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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2017년 12월 3일 주일 설교

2017-12-0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3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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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6  오순절 후 스물다섯 번째 주일 설교  ---------------------------------------------------------------------- 로마서 8장 1~11절,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1203.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된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25) 본문 4절의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본문 1절의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건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이 사라졌다는 것만이 아니라, 죄에 대한 선언, 유죄의 선고 자체가 내려질 수 없도록, 그래서 아예 형벌을 정할 수 없도록, 예수님이 우리의 상황과 조건을 변화시킨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에는 중요한 목적이 있었지요. 생명의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을 통해 죄와 형벌이라는 그 틀 자체를 깨뜨리신 것은, 단지 우리를 용서하시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우리로 죄를 이기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했습니다. 본문 4절 말씀처럼,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하나님이 믿음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축복하실 때부터 이미 드러나 있었음을 봤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이, 그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그땐 그의 가족과 후손이지요)가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창18:19). 하나님의 도, 곧 하나님의 법(실은 신약에서는 예수님, 나는 길이요 … 요14:6)을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 그것이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이자,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의와 공도, 히브리어로는 ‘쩨다카‘와 미슈파트’라 하는데요, 우리말로는 보통 정의와 공의라고 번역되는 말입니다. 한 번 따라 읽어보실까요? ‘쩨다카‘와 미슈파트’, 이것은 율법의 본질이자, 성경 전체를 관통하며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내요입니다. 특별히 한 개인의 신앙과 인격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나라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 정의와 공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천국’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 ‘쩨다카‘와 미슈파트’입니다. 메시아의 예표라 할 수 있는 다윗이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성경은 그가 모든 백성에게 다름 아닌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했다고 말씀합니다(대상18:14). 또 솔로몬을 찾아 온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향해 하는 축사는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잘 나타납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 당신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려고 당신을 세워 그들의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하게 하셨도다 ….”(대하9:8) 정의와 공의, ‘쩨다카‘와 미슈파트’는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반대로 정의와 공의가 무너졌을 때,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없는 신앙은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다고, 그건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순종하지 않고, 결국 이스라엘에 더 이상 소망이 없게 되자,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언젠가 그리스도가 오셔서 ‘쩨다카‘와 미슈파트’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고 직접 목도했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렇게 외쳤지요. “5.…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미슈파트’와 ‘쩨다카’(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여호와 칫키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23:5~6) 예수님이 왕으로서 행하실 것이 단지 망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가 회복된 그 나라를 이루시는 것임을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걸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신 것도 당연히 ‘쩨다카‘와 미슈파트’였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나라,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성취되는 나라, 그리고 그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먼저 구하라고,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 여전히 죄와 사망 아래 있는 사람들,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모르는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너희는 구하지 말고, 먼저,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구하라고, 그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 줄 다 아시는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실 것이라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 그것은 ‘쩨다카‘와 미슈파트’이며, 이것은 성도의 구원과 너무나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도대체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정의와 공의(‘justice’ and ‘righteousness’), 그 핵심이 무엇입니까? ‘쩨다카‘와 미슈파트’의 핵심은 자구책이 없는 사람, 즉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사람, 스스로 일어설 수 없고,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지킬 수 없는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것, 그것이 ‘쩨다카‘와 미슈파트’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는 말씀이 그런 맥락의 표현이지요. 모든 사람이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가장 대표적인 억압이 바로 죄와 죽음의 억압이니 말입니다. 성경에서 이처럼 스스로 자신을 구할 수 없는 사람의 대표적인 부류가 세 가지로 나오는데요, 혹시 기억나시는지요? 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입니다. 이 세 단어가 하나의 세트(set)처럼 등장하지요. 가정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져서 스스로는 절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절대적 소수로서 억압과 학대의 대상이 되는 나그네는, 성경이 정하는,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해야 할 최우선의 대상입니다. 여기 나그네는 단지 길을 떠나 어떤 여정 위에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한 나라에서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이민자나 난민을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나그네들이 주변에 정말 많아졌지요. 외국인 노동자들, 농어촌으로 이민을 온 결혼 이주 여성들, 탈북하신 분들, 등등 예수 믿는 사람과 교회가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해야 할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물론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 이 세 부류만으로 ‘쩨다카‘와 미슈파트’의 대상이 제한된 건 아닙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없고, 자유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을 찾고, 다가가,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정의와 공의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가장 중심에 놓았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율법의 목적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쩨다카‘와 미슈파트’는 여러 가지 율법 중에 한 가지이거나, 그것보다 조금 더 중요한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의 본질이자 근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택하시고 그와 관계를 맺고 언약을 주실 때,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사랑과 자비가 다름 아닌 ‘쩨다카‘와 미슈파트’라는 뜻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 밑바닥에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들은 모두 이방인이었고, 나그네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때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집트의 종이었고, 광야의 나그네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로마의 식민지 백성이었고,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또한 죄와 사망의 법 아래에서 신음하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유독 ‘너희가 나그네였음을 기억하라’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너희가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필요한 사람이었음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쩨다카‘와 미슈파트’였던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 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행하신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 또한 이 땅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하여 그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의를 행하는 것, 공의를 행하는 그것은 단지 어떤 도덕적 선행이나 인격적인 배려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일부여야 하고, 우리의 신앙의 일부여야 합니다. 율법이 지향하는 것,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 그리고 우리 안의 성령이 소망하시는 것, 모두가 다름 아닌 ‘쩨다카‘와 미슈파트’라는 걸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묵상하는 호세아서를 비롯한 구약의 예언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가 이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외면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새들보다, 짐승보다 못하다고까지 하셨습니다(렘8:7).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하는 것은 성도의 여러 의무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근원이고, 그 실체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가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우리 안에서 샘솟는 ’쩨다카‘와 미슈파트’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삭개오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여리고라는 곳에 키 작은 세리장 삭개오라는 이가 살았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깨끗한 자인데, 그의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지만 민족을 등지고 로마의 하수인이 되어 오로지 출세만을 생각한 사람. 결국 그 뜻을 이루고, 사기와 강탈로 엄청난 부자가 된 사람. 유대인들의 원수이자, 여리고에서 가장 큰 죄인으로 멸시 받던 사람.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 주님이 그 나무를 향해 걸어가십니다. 그리고 그를 보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서 묵어야겠다.” 급히 나무에서 내려온 삭개오가 싱글벙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장 더러운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고, 수군거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때 삭개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시키지도 않은 말을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물질이 있으면, 그것의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여러분 주님이 언제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까? 구원이 언제 그의 집에 임했습니까? 그가 예수님을 만난 시점입니까? 그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신 때입니까? 삭개오가 “저, 예수님 믿습니다!” 말할 때입니까? 아닙니다. 구원은 그가 스스로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으로, 자원하여, 넘치게, 정의를 행할 때입니다. 그는 율법이 정하는 것보다 넘치게 정의를 행합니다. 남의 것을 빼앗으면 율법은 두 배로 배상하라 명령하지요. 그런데 삭개오는 네 배로 갚습니다. 예수님이 시켜서가 아니라, 그 마음에 구원이 임해서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이것입니다. 여기가 구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율법의 힘이 아니라 다른 힘으로 넉넉히, 넘치게 이루어내는 거기가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임을 여러분 믿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 구원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야지, 하는 그 값싼 복음의 이상한 구원 말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진짜 구원 말입니다. 이기심과 죄악만 무성하게 자라던 우리의 삶을,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풍성하게 맺히는 삶으로 갈아엎으신 진짜 구원, 삭개오의 그 구원이 저와 여러분에 오늘 이 시간 충만히 임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여러분, 그 일은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삭개오가 율법을 몰라서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하지 못한 게 아닙니다. 알지만 못합니다. 그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건 율법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3절이지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연약한’이라는 형용사는 율법에 걸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 즉 죄로 물든 우리의 이기적 본성에 걸립니다. 우리의 육신이 약해서 율법이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서 이루어내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졌습니까? 율법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그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법을 이루기 위해 법 자체를 없애버리신 겁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법을 없앤 것이 아니라, 법을 우리 마음 가운데 새겨 넣으신 겁니다.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 구약 말씀 한 구절 찾겠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1~33절입니다(구약성경 1102쪽). “3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멘. 31절에 ‘새 언약’이라는 말이 바로 ‘신약(新約)’이라는 말이지요. 새 언약은 어디에 있다고 하십니까? 네 33절에 그들의 속에, 그들의 마음에 기록해 두겠다고 하십니다. 종이 위에 기록된 법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법으로 기록하시겠다고, 그래서 언약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게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로마서의 표현으로 바꾼 것이 바로 4절입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 이것이 우리 안의 성령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가르치시며, 그것을 기쁨으로 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약해서 할 수 없던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넉넉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령은 우리를 은혜로 날마다 새롭게 하십니다. 오늘 성령의 이 기름 부으심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구원이 임했습니까? 우리 고백교회 안에 구원이 임했습니까? 예수 믿으니 평안하고 좋다, 행복하다, 감사하다, 그게 끝이면 안 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기 멈출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근심하며 탄식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쩨다카‘와 미슈파트’는 절대로 어떤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쩨다카와 미슈파트’는 늘 어떤 동작이나 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그런가보다, 그래야지, 이런 마음의 생각이 아니라, 삭개오의 경우와 같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역사하심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쩨다카‘와 미슈파트’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감동이 있을 때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또 기도하며 자꾸 고민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 옆에 누가 고아이고 과부이며 나그네인가, 돌아봐야 합니다. 생활의 염려에 눌려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나는 부자도 아니고, 우리 교회는 넉넉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중에 형편이 좀 나아지면 그때 해도 되지 않나, 우리가 묻는다면, 주님의 이미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하는 사람, 가정, 교회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행여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성도는 세상의 누구에게라도 소위 ‘갑질’ 같은 거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랬다면 회개하십시오. 네 배로 갚으십시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다가 망했습니다. 여러분 갑질하는 사람들의 최후를 지켜보십시오. 그들의 운명을 보면 하나님의 성품이 보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로 죄를 용서하시고 눈감아 주시는 그런 구원이 아닙니다. 그 죄를 넉넉히 이기고, 정의와 공의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며, 은혜임을 잊지 마십시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했을 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저와 여러분, 우리 고백교회가 되기를, 그래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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