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017년 11월 26일 주일 설교
2017-11-2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3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71126 오순절 후 스물다섯 번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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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1~11절,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112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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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24) 본문 1절의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음악회 같은 곳을 가끔 가게 되면 한 가지 고민이 생깁니다. 과연 언제 박수를 쳐야 하나 하는 겁니다. 특별히 여러 악장으로 된 협주곡이나 교향곡 같은 경우에 더 어렵지요. 곡을 잘 모를 경우, 각 악장이 끝날 때마다 쳐야 되나 다 끝나고 한꺼번에 쳐야 되나, 어렵습니다. 물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별 문제가 없지만, 정말 박수를 치고 싶을 경우엔, 이것 또한 큰 고민거리입니다.
보통 여러 악장으로 된 곡의 박수는 모든 곡이 연주된 후에 치는 게 맞습니다. 지휘자를 비롯한 연주자들은 전체 악장을 큰 호흡으로, 하나의 연결된 작품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중간에 하나의 악장이 끝나고 치는 박수는 연주자들에게 큰 방해 요인입니다. 그래서 요즘엔 아예 중간 박수를 자제하는 안내를 연주 시작 전에 미리 공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전체의 곡을 다 모른 채 연주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 중간에 박수를 치곤하는데요, 이러한 박수를 일컬어 소위 ‘모른다 박수’라 합니다.
그런데 이 박수 말고도 ‘안다 박수’라는 게 있습니다. 이건 정반대의 박수인데요, 곡을 너무 잘 알아서 정확히 그 연주가 언제 끝날지를 이미 다 예측할 수 있는 분들의 박수입니다. 이런 분들은 보통 연주가 끝나자마자 정말 기다렸다는 듯이, 곡의 마지막 음표가 연주되자마자 벼락같이 박수를 칩니다. 그것도 그냥 박수를 치는 게 아니라, 큰 소리로 연신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칩니다.
사실 이 ‘안다 박수’ 역시 ‘모른다 박수’ 이상으로, 연주와 감상에 상당한 지장을 줍니다. 연주자들과 관객 모두가 연주가 끝난 후 몇 초 간은, 깊은 여운과 감동을 충분히 누릴 시간이 필요한데, 이 ‘안다 박수’가 그런 감흥을 다 없애버리기 때문입니다. ‘모른다 박수’는 실수니까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만, 이 ‘안다 박수’는 왠지 좀 불편함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자만과 조급함은 비단 이러한 연주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겁니다. 우리의 삶 곳곳에서 우리는 그저 좀 알고 있다는 이유로 많은 감동과 여운을 없애버리기 십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또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이거 알아, 나 이 말씀 익숙해’, 하는 생각이 우리를 별로 옳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어떤 하나의 틀 안에 가두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로마서 8장을 이제 본격적으로 강해하기 위해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스스로에게 질문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기존의 모든 생각들, 교리들, 어떤 틀 같은 것들로부터 최대한 자유롭게, 말씀 그대로 묵상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말씀을 함께 나누실 여러분께도 같은 고민을 부탁드립니다. 이미 안다는 생각은 잠시 내려놓고,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박수를 쳐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잠시 내려놓고, 최대한 본문에 있는 말씀 그대로, 마치 처음인 듯 묵상하시고, 또 그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풀어 알게 하시는 성령님의 오늘 이 자리의 역사하심과 연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지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구원이라는 것이,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임을 살펴봤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시작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의 가장 중요하고 첫째가는 특징을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네, ‘결코 정죄함이 없다’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가 보게 되는 가장 중요한 내 삶의 변화이자, 모든 변화의 시작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할 때의 출발점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 여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다, 축복이 있고, 위로가 있다, 성경은 이렇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너무 행복하고 좋아, 이건 너무 박수를 빨리 쳐버려서 진짜 중요한 내용을 무시한 ‘모른다 박수’ 같은 반응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 그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여기서 출발합니다.
사실 본문 1절의 원문은 우리말처럼 ‘그러므로 이제’로 시작하지 않습니다(Οὐδὲν ἄρα νῦν κατάκριμα τοῖς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결코 정죄함이 없다’의 ‘결코 ~가 아니다’라는 뜻의 [Οὐδὲν]이라는 부사가 문장 맨 앞으로 도치되어 강조되어 있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늘이 무너져도, 온 세상이 끝장나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단 ‘정죄함이 없다’는 말에서 시작을 해야 하고, 당연히 ‘정죄함’이라는 말부터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여러분, ‘정죄함’이 무엇입니까?(*) 여기 ‘정죄’라는 단어 [κατάκριμα]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보통 법정에서 사용하는 법적 용어라고 나옵니다. ‘죄에 대한 선고와 그 형(刑)을 집행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정죄의 범위(?)입니다. 보통 우리가 ‘정죄’(定罪) 하면 생각하게 되는 건, 정할 定, 허물 罪, 문자 그대로 ‘죄를 정하는 것’입니다. 즉 ‘유죄 선고’이자 그에 따른 ‘형량의 선고’입니다. 그런데 헬라어의 ‘정죄’[κατάκριμα]는 선고만이 아니라, 그 형의 집행까지를 ‘정죄’라고 규정합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정죄가 없다는 것은, 죄에 대한 유죄 선언과 그 죄에 대한 형별 모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죄로 정해지지 않는다면 형벌도 아예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당하시고 죽으셨다, 이렇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맞는 말인데, 이건 사실 절반 정도밖에는 말하지 않은 셈입니다. 정죄는 형벌만 있는 게 아니라, 유죄에 대한 선고까지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죄라고 하는 것에 대한 유죄 선고 자체가 내려질 수 없도록, 그래서 형벌을 정할 수 없도록, 우리의 상황과 조건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 대신 벌을 받으신 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고 더 중요한 뭔가를, 우리 안에, 그리고 세상 가운데 행하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이 말씀이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내가 분명 죄를 짓는데 그 죄의 형벌을 받지 않게 됨은 물론이요, 그 죄 자체가 선언되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 예수님이 도대체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행하신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하신 이유, 목적이 무엇인가, 궁금해지지 않습니까? 로마서 8장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운명하시기 전 “다 이루었다.” 하신 그 이루심이 과연 무엇을 아우르는 이루심인가, 그리고 그렇게 ‘다 이루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성도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로마서 8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정죄의 이 두 부분 중에서도 죄에 대한 선고 자체가 사라졌다는 측면입니다. 당장 2절에서 하시는 말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이 말씀이 바로 그런 ‘정죄 없음’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단지 죄인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죄의 형벌에 대한 면제가 아니라, 죄 그 자체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차원에서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당할 형벌을 대신 당하시지 않았다면, 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게 되는 일 자체가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속죄가 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의 문제, 더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이 그저 속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가 오직 속죄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여러분 굳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여러분, 사실 ‘속죄’는 구약에서도 있었습니다. ‘속죄’라는 말을 성경에서 검색해보면 오직 구약에서만 나타납니다. 신약에서도 나타나는 성경이 있긴 한데, 바로 구약의 속죄와 예수님의 속죄를 비교한 히브리서에서만 나타나고, 다른 어떤 신약성경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속죄’는 구약적인 용어인 것이고, 신약에 와서는 속죄 이상의 무언가가 강조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속죄는 구약에도 있는 하나님의 은혜인데요, 구약의 율법은 인간의 속죄를 위해 짐승을 죽여 피를 뿌리고 태우는 제사, 곧 속죄 제사를 명령합니다. 물론 이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달리,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다른 점입니다. 제사를 드린 후 인간은 몇 초 안 지나 다시 죄를 짓게 되고, 여전히 죄의 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에서는 항상 속죄의 제사가 쉼 없이 드려졌습니다. 그걸 ‘상번제’(常燔祭, regular burnt offering)라 합니다. 항상 드려지는 제사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매일 지속적으로 드리는 번제입니다. 하루에 아침, 저녁 2회에 걸쳐 어린 양을 한 마리씩 번제로 드렸고,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와 포도주로 드리는 전제도 함께 드려졌습니다. 안식일에는 제물이 두 배로 드려졌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니 1년 365일 성전에서 제사가 이어졌고, 성전은 언제나 짐승의 피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계속 속죄의 제사를 반복해야만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속죄의 제물이 되는 짐승들은 짐승이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뭔가 대가를 감당하고 값을 치르려면 적어도 같은 대상, 같은 층위의 존재 이상이 필요한데, 속죄의 제물로 사람을 죽여 바칠 수는 없으니, 짐승을 대신 바치는 그 속죄가 완전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한 거지요. 본문 3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말씀하는데, ‘죄 있는 육신’ 그게 인간입니다. ‘짐승의 모양’이 아니라, ‘인간의 모양’인 것이지요. 그러니 짐승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그 속죄의 율법 자체가 실은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구약의 모든 사람들은 바로 이 불완전한 속죄만을 알았고, 수없이 반복하여 드리는 그 불완전한 속죄의 제사를 가지고 죄와 싸웠습니다.
그러나 상번제든 무엇이든, 구약에서도 속죄는 되는 겁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그 죄를 용서받는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면, 예수님은 오실 필요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오늘도 짐승을 잡아 바치면 되고, 저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칼을 들고 소나 양을 잡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단지 속죄만이 아닙니다.
매일, 매번의 속죄 제사가 불편하고 번거로우니 그 수고를 덜기 위해 예수님이 직접 오신 게 아닙니다. 죄에는 반드시 속죄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인 것은 아닌 겁니다. 지은 죄를 용서 받는 거기가 아니라, 그 다음을 감당하고 이루시기 위해 주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속죄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이 오셔서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2절 말씀처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로 결코 정죄함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궁극적인 결과인 본문 4절을 위해서입니다.
본문 4절 함께 읽습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마치 마지막 결론처럼 등장하는 내용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지켜 행할 수 있게, 율법이 완성될 수 있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그게 어떤 방식으로 가능하게 되었는가는 본문 3절과 4절을 강해할 때,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건, 우선 그것이 가능해졌고, 또 가능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통해 율법이 성취되는 것, 율법이 충족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무시하고 아무 상관이 없이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율법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겁니다.
물론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함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율법의 소멸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까? 아브라함을 택하신 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그런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냥 복 받으라는 것, 하나님과 좋은 관계로 살아가자,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택하신 목적을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8장 19절입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이것이 그를 택하신 이유라 하십니다. 아브라함 자신과 그의 자손들 모두가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는 것, 곧 율법의 내용과 본질을 지켜 행하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 ‘의’와 ‘공도’라는 단어도.)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17~20)
예수님이 이루신 자유,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그 자유는 율법을 무시하는 자유가 아니라, 율법을 넉넉히 성취하는 자유인 겁니다. 시험이 어렵다고 그 시험을 아예 안 보고 합격하게 하는 은혜,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도저히 수업 내용을 따라갈 수 없어 자퇴해야 하는 그런 은혜가 아니라, 은혜로 합격을 하되 그의 실력이, 노력하고 시험 쳐서 들어온 사람보다 더 뛰어나게 하시는 은혜, 그래서 대학에서 더 좋은 성적으로 장학생이 되게 하시는 그런 방식의 은혜로 우리가 율법 앞에서 자유해진 겁니다. 믿음은 율법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율법을 완성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도록 하신 이유, 그건 죄를 이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도 ‘결코’[οὐ μη]가 쓰였습니다. ‘never’라는 뜻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누굽니까? 당시 가장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보다 우리의 의로움이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닙니다. 어떤 교리나 주장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한 주 동안 내가 과연 오늘날의 유대인 랍비보다, 또 다른 종교의 많은 구도자들보다 더 의로운 모습인가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나, 정말 천국 갈 수 있나’ 심각하게 고민하며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여러분 어떠신가요? 여러분은 괜찮으십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율법의 요구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다른 종교를 열심히 믿고 있는 많은 경건한 사람들보다 여러분 더 의로우십니까? 또 한국 교회 정말 안전하고 괜찮을까요? 믿음으로 구원 얻으니 다 천국 갈까요? 거기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이 질문에 우리가 제대로 답을 하려면, 우리는 우선 율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요구가 정확히 무엇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의’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무엇이 부족한지, 또 무엇을 향해 매진해야 하고, 어떤 목표를 향해 우리의 삶이 노력해야 하는지가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문제는 다음 시간에 계속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주 동안 여러분도 묵상하고 고민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과연 내가 율법을 이루어가는 삶인지, 과연 내 의(義)가 이 시대의 가장 경건한 종교인들보다 더 나은 것인지, 진지하게 자문(自問)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고민 자체가 바로 우리의 실력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