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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은 소망을' 2017년 10월 1일 주일 설교

2017-10-0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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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1 오순절 후 열일곱 번째 주일 설교 ---------------------------------------------------------- 로마서 5장 1~11절, 연단은 소망을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1001.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올릴 수 있는 파일 용량이 초과되어 첨부파일을 올려드리지 못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로마서 강해 17) 본문 4절의 ‘연단은 소망을’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앞의 3장과 4장의 내용을 한 줄로 정리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말하고 이제 그 의로운 이들을 향해 권면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원수에서 자녀로 회복된 것이 과거의 구원이라면, 이 권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누리는 것은 현재의 구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누리고 계신지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의 좀 더 정확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당시 로마의 평화[에이레네]는 전쟁 없는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그때는 하도 전쟁이 많으니까 전쟁이 없는 상태, 그 자체로 평화라 했습니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요즘의 한반도를 생각하면 그것도 물론 평화인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평화, 화평, 곧 ‘샬롬’은 그보다 훨씬 더 풍성한 의미를 가집니다. 한 가족이 싸움이 없다고 꼭 화목한 건 아니지요. 싸움만 없는 게 아니라 대화도 없는 가정이 있다면, 우리는 그 가정을 화목하다, 말하지 않을 겁니다. 갈등도 있고 때로는 서로 티격태격 하며, 속된 말로 ‘지지고 볶으며’ 살아도, 그럼에도 서로의 사랑을 느끼고, 누리며, 또 그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관계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샬롬입니다. 하나님과의 샬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이 사용하는 동사 ‘누리다’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그것은 깊은 만족과 평강의 상태를 즐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문제없이 지내는 것, 그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오셔서,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먹고,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먹는(계 3:20) 그런 좀 더 풍성한 관계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사실 이런 관계를 ‘누리자’, 이렇게 1절은 말하고 있지만, 아래 4번의 주석에 보면, ‘(또는) 화평이 있고’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권면이 아닌 평서문의 진술이라는 뜻입니다. ‘화평은 누리자’도 맞지만, 헬라어의 표현에서는 이것이 ‘화평을 누린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역한글과 개역 개정을 제외한 거의 모든 다른 성경이 이것을 ‘누린다’로 옮겼습니다. 화평을 누리려고 하는 우리의 노력이 또한 중요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마땅한 권리요, 현실임을 강조하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풍성한 화목을 누리시는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샬롬을 누리는 사람들의 특징이 2절에 나옵니다.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가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에서 5장으로 넘어오면서, 전체적인 맥락이, 믿음에서 소망으로 옮겨가는데요, 믿음으로 의로워진 성도는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으로 인해 즐거워합니다. 소망과 그 소망 안에서의 희락이 믿음의 현실입니다. 여기 즐거워한다는 단어 [카우하우마이]가 본문에 여러 번 나오는데요, 2절에도, 3절에도, 또 11절에도 반복되어 나옵니다. 사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자랑하다’입니다. 지난 3장에서 ‘자랑할 데가 어디냐’는 구절(27절)과 설교가 기억나시지요? 그 ‘자랑’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카우하우마이]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이 즐거움은 그냥 혼자만 알고 누리고 싶은 그런 쾌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드러내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나누고 싶은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그런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그 ‘자랑스러운 기쁨’의 근거가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소망이 이 기쁨의 근거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소망, 그 영광에 동참하는 소망, 그 영광에 이르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소망, 사실 잘 와 닿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그 영광이 우리에게 있는 영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성경은 ‘상속’의 개념을 중요하게 사용합니다. 그저 하나님의 영광을 멀리서 보고 기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물려질 내 아버지의 영광으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지난 수요일 강해 시간에 아브라함이 죽기 전에 많은 아들 가운데 이삭에게만 자신의 모든 소유를 상속하는 장면이 나왔는데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로마서 4장에서 역시 계속해서 상속자라는 단어 [클레로노모이]가 반복이 됩니다(14, 16절). 아들이 아버지의 막대한 유산을 누리며, 바라보는 그런 소망이라고 하면 좀 더 실감이 나실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건 성경이 그 소망을 구원의 현실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영광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어떤 영광보다 클 것이라는 것 또한 이미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자녀가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 가난하고 불쌍하게 살지 않듯, 우리 성도들의 삶의 현실 역시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단지 먼 소망이 아니라 그 소망 가운데 지금 여기서 기뻐하고 자랑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것이 하나님과 누리는 진짜 화평일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영광의 소망을 깨달아가고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3절 이하에 보면, 이 소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고, 또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는지가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 시작이 환난이지요.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카우하우마이]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유가 환난 그것이 바로 소망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답답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환난이 인내를 이루고(produce), 인내가 연단을 이루고, 그 연단이 다시 소망을 이룹니다. 여러분, 환난이 인내를 이룹니까? 환난을 겪으면 물론 당장 짜증과 한숨과 두려움이 생기지만, 어떻게 인내를 이룹니까? 반대로 한 번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인내라는 자질이 어떻게 생깁니까? 우리에게 없던 인내가 생기고 그것이 더 강해지는 것은, 결국 환난의 터널을 지나면서입니다. 고난을 인내로 견디기도 하지만, 고난이 인내를 낳습니다. 외부의 자극이 우리의 근육을 강하게 하는 것처럼, 삶의 고난이 우리의 인내를 강하게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인내가 다시 연단을 이룬다고 합니다. 연단, 조금 어려운 말인데요, 우리 성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보통은 ‘연단 받았다’ 예전에는 이렇게 많이 사용했는데, 그럴 때는 ‘믿음의 시험’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원래 연단이라는 단어 [도키메]는 거기서 조금 더 들어가야 합니다. ‘연단’은 인내를 통해 충분한 검사와 검증이 이제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의 뜻이 ‘품질 검사가 완료된’이라는 뜻입니다. 대장장이가 주물로 어떤 칼이나 기구를 만들 때, 수없이 때리고 식히기를 반복하지요. 그러다가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비로소 완성된 제품으로 판매대 위에 올리게 됩니다. 오랜 인내가 안에서 응축되고 축적되어서, 이제 검사필증 붙어 있는, 이미 검사가 끝난 인내, 인내가 그것 안에 녹아들어 하나의 ‘성품’이 된 것을 연단이라 합니다. 열 달 동안 아이를 뱃속에서 품고 기르며, 숱한 고통을 인내하여 결국 아이를 출산한 어머니는, 그 인내가 그녀의 한 성품으로 녹아든, 진정한 어머니의 성숙함을 가지게 되지요. 출산 이전의 여인과 이후의 여인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됩니다. 여인은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처럼, 한 번 두 번 반복된 인내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연단은 그녀를, 웬만한 고통이나 어려움 앞에서도 끄떡도 하지 않게 만듭니다. ‘겪어본 자의 의연함’이 묻어나오고, 그것이 다른 고난들 앞에서도 침착함과 평정심을 유지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검증되어지고 인격으로 녹아든 인내를 연단이라 합니다. 당연히 이 연단은 인내로부터 탄생합니다. 그런데 이 연단의 마지막이 소망입니다. 인내가 쌓여 연단을 이루듯, 연단이 모여 소망을 이룹니다. 수많은 담금질을 통해 만들어진 귀한 보검(寶劍)이 가지는 영광, 여러분 이건 잡다한 다른 칼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와 소망이 있지요. 그 자체로 이미 영광스러운 존재이지만, 그것을 다룰 만한 존재를 기다리며, 귀하게 사용될 그 무언가를 바라보는 소망이 생깁니다. 성경은 바로 그 연단이 빚어낸 보검이 바로 성도의 영광이요 소망이라 합니다. 사실 오늘날은 그냥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 같은 딱 그 정도의 소망들이 넘쳐납니다. 세상도 그렇고 성도도 그렇습니다. 보검이니 무슨 명검이니 되는 것 원치 않고, 연단 없이, 인내 없이, 평범한 평안을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빌딩 한 채 지어 월세 받으며 사는 삶을 꿈꿉니다. 세상 사는 게 워낙 힘들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래서 진짜 소망이 없고, 진짜 평안이 없기도 합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샬롬이 하나님 없어도 되는 샬롬이 아닌가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그런 평안과 부요가 우리의 소망이라면, 그건 뭔가 잘못된 겁니다. ‘종교의 역설’이 그겁니다. 신을 믿지만 신이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기 위해 신을 믿습니다. 이상한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른 소망을 가지십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더불어 먹는 꿈, 평안해질수록 하나님이 더 필요해지고, 부요해질수록 더 하나님을 앙망하는 그런 삶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환난이 없는 평안이 아니라, 환난을 이기는 평안, 환난을 없애는 소망이 아니라, 환난의 끝에서 발견하는 소망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여기가 세상이 말하는 소망과 성도의 소망이 갈리는 지점입니다. 요셉이라는 소년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어릴 때부터 고난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그가 잘못한 거라고는 아버지의 사랑을 좀 더 받은 것뿐이고, 또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 몇 번 한 것뿐인데, 형제들은 그를 죽이고자 했고, 결국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성경은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고 했지만, 아시는 대로 그는 그럴수록 점점 더 깊은 고난으로 내려갑니다. 말 그대로 인내가 쌓여갔고, 청년에서 성인이 되었을 때 이미 연단이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연단의 소망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어리다고 연단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 연단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된 사람이 있는데요, 그게 누구인지 혹시 기억나시는지요? 디모데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22절),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 요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힘겨운 일상을 살고 있어서, 디모데와 같은 청년, 학생들도 많을 겁니다. 이왕 겪는 고난, 우리 청년들이 저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요셉은 처음엔 당연히 거기서 빠져나와 속히 부모에게로 돌아가는 소망만 있었습니다. 나름 성공하여 멋지게 복수하고 싶은 소망도 있었습니다. 상황이 나빠지자, 그냥 살아만 돌아가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소망 대신, 그 연단의 여정에서 요셉으로 하여금 전혀 다른 소망, 그에게는 아예 있지도 않았던 소망, 요셉 자신의 삶과 지혜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소망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 고난과 인내와 연단 속에서, 요셉은 어느 날 그 소망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당신의 계획과 소망 가운데 미리 애굽으로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앞으로 장장 7년간의 대가뭄이 애굽은 물론 온 팔레스타인 지역을 덮치게 될 것과, 그것을 대비하고 준비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요셉을 택하셨고, 연단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요셉의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어릴 적 추호도 그런 꿈을 가진 적도 없었고, 고난의 여정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소망 속에서 그가 인내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런 소망을 미리 말씀하셨다면, 그리고 그 소망을 위해 그 긴 연단이 있어야 함을 알았다면, 요셉은 아예 다른 길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연단되었고, 그 여정의 끝에서 용서를 배웠고, 또한 세상을 섬기는 자로 서게 됩니다.     성도의 소망은 처음부터 주어지는 무언가가 아니라고,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우리의 소망을 다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고난과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소망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발견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환난 중에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그 소망의 여정에 우리가 들어온 것이고, 그 여정을 하나님이 주관하셔서 끝내 소망에 이르게 할 것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주 넘어지고 흔들립니다. 요셉도 그랬습니다. 그가 고난의 자리에서 늘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래서 평안히 그 날들을 인내했을 거라는 건 우리만의 착각입니다. 그는 극심하게 흔들렸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당황했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훗날 드러날 소망을 바라보며 무작정 인내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고난을 제거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그 기도가 없이는 우리가 인내로, 연단으로, 소망으로 아예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몸이 아파 기도할 때, 비록 하나님은 그 고난을 제거해주시지 않았지만, 더 큰 소망을 바울에게 주셨습니다. 이미 너에게 충분한 은혜가 있지 않느냐. 네가 약한 그 자리에 내 강함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때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증언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래서 겨우 겨우라도 연단의 여정을 이어갈 수 있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인생의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해결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 기도와 간구가 실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여러분의 고난과 아픔에 대해 토로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께 이야기를 하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진짜 신앙은 이게 아닙니다. 여러분, 신앙은 하나님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말씀에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외칩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그러면서 하나님은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그 하나님을 앙망하라고, 소망하라고 외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왜 이스라엘이 실패했는지 깨닫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내 권리 따위, 알은 체도 않으신다.”(공동번역) 지금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이 지금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자기들끼리 그렇게 이야기하고, 선지자에게 항변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나님이 어쩌고저쩌고, 고난이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입니다. 본문에는 ‘말하며’라는 두 개의 동사가 나오는데요, 그 동사([아마르]와 [다배르]) 둘이 모두 미완료형입니다. ‘계속 그렇게 말해왔고, 또 아직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작 하나님을 앙망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혹시 이런 모습은 아닙니까? 힘들다고 우리끼리 이야기하고 서로 위로하지만, 정작 그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그런 모습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절대로 인내를 이어갈 수 없고, 연단에도 이를 수가 없습니다.) 주제가 고난이어서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다시 욥기를 죽 읽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욥기에는, 고난당하는 욥과 세 친구가 나옵니다. 여러분, 욥과 나머지 세 친구의 결정적인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욥기가 자그마치 42장이나 되는데 그 중에 태반이 이 세 친구가 욥에게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욥‘기’가 아니라 욥의 친구들‘기’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가 전부 뭐냐면, “네가 잘못해서 고난당하는 거다. 잘 생각해봐라. 하나님은 이러하시고 저러하신 분이시다. 잘 생각해보면 네 문제가 보일 것이다.” 등등, 온통 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들뿐입니다. 그 많은 대화들 중에서, 고통당하는 욥을 위한 기도 한 마디가 없고, 왜 이래야 하냐고, 하나님을 향한 토로와 항변 하나가 없습니다. 타인의 고난 앞에서는 차라리 침묵이 위로인데, 그들은 전혀 위로가 되지도 않습니다. 욥은 고통에 신음하면서, 또 옆에서 그렇게 마음을 긁는 친구들에게 대답하면서, 그러면서도 기어이 하나님께 항변을 합니다. 그것이 설사 잘못된 항변이더라도,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께 회개하는 이야기가 될지라도(실제로 그렇게 판명이 되지만),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결국 우리의 신앙이고, 우리가 누려야 할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그렇게 고난 중에서 말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가 화목의 제물이 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2절, 은혜에 ‘들어감’ : 왕이나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들어가는 것더) 나중에 하나님이 욥과 그 친구들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욥의 친구들에 대해 하나님은 단 한 마디로 규정하시지요. “너희는 욥보다 의롭지 못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시고 그걸로 끝입니다. 여기 의롭지 못하다는 평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말 밖에는 해 줄 말이 너희에게는 없다는 게 진짜 심각한 문제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심지어 그들에게 직접 제사도 못 드리게 하십니다. 너희가 내게 드리는 제사는 받기도 싫으니, 너희가 한 잘못에 대해, 욥한테 대신 제사를 부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아닙니다. 욥기 38장과 39장에 걸쳐 하나님의 긴 말씀이 나옵니다. 그간 욥을 향해 억눌러 온 하나님의 마음이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정말 말 그대로 말씀이 쏟아 부어져 흘러넘칩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끝나면 욥이 대답하고 다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나님과 욥의 긴 대화가 욥기 끝까지 이어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소망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하시다, 어떠하시다 하더라, 뭐 이런 많은 이야기, 결국 남의 이야기, 믿음 없는 사람들끼리 하나님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 당장은 시원하고 위로가 되고 그럴지 모르지요.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답과 하나님의 소망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그게 전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말하는 자는 반드시 인내와 연단을 지나 소망에 이릅니다.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비록 당장 시원하지는 않아도, 하나님의 임재와 행동을 맛봅니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드디어 소망이 나옵니다. 내게는 없던 소망, 내가 품을 수 없던 소망,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선한 소망이, 고난의 자리, 인내와 연단의 자리에서 나옵니다. 요셉이 창세기 맨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에게 하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다.”(50:20)입니다. 여기 두 가지의 변화가 있지요. 하나는 그의 인격과 성품의 변화입니다. 복수가 아니라 용서에 이른 것이고, 그에게 하나님의 소망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의 악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우리의 고난들을 하나님이 친히 ‘바꾸셔서’(!) 그것을 선으로, 소망으로 인도하실 것을 바라보는 그 자리가 우리 성도들의 부르심의 자리인 것을 잊지 마십시다. (*) 나는 그런 길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 성도의 소망이 세상의 소망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기뻐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믿음으로, 공짜로 구원을 얻었지만, 그 구원이 얼마나 값지고 거룩한 것인지를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을 통해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실은 그 과정이 성화이고, 그게 성도의 영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저를 포함한 많은 성도들이, 우리의 삶에 연단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거나 부정하고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위로를 받고, 좋은 말을 듣기 위해 교회에 갑니다. 연단이 이루는 소망이 아니라, 연단 없는 소망을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게 정말 샬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소망을 향해 믿음의 전진을 하는 게 아니라, 광야에서 헤매며 하늘에서 떡과 고기와 술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그런 소망만을 품고 삽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렇게나 시시껄렁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요.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은 인내와 연단을 통해 소망에 이르러야 하는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앙망하는 날마다의 소망이 있어야 함을 또한 말씀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4절에서, 자신과 로마 성도들이 [우리] 이미 이 소망을 알고 있다고 서로 말하고 있는데요,     힘겨운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 사랑하는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부디 우리 또한 그 소망을 살아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순간 이어지는 어려움의 시간들을, 주님을 앙망하며, 온전히 인내와 연단을 이루어 가시기를,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하나님의 소망으로 채워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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