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고난도 함께(1)' 2018년 1월 21일 주일 설교
2018-01-2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80121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 설교
------------------------------------------------
로마서 8장 12~18절, 고난도 함께(1)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80121.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된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29) 본문 17절의 ‘고난도 함께’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여러분 행복하신가요? 행복하신 분, 손 한 번 들어보세요. 그럼 손을 드신 분 중에서 고난이라고 할 만한 것이 삶에 아예 없는 분 한 번 손들어 보세요. 이번에는 아까 처음에 손을 들지 않으신 분들에게 여쭤볼게요. 행복하다고 하지 않으신 분들 중에서 남에게는 없는 특별한 고난이 있는 분 손 한 번 들어보세요.
우리의 행복은 고난과 정반대의 개념은 아니지요. 고난이 있어도 행복할 수 있고, 고난이 하나도 없지만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걱정 할 필요 하나도 없는 재별 2세가 삶의 허무에 취해 마약에 중독되어 살아가기도 하고, 남들이 볼 땐 너무나 큰 고난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래도 행복하다고,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행복이지 고난이 없는 삶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로 고난을 직면하게 하고,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친히 우리를 고난의 광야로 인도해 가시기도 합니다. 본문 17절은 분명히 말씀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다. 이 17절은 명령문이 아니라 평서문인데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이 당연함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과 시험의 자리로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주중에 우리가 묵상을 하면서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서 계속 반복되어 나온 표현이 뭐냐면,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할수록,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가득 채울수록, 그는 점점 더 죽음에 가까이 갑니다. 성령으로 덜 충만했다면, 조금 덜 경건했다면 아마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아주 성령이 충만했고, 결국 고난을 당했고, 순교했습니다. 물론 그때 그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마치 천사의 얼굴처럼 행복으로 넘쳤다고 증언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경험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당하신 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내시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셔서 40일 금식을 하시게 됐고, 그때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고난과 시험, 이건 단순히 우리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실존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방향은, 결코 고난이 없는 평안, 고난이 없는 허무는 아닙니다.
성경은 지속적으로 성도의 고난을 이야기하고, 그 고난이 성도에게 필연적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피하는 것, 고난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인 어떤 종교나 신앙이 있다면, 일단 그건 성경과는, 진리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고난을 면할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이 좋아지면 고난을 피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되는 신앙, 신학이 있다면, 그건 십중팔구 사이비 아니면 이단입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대로 종교가 민중의 아편, 마약이 되는 건 간단합니다. 고난 없는 신앙을 말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럼 성도에게 왜 고난이 꼭 뒤따르는 걸까요? 오늘 본문은 왜 또 우리가 예수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하실까요? 고난이 다 끝나신 예수님이 또 고난을 받으셔야 한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고난에 관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말씀은, 아시는 대로 욥에 대한 기록, 욥기입니다. 성경은 그에게 닥친 지독한 고난이 그의 죄나 허물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오히려 그가 온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데반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그가 의로운 고난을 받았지만, 그가 의로웠기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은 스데반과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우선 모든 고난이 죄의 결과는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크게 그림을 보자면, 고난은 죄의 영향력과 연관되어 있지만 …) 죄로 인해 고난을 받는 일이 하나님의 공의이긴 하지만, 하나님은 또한 인내와 긍휼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요. 물론 고난은 나를 돌아보게 하고, 그래서 죄를 그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야기했지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다.”(벧전 4:1) 그러나 그 말이 죄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이런 뜻은 아닙니다. 죄를 멈추는 것은 고난이 가져오는 여러 유익 가운데 하나일 따름입니다. 고난이 죄로 인함이라는 것만큼이나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대로 이미 심각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존재에게 고난은 오히려 각성의 기회가 됩니다. 그래서 사탄은 그런 사람을 향해 일부러 고난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좋은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건드리고 시험을 하고 고난에 던지는 것은, 고난 외에는 그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욥의 경우였습니다.
성경은 욥이 당한 고난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합니까? 욥이 고난당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일종의 논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시작은 하나님이셨지요.
사탄에게 하나님이 약간 으스대는 말씀으로 이야기하십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 욥에 대한 하나님의 자랑이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사탄이 대답하기를,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 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이렇게 해서 욥이 고난 속에 던져집니다. 하나님이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신 거지요.
물론 욥은 이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저 천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 말 그대로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합니다. 당연히 고난의 이유는 욥에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만약 왜 욥이 고난당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다면, 욥은 그래도 견디기가 좀 더 수월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삶의 고난들이 모두 그런 것처럼, 욥도 그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고난에 빠져 듭니다.
사실 고난의 이유를 안다면 우리는 그것을 고난이라 부르지 않을 겁니다. 고난은 보통 그 원인을 도저히 알 수 없을 때, 그런 삶의 어려움을 일컫는 말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 “도대체 왜 이런 어려움이 ….” 그 이유와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진정한 고난입니다.
이걸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삶의 어려움을 다 고난이라,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이유를 모르는 것이,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또 나 아닌 다른 누군가, 혹은 사회나 시스템의 원인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이유를 모른다면, 우리는 통상 고난이다, 일단 이야기하지요. 하지만 고난의 이유를 분명하게 아는 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욥기의 거의 대부분이 고난의 이유를 찾는 데 할애된 것도 그래서입니다. 무작정 고난이라고 할 게 아니라, 그래서 그냥 절망할 것이 아니라, 먼저 고난의 이유를 생각해보는 게 우선입니다. 물론 그럴 힘이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욥의 경우처럼 정말 우리가 알 수 없는 고난도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나 욥처럼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은 그런 존재에게는 더욱 더 말입니다. 예수 잘 믿어서 고난이 없다, 모든 것이 형통하다, 여러분 이런 말에 주의하십시오. 예수 믿는 신앙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잘 믿어서 고난이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신앙이 별로여서 고난이 없을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예수님과 연합된 자는 반드시 예수님의 고난을 경험한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니까요.
여러분, 그럼 지금은 어떨까요? 지금은 그러한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내기가 없어졌을까요? 저는 아닐 것 같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향해 계속 같은 말을 할 겁니다. 무슨 말을요? “아무개가 이유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것 같으세요? 하나님이 그를 복 주시고, 그를 보호하시고, 그를 풍요롭게 하시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시험해보세요. 고난으로, 광야로 인도해 보세요. 분명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도 사탄은 하나님을 향해 추궁할 겁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할까요? 욥이 당한 고난을 생각하시며, “그래 네 말이 맞다. 까닭 없이 나를 경외하는 인간이 어디 있겠느냐. 너 잘났다. 그러니 가서 네 할 일이나 해라.” 이러고 마시면 참 좋은데, 그러셔야 하는데, 하나님은 꼭 거기서 멈추시지 않습니다. “그래? 아니거든! 아무개는 이유가 있어서 나를 경외하는 게 아니거든. 한 번 해 봐라. 아무개가 그것 없다고 나를 원망하고 나를 경외하지 않는지…. 네가 한 번 시험해 봐라.”
여러분 이렇게 되면, 이건 사탄의 시험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시험인가요? 대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당하는 시험이 모두 우리 욕심 때문에 생기는 거라고 교훈하는데요…, 유명한 말씀이지요.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3~15). 이것은 사실 완전히 하나님의 입장만을 생각한 것인데요, 굳이 야고보 사도의 입장을 헤아려 해석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비록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믿음의 고난과 시험보다는, 우리의 정욕으로 인해, 욕심으로 인해, 보다 적극적으로 빠지는 죄악의 시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하나님 편에서만 생각한 거다, 하는 인상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애매한 입장이지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시고, 또 그것을 감당할 힘도 주시며, 그 시험을 피할 길도 주신다는 말씀으로, 야고보 사도의 말보다는 훨씬 더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지요.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여기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이라는 말의 의미는 세상 사람들, 일반 사람들이 다들 겪는 그런 시련 외에 다른 시련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 하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라고 해도 일상적으로 당하는 고난들은 다 겪기 마련이고, 그것을 겪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하나님이 빛과 공기를 주시듯,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고난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한 부분이다, 이걸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욥이 겪은 고난에 직접 적용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물론 욥의 고난도 세상 사람이 겪을 수 있지요. 그러나 욥이 과연 바울 사도 말처럼, 그 시련을 아무 문제없이 다 잘 감당한 것인지, 하나님이 그에게 이길 힘도 주시고, 또 피할 길도 주신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욥도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고, 자기 안에 있는 죄의 문제를 보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입장, 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입장은 예수님을 통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서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에 관하여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나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6:13) 지난 수요일에 야곱의 외동딸 디나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를 악에서 구하여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함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주님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라는 이 부분은,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지 마시고”가 됩니다. 사실 이 부분은 기도이긴 하지만, 2인칭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바 아버지,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지 마세요!”라는, 조금은 강한 어조의 기도인 것입니다. 어쨌든 주님은 우리에게 아빠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라고 친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저는 적어도 예수님의 이 기도, 주님이 가르쳐주신 그 기도의 응답이 욥의 시험으로부터,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시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 보존하여 주심을, 또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믿습니다. 사탄의 내기보다 아들, 딸의 요청이 더 중요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위해서나, 또 특히 성도들을 중보하며 기도할 때, 이 기도를 빼먹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힘든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우선 이 기도부터 합니다.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세요, 하나님. 그리고 제가 분별할 수 없고, 이겨낼 수 없는 악에서 구해 주세요. 이 땅의 모든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아버지의 것입니다.” (주문처럼 외우시지 마시고, 의미를 기억하며 꾹꾹 눌러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올 해 들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과 영화는 우연치 않게도 모두 고난에 관한 내용입니다. 영화는 지난 주중에 봤는데요. 오래 전에 구입해 놓고 보지 못했던 영화로, 이창동 감독의 ‘詩’라는 영화입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창세기 34장, 세겜의 비극과 디나)를 하기 전에 이 영화를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 다음날 보는 바람에, 저 혼자 그 벅찬 감동을 간직하고 있는데요, 여러분도 꼭 한 번 보시기를 권합니다. 죄에 대한 고난에 대한 가장 깊은 수준의 예술적 해석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1,000원이면 보실 수 있는 …)
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작년 12월 말부터 연초까지 읽은 김훈 작가의 ‘흑산’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읽으셨겠지만, 주 내용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에 관한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수많은 사람들, 대략 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네 번의 큰 박해를 통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외국인 선교사와 사대부로부터 천민,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신앙으로 인해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배교했던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가 치열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 책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책 내용 중에서, 한 이름 없는 소작농의 아내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쓴 시, 기도문이 있는데요,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주여, 매 맞아 죽은 우리 아비의 육신을/ 우리 아들이 거두옵니다./ 주여,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당신의 주검을 거두신 모친의 마음이 어떠했으리까.// 하오니 주여,/ 우리를 매 맞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어미 아비 자식이/ 한 데 모여 살게 하소서.//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을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주여, 주를 배반한 자들을 모두 부르시고 거두시어/ 당신의 품에 안으소서./ 주여, 우리 죄를 묻지 마옵시고,/ 다만 사하여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설 ‘黑山’, 한 소작농 아내의 기도)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을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이 부분을 읽는데 저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눈물을 닦고 정신을 차렸을 때, 다시금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지 마세요! 우리를,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악으로부터 구원해주세요. 이 땅의 모든 권세와 능력이 아버지의 것이지 않습니까?” 이 기도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이 땅의 많은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해서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할 기도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결국 응답될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해서는 아직 시작도 하질 못했는데요, 고난에 관한 서론적인 말씀을 나누려다가 이야기가 많이 본문에서 멀어졌습니다만, 성도의 고난, 하나님의 자녀들의 고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계속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면…, 그건 욥기에서 제기한 한 가지 중요한 숙제인데요, 그것은 욥의 시험이 본래 무엇을 위한 시험이었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이 하나님께 제기한 불만이 뭐였습니까? 욥은 절대로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잘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 그것이 아니라고, 좋은 것, 복을 줬기 때문에 나를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유 없이, 까닭 없이, 나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항변하십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이유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것이지요. 여러분, 결국 우리의 신앙은, 이 고백을 향하여 가는 여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유 없이 사랑할 수 있느냐, 하나님을 까닭 없이 경외할 수 있느냐, 거기에서 우리의 신앙은 중요한 변곡점을 지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숱한 고난들은 바로 이 문제를 풀기 위한 긴 싸움의 성격을 갖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뒤따라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한복음 6:26) 먹고 사는 것 때문에, 배불리 먹기 위해서, 그것 때문에 주님을 찾고 주님을 따라가고 있음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다름 아닌 주님 자체를 먹고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보상, 다른 이유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체를 보상으로 삼으라는 것이지요. 하나님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이유로 하는, 그 사랑으로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고난이 우리의 삶을 덮쳤을 때,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주신 많은 것들이 사라졌을 때, 그리고 하나님 홀로 우리의 삶에 소망으로 남아 도드라지실 때, 그때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어떤 모습인지, 정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내가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니면 나무에게 빌고, 하늘에 빌듯, 그렇게 하나님께 비는 그런 신앙은 아닌지,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는 그런 신앙은 아닌지, 스스로 정직하게 질문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이유 없이 사랑하십니다. 보상 없이, 우리가 뭔가를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자녀이기에 우리 자체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라, 천국 가기 위해서도 아니라, 다른 이유 없이 오직 그저 나를 사랑하는 그 하나님을 바라고 사랑할 수 있는 길로 성령은 지금도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고난은 그 길에 아무 장애가 되기는커녕 더 분명한 푯대가 되어 우리를 밝히 인도해줄 것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했던 7년의 시간, 그 고난의 시간을, 라헬 사랑하는 마음에, 라헬을 아내로 맞을 생각에, 단 며칠처럼 여기며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길에 찾아오는 고난 역시, 우리를 좌절하고 넘어지게 하기보다는 더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를 인도해 갈 것입니다.
혹시 지금 고난의 자리에 머물러 계시다면, 또 우리가 앞으로 어떤 고난 속에 들어가게 된다면, 여러분, 부디 잠시 멈춰 서서, 오늘 본문 18절 말씀처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이유 없이 사랑하고 경외하는 믿음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삶의 모든 문제들이, 우리의 생각을 필요로 합니다. 그냥 우리의 기분이 이끄는 대로, 우리의 몸이 원하는 대로, 고난은 불행이다, 평안은 행복이다, 이렇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진실인 것처럼 믿고 살아서는 안 되고, 우리는 잠깐 멈춰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는 이유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이런 것들이 설사 내게 없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할 것인가? 생각하는 그 자리가 우리의 구원의 자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혹시 삶에 특별한 고난이 없는데도 기쁨이 없고, 만족이 없다면, 하나님이 참으로 여러분 안에 있는지,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쁨의 근원에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C.S. 루이스의 말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완전한 만족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우리가 또 다른 세상을 위해, 오직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도록 지어졌기 때문”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도의 진짜 고난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이어서 계속 나누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고난을 당했지만, 왜 우리는 여전히 고난을 피할 수 없는가? 바울은 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다고 말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그 고난을 왜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왜 불가피하며, 그 고난의 구속적 의미는 무엇인가? 뭐 하나 쉬운 주제가 없지만, 함께 또 씨름해 보십시다. 성령께서 우리를 바른 생각, 바른 결론으로 인도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