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2017년 7월 23일 주일 설교

2017-07-2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2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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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23오순절 후 일곱 번째 주일 설교 ---------------------------------------------------------- 로마서 2장 1~16절,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0723.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7) 본문 1절의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주 오후 성경개관 시간에, 성막과 구약의 절기와 제사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기억나시는지요, 레위기에 기록된 다섯 가지의 제사 중에서, 유대인들이 의무적으로 드려야 했던 두 가지 제사가 무엇이었습니까? 네, 속죄제와 속건제, 이 두 가지였습니다. 둘 다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태워서,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복구하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드려지는 제사였습니다. 그럼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속죄와 속건의 제사를 한 번, 두 번, 드리게 되면서, 사람들은 그럴수록 죄의 심각성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게 됐을까요? (*) 아마 처음에는 자기의 죄를 대신하여 죽고, 해체되고, 태워지는 짐승을 보며, 적잖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을 겁니다. 몇 번 말씀드린 대로, 제가 네팔 ‘덕친칼리’라는 곳에 갔을 때, 사람들이 직접 가지고 온 짐승으로 그 자리에서 잡아 제사를 드리는, 힌두교 제사를 보고 한동안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인간은 시각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존재여서 그런 제사의 시각적 효과는 아마 대단한 힘이 있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피의 제사를 드리면서, 죄의 심각성을 생각했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고, 또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아야 하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두 번이고, 계속 그런 일들이 반복이 되면서, 심각한 반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의 충격은 무뎌지고, 그들의 마음은 오히려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뜻의 정반대의 방향으로 굳어져 가게 된 겁니다. ‘그래, 어차피 다 지키지 못하는 거야. 그걸 아시니까 하나님이 이런 속죄의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거 아니겠어? 중요한 건 내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율법 안에 있다는 거야. 어차피 사람은 완벽할 수 없는 거, 적당히 하고 하다가 잘 안 되면 또 제사를 드리고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야.’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겁니다. 아주 작은 출발의 차이였는데, 이것이 실은 그들의 삶과 역사 속에서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만들게 됩니다.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기억하고, 돌이켜 회개하기를 원하셔서 주신 최소한의 율법과 제사가 도리어 정반대의 방향으로, 그러니까 죄를 조금 더 편하게 지을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된 겁니다. 본문 4절 말씀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인내를 멸시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율법과 제사를 내 죄의 수단으로 삼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그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떨까요? 사실 우리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매년 최소한 몇 번의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아예 드려지지도 않게 됐으니까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속죄가 아니라 감사가 목적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모든 제사를 대신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수천수만 번의 제사가 단 한 번으로 끝났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예수님의 그 제사를 눈으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단지 성경을 읽고 믿은 것이 전부입니다. 보지 않고 믿었으니 복되지만, 저와 여러분은 당연히 유대인들보다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기도 더 쉽습니다. 이미 모든 속죄의 제사가 끝났다고,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았다고 우리는 확실히 믿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뀌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지요. 율법과 제사가 이스라엘을 더욱 하나님 앞에 불의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저와 여러분을 더욱 하나님 앞에 불의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유대인들이 실패한 그 방향으로 예수를 믿고 있다면, 그렇게 큰 오차를 가지고 믿음의 여정을 출발해서 가고 있다면, 이미 우리는 본래 가야하는 믿음의 여정에서 아주 멀리 이탈되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로마서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인간은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만들어낸 문제를 하나님의 입장처럼 중요하게 생각을 안 합니다. 아니 못합니다. 하나님은 죄가 우리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했다, 하나님께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래서 당신의 아들이 오셔서 제물이 되어야했다고 하시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이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구원을 받기 전까지는, 또 내가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이 문제를 대단히 순진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봅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입장이 아니라, 죄를 늘 ‘짓는’ 입장이기에, 그게 일면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릴 적 제 아버지께서는, 제가 뭔가를 잘못하면 항상 저를 집 앞에 있는 작은 산에 올라가서 제가 맞을 만큼의 회초리를 스스로 판단해서 꺾어오라고 시키셨습니다. 저에게는 그게 참 고역이었는데요 …, 아버지께서 누구한테 그런 방법을 듣고 사용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 안에는, 제가 잘못을 깊이 생각하고, 그것의 문제점을 스스로 깨닫고,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말라는 뜻이 계셨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수백 번 그 산에 오르면서, 거의 단 한 번도 제 잘못의 심각성을 생각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몇 대의 회초리를 꺾어가야 적당히 面도 서면서도 적당히 안 아프게 그렇게 끝날까, 늘 그 생각이었습니다. ‘어떤 회초리가 안 아프면서도 빨리 부러지나, 몇 분 쯤 산에 있다가 내려가야 적당히 아버지의 화가 좀 풀리게 될까? 너무 늦게 내려가면 더 화를 내시겠지.’ 오직 덜 맞고 덜 아프기 위한 별별 생각만 했습니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마음 깊이 곱씹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는 게 아니라, 오직 내가 이 불편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빨리 벗어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적게 맞고 최대한 유리하게 일을 마무리할지, 오직 그것만 관심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산에 올라갈 때마다 제가 조금씩 더 어른스러워지고 성숙해져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영악해지고 교묘해지기만 하는 거지요.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그냥 아버지께서 직접 회초리를 꺾어 오시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죄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징계와 형벌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그 죄가 가진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와 내가 타인에게 입힌 고통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일로 당할 나의 문제, 나의 어려움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이기기가 힘듭니다. 죄에 집중하여 그것과 싸우지 못하고 늘 그 다음, 죄의 형벌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없이는 안 됩니다. 징계가 아닌 죄 자체에 집중하고 그것을 이길 수 있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징계를 당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분의 판단을 생각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죄를 향해 가진 당신의 모든 진노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았습니다. 더 이상의 징계와 진노가 없는 온전한 용서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죄를 보게 하신 것,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징계를 피하기 위한 형식적인 회개와 예배 말고,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기 위한 회개와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은 아들 예수에게 당신의 모든 진노를 쏟았습니다. (*)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을 듣고도 역시나 극단적인 양갈래의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젠 징계까지 하나님이 해결해버리셨으니 이전보다 훨씬 더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행함 없는 죽은 믿음이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반대로 정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한 자유를 만끽하며, 죄에 맞서 싸워 승리하는 길을 걷는 사람들도 나옵니다. 탕감된 죄의 빚을 다시 짊어지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삶을 넘어서, 다른 사람이 내게 진 빚을 탕감해주며, 참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일들을 행하려는 신실한 믿음의 성도들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그들에게는 예수가 구원자이시자 동시에 삶의 롤 모델이 됩니다. 놀랍게도 예수의 ‘제자’가 되는 거지요. 나를 따르라, 가서 너희도 나처럼 살아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에이 그걸 어떻게 제가’라고 말하지 않고, ‘아멘’으로 반응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본래의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고, 그렇게 그 먼 길을 향해 걸어가는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갈래 길 중에서 어느 쪽의 길을 택하고 걸어가고 계십니까?  사실 본문의 내용에서 제가 좀 너무 멀리 나간 것도 같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건, 우리의 본성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오셨지만, 그들은 영접하지 않았고, 그들의 삶에서 떠나주시기를 요구했고, 결국 죽음에 넘겨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 진리는 남을 향한 정죄에 사용했다는 것, 그것이 본문의 메시지인데, 제가 너무 멀리 와 버린 것도 같습니다. 주중에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는데요, 어느 외진 한 마을에 타지에서 부부가 이사를 와서 살게 됐답니다. 그런데 이 부부가 너무 금슬이 좋아서, 서로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섬기는 부부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런 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칭찬도 하고 좋아했습니다. 정말 괜찮은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들어왔다고, 참 보기만 해도 좋다고, 사람들이 만족해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을 분위기가 점점 이상한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배우자에게 그 집 남편, 그 집 아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겁니다. “저 집 남편은 이런 것도 해 주고, 저런 것도 한다는데, 당신은 뭐냐, 정말 나를 사랑하기나 하는 거냐?” “아니, 그러는 당신은 뭐 잘 한 게 있냐. 그 집 아내는 이렇게, 저렇게 남편을 하늘처럼 섬기더라. 왜 당신은 그렇게 안 하냐? 안 하는 거냐, 못하는 거냐?” 서로 싸우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 뭐냐, 그 부부를 그 마을 밖으로 내쫓았다는 겁니다. 그냥 우리는 우리대로 사는 게 편했다, 괜히 그 부부를 보면 우리만 불편해지고, 힘드니까, 그들을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고, 자기들 살던 대로 다시 돌아가게 됐다는 겁니다. 사람은 내가 먼저 변할 생각을 안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깨닫고 감동을 받아도 그걸 내가 먼저 살아낼 생각은 거의 안 합니다. 그 말씀으로 남을 판단하고 고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습관대로 살아갑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나타나도, 오히려 그 진리를 미워하고 핍박하여 내 시선에서 내쫓아버립니다. 나를 향해 밝게 비취는 빛을 도리어 다른 사람을 향해 반사해 버립니다. 그게 인간의 모습이라고 오늘 말씀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도 그렇게 진리를 우리의 삶 밖으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혹시 진리를 알고 그분의 말씀을 더 온전히 깨닫고 살면 그게 나를 더 피곤하고 힘들게 할까봐 말씀을 보는 것도 주저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안 보고, 모르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안 보이는 곳으로 밀쳐내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 유혹에 미혹당하면 안 됩니다. 진리를 살아낼 힘이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말씀에 순종할 힘이, 오직 말씀에서만 나옵니다.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빛 되신 예수를 밀쳐내는 게 아니라, 한 발 더 그 빛 앞으로 다가서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을 요리조리 피하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의 칼날이 나의 삶과 생각 속에 들어와 은밀하고 감춰진 불의와 교만을 찔러 쪼개도록, 그 아픈 칼날을 여러분의 삶 깊숙이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다만 한 가지, 그 칼을 타인을 향해서 휘두르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1절에서 언급하는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지는 마십시오.  인간은 자신이 죄인이면서도 타인을 비난하고 비판할 때는 그보다 더 의로울 수가 없습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며 마치 자신은 전혀 그런 행동과 무관한 듯 착각을 하는 게 인간입니다. 저 같은 설교자들이 빠지는 오류가 그것이지요. 설교가 곧 내 실력인 줄 착각하는 겁니다. 판단하는 그 말이 내 삶인 줄로 인간은 참 잘 속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비판과 판단이 실력이 아닙니다. 그 판단대로 자신도 역시 행해야만 실력입니다. 하나님은 비교하고, 비판하는 인간의 행위 속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꿰뚫어 아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남을 향한 판단들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심판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젠 더 이상 몰라서 죄를 지었다는 말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판단한다는 것은 그것이 죄라는 걸 내가 잘 안다는 것이요, 그러므로 더 이상 핑계 댈 수 없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판단이 무섭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지만(눅12:48), 판단하고 비난하는 이들에게는 그러한 배려와 참작조차 없어지는 겁니다. 프로이드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투사’라는 말로 교묘하게 꼬집었지요. 내가 비판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는, 내가 감추고 싶고, 내가 부정하고 싶은 나의 욕망과 나의 실존이 담겨 있다는 겁니다. 내가 특별히 싫어하는 부류의 모습이나 성격은, 내가 감춰둔 나의 모습을 남에게 투영한 결과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도 하고 싶은 건데,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거였는데, 어떤 이유로 인해 내가 하지 못하는 그것을 누군가 하고 있을 때, 인간은 분노를 느끼고, 엄청난 비난을 거기에 퍼부음으로써, 자신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과도하게 자신을 부정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혼낼 때 그런 일이 자주 나타나지요. 내가 하는 그 비판 속에, 감춰진 내 모습이 있다는 건 이미 세상의 상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성도는 타인을 향한 정죄와 비판이 자기 속에서 일어날 때, 그것이 자신을 정죄하는 큰 사이렌 소리로 들려야 합니다. 저도 어느 순간 날카롭게 타인을 정죄하는 저 자신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는데요, 우리는 그런 순간마다 큰 소리로 사이렌을 울려야 합니다. ‘지금 내가 나 자신을 정죄하고 있구나. 내가 나를 심판하고 있구나!’ 깨달아야 합니다.  남의 틀린 걸 용케도 잘 찾아내고, 누구보다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그럼에도 정작 나는 그 기준으로 살아갈 능력도 없고, 더 나아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에 걸린 들보를 빼 주시기를, 우리가 타인의 백 데나리온짜리 허물을 기꺼이 용서하고 탕감해 줄 수 있는 그런 마음 주시기를, 성도는 늘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도의 그런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유일하게 구별되는 지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방향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졌고, 먼저 걸어가신 그 방향이어야 합니다. 비록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그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그 길을 갈 수 있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모든 걸림돌을 다 제거하셨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징계와 심판도, 우리를 향한 정죄도, 반복해야 했던 제사와 속죄도, 모두 하나님의 편에서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성령이 우리 각 사람에게 충만히 부어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 몫의 책임은, 그 바른 길을 택하고 그 길을 인내하며 계속 전진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고쳐 가시도록, 성령의 위로와 인도하심을 구하고 힘입는 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바른 길을 선택하고, 참고 선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하는 평강을 누리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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