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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할 데가 어디냐' 2017년 9월 10일 주일 설교

2017-09-1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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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0 오순절 후 열네 번째 주일 설교 ---------------------------------------------------------- 로마서 3장 27~31절, 자랑할 데가 어디냐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0910.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고, 첨부된 파일을 클릭하시면 내려 받으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14) 본문 27절의 ‘자랑할 데가 어디냐’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27절의 ‘그런즉’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앞의 내용으로부터 얻어지는 결론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앞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지난 주 말씀을 생각해보면, ‘믿음의 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믿음은 오롯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기대한다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 가운데 들어가게 되는 것, 그것이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도 되는데, 바울은, 말씀드린 대로, ‘그런즉’이라는 말로, 뭔가 더 중요한 결론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본문에는 두 번의 ‘그런즉’이 나오는데요, (사실 그 안에는 세 번이라고 할 수 있긴 한데, 어쨌든) 27절에 한 번, 31절에 한 번, 나옵니다. 이 두 번의 ‘그런즉’에 대해 오늘과 다음 주에 계속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그런즉’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를 의지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을 바울은 상당히 문학적으로 표현을 했는데요, 27절에 보면,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다.”[에클라이오] 自問自答하는데요, 이 부분을 원문 표현 그대로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런즉 자랑이 어디 있느냐?” “어떤 자랑도 들어올 수 없도록 문이 잠겼다.” 즉 믿음의 법 아래에는 자랑이 들어올 여지가 없어졌다, 하는 선언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우리가 얻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의로움이, 구원이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임을, 자격 없이 받은 것이기에, 내 것인 양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인정하십니까? 그런데 본문 말씀처럼 아예 문을 잠그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구원에 관하여는 뭐 그렇다 쳐도, 우리의 삶에 아예 자랑이 빠지는 건 좀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더 그런 자랑을 요구하기도 하지요. 자기를 드러내고 알리는 것 자체가 실력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SNS가 발달하면서, 사실 자랑은 우리의 일상과 더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거기 올라가는 내용이라는 것이 사실 거의가 자랑입니다. 얼마나 은근히, 또 유쾌하게 자랑하느냐의 차이일 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기 자랑하는 일에 길들여져 그것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바울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음을 알게 되지요. ‘자랑’이라는 헬라어가 [카우헤시스]인데요, 바울 서신 같은 신약성경에 정말 많이 나옵니다. 신약성경에만 약 60회 정도 등장합니다. 전체 분량으로 보면 구약이 신약보다 훨씬 많은데도, 이 단어는 오히려 구약보다 신약에 약 1.5배 정도 자주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많은 ‘자랑’이라는 단어가 주로 어떤 맥락에서 나오겠습니까? 네, 맞습니다. 거의 대부분 ‘자랑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서 나옵니다. 유대인들만의 사회라고 할 수 있었던 구약과는 달리, 로마라고 하는 신약의 배경에서는, 이방 민족과의 비교와 자랑이 더 많아진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주로 무슨 자랑 했겠습니까? 역시 오늘날이랑 비슷합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면, 이생의 자랑(요일2:16)이라고 요약됩니다. 자기가 가진 것, 자기가 해낸 것(NIV,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 자랑이지요.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고서도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자랑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이라고 했고, 제자들이 다 유대인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어왔고, 알아왔다’고 자랑했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가지고 있음’도 또한 자랑했습니다. 이방인들, 헬라인들 역시 자기들 나름대로 자랑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지혜와 지식과 문화를 자랑 했고, 로마라는 거대한 힘의 기득권도 자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그런 신앙의 전통과 역사가 없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더 예수를 잘 믿고, 그래서 더 많이 복 받았음을 자랑합니다. 실제로 이방인들의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보다 훨씬 더 부흥했고 규모는 점점 더 커졌습니다. 성도의 숫자와 물질의 크기, 그리고 그에 따른 힘과 세력은 이미 예루살렘을 압도한 지 오래였습니다. 가난한 유대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물질로 열심히 섬긴 것도 다 이방 교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대로, 이방인들은 이방인들대로, 다 나름의 자랑이 있었고, 그래서 성경에는 그토록 자랑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게 됐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믿음이 연약할 땐 세상적인 것들로 자랑합니다. 외모와 소유를 자랑하고, 출신과 학벌을 자랑합니다. 자기 능력과 실력, 그리고 그렇게 되는 데 필요했던 인내와 노력도 자랑하지요. 물론 다 하나님이 주셨다고 작은 안전장치를 달긴 합니다만, 사실 그것이 더 위험한 자랑이지요. 왜요?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그만큼 사랑하지도, 축복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니까요. “자랑하는 게 뭐가 그리 나쁘고 악한 것인가?” 생각하게도 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남의 자랑을 들어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여러분 남이 늘어놓는 자랑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기분이 좋아지고, 그 자랑이 인정이 되고, 칭찬이 나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대체로 다른 사람 자랑을 들으면 괴롭습니다. 그것이 사실인데도 싫어합니다. 자랑, 거기에는 인간의 교만과 이기심이 깃들어 있음을 우리의 본성이 증언합니다.(자랑질, 순우리말) 성경은 이러한 자랑이 “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원래 하나님에게는 없는 것이 자랑입니다. 자랑은 본래 허탄하고 악한 것으로(약4:16), 그것은 본래 세상에서 온 것인데, 그것이 신앙에도, 또 성도에게도 ‘들어와 영향을 끼친 것’이지요. 믿음이 자라서도 자랑의 위험은 여전히 남습니다. 사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자랑이 바로, ‘믿음’ 자랑, ‘자기 의’ 자랑입니다. 믿음이 자라면 그것도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이렇게 헌신한다, 내가 이렇게 순종하고 있고, 이만큼 섬기고 있다. 내가 이렇게나 인내했고, 수고했다!’고 자랑합니다. 바울 당시에도 다들 그렇게 자랑하니까, 하다하다 바울이 자기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서 말하지요. 그만들 좀 해라. 그렇게 자랑하려고 한다면 내가 자랑할 게 왜 없겠냐고 항변하는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가장 빠지기 쉬운 자랑, 제일 위험한 자랑이 믿음 자랑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한 방법인데, 우리는 결국 그것마저도 자랑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물론 이러한 자랑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나 믿음 좋다! 나 헌신하고 수고한다!” 이렇게 자랑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신 이러한 믿음의 자랑은 대단히 변신에 능합니다. 자랑의 모양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나타납니다. 예컨대 내 믿음의 수고에 대한 타인의 무지와 무시 앞에서 느끼는 섭섭함이나, 나처럼 하지 못하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을 향한 비판 같은 것들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는데 왜 너는 안 하느냐? 내가 이만큼 수고했는데 너는 왜 알아주지 않느냐?’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일어날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안에 독한 시기와 믿음의 자랑이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약3:14).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남을 위한 희생을 해도, 그 안에 자랑이 없는 사람은, 내 행위가 기준이 되어 누군가를 비판하지도, 인정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셨죠. 그 안에 이미 사랑과 기쁨이 충만하셔서, 그렇지 못한 이들을 보면, 도리어 그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세요. 비판하느냐, 불쌍히 여기느냐, 그 차이는 실로 대단히 큽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자랑과 무관하게 믿었고, 헌신했습니다. 하나님 주신 은혜에 감사함으로 일하게 됩니다. 힘들어도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인내하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지나면, 그 일 자체가 나에게 주신 복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그 자리를 허락해주셨다는 걸 이해하게 되는 단계가 오지요.     그런데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이르게 됩니다. 이번 주 수요 강해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부분을 묵상했는데요, 그 내면의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랑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의 결말이 바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모든 헌신에는 어떠한 자랑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면서 그 희생을 자랑하시는 것 보셨습니까? 물론 하도 자식이 속을 썩이면 그걸 말씀하실 때도 있지만, 부모는 당신의 희생과 수고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늘 부족하다고 말씀합니다. 왜요, 그것이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어떻다고 말씀합니까? 오래 참고, 온유하고, 그 다음이 ‘자랑하지 않는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도, 희생도, 심지어 내 몸을 내어주는 그 헌신도 자랑할 수 없음을, 자랑할 필요가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데까지 이르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여정, 그 시작과 끝에는 그래서 자랑이 없습니다. 자랑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집니다. 우리 안에 자랑이나 또 그 자랑의 변신한 뭔가가 있을 때, 우리는 그것과 강하게 맞서 싸워야 합니다.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더 악하고 은밀하게 변신합니다. 그 자랑을 부추기는 사탄을 내쫓아야 하고, 문을 걸어 잠글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도가 해야 할 자랑이 따로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성도가 자랑하는 것, 자랑해야 하는 것이 세 가지 정도 나오는데요, 여러분 혹시 그 세 가지가 무엇인지 기억나시는지요?(*)     우선 좀 쉬운 것부터 시작을 한다면, 이번 주 금요일 QT 본문 중에 보면, ‘자랑’이라는 단어가 나왔었는데,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데살로니가전서 2:19의 말씀으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자신의 자랑이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서로를 자랑합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이러한 표현을 참 많이 사용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도 그렇고, 또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도 ‘나의 면류관’이라고 자랑합니다(빌립보서 4:1, …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 또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서는, 주님 다시 오실 때, 그들이 바울의 자랑이 되고, 바울이 그들의 자랑이 될 거라고 이야기 했습니다(고린도후서 1:14). 저와 여러분도 서로가 서로에게 자랑이 되는 꼭 그런 믿음의 관계이기를 소원합니다. 물론 이 자랑 역시 제3자를 향해서 하는 자랑은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자랑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지, 밖을 향해서 다른 사람에게 굳이 자랑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목사는 목사끼리 모이면 성도 자랑하고 싶어서 난리고, 또 성도들은 자기 목사를 자랑하고 그럴 수 있는데, 경험해보면 그 자랑도 별로 유익하지 못합니다. 그 자랑 역시 결국 인간의 공로와 능력과 의를 자랑하는 셈이니, 그 자랑이 우리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은 조심할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문밖으로 멀리멀리 나가야 하는 자랑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부터가 중요한데요, 성경 한 구절 찾겠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1~14절입니다. “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아멘. 바로 십자가 자랑입니다. 14절이 너무 중요하고 그래서 꼭 기억하셨으면 하는데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 여러분,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여러분, 당시 바울이 자랑하던 십자가는 사실 도저히 자랑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자랑은커녕, 일반적인 대화 안에서는 그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는 그런 단어였습니다. ‘터부’라고 하지요. 지금이야 십자가, 그러면 예수님이 생각나고 그래서 ‘뭐, 자랑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 당시 십자가는 엄청난 공포와 혐오의 상징이었습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어떤 무서운 질병이나, 형벌, 예컨대 斬首나 陵遲處斬과 같이 끔찍한 형벌을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점잖은 로마 사회에서 ‘십자가’라는 단어는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는 매우 불쾌한 무엇이었습니다(F.F. Bruce). 그러니 로마 시민인 바울이, 나는 십자가를 자랑한다, 이렇게 말했을 때, 로마인들이 느꼈을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엔 기독교인들이 이상한 오해를 받기 십상이었지요. ‘이 사람들 정신이 좀 이상하다. 십자가를 자랑하고 다닌다!’ 심지어 바울은 자신의 모든 배경과 지식과 가문을 배설물에 비유하면서까지 십자가만 자랑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오랜 그 사랑의 역사가 오롯이 십자가 안에 녹아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십자가 자랑은 자연스럽게 성도의 마지막 자랑과 연결이 됩니다. 사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나는 더 이상 자랑할 게 없다는 걸 자랑하는 겁니다. 말이 좀 이상한데요, 십자가는 내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을 자랑하는 겁니다. 내가 자랑할 거라고는 내가 의지하는 십자가뿐이라는 겁니다. 사실 이것은 자랑이 아니지요. 십자가를 자랑하는 순간, 나의 모든 자랑이 더 이상 들어올 수 없게 됩니다. 말 그대로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자랑이라는 말 자체가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자랑이라는 것을 하려면 단 한 가지, 마지막 자랑만 남게 되는데요, 바로 나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부득불 자랑해야 한다면,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고백하는 겁니다(고후11:30). 성도의 마지막 자랑이 바로 이 자랑입니다. 바로 나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는 세상과는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내 약함이 자랑입니다. 이건 겸손과는 조금 다릅니다. 겸손은 스스로 낮추는 것이고,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지만, 성도는 더 나아갑니다.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거기서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할 때, ‘약한 것’이라는 단어는 [아세이나야, infirmity]라는 말로, 그 기본 뜻이 ‘모자란 것’입니다. 힘이나 지성이나 돈이나 건강이나, 심지어 믿음까지도 모자란 것인데, 바울은 그것을 자랑한답니다. 왜요? 그 모자람을 통해 하나님의 넘치심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라는 모자람이, 그 약함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긍휼을 자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그의 모든 편지에서 계속 그런 걸 자랑합니다. 나는 약하다, 두려움이 많다, 두려워서 심히 떨었다, 나는 말의 능력이 부족하고 지혜가 부족하다, 나는 만삭 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자랑한다(고전2:3~5), 감추지 않는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약함이 하나님의 강함이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겸손보다 더 나아갑니다. 심지어 바울은,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도 자랑합니다. 우리처럼 믿음이 좋고, 그래서 기도 응답 잘 되는 걸 자랑하는 게 아니라, 내 기도는 응답이 안 됐다, 그걸 자랑합니다. 내게 있는 질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더라, 되려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하신다, 이야기하며, 하나님의 능력은 내가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세상의 스스로 높아진 모든 자랑을 부끄럽게 하셨고, 지금도 그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십니다.”(고린도전서 1:27~29) 여러분은 부끄럽게 하시는 쪽에 서시겠습니까, 아니면 부끄러움을 당하는 쪽에 계시겠습니까?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고, 자신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강해서 교만하지 않고, 약해서 실망하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를 시기하고,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자랑함으로,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머묾을 선포하고, 하나님이 그 약함으로 세상의 강함을 부끄럽게 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러나 이 자랑은 말로는 쉽지만, 살아내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강해지고 싶고 또 그것으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죽지 않고,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예수를 이용해서 내가 강해지고 싶지, 예수를 따라 죽고, 부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자랑하려면,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려면, 우리에게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늘 14절 뒷부분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14절을 보면,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아멘. 여기가 정말 중요한 부분인데요, 여러분 조금 더 힘을 내서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죽었다고, 또한 나도 세상을 대하여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어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렇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죽으셨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렇습니다(롬6:10~11).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모든 죽음이 그렇듯, 예수님 역시 죽음과 함께 모든 영향력과 존재감이 소멸되었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예수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끝났고, 예수는 곧바로 잊혀졌습니다. 부활하신 뒤에도 주님은,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시며, “봐라, 나 살았지! 네가 죽였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있다! 내가 하나님이다!” 말씀하시며 자랑하시지 않지요. 세상을 향해 온전히 죽습니다. 예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순간에 예수는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났습니다. 세상에게는 죽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살았고, 모든 성도를 살리며 살아났습니다. 세상은 예수를 기억하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 예수는 여전히 살아 있고, 진정으로 살아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 역시 예수를 믿음으로, 같은 경험을 한다고 선언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납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입니다. [드라마 같은 데, 네가 아는 박복자는 죽었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위에서, 나도 함께 죽는 겁니다. 세례가 그 뜻입니다. 내가 주님과 연합하여 죽는 것입니다. 나 역시 세상을 향하여 죽고, 세상도 나를 향하여 죽습니다.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지금 성경은 우리에게 조금 겸손하게 살아라, 이런 뜻의 말씀을 하는 게 아닙니다. 자랑하지 말라는 게 겸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해 죽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평가와 평판과 인정 앞에 날마다 죽는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살아나고, 부활의 능력이 내게 나타나게 그렇게 살아가라는 겁니다. “절대로 세상과 하나님 모두에게 살아날 수 없습니다. 부득불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펄펄하게 살아 자기 자신을 자랑할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 십자가를 자랑할 것인지,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John Stott)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자랑과 그 교묘한 자기 위장의 모습들을 그냥 가볍게 넘기면 안 됩니다. 성도에게 자랑의 문제는 살고 죽는 문제요, 어떻게 죽고,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평생 그 싸움을 싸우며 늘 이 고민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어야 한다. 주님 다시 오실 때, 그때 자랑할 수 없게 된다면, 지금의 모든 수고가 다 헛된 것이다. 지금 세상의 자랑에 취해 십자가의 길을 부끄러워하고 포기하면, 주님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그때 주님이 나를 부끄러워하실 것이다.’ 늘 고민하며 기도했습니다(빌립보서 2:16)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의 날에 자랑할 게 많은 그런 삶 살아내십시다. 세상을 향해서는 날마다 죽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날마다 살아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십시다. 우리의 약함과 모자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다. 도리어 자랑하며, 거기서 세상의 강하고 부하고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십시다. 우리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자랑이 되는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아내십시다. 더 이상 어떤 자랑도 우리의 삶과 믿음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은혜의 자물쇠로 문을 단단히 잠그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부활의 능력 안에서 그분의 자랑이 되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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