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2017년 9월 24일 주일 설교

2017-09-2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70924 오순절 후 열여섯 번째 주일 설교 ---------------------------------------------------------- 로마서 4장 1~25절,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0924.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량이 초과되어 첨부파일을 올려드리지 못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로마서 강해 16) 본문 20절의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좀 오래된 미국 TV 만화 영화 <개구쟁이 데니스>(Dennis The Menace)를 혹시 아시는지요? ‹짱구는 못말려›의 미국 버전 정도 되는 코미디 에니메이션인데요, 한 때는 비디오게임에 극장판 영화까지 나올 만큼 인기가 많았습니다. 바나나 껍질 모양의 머리 스타일을 한 주인공 데니스는 장난기가 가득한 소년으로, 자기만큼이나 덩치가 크고, 늘 같이 뛰어다니는 흰 색 강아지와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 민머리 친구와 늘 함께였지요. 얼마나 개구쟁이인지, 데니스의 장난에 온 동네가 늘 정신이 없습니다. 특별히 바로 옆집에 사는 윌슨이라는 이름의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가 특히 고생을 많이 하시는데요, 데니스의 그런 장난과 심술로 인해 생기는 소동과 에피소드들이 보는 사람들을 재미있게 하는 그런 만화입니다. 그런데 거기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말씀드린 데니스 네 바로 옆집의 윌슨이라는 부인이, 직접 만든 쿠키를 두 손 가득 들고 밖으로 나와서 옆집 데니스에게 먹으라고 건네줍니다. 그러자 데니스가 늘 옆에 함께 다니는 친구에게 묻지요. “내가 무슨 착한 일을 해서 윌슨 부인이 나한테 과자를 이렇게나 주는 걸까? 내가 뭘 잘했지?” 그러자 친구가 대답하지요. “네가 착해서가 아니라, 윌슨 부인이 착해서 주는 거야.” 지금 로마서 4장의 이 이야기는, (역시나 민머리인) 바울이 데니스처럼 뭔가 착각하고 있는, 그래서 복음에 위협(Dennis The Menace)이 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시고 복 주셔서 가나안 땅 주시고 좋은 것(구원) 주신 것이 그대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착해서 주시는 거다. 너희가 자랑하는 너희의 믿음이나 순종은, 실상 윌슨 할머니가 내미는 막 구워낸 그 맛있는 쿠키를 냉큼 받아먹는 그런 행동일 뿐, 결코 너희의 자랑이 될 수 없다. 이제 이방인들도 너희의 그 믿음이라는 똑같은 방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갓 구워낸 빵을 맛있게 먹을 차례다. 그게 복음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좀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하기 위해 바울이 본문에서 근거로 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 두 사람입니다. 워낙 유대인들이 이 두 사람을 위대한 신앙의 모범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실제로 이 두 사람의 삶과 고백이, 복음의 정수를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주보와 함께 나눠드린 간지(間紙)에 보면, 집회서라는 외경(外經)의 말씀이 있는데요, 지난번 구약 개관 시간에 잠깐이나마 언급한 대로, 가톨릭에서는 이 외경 역시 정경으로 받아들여져 있습니다. 이 집회서의 ‘집회’라는 말은 ‘교회의’라는 뜻의 ‘에클레시아스티쿠스’(Ecclesiasticus)에서 온 것으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인들도 애독했던 책 중 하나입니다. 솔로몬의 잠언처럼 지혜 문헌으로 분류가 되는데요, 44장에는 많은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을 칭송하는 내용이 있구요, 특별히 본문 19절 이하에는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함께 잠깐 보시면, “19.아브라함은 허다한 민족의 위대한 시조이며 아무도 그 영광을 따를 사람은 없다. 20.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율법을 지키고 그분과 계약을 맺었다. 자기 살에 그 계약의 표시를 새기었고, 시련을 당했을 때에도 그는 충실하였다. 21.그러므로 맹세로써 그에게 약속하시기를, 그의 후손을 통해서 만백성을 축복하고 땅의 먼지처럼 번성하게 하며 그의 후손을 별과 같이 높여주고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집트 강에서 땅 끝까지를 유산으로 주겠다고 하셨다. …” 아브라함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시각이 어떤 것인지, 여기 잘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 그분과 계약을 맺었다고 기록하고, 할례 또한 그것을 행한 아브라함이 강조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고 약속하신 것이 아브라함의 신앙과 충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로 충분했고, 축복받을 만 했다, 하는 어조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이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정반대이지요. 그리고 그 근거는 단순히 주장이나 추측이 아니라, 토라의 말씀 그 자체에서 그대로 가져옵니다. 정말 아브라함이 율법에 순종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고(義), 그분의 언약을 누리게 되었는가, 질문합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 할례도 받기 전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부르심이 먼저 있었고, 그 거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브라함이 기꺼이 받아들였을 뿐 아니냐고, 그 받는 믿음이 의로움의 이유가 아니었냐고 묻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깨달은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회개합니까? 아니면 먼저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습니까? 물론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명확하지요. 예수를 먼저 믿고 그리고 나서 회개합니다. 예수를 알고 믿게 되어야, 비로소 죄가 깨달아지고, 그 다음에 회개도 하고 순종도 하고, 예배도 드립니다. 바울은 지금, 아브라함도 다윗도 모두 다 그 과정을 통해 그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먼저 용서하시고, 찾아가셔서,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죄가 무엇인지, 의로움이 무엇인지도 깨달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용서를 받은’이라는 단어가 ‘forgiven’이지요. 그걸 어떤 분이 파자(破字)하기를, ‘given before’, 그러니까 ‘먼저 주어진’이라는 말로 풀어놓으셨더군요. 용서란 죄를 지은 누군가가 뭔가 잘 해서, 만회해서, 무언가 용서받을만한 일을 해서가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먼저 베풀어진 것이고, 그것을 그저 받는 것임을 의미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을 믿는 게 모두 그렇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그들이 아브라함 되고, 이스라엘 백성 된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있어, 아브라함이 되고, 이스라엘이 되었고, 그 후에 율법도 받고, 할례도 받았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이 순서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할례를 받아서 하나님 백성이 된 게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확증하는 할례가 뒤에 있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은혜’임을 강조합니다. 오래된 빵 토라(율법)를 통해서 베푸시던 하나님의 은혜, 또 새로 구워낸 새 빵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시던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와 구원과 복을 잘 받아 맛있게 먹는 것, 그것을 성경은 믿음이라 합니다. 내가 뭘 잘해서 이런 은혜를 받았나보다 스스로의 덕을 찾아보고 으쓱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신 대로 감사히 맛있게 먹고 또 누군가에게 함께 먹자 나누는 그것이 곧 복음인 것인지요. (*) 지금 바울이 계속 이런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본래부터 이런 믿음이라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데니스 같은 어린아이나 또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다 ‘믿음’ 역시도 우리의 ‘행위’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도 나는 믿었다. 저들은 믿지도 않았지만 나는 받아들이고 믿기라도 했으니 구원을 얻은 것 아니냐, 믿는 것도 실력이다,’ 이쪽으로 가게 됩니다. 지금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하는 게 이 문제입니다. 믿음은 결코 우리의 행위로서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감정이나 의지로서 행위와 반대라는 게 아니라, 인간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행위와 반대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의지와 결단이 강조되는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고,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인내와 용서가 나타나는 무언가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비단 율법과 할례를 자랑하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순종과 헌신과 믿음 그 자체마저도 자랑이 되어버리는 우리 또한 이 메시지의 대상인 것이지요. 여러분, 아브라함의 인생에는 중요한 몇 번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것, 그리고 나이 많아 이미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그가 받아들인 것, 또 그렇게 얻은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큰 시험을 통과한 것, 등등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향해 ‘너 참 의롭다!’ 하신 것이 언제입니까? 네, 하나님의 약속을 그가 받아들인 그 때에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칭의(稱義)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혈혈단신으로 낯선 땅으로 길을 나서는 것이 더 큰 믿음입니까, 아니면, 나이 많아 늙은 부부에게 아이가 생길 거라는 말을 믿는 것이 더 큰 믿음입니까? 또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은 어떻습니까? 그냥 마음으로만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믿어서 삶이 움직이고, 하나님께 내 가장 귀한 것까지 드리는 그 모든 과정까지가 더 큰 믿음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향해서가 아니라, 다만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 어쩌면 너무나 세속적이고, 너무나 단순한 그 약속을 받아들인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의롭다고 부르시는 것입니까? /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는 믿음이란, 그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주시는 대로 다 받는 우리의 빈손,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믿음 章’이라는 별명을 가진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 기드온, 삼손, 입다, 바락 등등, 그들이 정말 믿음의 영웅인가, 생각해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지지요. 왜요? 성경은 그들을 영웅처럼 그려내고 있지 않거든요. 기드온은 겁쟁이에 의심 많은 사람이었고, 삼손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한량이고, 입다는 패륜아에, 바락은 또 소심하기가 얼마나 소심한지, 그런데도 성경은 그들을 믿음의 영웅이라고 부릅니다. 왜요? 그들은 모두 어떤 가능성을, 자신들의 모습 속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밤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는, 아브라함은 스스로 이미 모든 소망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하나님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뭘 주신다는 겁니까? 그래봤자 그 모든 것을 물려받을 사람은 저의 종 엘리에셀입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주시지 않아서, 이미 그가 제 모든 것을 물려받을 후사로 정해야만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창15:1~3) 이야기합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하늘의 별들을 보게 하시지요. “저 뭇별을 네가 셀 수 있느냐,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아브라함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드디어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부르셨습니다. 그걸 오늘 로마서에서는, 18절이지요,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19절,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의 어떤 믿음을 의롭다고 생각하시는지, 조금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간의 몸이 죽은 것과 같다고 할 만큼, 불가능에 가까워졌을 때, 거기에 어떤 인간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나 방법이 존재하지 않을 때, 오직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 외에는, 어떤 다른 가능성이 없을 때,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 의지하는 그것이, 곧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시는 믿음의 본질임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 믿음 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당장 이렇게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믿음이 얼마나 훌륭하냐, 믿을 수 없는 자리에서 믿지 않았느냐,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니냐, 말씀하실 겁니다. 그러나 지금 초점은 그게 아닙니다. 그가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의 인생에 개입하시고, 신실하게 인도하신 일들이 이미 그 앞에, 창세기 12장부터 14장까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보겠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이 믿음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과 정확하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십니까?)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 그것을 믿는 믿음의 자리가, 곧 아브라함이,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을 믿는 바로 그 자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17절 말씀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창조의 하나님, 부활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23절 이하의 말씀이 있습니다. “23.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다름 아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조상인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처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됐습니까? (*) 네, 당연하게도 봤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믿은 게 아니라, 보고 믿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 몇 번을 말씀하셨어도 부활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이 결국 보고 믿었습니다. 부활하셔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주시고, 함께 먹고, 함께 지냈기에 그들이 비로소 믿었습니다. 도마처럼 믿음 없는 이들에게는 친히 한 번 더 찾아가셔서, 당신의 몸을 만져보라 하시고, 기어이 믿게 하십니다. 그게 제자들이 가진 부활의 믿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를 믿은 제자들의 믿음은 자랑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 보지 않고 믿는 우리는 더 복되다고 주님 말씀하신 것이지요.) 아브라함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그가 정말 믿기 어려운 걸 믿어냈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기어이 아브라함을 믿을 수 있는 그 자리까지 하나님이 그를 포기하지 않고 인도해 가셨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자리까지 말입니다. 여러분, 그 믿음이 오늘 우리 안에도 있어서, 주님을 예배하게 하심에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할렐루야! 본문 중간(7~8절)에 잠시 인용되는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죄의 용서의 차원에서 깨달은 사람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내가 먼저 용서받았기에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시편 32편에서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깨닫고 나니, 내가 문제가 없어서, 죄가 없어서,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 죄를 사해 주시고, 가려주시고, 심지어 그 죄를 인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임을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내가 드린 제사나 예배 때문에 나를 용서해주시는 게 아니라, 이미 용서를 하셨기 때문에 희생의 제사가 효력이 있구나, 깨달았습니다. 다만 다윗은 자신의 죄가 가려지고, 사해진 것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속 이야기를 다 알지요. 어째서 다윗의 죄가 용서되고 가려졌는지, 우리는 그 내용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이 있었고 또 있어야 했다는 것을 압니다. 25절 말씀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가 십자가 죽음에게로 내어줌을 당했음을 압니다. 다윗은, 비록 예수의 십자가를 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죄인을 용서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십자가의 예수를 믿은 자의 예표입니다. 아브라함이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을 믿은 예표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본문이자 신약 성경의 맨 첫 장, 첫 절인 마태복음 1장 1절은, 오늘 본문의 두 사람, 아브라함과 다윗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지금 바울은 그 계보가 단순히 혈연의 계보가 아니라, 믿음과 은혜의 계보임을 밝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죄로 인해 망가진 인간을 그렇게 회복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그 계획의 흐릿한 청사진이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먼저 드러나고 고백된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그리고 경건하지 않지만 의롭다 여기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두 사람은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늘 우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럼 이것으로 모든 이야기가 끝납니까? 그렇지 않지요. 말씀드린 대로 아브라함은 죽음보다 더한 순종의 자리로 가고, 제자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기가 모든 이야기의 끝이 된다면, 교회는 온통 양심 없는 죄인들로만 가득차고 말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처럼, 하나님의 용서는 단지 사면, 무죄 석방이 아니라 의로움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저 용서받았으니, 이제 다시 죄와 의의 가능성 그 중간 어디에 있는 게 아니라, 의의 종으로, 빛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는 그것이 구원입니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사망에서 부활로, 심판에서 영원한 영광으로, 율법에서 자유하나 율법을 완성하는 자리로,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입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지요. 평생 악동 데니스로만 남는 게 아니라, 윌슨 부인처럼 자비로운 어른으로 닮아가고 자라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믿음의 삶입니다. 오늘 주보 간지(間紙) 두 번째 본문인 야고보서 말씀이 그 후반부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핵심이 되는 22절부터 24절까지만 같이 읽겠습니다.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내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를 받았고, 그래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는가는, 결국 믿음 그 이후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즉 우리가 얻은 구원의 진실성은 믿음 그 이후의 믿음이 결정하고 증언합니다. 내가 정말 큰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정말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용서를 경험했다면, 그는 그 이후의 삶과 믿음으로 그 용서와 사랑을 증언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뒤에는, 회개가 반드시 뒤따릅니다. 행위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견고해졌다고 20절에서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라고, 견고해지고, 또 열매를 맺습니다. (주중 QT 본문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이 크게 자랐다고 칭찬하지요.) 또 반대로 믿음은 약해지기도 하고(19절) 없어지기도 합니다(20절). 아브라함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늘 믿음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약해지기도 하고, 또 아예 없는 것처럼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땅을 떠나 애굽으로도 갔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팔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들의 이름이 이삭[이츠핰], 웃음입니다. 그의 인생 곳곳에 하나님을 향한 비웃음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어떻게 그의 믿음이 결국은 견고해지고 온전해졌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잘 받는 믿음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믿음으로 자라갈 수 있었습니까? (*) 하나님이 늘 그와 동행하시며, 그에게 계속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답해야 할 중요한 마지막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자랍니까? 어떻게 받는 믿음에서 행하는 믿음, 순종의 믿음에 이릅니까? 도대체 믿음은 어디에서 생깁니까? (*)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때마다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같은 언약을 반복하시고, 또 반복하십니다. 했던 이야기, 또 하시고 또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 말씀의 자리에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은 그저 소멸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머물며,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인간의 언어도 사람의 몸과 삶으로 들어와 영향을 미치는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하겠습니까?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신 그 말씀만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합니다. 믿으십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왜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까? 어째서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순종의 믿음이 없습니까? 그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듣고 묵상하는 것이 늘 세상 소리, 사람 이야기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왜 연약한 존재입니까? 중요한 것, 좋은 것, 선한 것, 그것에 영향 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까이 있는 것에 영향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듣는 소리가 늘 세상 이야기, 죄의 이야기, 어둠의 이야기, 별 것 아닌 사람의 지혜 이야기, 그것뿐이면 결국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시며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느냐. 언제까지 마음이 둔해져 있을 것이냐.”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그들의 교훈을 주의하라 하십니다.”(마16:11~12) 주님과 함께 있어도 여전히 그들의 귀에 다른 교훈이 가득한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듣는 소리, 우리가 듣는 교훈이 우리의 마음을 결정합니다. 아니, 그렇다고 귀가 결정하지 않습니다. 귀는 들리는 대로 다 듣습니다. 결국 인간은 생각으로, 의지로 듣습니다. 무슨 소리를 듣고 무슨 소리에 귀를 닫아야 할지 성도는 늘 결정해야 합니다. 그 선택이 잘못되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됩니다. 반대로 살아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본문 20절이 말씀합니다. 다른 게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견고해진 믿음, 순전해진 그 믿음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나가서, 유명해져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믿음에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믿음으로 자라갈 때, 주님을 닮아갈 때, 그것이 하나님 최고의 영광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으로 날마다 믿음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