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2017년 9월 17일 주일 설교
2017-09-17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70917 오순절 후 열다섯 번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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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27~31절,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09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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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15) 본문 31절의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본문의 첫 번째 ‘그런즉’, 그러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구원 가운데는 어떤 자랑이 있을 수 없다, 하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봤습니다. 자랑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본래 마귀의 것이었다가 죄로 인해 우리 가운데 들어왔다고 했고, 그래서 성도는 이생의 여러 자랑뿐 아니라, 성도 자신의 믿음에 대한 자랑 역시 우리의 신앙과 삶 가운데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단단히 잠가야 함을 이야기했습니다.
더 나아가 성도가 열심히 해야 할 자랑에 대해서도 함께 묵상했는데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을 자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또 그 말을 뒤집어 보면,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이라고도 했지요.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는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렇게 주의 나라를 세워가는 존재들이 성도라 했습니다. 더불어 성도는 서로를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지체 서로를 자랑하며, 우리는 믿음의 연단을 견뎌내기도 하고, 우리를 미혹하는 세상 자랑의 유혹 역시 이겨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 한 주도 그런 믿음의 여정을 걸어오셨을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축복하고 자랑합니다.
오늘은 3장 마지막 절, 31절에 있는 두 번째 ‘그런즉’의 내용을 살펴보려 하는데요, 그 내용은 매우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믿음이 율법을 파기하는가, 질문하고, 그럴 수 없다. 오히려 믿음은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답합니다. 믿음이 율법을 파기하느냐는 이런 질문은, 아마도 성도들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마다 늘 들었을 항변일 텐데요, 그럼 이 질문이 어떻게 나오게 됐을까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니까, 그럼 율법은 필요가 없는 거냐, 율법은 안 지켜도 된다는 말이냐, 그럼 그 구원 때문에 더 죄를 짓게 되는 거 아니냐, 하는 반문이 나왔습니다. 물론 바울이 전한 메시지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는 분명 율법을 무시하거나 파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함으로 하나님이 모독을 당한다고도 말했을 정도로(2:24), 율법을 행하는 문제를 강조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이야기하는 바울과 그리스도인들을 ‘반율법주의’라고 낙인을 찍어버렸습니다. “바울과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무시한다, 율법을 파기해버린다, 그들의 메시아 예수가 성전도 무시하고 안식일도 무시하더니, 그 제자들도 똑같다.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쉴 새 없이 거슬러 말하고(행6:13),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행18:13). 그들 역시 예수처럼 처형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느 교회를 가나, 또 어떤 성도를 만나나 이 율법의 문제에 늘 민감했습니다. 자신도 조심했고, 또 성도들에게도 항상 세상의 본이 되는 삶과 인격을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은 것도, 어떤 유대인들의 결례에 대한 비용을 직접 지불한 것도 모두 그런 오해를 만들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세상의 시선 속에서, 세상의 비방거리가 되지 않도록(롬14:16) 조심하라고 했고, 할 수만 있다면, 아예 그런 빌미 자체를 만들지 말라고도 했습니다(딤전5:14). ‘반율법적’이라고 비방하는 자들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딛2:5), 그렇게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아랫사람에게나 윗사람에게나 늘 언행에 조심할 것을 신신당부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당연히 조심해야 되지요. 믿음으로 구원 얻었다는 말이 우리의 올무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는 구원만 받으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당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17~20)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나, 오늘 31절의 이 내용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참으로 뼈아픈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싸구려 복음으로 전락해버려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회심 없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그러면서도 천국을 자신합니다.
지난주 말씀의 표현을 빌면, 주님과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서 죽는 것 없이, 그저 죽어 천국 갈 보험 하나 들어놓은 것 같은 그런 것이 성도의 신앙이라고 착각합니다. 세상의 본이 되기는커녕,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의 지탄과 비방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부끄러움과 회개가 없는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오늘 이 질문은 여전히 진행형의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 그럼 우리가 심기일전해서 다시 31절을 읽어보십시다. 이번에는 역할을 좀 나눠서, 제가 유대인이라고 생각하고, 또 여러분은 바울이라고 생각하시고, 제가 질문을 할 테니, 여러분께서 뒷부분의 대답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먼저 질문하겠습니다. “사람이 그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면, 그럼 그 믿음은 율법을 파기하는 겁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네,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메 게노이토]라는 말로 강하게 부정합니다. 그리고 부정을 넘어 훨씬 더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도리어 믿음이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외친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문제에 대해 본문은 더 이상의 설명이 없는데요, 향후 6장과 8장 등에서 설명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희는 오늘 이 부분을 좀 더 깊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이 문제의 대전제를 우리는 늘 기억해두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의 전제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율법을 지키는 그 행위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안 된다, 우리가 율법을 바라보고 그것을 다 행하려고 해서는 오히려 그것을 행할 수 없다, 이것이 복음의 대전제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율법을 잘 지켜서, 죄를 안 지어서 율법을 세우려고 하면 안 됩니다. 말이 조금 이상한데요, 우리가 율법을 직접적으로 상대해서는 율법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여 유대인들이 실패한 겁니다.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다고, 율법을 잘 지키면 의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출발이 문제였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우리가 한 번 기억해봅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늘 시비를 거는 게 안식일을 예수님이 어기신다는 문제였습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가다가 배고프니까 밀을 손으로 비벼서 먹지를 않나, 예수님은 꼭 안식일을 골라 환자 고치는 일을 하시지 않나, 하는 행동마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 같은 모습에 많은 유대인들이 당황하고 분노했습니다.
하루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해 안식일에 주님이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는, 한 병자(손 마른 사람)를 지목하셔서,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말씀하셨고, 그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이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지요.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묻는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그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눅6:1~) 아무 대답이 없자 주님은, “무리를 둘러보시며 그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가 내밀매 그 병이 나았습니다.
여러분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예수님의 태도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율법을 굳게 세우기 위해, 취하고 있는 두 입장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은 뭘 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안식일을 어기는 그 무언가를 피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주님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십니다. 다시 말해 안식일에 더 열심히 선을 ‘행함으로’ 그 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이 태도의 차이는 실로 대단히 큰 차이입니다.
무엇을 범하면 죄가 되는가, 여기에 머무르면 결국 바리새인처럼 나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남도 정죄하여 넘어지게 만듭니다. 반면에 무엇을 행하면 선이 되는가, 무엇을 행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거기에 초점을 두면, 나는 율법에 자유하나, 자연스럽게 율법이 세워집니다. 율법이 완성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먼저 구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聖化이고, 율법을 완성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를 믿고도 우리는 늘 하는 질문이, ‘지금 이것이 죄인가, 아닌가,’ ‘이것 하면, 이것 안 하면, 하나님이 벌하실까, 아닐까?’ 여기에 머물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우리는 거룩함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뭘 하면 주님이 기뻐하실까? 어떻게 하면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이 고민을 해야 합니다.
우리 말씀 한 구절 찾아 읽겠습니다. 에베소서 5장 8~18절 말씀입니다(신약성경 315쪽). “8.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15.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구원은 죄의 종이 죄에서 자유해지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구원은 죄의 종이, 어둠의 자녀가 의의 종, 빛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죄는 이미 이겼으니 그 다음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가 빛이랍니다. 이미 빛이니 그 빛을 비추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가진 이 빛이 혹시라도 꺼지면 어떻게 하나, 이런 마음으로 불안해서 가만히 들고만 서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내가 받은 달란트 이거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으로 땅에 묻어만 두고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이 빛을 어디에 비춰야 하나, 이 달란트를 어디에 써야 하나, 하는 고민, 그렇게 질문으로 바꾸는 그것이 바로 거룩함(聖化)의 시작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죄를 안 짓는 게 구원이 아니라, 죄를 책망하고, 더 나아가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으로 죄를 드러내어 이기는 게 구원입니다. 물론 죄를 범하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 머물면 안 됩니다. “~하지 말라!”는 머무는 게 아니라, “~해라!”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여기가 끝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어떻게 행해야 할까, 고민하고 자세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 고민이 있어야 믿음으로 율법을 세울 수 있습니다.
마귀의 전략은 계속 우리가 죄의 문제에만 머물러 고민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것만 골몰하게 합니다. 죄를 묵상하게 해서, 그 죄와 실패에만 계속 머물러 있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꾸만 넘어지고 그래서 믿지 않는 바로와 아비멜렉 앞에서 자기 아내를 지키지도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오히려 선지자라고 부르시고, 도리어 그에게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끝끝내 너는 빛이라고, 잠자는 이들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일어나서 빛을 비추라고 하십니다.(*)
말씀 한 구절 더 찾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으로 가서, 15절부터 19절까지입니다. 엡1:17~19, 15.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1단계]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2단계]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3단계]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4단계]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실제로 그것을 경험하고 맛보는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 바울이 말하는 성도의 신앙의 여러 모습에 대해서, 여러분 성경책에 한 번 번호를 매겨보십시오.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 곧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을 믿게 하시는데, 그 과정이 이렇습니다. 17절에,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가 ①입니다. 그리고 18절에,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부르심 속에 담긴 소망)가 ②, 또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가 ③, 19절에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가 마지막 ④입니다.
①의 하나님을 아는 것, 그래서 믿고 천국 가는 것, 여기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왜 우리를 부르셨는가, 그 소망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하고, 또 우리에게 주신 주의 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 지를 깨달아야 하며, 거기서도 더 나아가,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를 우리로 실제로 맛보고 경험하는 것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 길을 믿음으로 걸어갈 때, 율법은 자연스럽게 굳게 세워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와 있는 것 같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한 번 스스로를 이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보십시오. (*) 성령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냥 어떻게든 죄만 안 짓고 사는 그 일을 넘어서, 더 사랑하도록 도우시고, 더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 부디 죄 앞에서 머물러 계시지 마십시오. 그것을 책망하고 이기는 자리로 가세요.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만 머무르지 마시고(물론 이것도 사모함이 필요하고 열정이 있어야 하지만), 속히 그 다음의 자리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져 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믿음의 과정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굳게 세우는 데 조금 더 구체적인 방법론이 되겠는데요, 여러분, 에베소서 이 말씀을 다시 보시면, 그 단계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부르심의 소망과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도,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을 맛보는 것도 모두 내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된다는 것이고, 그것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계시의 영’ 곧 성령을 통해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믿음의 싸움을 나 혼자 감당하려고 하는 습관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지난 설교를 다시 생각해보시면, 믿는다는 말의 성경적인 의미가 뭐라고 했습니까? 네, 맞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의지하고 기대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오늘 31절의 말씀을 풀어 읽으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대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성경 한 구절 더 찾겠습니다. 로마서 8:1~8,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율법이 육신(육체 그 자체가 아니라, 현세 지향의 성향?)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카타 사르카] 그 영을 따라 행하는[카타 프뉴마]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아멘.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8장을 강해할 때 말씀을 드리기로 하고, 여기서의 핵심은 ‘영을 따르는 것’입니다. 3절 이하를 보시면, 율법은 결국 성도를 의롭게,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실패한다고 하면서, 그 이유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해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상황이 달라졌음을 알게 되지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면서, 그 방법이 “육신을 따르지 않고[카타 사르카] 그 영을 따라 행하기[카타 프]”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냥 스스로 뭔가를 하는 게 아니라, 영을 따라 행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육신의 연약함을 넘어 율법을 이루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말은 좀 복잡하지만 의미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연약해서 율법만 보고서는 절대로 율법을 이룰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꼭 필요하고, 성도는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더 쉽게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그 성령과 함께, 그 성령을 의지함으로 율법을 세웁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광야를 건너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까? 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늘 바라보면서, 출발하고 멈추고 이동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우리 인생이라는 광야의 구름기둥, 불기둥입니다. 그 기둥이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듯이, 성도는 삶의 매순간마다 성령을 의지하고 그분의 소리를 청종함으로 거룩을 이루어가고, 그분이 원하시는 하나님나라를 세워갑니다
여러분, 이건 그냥 단지 상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이 늘 나와 동행하셔!” 이런 ‘느낌적인 느낌’이 아닙니다. 정말 성령과 함께 멈춰야 하고, 정말 성령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육신을 따른다는 말은 그냥 세상 흘러가는 대로, 내 몸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산다는 뜻입니다. 그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고 경험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성령을 의식하고, 의지하고 청종해야 합니다.
성령을 늘 의지하고 청종할 때 우리 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인도해 가시는 겁니다. 여러분, 성령의 첫 번째 열매가 무엇입니까? 맞습니다, 사랑(갈5:22,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을 통해 맺으시는 열매, 그 처음이 사랑입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면, 거기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으로 이웃도 사랑하게 되는 데 이릅니다.
왜 사랑이 성령의 첫 열매입니까, 첫 열매여야 합니까? 사랑만이 율법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13:10, love is the fulfillment of the law.). 사랑만이 법 이상의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야 모든 율법을 완성하고 난 이후에도 그 믿음의 순종이 자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냥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냥 가을바람에도 웃음이 나고 지나가는 음악 선율에도 눈물이 나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여러분 그냥 아무 일 없이도 눈물이 나고 웃음이 나고 하시는지요?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곳이 거기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구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고되고 너무 버거워서 그런 사랑을 느낄 여유도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더 성령을 의지하고 구해야 합니다. 조금 더 힘껏 성령을 부르고 찾아야 합니다. 혼자서 내 삶을 다 책임지려 하지 말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천국 가는 구원만 의지하지 마시고, 천국에 가는 그 여정 전부를 의지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도 천국을 맛봅니다.
주중 목요일 QT 본문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칭찬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9.교우들에 대한 사랑을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가르침을 받아서, 10.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것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권면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4:9~10)
참 놀랍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한 내용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과 삶 속에 다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사랑을 가르치셨고, 그 사랑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다른 번역으로 보면 바울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더 잘 이해가 됩니다. 사실 개역개정 성경에서 조금 약하게 번역된 것이 재귀대명사[yourselves, autos]입니다.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어떤 중간의 도움 없이 직접,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메시지를,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서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사랑을 행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울의 진짜 하려는 말이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에 사용된 동사가 [테오디닥토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다]인데요, 성경에 여기에 단 한 번 나오는 단업니다. 그 동사의 뜻 자체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다, 이렇게 풀어 쓰지 않고, 왜 굳이 이 단어를 썼을까요? 어떤 중간의 매개 없이, 직접, 곧바로, 성령의 내적 조명과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리더나 사도에게 배운 게 아니라, 그들이 직접 성령의 음성을 청종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당시에는 우리가 아는 사복음서, 로마서, 이런 성경이 아직 없을 때입니다. 그냥 파편적으로 돌아다니는 몇몇의 말씀 두루마리만 회람할 때입니다. 베드로도 바울의 편지를 구해다 읽고, 바울도 다른 사도들의 글을 구하여 읽으며 묵상하던 때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만큼 성령은 성도 가까운 곳에서, 친절하고 세밀하게 인도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성령을 찾고 구하고 듣고자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이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과 가르침을 청종함으로 여러분의 삶이 율법을 굳게 세우는 온전한 믿음의 삶 되기를 축복합니다. 나 혼자 싸우고 버티는 그러한 삶이 아니라, 단지 죄인지 아닌지 두려워하며 사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하고 기대함으로, 그분이 기뻐하시는 선한 뜻들을 품고 그렇게 율법을 굳게 세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가을, 부디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그래서 더 온전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