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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도 함께(2)' 2018년 1월 28일 주일 설교

2018-01-2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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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8  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 설교  ------------------------------------------------ 로마서 8장 12~18절,  고난도 함께(2)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80128.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된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30) 지난주에 이어서 본문 17절의 ‘고난도 함께’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지난주에는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많은 고난들, 꼭 성도여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를 시험하는 많은 삶의 시련들에 대해 함께 생각해봤는데요, 오늘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난, 예수를 믿는 성도의 고난이라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는 ‘고난과 영광’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 미래의 영광이 대조되고 또 비교가 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이렇게 둘을 구분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사실 예수님은 이런 구분 자체를 없애는 듯한 고백도 하셨습니다. 미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신다는 말씀도 있지만, 지금 당신이 당하는 고난 자체가 영광이라고 이야기하신 겁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가시면서, 주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요12:23)고 선언하시기도 했고, 십자가에 매달려 높이 들어 올려짐을 마치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처럼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영광을 위한 고난이 아니라, 고난 자체가 영광이다,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가시는지요? 지난 며칠 동안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한 이름은 아마 테니스 선수 정현일 겁니다. 대한민국 선수 최초로 세계 메이저 대회 8강을 넘어 4강에 오른 정현 선수를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위로도 얻고 힘을 냈던 그런 한 주였습니다. 저도 아내에게 “나도 테니스 배워야겠는데, 괜찮을까?” 이야기도 했는데요 …, 4강에서는 아깝게 2세트가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기권패를 당했습니다. 사실 1세트에서도 평소 정현 선수답지 않은 플레이가 이어져 좀 이상했습니다. 특별히 공의 방향대로 전혀 민첩하게 움직이지를 못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발바닥이 엉망진창이었던 것이 나중에 알려지게 됐지요. 경기 전 수건을 입에 물고 발에 진통제 주사를 맞았지만, 진통제조차 듣지 않을 만큼 통증이 심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정현 선수의 발 사진이 나중에 인터넷에 올라왔는데요, 피부의 상당한 너비가 아예 떨어져나가서 그 속의 빨간 생살이 다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니까, 정말 뛰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걷는 것도 거의 어렵겠다, 싶었습니다. 우린 보통 그런 걸 ‘영광의 상처’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그 상처 자체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테니스를 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무나 그 대회에 나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전 세계 수십만, 수백만의 선수들 중 단 120명만이 호주 오픈에 나갈 수 있습니다. (한국 대표 2명) 그 자체로 이미 영광이고, 거기서 다치고 아플 수 있는 것도 너무나 큰 영광이지요. 4강이면 6라운드인데요, 1라운드에서 패배하고 떨어졌다면 크게 상처 나고 아플 일도 없지요. 4강까지 갔으니 그 아픔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현 선수가 겪은 아픔은 그 자체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통증이 얼마나 심했는지, 현지 의료진이 통증을 1~10으로 표현해달라 했더니, 정현이 15라고 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 후 공식 기자회견에서 정현 선수는, 호주오픈을 치르는 동안 너무 행복했다고, 코트 안과 밖에서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감격스러워했습니다. 지난주에도 잠깐 말씀드린 대로 고난이 있고, 상처가 있어서 불행한 게 아닙니다. 그것이 없다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영광에 이르는 고난, 그리고 영광 그 자체라고 인정할 만한 그런 고난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행복하지 않은 겁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에서 이런 영광스러운 고난을 다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나누게 될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도로서, 당하는 영광스러운 고난 역시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성도로서 받는 고난이 미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영광임을 깨닫는 은혜가 저에게, 그리고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그래서 우리 모두가 행복하고 감사한 인생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그럼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러운 고난에는 뭐가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다 겪는 공통의 고난 외에,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겪는 고난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 분명히 있으실 텐데 생각해볼 기회가 별로 없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이미 그 고난을 영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혹은 영광까지는 아니어도 이미 그것을 나의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미 여러 번 상처가 나고 다시 새 살이 올라 이젠 굳은살이 되어버린 ‘이겨낸 고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특별히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 자체로 대단히 훌륭하신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가 그래서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러운 고난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예수를 믿는 고난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는 것 자체가 고난인 경우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자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을 수반하게 되는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는 아직도 많습니다. 예수 믿기 위해, 교회 가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해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오늘 로마서를 읽고 있을 로마의 성도들 역시 예수 믿는 고난 속에 있습니다. 네로 황제 당시에 로마인들이 겪은 고난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는데요, 로마 군인들이 딱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아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는 곧장 끌려가 세 가지의 방법 중 하나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형이었고, 또 하나는 짐승의 가죽을 사람에게 입혀서 맹수들 사이에 풀어놓아 물리고 찢겨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고, 마지막은 인간 횃불을 만들어 태워 죽이는 것, 이렇게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가, 그 질문에 대한 긍정의 대가가 그거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그와 같은 삶을 살며 믿음을 지켜가는 이들을 향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겁니다. 다행히 오늘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이 고난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졌습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우리 중에서도 예수 믿는 것 자체가 고난인 성도들이 아주 없지 않습니다. 핍박을 견디며 예수를 믿어야 하고 여러 불이익을 감수하고 교회에 오셔야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미 그런 고난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고통에 익숙해지고, 아예 이겨낸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에게 당장 예수 믿는 고난이 없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지는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합니다. 또 믿음 자체가 고난이던 때가 실재했고, 그 고난을 온전히 감내한 이들에게 우리가 지고 있는 빚에 대해서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 기억과 생각에서 성도의 두 번째 고난, 곧 예수를 전하는 고난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러운 고난, 그 두 번째는, 바로 복음을 전하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마10:16)고 하셨습니다. 양은 양들끼리 살아야 고난이 없는데, 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셔서, 당신을 증언하라고 하시니, 거기엔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성도가 양이요 세상이 이리떼라는 말이 다 맞는 것 같지도 않고, 또 그 고난을 아예 외면해버리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홀로 예수 믿은 것이 아님을, 누군가 그 고난을 감당했기에 오늘 우리가 이 시간에 여기 모여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절 말씀처럼, 그래서 우리는 빚진 자이지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어간 수많은 고난들에 지고 있는 사랑의 빚, 고난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특별히 한국교회 모든 성도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로 인해 복음이 우리에게 왔고, 또 그것을 맘 편히 믿을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땅의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영국 선교사 토마스 목사님인데요, 그분의 이야기를 아마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중국에서 한문 성경책을 잔뜩 싣고 희망에 차서 조선으로 오는 배를 타지요. 그가 당시 런던에 있는 선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조선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생각을 하니 기쁨이 넘칩니다. 희망찬 선교활동의 기회를 저에게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미지의 나라에서 일어날 모든 일들을 주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라는 희망찬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모든 게 처음부터 어그러졌습니다. 한양으로 가려고 했던 배는 길을 잘못 들어 대동강 입구로 들어가 평양으로 향하게 되었고, 물때가 맞지 않아 결국 배가 좌초되고 맙니다. 설상가상 평양 군사들의 공격으로 배는 다 불타게 되고 토마스 목사는 다급히 가져간 한문성경책들을 사람들을 향해 던졌지만 대부분 강물 속에 빠지고 맙니다. 결국 제대로 복음 한 번 전해보지 못한 채, 아무 소득 없이, 대동강 하류 양각도라는 곳에서 목이 잘려 순교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습니다. 제대로 복음을 전해보지도 못한 채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겁니다. 하지만 그의 고난은 이 땅에 귀한 복음의 씨앗이 됐습니다. 그 사건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훗날 예수를 영접했고, 조선 초대교회의 주축이 되었으니까요. 가족과 함께 거기 구경나왔던 어린 소년 하나가 훗날 장대현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고(최치량), 토마스 목사가 가져 온 성경을 가져다가 집을 도배하여 여관으로 사용하던 사람은, 결국 회심하여 그 집을 교회로 드리게 됩니다(박영식). 무엇보다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벤 장본인이었던 박춘권이라는 사람도 훗날 예수를 영접하게 되지요. 토마스 목사가 참수당하기 직전에 그에게 건네준 한문성경을 읽게 되었고, 세례를 받아(1899년), 몇 해 뒤 당시 교회의 최고 직분인 영수(領袖, 장로가 없는 교회에서 장로역할을 대행하는 직분)가 되어 남은 생애를 복음 전파에 헌신했습니다. 그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이 바로 그 유해가 저의 모교 장신대에 있는, 사무엘 마펫(Moffett, S. A., 馬布三悅) 선교사입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헌신을 통해 성경이 우리 손에까지 왔고,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당연히 그 복음은 다시 우리를 통해 누군가에게로 전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지요. 혹시 여러분에게서 그 복음이 멈춰 있는 건 아닙니까? 저와 여러분이 복음의 종점(終點) 된다면, 그건 하나님 앞에, 또 우리 믿음의 선조들 앞에 너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는 반드시 고난이 따릅니다. 믿기만 할 때와는 전혀 다른 고난이 시작되지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복음을 전파하시던 상황에 대해,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막1:14) (이 구절은 장신대 입학 암송구절 중의 하나인데, 그 이유를 이번에 알게 됐습니다.) 여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라는 부분입니다. 여기 요한, 즉 세례 요한이 누구에게 잡히지요?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디바(안티파스)입니다. 그가 다스리던 지역이 바로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신 갈릴리 지역입니다. 아시는 대로 결국 요한은 그의 생일에 참수를 당하게 되지요. 그리고 바로 이때 주님이 갈릴리로 가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이 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에서 시작되었음을 분명하게 강조합니다. 요한이 갈릴리에서 잡힌 그 시공간의 환경 속에서, 예수님은 굳이 갈릴리로 가셔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핍박이 좀 잦아들고, 분위기가 좀 더 좋아진 뒤에가 아니라, 고난이 없는 형편이 좀 더 나은 동네에서가 아니라, 고난의 시공간 속으로 들어가 복음도 전하시고 제자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고난이라는 자궁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요즘 제가 만나는 선교사님들마다 다들 사역이 너무 힘들다고 말씀합니다. 한국교회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새롭게 파송되는 선교사님 숫자도 줄어들고 있을 뿐 아니라, 또 파송된 선교사님들의 여건도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제가 아는 한 아프리카 후배 선교사님이 저를 찾아오셨다가, 저희 교회 여건을 듣고 그냥 아무 말 없이 가셨습니다. 안타깝기도 했고,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직접 가지 못하면 보내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게 최소한의 빚을 갚는 길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정말 감사하는 마음, 빚진 마음이라도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기꺼이 그 일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큰 영광이요 면류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는 그 순간이 저희 교회가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성도님들 중에서 파송할 수 있다면 더욱 감사하겠지요. (순마다) 주님이 그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 고난, 예수를 전하는 고난 외에 그리스도인에게 또 어떤 고난이 있을까요? 네, 예수를 뒤따르는 고난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고난입니다. 주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고난인 이유는, 말씀이 우리의 이기적 본성과 거스르기 때문이지요. 13절 말씀처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할 만큼,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하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죄인이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주의 말씀을 삶으로 고백하기 위해 겪는 고통, 그것을 성전이 되어가는 고통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1월 암송구절 말씀처럼, 성경은 우리의 몸, 우리의 삶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간다고 이야기합니다. 내 몸과 삶이 거룩한 성전이 되기 위한 고통, 날마다 시간을 구별하여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비추어 내 삶을 갱신하고, 끊임없이 내 생활 속에 거룩함을 경작하는 고통, 그 고통이 바로 성도들만이 가지는 영광의 고난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 거기에만 머무르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이상훈 순장님 새교우 심방을 가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는데요, 주님은 자꾸 뭔가를 더하고 공급하라고 하십니다. 믿음만 있으면 끝나지 않고, 거기에 덕을 공급하고, 덕에는 지식을 공급하고, 지식에는 절제를, 절제엔 인내를, 인내엔 경건을, 경건에는 형제 우애를 또 거기에 사랑을…. 그러니 힘들고 어렵습니다. 끝이 없는 건축의 과정이 계속됩니다. 여러분 안에도 그런 고통이 느껴지시지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성전으로 빚어 가시기에 부대끼는 고통이 여러분 안에 있으실 겁니다. 한 발 앞으로 나아간 것 같다가도 다시 두 발 뒤로 물러난 것 같은 좌절감도 우리를 괴롭힙니다. 하지만 그 좌절이 멈추지 않는 한 분명 하나님이 그 건축을 완공하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성도의 고난은 예수의 몸을 이루는 고난입니다. 함께 교회를 이루는 고난, 함께 교회가 되어가는 고난입니다. 같이 믿어야 하기에, 함께 교회로서 지어져가야 되기에 겪는 고난도 만만치 않습니다. 혼자 믿으면 그래도 편하고 쉬울 텐데, 주님은 우리를 함께 지어 가십니다. 바울이 이걸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교회를 통하여’ 당하는 고난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주님 또한 교회의 머리로서 몸 된 교회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함께 모이고, 교제하고, 함께 예배하는 것이 실은 큰 고난입니다. 이 추운 날 여러분은 먼 길 달려 교회까지 오셔야 되잖아요. 그냥 집에서 혼자 예배하고 기도하면 좋은데 주님은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시고,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거기 계시겠다고 하시니, 교회를 이루는 것, 주의 몸이 되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와서 보면 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내가 정말 같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또 왜 그리 많은지요. 함께 있는 것이 고난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불편한 관계 속에서도, 우리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소위 황금률이라고 하지요. 내가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대하라는 이 말씀은, 우리를 대단히 피곤하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논어(論語)》에 보면 공자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지요.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보면,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제가 평생 동안 실천할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그것은 바로 용서의 '서(恕)'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己所不欲勿施於人]”라고 말하였습니다. 용서할 ‘恕’자는 같을 ‘如’ 아래에 마음 ‘心’이 놓인 글자인데요, 타인의 마음과 같은 마음, 그게 용서라고 했고, 공자는 그것을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타인에게도 행하지 말라는 해석을 덧붙인 겁니다. (물론 공자 역시 긍정적인 형식으로도 진술했습니다. 『논어』 옹야편에 보면, “무릇 仁한 사람은 자신이 세워지기를 바라는 방식으로 남을 세우고,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남을 도달하게 한다(夫仁者, 己欲而立人, 己欲達而達人.)”) 그런데 예수님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우리를 권면하십니다. “모든 일에서 남들이 너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대로 그처럼 그들에게 (먼저)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남이 싫어할 일 하지 않는 것을 안 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내가 남에게 원하는 바를 행하라고, 보다 적극적인 주문을 하십니다. 교회는 그래서 불편과 모험을 감내해야 하는 공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내 삶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난의 가능성을 가득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더구나 하나의 교회를 세워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큰 교회에 실망한 많은 분들이, 어떤 교회에 다니고 싶으냐고 설문을 하면, 대부분 ‘작고 건강한 교회’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하는 게 있지요. 작은데 건강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희생과 기도와 눈물이 필요한지를 잘 모르시고 하는 말씀입니다. 작고 건강하게 이미 세워진 교회를 가면 물론 좋겠지만, 그런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작고 건강한 교회는 함께 만들어가야 하고, 거기엔 크고 건강한 교회나 크고 건강하지 못한 교회에서는 요구되지 않는 엄청난 고난을 서로가 나눠져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감당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이 바로 작고 건강한 교회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가는 그것 자체가 성도의 고난인 이유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이 겪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해 생각을 해봤는데요,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영광의 고난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채워져 가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고난, 예수를 전하는 고난, 나 자신이 성전이 되는 고난, 우리가 교회로 함께 지어져가는 고난, 참 많고 힘든 고난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사실 이 내용들은 여러분이 다 이미 아시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이걸 장황하게 여러분께 설명한 것은, 성도의 고난이 우리의 영광이며, 영광을 향한 고난의 여정에 이미 우리가 들어와 있음을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 고난들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는 고난들입니다. 강요될 수도 없고, 또 억지로 짊어질 수도 없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계속 그 방향으로 인도해 가실 겁니다. 거기 영광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고난 앞에서 우리는 그 고난을 줄일 방법을 찾고 기도하기 전에, 그 고난을 뚫고 나갈 힘을 구합시다. 비겁하게 도망가지 말고, 그 고난과 함께 살 수 있는 믿음을 구합시다. 분명 아프고 힘들 것이지만, 또 넘어질 가능성이 많지만, 그 고난의 자리가 영광임을, 거기 있음이 우리에게 가장 큰 능력이며 경험임을 잊지 마십시다. 어차피 어려울 것을 알면서도 정현 선수는 페더러와의 그 4강 경기에 참여합니다. 고통을 참고 한 세트를 뛰고, 비록 졌지만 그 다음 세트에도 코트로 나갑니다. 왜요? 왜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 경기에 나갔을까요? 그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지, 페더러와 그 경기를 뛰어보는 것 자체가 그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겠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모두가 영광이라고 고백되는 그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힘든 고난의 자리에서, 그 고난에 합당한 자로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심을 기뻐했던 초대교회 사도들과 같이(행5:41), 나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큰 기쁨의 이유가 되기를, 그 고난이 없는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슬픔이요, 고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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