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믿음과 흰색 코끼리" 2014년 3월 21일 새벽기도회 설교 (사순절15)
2014-03-2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40321 금요일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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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 1~8절, 사순절(15) 믿음과 흰색 코끼리
* 설교 음성 : http://www.4shared.com/mp3/9DHYaIWAba/20140321__15_.html
사순절 열다섯 번째 말씀으로, ‘믿음과 흰색 코끼리’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가끔 금융신문이나 경제를 다루는 매스컴에서 ‘흰색 코끼리’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금융권에서는 이 ‘White elephant, 흰색 코끼리’를, 수익성이 별로 없는 투자 기회로 비유합니다. 투자를 했는데 수익성이 없는 골치 아픈 투자건을 가리킵니다. 원금 생각에 팔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계속 가지고 있기도 어려운 그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바로 흰색 코끼리인데요, 본래 이 용어는 불교문화권의 국가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고대 태국의 국왕은 자기가 미워하는 신하에게 흰색 코끼리를 하사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 코끼리가 매우 신성시 되는 귀한 존재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를 받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참 고역입니다. 숭배의 대상이니 일을 시킬 수도 없고, 함부로 다룰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코끼리가 보통 키우기가 어려운 동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먹기도 많이 먹고 공간도 엄청 차지합니다. 더구나 평균 수명이 길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키우다가는 집안이 휘청거릴 지경입니다. 요즘 경제가 어려워져서 애완동물을 유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요, 이건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왕이 하사한 것이기 때문에 혹 그 코끼리가 죽거나 하면 왕권에 대한 반역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애물단지가 되는 셈입니다. 호의의 선물입네, 하고 받았지만, 실상은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곤란한 선물이 없고, 오히려 코끼리를 키우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문득 믿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이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흰색 코끼리처럼 여기는 분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삶이 비록 고단하고 힘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애물단지나 곤란한 선물 정도로 여기지는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의 삶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이것이 아예 틀린 이야기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고 여긴 나머지, 우리가 마치 하나님을 위해, 구원을 위해 매우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과 로마서 전체가 두고두고 강조하는 것은, 아시는 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그 믿음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한 우리는 때로 이 믿음 자체가 하나의 공로나 일로서 여겨지는 때가 생기게 됩니다. “숟가락만 얹기는 했지만, 나도 분명 믿었어. 믿은 공로가 있고, 내 의지가 있는 거야. 내가 믿었으니 구원을 받았지, 안 믿었어봐, 아무 일도 없었을 것 아니야? 더구나 믿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믿기 위해 포기할 것도, 희생할 것도 얼마나 많은데, 다 일이야. 믿음도 그 믿음의 삶도 다 일이란 말이지.” 이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길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벌써 이쯤 되면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이 마치 앞서 이야기한 ‘흰색 코끼리’처럼 되고 맙니다. 받는 것도 쉽지 않고, 그걸 지키고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은, 말 그대로 나의 일, 나의 공로가 됩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인데, 그렇게 보면 분명 내 공로가 아닌데, 그 구원을 위해 우리는 기꺼이 받기로, 그러니까 믿기로 결단했고, 수많은 어려움을 감수하기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다시 인간의 ‘의’가 고개를 들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 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을 말합니다. 조금 일했다거나, 뭐 그런 것이 아니라, 일한 것이 없다는 단정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해 묘사하는 그 앞부분도 마찬가지 관점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 그것은 은혜이지 보수가 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구원과 관련된 어떤 부분에서도 인간의 행위는 개입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은 행위가 아니라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받는’ 그 행위 정도는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그것도 어불성설입니다. 우리는 지금 흰색 코끼리를 받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받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 그런 선물입니다.
누가 갑자기 여러분에게 아무 조건 없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초고층 타워펠리스 한 채를 선물하겠다고 하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받는 것을 주저하고 망설이시겠습니까? 이거 관리비는 어떻게 되나, 이거 너무 나한텐 과한 거 아닌가, 누가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뭐 이런 고민하며 기회를 놓치시겠습니까? 아마 세상 어디에도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운석이 떨어져도 그걸 찾겠다는 사람들이 구름떼 같이 몰려드는 상황에서, 타워펠리스를 준다고 하면 아마 못할 일이 없다 할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믿음은 이보다 더 합니다. 아무도 싫어하지 않는 모두가 원하고 모두가 갈망하는 것을 그저 받겠다고 하는 소극적인 동의만 해도 언약은 체결됩니다. 이것은 로또 당첨보다 더 한 값없는 은혜입니다. 복권은 내가 사기라도 한 것이지만, 구원은 아예 공짜였으니까요. 거절할 수 없는 귀한 선물이 제안되었고, 나는 그것을 받았습니다. 내가 한 일이 있습니까? 내가 받을 의가 있겠습니까?
누구는 아브라함의 할례를 말하며, 순종을 말하며 그래도 아브라함도 대단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를 하기 전에 이미 믿은 그 때 그는 의로 여김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할례와 순종 모두 그 믿음의 의가 있고 난 이후의 일이기에, 그 또한 아브라함의 공로나 보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에는 자랑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잘 믿고 못 믿고도 없는 셈입니다. 다 거기서 거기, 도토리 키 재기일 따름입니다. 수십 억, 수백 억 하는 호화 저택을 다 한 채씩 받으면서 누가 더 환호를 했느냐, 누가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았느냐, 그게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우리의 믿는 바 행위는 자랑의 대상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자랑을 하려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정말 아무나 갈 수 없는 믿음의 길을 가시는 선배 목사님이나 선교사님, 혹은 귀한 믿음의 성도님들을 보면 한결 같이 당신의 믿음을 자랑하시지 않음을 봅니다. 이상하게 예외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참고 견디고 승리했는데,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합니다. 반대로 별 것 아닌 희생, 다 드러나는 희생, 칭찬받는 희생, 그런 희생을 하면서 기어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른 이의 칭찬에 우쭐 해지고, 마치 내가 대단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처럼 여깁니다. 솔직히 저도 문득 그런 마음이 들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귀의 마음입니다. 믿음에는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믿음이, 큰 노력과 열심으로 지켜낸 어떤 대단한 업적이라 여기면 안 됩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지켜냈다고 하는 우리의 삶, 우리의 믿음이 실은 다 먼저 맛보시고,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지키심의 열매일 뿐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해서나, 또 구원 받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나, 일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랑하고 있다면 우쭐해 하고 있다면 남과 비교하고 공을 논하고 상을 논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그가 구원과 상관없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증거일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하십시오. 은혜는 잊고 살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기억하고 인정하고 감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은혜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 안에 거하십시오. 은혜 안에 거할 때 감사와 기쁨이 넘치며, 다시 은혜가 채워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참된 은혜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찾아 온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게 됩니다. 나의 부모,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자녀, 실은 다 내 공로와 내 업적, 내 자랑이 아니라, 오직 은혜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은혜가 사람을 겸손케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겸손한 삶, 은혜 안에 거할 때 이루어집니다.
가장 좋은 것을 값없이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하루도 다시 선물로 주셨습니다. 부디 이 귀한 날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온전히 거하며, 그 은혜를 자랑하는 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