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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함정" 2014년 3월 22일 새벽기도회 설교 (사순절16)

2014-03-2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7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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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2 토요일 새벽기도회  ----------------------------------------------------- 로마서 4장 13~17절, 사순절(16)  믿음의 함정    * 설교 음성 : http://www.4shared.com/mp3/Vq00UIEMce/20140322__16_.html 사순절 열여섯 번째 말씀으로, ‘믿음의 함정’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믿음의 문제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설명하기 위해 오늘 사도 바울이 예로 꺼내드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100세가 되어서까지 하나님이 그를 많은 민족의 아비로 삼으실 것을 믿었던 아브라함은 믿음을 말할 때 항상 듣게 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언제나 한 가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어제도 잠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우리의 믿음 자체가 하나의 행위나 공로가 되는 것으로 결코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측면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다 보니, 우리는 종종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아브라함이 잘 믿어서 정말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구원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면 여러분 구원이 어찌 은혜가 되겠습니까? 다시 믿음이라는 하나의 인간적인 ‘의’만 남게 되고, 아브라함은 우리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신앙의 거인이 되고 맙니다. 사실 이 부분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다.”라는 말은 그가 훌륭한 믿음의 모범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표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구원이 아브라함을 통해 시작되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요컨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강조하는 표현, 그것이 바로 성경의 ‘믿음’이라는 말 속에 담긴 실제적 의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자꾸 강조하다보니, 어느 순간 우리는 믿음이 또 하나의 율법적 행위가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과거에 수많은 율법이 있었고 그걸 다 지키면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율법이 하나의 율법, 곧 믿음으로 응축되었고, 이제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다, 이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실상은 정반대이지요. 복음의 핵심은,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얻는다.”가 아니라 “아무 것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어떤 조건도 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에 해당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온다는 표현을 다르게 할 수 있는 방식이 없기에,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여 설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본받아야 할 어떤 대단함이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강조점 자체가 아브라함이 아닌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차이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거의 본질적인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에 길게 기록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우리가 본받아야 할 어떤 위인의 이야기로 읽으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는, 아니 성경의 모든 믿음의 거인들의 이야기는, 실상 그들의 훌륭함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믿음의 본질, 곧 인간이 무능하고 부도덕하며 궁극적으로는 믿음까지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스스로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을 지켜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이야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이 정말 좋아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을 끝까지 잘 믿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언약이 있고난 후 아들 이삭을 낳을 때까지 아브라함은 늘 흔들렸고 의심했습니다. 염려와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방법으로 아들을 가지려 하여 결국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까지 낳았습니다. 믿음이 아니지요. 아들 이삭을 가지기 1년 전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다시 듣고 하나님을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기에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감추거나 포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지금 핵심은 아브라함의 견고한 믿음이 아니라, 그의 그런 연약함 속에서도 여전히 그를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택함 받은 자가 아브라함이었으며, 저와 여러분 역시 바로 그 사랑으로 택했기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르게 된 것이고, 결국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같은 모습, 같은 믿음, 같은 구원의 자리에 있음을 오늘 로마서는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래 생각하던 아브라함의 대단하고 거창한 믿음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이와 같은 구원의 섭리와 신비를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믿느냐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믿음을 믿을 때가 많습니다. 만약 우리가 나 스스로를 바라보며, 내가 얼마나 잘 믿는지, 얼마나 경건하며, 얼마나 바른지, 이런 부분에 믿음의 초점을 둔다면, 그것은 이미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정반대편에 서 있는 셈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나의 거룩한 상태나 하나님을 향한 견고한 신뢰의 모습이 아닌,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붙들고 계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어서 가는 천국이 구원입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구원의 본질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그것에서 이미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가는 것이야 당연한 결과이지요.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한 관계에 놓여있다는 말, 거기에도 무슨 인간적인 조건이 필요하다고 느껴지십니까? 행하는 모든 것이 죄이고, 품는 모든 마음이 다 더러움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로 당신과 화목하게 하셨는데,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에 더 필요한 무언가가 또 있어야 하겠습니까? 이번 Talk Bible 교리 공부에 관한 지체들의 질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성도의 친구 하나가 세례를 받고 정말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대적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이런 류의 사람들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답이 무엇이겠습니까? 답은 이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전혀 믿는 것 같이 살지 못하는 살지 않는 사람들을 당신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소위 믿음이라는 방법을 택하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친구와 얼마나 다르다고 여기십니까? 그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저는 제 스스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작아지거나 약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고, 지금도 그 은혜 안에 거할 때에만 비로소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길게 말씀을 드렸지만 결국 요점은 하나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감당해야 할 몫을 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진 우리가 해야 할 결단이 있다면, 내가 더 훌륭한 성도가 되겠다, 더 나은 모습이 되겠다는 나의 의를 향한 열정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의 의를 놓지 않겠다, 설사 내가 다시 죄를 짓고, 다시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이 된다고 해도, 여전히 나를 붙들고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놓지 않겠다, 하는 단순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믿음이라는 시소를 타고 있습니다. 그 시소의 한 편에는 나의 노력과 의지와 의가 놓여있고, 반대편에는 하나님의 열심과 의지와 사랑이 놓여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무게를 더 두고 믿습니까? 비교할 수도 없이 내가 아닌 하나님께만 초점을 두는 것, 그것이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며, 아브라함을 통해 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시소를 내 쪽으로 기울이기 위해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반대편에 계신 주님의 그 사랑을 받고 누리고 그 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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