, 노동자 하루 품삯의 1/64인데요, 천 원이나 될까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가난한 과부의 그 생활비 전부를 넣으라고 하실까요? 그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인가요? 과부처럼 우리도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인가요? 여러분, 이 행동과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뒤 성전을 나가시며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저주하시지 않나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건 없어요. 과부가 그 어려운 형편에 자기 생활비 전부를 넣어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예물을 드리는 일이 일어난 그 상황을 예수님은 책망하시는 거예요.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 전부를 드리는 것이 마치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 양, 그렇게 그들의 삶을 고달프게 만드는 그것부터 무너져야 한다고 주님은 교회를 향해, 그때나 지금이나 말씀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고아와 과부에 대한 명령은 우리가 잘 아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던 출애굽기에서부터 강조된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22.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4.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22:22~24) 주님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바라보시는지, 또 우리가 얼마나 이 말씀을 가벼이 여기는지, 새삼 알게 되지요. 저는 과연 오늘 한국 교회가 이 문제 앞에 잘 하고 있는지, 괜찮은지, 참 두렵고 부끄럽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는 여전히 고아와 과부를 괴롭게 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 일산에서 국가조찬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이번이 50주년 기념 기도회여서 기독교인들 외에도 문재인 대통령 내외를 포함한 장관, 의원, 시장 등 여러 정치인들도 참여해서, 5000여 명에 이르는 역대 최대 규모였다고 합니다. 저도 영상으로 중요한 부분을 좀 보게 됐는데요, 그런데 행사 중에 문재인 대통령이 인사 말씀을 하시는 장면이 있었는데, 제가 그 장면에서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 단락만 말씀을 드리면,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국가조찬기도회에 따뜻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올해는 희년의 해를 축복하는 자리여서 더욱 뜻 깊습니다. 성경에서 희년은 죄인과 노예, 빚진 사람 모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해방과 안식의 해였습니다. 약자는 속박으로부터, 강자는 탐욕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공동체가 건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경계와 벽을 허무는 포용과 화합의 정신이 희년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희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실천을 다짐하는 기도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 기독교가 이 땅에 전파되면서 대한민국이 자유와 진리를 향한 길을 걷게 됐다고, 부당한 침략과 지배로부터 자유를 불평등과 억압으로부터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숭고한 여정의 길에서 한국교회가 참으로 큰 힘이 됐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늘 이 사회 안에서도, 교회가 고통 받는 사람들, 특별히 미투 운동 피해자들을 위해 따뜻하게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저는 우리 대통령이 50이라는 숫자 앞에서 희년을 말할 수 있는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솔직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종들의 멍에를 풀어주라고,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모든 재산을 되돌려주고, 모든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하라고 명령하신 그 희년을 한 나라의 대통령이 공적인 자리에서, 약자는 속박으로부터, 강자는 탐욕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공동체가 건강해지는 때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나라인 것이 정말 믿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과 정치를 통해 구현하려고 고민했던, 네덜란드의 전 수상이자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생각도 났습니다. 반면에 똑같은 희년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설교자로 나선 한 목사님은, 희년이 되었으니 그저 하나님이 이 나라의 번영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는 걸 보고, 뭐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구나 싶은 게, 목사로서 참 부끄럽고 민망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목사로서 제 신앙의 양심을 걸고 여러분께 감히 말씀드립니다. 어쩌면 이 시대는 교회가 세상보다도 못한 시대인지 모릅니다. 모세의 시대, 예수님의 시대에는 세상이 안 하니까 믿는 사람들이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고아와 과부를 돕는 건 믿음이 아니라 상식인 세상이에요. 이걸 신앙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민망한 이야기에요. 그저 교회만 잘하면 되겠구나, 싶은 게 솔직한 제 심정이에요. 여러분, 우리만 정신 차리면 됩니다. 남 이야기 할 것 없고, 저와 여러분의 삶이, 그리고 우리 고백교회가 하나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경건의 자리를 회복하면 됩니다. 교회가 성도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그것이 마치 믿음인 양 속이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해요. 저는 우리 교회가 과부의 두 렙돈을 드리지 못하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해요. 과부가 두 렙돈 드리는 게 좋은 믿음이라고 인정하는 그런 교회는 아니었으면 해요.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 고아와 과부를 향해 먼저 다가가고 찾아가서 그들을 섬기는 교회가 돼서, 주님 앞에 정결하고 흠 없는 경건을 살아내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중에 어느 나그네 한 분이 교회를 찾아오셨습니다. 아침 9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간이었는데, 오셔서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현금이 몇 천원밖에 없었는데, 그걸 드렸더니 제게 배가 고프니 밥을 한 끼 좀 사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식당이 거의 없어서 몇 군데를 같이 돌아다니다가 겨우 한 식당을 찾았고 거기서 제육볶음을 시켜드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교회로 돌아오는데 뭔가 좀 허전하고 그랬습니다. ‘나는 너무 기다리는 데 익숙하구나. 나는 누가 구해달라고 말해야 구해주는 인간이구나. 나는 그렇게 구원받지 않았는데…, 나는 분명 주님이 먼저 나를 찾아와주셨고, 나를 먼저 사랑해주셨고, 그래서 내가 주님을 영접했는데, 나는 여전히 먼저 찾아가지 않는구나. 고아와 과부가 나를 찾아와 부끄러운 손을 벌릴 때까지, 나는 기다리고만 있구나.’ 참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건, 그저 가만히 앉아서 죄인을 기다리고, 또 고아와 과부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것”이지 누군가 오면 그때 제자를 삼는 게 아니지요. 흉악한 결박을 당하고, 부당한 폭력을 당하는 이들이 우리를 찾아와 “우리 좀 도와주십시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는 걸 기다리라는 뜻이 아니라, 먼저 가서 그들을 찾고, 섬기라는 명령이 아닙니까? 우리 주변에는 찾아갈 수 있는 그런 고아와 과부들이 있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곳들, 그런 분들이 찾아보면 참 많습니다. 단지 물질만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건강과 지혜와 능력으로 섬길 수 있는 곳이 찾아보면 많습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가 찾아가 섬길 수 있는 그런 기관을 하나 정하면 좋겠는데, 여러분 어떠신지요? 주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맡기셨어요. 결박을 풀고 압제를 꺾는 권세가 우리에게 있다고 하세요. 그냥 죄인이니까 용서만 받아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보다 훨씬 더 우리를 긍정하십니다. 이미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이겼음을 확증하는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꼭 그리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화 ‘신과 함께’를 보셨는지요? 이 영화를 1,400만 명 이상이 보셨다는데요, 거기 보면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7번의 재판을 거치게 되고, 그 7번의 재판을 무사히 통과한 자만이 환생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아마 영화 마지막 부분이었을 텐데, 염라대왕이 주인공의 죄를 심판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세상에서 죄를 지었어도, “진심으로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또 진심으로 용서를 받은 죄를 저승에선 심판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죄를 범하며 살기에,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교훈이 담겨 있지요. 그런데요 예수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시지요? 용서를 받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시지요? 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거예요. “14.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태복음 6:14~15)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반복되지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성경의 가르침은 일관됩니다. 용서를 하면 용서받을 것이다, 말씀하세요. “용서를 받은 사람만 용서할 수 있다. 내가 죄인이며, 그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여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는 타인을 용서할 수 있다. 용서를 받지 못했기에, 거짓으로 회개하였거나, 자신의 죄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기에, 타인을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용서하는 그만큼 우리는 용서받은 것이다. 용서한 그만큼 우리는 용서받는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 긍휼이 심판을 이긴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이며, 우리의 신앙이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사람은 실수도 하고 죄를 반복하기도 하는, 그래서 용서가 필요한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고, 누군가를 자유케 할 수 있고,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거룩하고 온전한 존재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해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온전한 경건이라고 또한 말씀합니다. 죄만 짓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이기고, 죄인을 용서하는 존재가 저와 여러분이라는 것이 주님의 관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그것은 단지 어떤 종교적 의무를 다하고, 또한 술, 담배 안 하며 겉으로 고상한 척 하는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요, 주님이 원하시는 경건은 그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어떤 의무를 다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죄를 안 짓기 위해 안절부절 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찾고, 고민하고, 행하는 거기에 경건의 본질이 있음을 우리가 함께 기억하고 살아내기를 원합니다. 요한 사도는,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의 치마폭에 싸여 아무 것도 안 하는 그런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고, 밖으로 나가 고아와 과부를 찾아 나서고, 그들에게 놓인 흉악한 결박을 풀어주는 온전한 모습으로 저와 여러분이 새로워지기를, 우리 고백교회가 그렇게 바로 세워져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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