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다 죄 아래 있다' 2017년 8월 27일 주일 설교
2017-08-27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3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70827 오순절 후 열두 번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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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9~18절, 다 죄 아래 있다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082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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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12) 본문 9절의 ‘다 죄 아래에 있다’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 말씀을 기억해보면, 우선 죄가,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잘못이나 범법 행위를 범하는 문제이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문제라는 점을 생각해봤고, 또 그러한 관계적 차원의 죄에 대해 인간이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 때문이었다는 것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지난 한 주를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그 말씀을 듣고 깨닫기 전과 비교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온전해지고, 깊어지셨는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참 고민도 많았고, 좌절도 많았던 그런 한 주였습니다. 말씀을 통해 얻은 그런 깨달음이 곧장 저의 믿음이나 실력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 됐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째서 우리는 깨닫기가 그리 어렵고, 또 깨달아도 그걸 살아내기는 더 어려운 걸까요?
본문 9절은, 그런 질문에 대해 한 가지 실마리 같은 것을 던져줍니다. 그건 이러한 문제가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 이전에 죄의 본성과 그 힘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9절을 다시 보시면,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 여기, ‘죄 아래 있다’는 말의 의미가 뭘까요? 이걸 어떤 영어 성경에서 보면, under the power of the sin, 그러니까 죄의 힘 아래에 있다, 이렇게 번역했는데요,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지요?
여러분 보통 죄라는 말과 연결되는 술어에 어떤 게 있을까요? 우리는 보통 ‘죄’를 목적어로 사용해서 죄를 ‘범하다’, ‘죄를 짓다’ 등과 같이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은연중에 죄의 문제에 있어서, 내가 주체이고, 죄는 나에 의해 결정되는 하나의 대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죄 아래 내가 있는 게 아니라, 죄 위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하지만 성경은, 그런 우리의 생각이 틀렸음을 지적합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우리가 죄 아래 있고, 죄가 우리를 선택하고 결정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는 ‘죄’가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로 등장하여 이러한 사실을 일깨우는 말씀이 정말 많습니다. 죄가 살아났다(7:9),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5:12), 죄가 우리 안에서 온갖 탐심을 이룬다(7:8), 죄가 자란다(장성한다, 약1:15), 죄가 인간을 주장하다(다스리다, 지배하다, 6:14), 죄가 왕 노릇을 한다(5:21) 등에 이르기까지, 죄는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나쁜 행동, 빗나간 행동(하마르티아)이기 이전에,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하나의 세력으로 자라나서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의 관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죄의 인격적 측면과 통치의 측면을 단 한 단어로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오늘 제목이기도 한 9절의 표현, ‘죄 아래에 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사실 로마서에 여기 ‘죄’라는 단어 ‘하마르티아’가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쓰임이 아주 강렬하지요. 모든 사람을 다 자기 아래 두고 있다는 선언 속에 죄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언가의 힘 아래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보통 ‘권세’, ‘통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10절부터 18절까지 길게 인용된 말씀을 보면, 마치 사람의 모든 행위가 다 죄뿐인 것처럼 그렇게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아무 죄도 범하지 않는 순간도 우리 일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이토록 단호하고 강한 어조로 말하는 것은, 설사 우리가 그런 순간을 산다고 해도, 여전히 죄라는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죄를 깨닫고 싸워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 죄라는 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는 죄를 과소평가하면 안 되겠지요. 물론 필요 이상으로 과대평가해서도 안 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를 잘 모르거나, 막연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죄를 택하고 그 죄를 내가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가 우리를 선택하고 주장하고 있고, 그러한 죄의 권세 아래 우리의 삶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죄에 대한 우리의 가장 큰 오해인지도 모릅니다.
아담을 통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온 이후, 죄는 인간의 왕 노릇을 해 왔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the lord of the creation)이라는 건 사실 인간의 주장이고, 실상은, 죄가 만물의 영장 노릇을 했습니다. 사실 처음 아담은 에덴동산의 실질적인 왕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었지요. 그때는 죄가 인간을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게 되는 과정이, 지금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과 비슷한 과정인 것처럼 우리는 생각하고 비교하며 말하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그때는 철저하게 죄가 아담의 권세,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뱀보다 아담이 더 우위에 있었고, 그래서 유혹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죄는 인간을 유혹하는 게 아니라 다스립니다. 사람은 자기가 주체라고 생각하고 죄를 선택하는 거라고 여기지만, 착각입니다. 죄가 다스립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향한 마지막 시험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마귀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이야기하지요. “만일 네가 내게 엎드려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치 실제로 세상과 그 영광이 다 자기 것인 양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자신 있고 대단합니다. 놀라운 건 예수님도 마귀의 이 말을 인정하시는 듯, 그저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는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실 따름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건 우리 인간밖에 없는 지도 모릅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다(5:21), 이것이 인간 세상을 향한 성경의 진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죄는 권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인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통치 아래 있던 동물과 식물과 온 우주 피조물에게도 같은 영향을 미쳤다고 성경은 말씀하시지요. 피조물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죄의 종이 된 후, 피조물도 인간들과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고,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성령 안에서 진정으로 죄의 권세를 향해 자유한 성도들이 영광 얻는 때를 고대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로마서 8:19~23). 죄의 권세는 단순히 인간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모든 동물과 자연, 우주의 차원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죄의 가장 큰 능력인 사망을 이기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깨뜨리신 것입니다. 죄 자체가 끝장난 것은 아닙니다. 죄는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죄는 더 이상 이전의 그 권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고,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당신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기(요한복음 1:12)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하나의 권세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그런 권세의 실체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면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6:18)고 하셨지요. 교회는 그런 소명이 있는 겁니다. 더 이상 이 땅이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지 않음을 증언하고 살아내는 소명, 예전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되었음을 알리고 보여주는, 그런 거룩한 소명이 교회와 성도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그 소명을 잘 감당하는 것 같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면, ‘아, 세상이 달라졌구나. 죄와 사망의 권세가 꺾였구나. 진정한 자유가 왔구나!’ 이렇게 생각합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세상은 교회와 성도를 보며 죄의 권세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역으로 깨닫고 있지요. 실제로 한국 교회는 죄의 권세 앞에 너무나 무력해졌습니다. 정말이지 다시 죄의 노예가 된 것만 같습니다.
세상이 점점 악해지는 것 같이 보이는 이유는 오롯이 예수 믿는 우리들 때문입니다. 죄의 권세와 맞서 싸워야 하는 사람,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성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죄와 싸울 이유도 없고, 그 권세를 이길 방법도 없습니다. 오직 교회와 성도만이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싸워야 하고, 또 이겨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죄의 권세에 대해 제대로 알고, 바른 방법으로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뒤에도 여전히 죄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1)이러한 죄에 대한 싸움을 자꾸만 오해하기 때문이고, 2)(더 본질적으로는) 싸우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깐 말씀 한 구절 같이 좀 찾아 읽겠습니다. 우리가 전신갑주라는 말로 잘 아는 본문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20절(신약 316쪽), 10.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19.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성도의 삶과 신앙의 성격에 대해, 우리가 싸우는 죄와의 싸움에 대해 분명하게 정의내리시지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게 아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싸움이 아니라, 권세와 권세의 싸움이다.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한 사람의 자기와의 싸움, 이런 게 아니라, 눈에 보이고 또 보이지 않는 권세들과의 싸움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게 아닙니다. 성도는 그 너머의 존재들을 의식하고 그들을 상대로 맞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세, 어떤 힘들과 싸우는 것이지, 나를 싫어하고 나를 괴롭히는, 그냥 좀 미운 누군가와 싸우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데 우리의 에너지를 다 소모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능력과 악의 실체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우는 무기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이 싸움은 내 실력으로 싸우면 100전 100패입니다. 10절에 정말 중요한 말씀이 있지요. 우리의 무기가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입니다. 일단 주 안에서 싸워야 하고, 또한 주님의 능력으로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을 이길 실력과 무기가 우리 안에 없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게 그겁니다. 싸움에 필요한 모든 것이, 전신갑주가 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칼도, 방패도, 신발도, 투구도, 갑옷도, 허리띠도 다 주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고, 주 안에서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그의 능력과 무기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으며, 그렇게 싸워야 이깁니다. 하나님과 끊어지면 싸워보나 마나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단 주 안에서, 그리고 그의 능력으로 싸워야 합니다.
적은 강합니다. 우리가 무엇이 약한지 알고 있고 어디를 공격하면 무너지는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적은 권세입니다. 우리를 실질적으로 얽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도 ‘교회로’ 싸워야 합니다. 음부의 권세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거룩한 연합이 성도의 연합이고, 그 실체가 교회입니다.
사도신경 속에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고 이야기하지요. 우리는 지금 1대 1의 각개전투를 싸우는 게 아닙니다. 사탄은 우리를 그런 싸움으로 자꾸 인도해갑니다. 1대 1로 싸우자고 할 겁니다. 우리의 삶은 점점 더 고독해집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됩니다. 그렇게 싸우면 이길 수 없습니다. 18절 말씀처럼, 가능하면 여러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목사를 위해서도, 우리 지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혼자서는 절대 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전쟁할 때 상대의 강한 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까, 아니면 약한 곳을 노려 공격합니까? 네 당연히 약한 곳을 집중하여 계속 공격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장 먼저 누구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교회의 가장 약한 성도들을 위해, 이 싸움을 가장 버거워하고 힘들어 하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곳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믿음을 눈을 뜨고 무기를 갖추고 다시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의 미래가 우리가 살아내는 일상 속의 묵상과 기도에 있다고 오래 전부터 여러분에게 말씀드려 왔습니다. 서로의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 멀어서 쉽게 모여서 기도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말씀 역시도 목사에게만 의존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저와 여러분이 삶에서 꾸준히 말씀을 먹고, 그 시간을 통해, 길지는 않아도, 말씀 안에서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기를 간절히 바래왔습니다.
여러분, 말씀 묵상하고, 그 말씀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는 그것밖에 무기가 없습니다. 이 싸움이 여러분 자신만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 지체들과 더 나아가 주의 나라를 위한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나만 생각하면 안 해도 되지만 서로를 위해서라도 해야 합니다.
다시 믿음의 방패, 말씀의 칼을 드십시오. 정신이 좀 들고 힘이 좀 차려지면, 그땐 내 것만 들지 말고 힘겨워하는 상대의 것도 좀 같이 들어주고 하십시오. 같이 싸워야 합니다. 시선을 좀 더 멀리, 넓게 두고, 이 세상 속에 저와 여러분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느껴보십시오. 우리는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하는 자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선진국일수록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에 대한 예우가 특별하지요. 거리, 상점 어디서나 군인들을 향해 “당신의 섬김에 감사합니다.” “Thank you for you service.”라고 말하며 고마움을 표시하는 시민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이런 부분이 많이 부족한데요, 요즘 국가적으로 보훈을 강조하는 건 그래서 참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지종성 대위(성도)를 생각하고, 또 이 땅의 군인들 생각을 할 때마다, 하나님나라에서 누가 존귀한 사람일까, 늘 생각하곤 합니다. 이 땅의 삶을 거룩한 군사로서, 나와 지체를 위해 열심히 싸운 성도들, 그래서 상처도 많고 흉터도 많은 그런 성도들이 천국에서 가장 존귀하게 영광을 받겠구나, 하는 그런 마음이 듭니다.
바울은 죽기 직전 디모데후서(4:7~8)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여러분, 먼 훗날 주님 앞에서, 함께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더 이상 우리가 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고, 우리 아래에 죄가 있습니다. 그런 세상이 왔음을 살아내고 보여주는 사명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음을 잊지 마시고, 부디 주의 나라의 거룩한 군사로서 죄의 권세와 맞서 싸워 이기는 그런 저와 여러분, 우리 고백교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