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시험, 너 잘 만났다." 2014년 3월 9일 주일예배 설교

2014-03-09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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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9 사순절 첫 주 ----------------------------------------------------- 마태복음 4장 1~11절, 시험, 너 잘 만났다.  * 설교 음성파일 : http://www.4shared.com/mp3/iYkaUIoNba/20140309__1____.html (클릭) 사순절 첫 번째 주 말씀으로 ‘시험 너 잘 만났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세상에 시험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렇게 싫어하고 피하고만 싶은 시험은 우리 인생 도처에 놓여있습니다. 시험 없는 세상, 생각만 해도 행복할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시험의 기회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시험이 없다면 아마 원하는 곳,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정말 복잡하고 무질서한 경쟁이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사람은 많아지고 경쟁은 심화되는 상황에서 시험은 어쩌면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인생에도 시험은 늘 내 가까이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부터 온갖 시험이 찾아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시험거리도 아니었던 것들이 온통 시험이 됩니다. 어떤 것이 시험이냐고 물어오면 딱히 대답하기도 어려운데,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시험거리이고 시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시험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처음 에덴동산이 만들어졌을 때, 거기도 사탄이 있었고, 시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완전한 공간, 그래서 구약에는 에덴동산 외에 천국이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신약이 말하는 천국의 히브리어 번역이 ‘말구트 샤마임’ 곧 ‘하늘의 왕국’으로 있을 뿐, 구약은 천국이 곧 에덴동산입니다. 실제 이스라엘에서도 천국은 ‘말구트 샤마임’이 아니라, ‘간 에덴’ 곧 에덴동산입니다. 그런데 거기도 시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나라인데, 하나님의 통치가 그보다 더 강력할 수 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 시험은 하나님의 주도권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기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만드시고, 먹지 말 것을 명령하시지 않았다면 상황이 어떠했을까? 사탄이 에덴동산에 아예 발붙이지 못하게 막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지금과 전혀 다른 구속의 역사가 쓰여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천국을 상징하는 에덴동산에도 시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는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시험이 일상이 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시험을 당하십니다. 시험에 예외가 아무도 없음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말씀하는 구절이 또 있을까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시점에 치른 시험 말고도 주님은 늘 시험 속에서 사셨습니다. 오늘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는 것도 시험과 함께이고, 이후에도 수많은 시험에 평생 노출되어 사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것이지만, 그래도 한 번 간단하게라도 정리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아시는 대로 시험은 세 가지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두 가지로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과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은 같은 목적에서 주어진 것들입니다. 시험하는 사탄의 말 속에서 공통된 한 가지를 발견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구절입니다. 비록 시험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큰 틀에서는 같은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첫 번째 시험은 금식하신 예수님의 현실적인 필요에 대한 시험입니다. 배고프니 돌을 떡이 되게 해서 먹으라는 유혹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유혹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금식을 했는데, 제가 여러분에게 가서 “이제 금식하고 배가 고프니 라면이라도 끓여먹으라.”고 했다면, 이것이 시험이겠습니까? 물론 아니지요. 금식 중이었다면 모를까, 금식이 다 끝난 상황에서 음식을 먹으라는 것은 시험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시험이 되는 것은, 그 앞에 있는 전제, 곧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어떤 기적을 통해 스스로 드러내라는 것이기에 이것이 시험입니다. 메시아가 되시는 예수님이나 또 그분의 자녀가 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순간 세상은 우리가 누구인지 증명해보라는 요구를 듣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해보라, 이런 요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요구의 대부분은 일상의 필요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대학도 잘 가고, 취업도 잘 되고, 결혼도 잘 하고, 돈도 잘 벌어야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한 번 내게 보여줘 봐라.” 말합니다. 이러한 이야기에 괜히 ‘욱’ 해서 하나님께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열심히 간구하면 이제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 이번 일을 통해서 제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똑똑히 보여주십시오. 잘 되게, 복 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셔서 하나님 믿는 자녀의 본때를 좀 보여주십시오.” 이런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 시험을 거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힘이 있어도, 그것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드러내려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반대로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됨이 그러한 세상의 필요에 대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 곧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기억하고, 그 말씀 안에 머물고자 한다면, 이 시험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그 외의 모든 욕심과 욕망은 다 사탄의 유혹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시험도 이런 측면에서는 같은 시험입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렇게 해보라’는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시험의 대상이 조금 다릅니다. 첫 번째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능력으로 떡을 만드는 것이라면, 이번에는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를 붙들어 주실 것을 시험하는 것이지요. 시험의 내용 또한 현실적인 필요가 아니라, 그 이상의 과시적인 것, 곧 굳이 뛰어내릴 필요가 없는데도 뛰어서 하나님이 너를 붙들어주는지 시험해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시험의 대상은 실상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 시험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인간의 시험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대응하시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나의 시험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시험하는 이 두 번째 시험은 여러 시험 가운데 가장 난해하고, 또 신앙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시험입니다. 시험은 인간과 같은 연약한 존재, 그래서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존재에게나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시험이라는 말은 그래서 그 자체로 하나의 불경건이며, 불신앙이며, 심각한 타락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한 인간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많이 등장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범했던 ‘맛사’(massah)의 시험이 대표적입니다(출17장). '시험하다' 혹은 '유혹하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나사'(nasah)에서 '시험'을 가리키는 명사 '맛사'(massah)가 나왔습니다. 이 명사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시험했던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는 때마다 이 맛사에서의 사건을 빗대어,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신6:16, 신33:8, 시95:8-9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특별히 시편 95편의 인용에서 하시는 말씀이 맛사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지적하고 계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95:9의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적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내가 하는 일을 보고서도 나의 속을 떠보고 나를 시험하였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아담에게 접근한 뱀의 첫 전략도 그것이었지요. “정말 동산의 모든 나무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는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일단 거리를 두게 만듭니다. 모든 동산을 다 누리게 한 일에 대해 눈을 가리게 하고, 거기 주어진 단 하나의 예외에 초점을 두게 만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기적을 통해 노예의 자리에서 복 된 인간의 자리로 구원한 모든 사실들로부터 줌 아웃 해서, 오직 지금 잠깐의 현실적 고난에 줌 인하게 만듭니다. 이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사랑에 고개가 갸우뚱 하는 순간, 이미 시험에 넘어가기 시작한 셈입니다. 사순절 기간,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저는 그런 마음이 듭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랑이신 하나님께 처절하게 버림 받아 저주 가운데 죽어야만 했는가, 어쩌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그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는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을 떠보고 시험한 결과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원하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인간이 온전히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시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 사랑의 크기를 시험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수많은 기적과 능력 속에서도 하나님의 속을 떠보며 하나님을 우롱하였습니다. 그러니 결국 십자가까지 온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마지막까지 다 하는 그 순간까지 인간은 하나님을 시험하여 하나님을 막다른 곳까지 이르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혹시 하나님을 막다른 곳까지 몰아세우며,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제 더 이상 보여줄 하나님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이상 가는 사랑의 징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보고도 느끼고도 믿고도 하나님을 시험한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스스로 포기하는 길 뿐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려고 했는데, 전혀 간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만, 짧게 세 번째 시험을 살펴보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세 번째 시험도 사실은 크게 보면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나에게 굴복하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다워지라는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험은 처음부터 거짓에 기초하고 있는 유혹입니다. 사탄이 말하는 걸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핏 맞는 이야기 같지만, 그 이야기 자체에 거짓이 들어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이 온 세상의 주인인 척 예수님께 다가가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요. 사탄에게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줄 수 있는 소유권도, 처분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치 그것이 자기 것인 양 우리를 속이며 유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맞설 때에도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사탄이 원하는 방향으로 살면 우리의 삶이 조금 더 윤택해지고, 하나님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면 우리의 삶이 더 여유로워질 것이라는 사탄의 유혹에 담긴 달콤함에 취해 거짓에 눈이 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굴복하면 누리게 될 것 같지만, 명심하십시오. 권세와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어쨌거나 예수님께서는 어려운 시험의 때를 잘 이겨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을 통한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임합니다. 이처럼 시험에서 승리하면 하나님의 위로와 권능이 임합니다. 시험은 내 영혼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근육이 됩니다. 그러나 패배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패배의 잔을 마셔야 할 뿐 아니라, 더 큰 시험으로 들어갑니다. 사탄의 첫 시험을 이겨내지 못한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첫 시험에 패배한 결과,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더 크고 무거운 시험들에 그대로 노출됩니다. 시험이 또 다른 시험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시험을 처음에 분별하고 준비하여 대응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기면 그것으로 종료이지만, 지면 계속 더 깊은 시험으로 들어갑니다. 이기기가 몇 배 더 힘들어집니다. 영적 시험은 운전면허 시험과는 다릅니다. 한 번 떨어지면 다시 똑같은 것 더 잘 준비해서 다음에 붙으면 되는 그런 종류의 시험이 아닙니다. 떨어지면 더 어려운 시험을 당합니다. 군대에서 받는 시험이 그래도 이와 좀 비슷합니다. 처음에 잘 하면 그냥 끝납니다. 그런데 처음에 못하면 더 센 기합과 시험에 놓입니다. 사격 훈련을 하고 테스트를 받아 한 번에 통과하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일단 한 번 떨어지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다시 PRI라는 엄청난 훈련을 다시 받아야 하고, 더 높은 합격 기준으로 재시험을 봐야 합니다. 처음에 통과하면 영광이 따르지만 그렇게 재시험으로 통과하면 영광은커녕 수치만 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시험이 이와 같습니다. 한 번에 이겨야지, 지면 정말이지 망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면 하나님의 위로가 있고, 이제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사역이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의 시험을 통해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비로소 시작하신 것을 보면서 우리는 시험이 가지고 있는 시작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새 일은 언제나 시험을 통해 열립니다.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겨야 하기에, 하나님은 새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언제나 새 사람을 빚으시고, 거기엔 시험이라는 중요한 훈련의 과정이 수반됩니다. [New Mission ← New Being ← New Test]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시험도 성령께서 직접 이끄시고 인도하신다는 다소 놀라운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시험을 준비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시험의 과정은 결코 시험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통과하면 복을 주고 실패하면 벌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 시험을 통해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시고 동시에 그를 통해 새 일을 행하시기 위함입니다. 시험을 우리가 인식하고 제대로 반응해야 하는 진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의 시험을 이겨냈더라면, 분명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통해 본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실패로 그 계획은 유보되고 또 포기되었습니다. 이런 상상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미리 뱀의 그 유혹이 정말 중요한 시험이라고 미리 말씀해주셨더라면, 사전에 작은 언질이라도 주셨더라면, 아마 시험의 상황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시험인지를 아담과 하와 모두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그 결과 그처럼 허무하게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이 정말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중요한 시험을 제대로 알고 있기만 해도 상황은 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이, 우리의 준비가 달라지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시험이 언제나 예고 없는 급작스런 쪽지 시험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학교 다닐 때 가장 어려운 시험이 바로 예고 없이 치러지는 퀴즈나 쪽지 시험입니다. 중간이나 기말에 보는 시험은 일단 대비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기가 시작되면서 교수님께서 평가의 기준 가운데 하나로 언급한 갑작스런 퀴즈 같은, 범위도 없고 정해진 날짜도 없는 시험이 정말 무서운 시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시험이 다 이와 같습니다. 정해진 범위도 전혀 없고, 예고된 적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치러야 할 시험이 있다는 사실만 주님이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시험은 우리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범위와 난이도로만 출제된다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쉽게 동의하기 힘든, 그런 말씀도 추가하셨지요. 그래서 시험이 어렵습니다. 날짜만이라도 안다면 또 시험의 범위만이라도 안다면 괜찮을 텐데, 우리 앞에 놓인 시험들은 다 서프라이즈 테스트입니다. 그냥 서프라이즈가 아니라, 오늘 예수님의 시험과 같이, 내가 육체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맞이하는 시험입니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을 때 영적 공격이 오면 넉넉하게 이겨낼 수 있는 것도, 오늘 예수님의 상황처럼,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하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이단에 빠지는 많은 경우, 자신의 삶에, 신앙에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그와 같은 유혹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누구라도 당황하게 되고 그때 다가오는 시험은 평상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위기가 됩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넋 놓고 시험을 치를 수는 없습니다. 두 손 놓고 당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문제는 시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 시험은 단순히 우리를 평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시험을 통해 우리를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성숙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고, 더 중요한 것은, 거기 새 일을 위한 새 부대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이 어째서 성장하지 않느냐, 왜 내 믿음은 늘 정체되어 있느냐, 질문하신다면, 저는 단호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시험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시험이 이끄는 더 깊은 믿음의 수준으로 결코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험에 대한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시험은 될 수 있으면 피해할 우리의 적이 아니라,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의 친구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시험, 너 잘 만났다’입니다. (어투를 좀 더 적극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시험아, 너 정말 잘 만났구나! 이런 마음이 우선 필요합니다. 시험 자체를 볼 것이 아니라 그 시험 꼬리에 붙어 오는 하나님의 새 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시험이 끝나고 드디어 주님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사람들을 가르치고 고치시는 일들이 시험과 함께 시작됩니다. 이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시험을 발견하고 제대로 치르는 일입니다. 시험인지 구별을 해야 치릅니다. 시험인지도 모르고 어리버리하게 그냥 평소처럼 지내고 나중에 가서 친구들에게 지난번에 그게 시험이었다고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아차’ 탄식한다면, 그의 성적은 더 볼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기도하고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시험이 왔을 때 ‘이거 시험이구나’ 분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말씀이 없이는 시험을 시험으로 인식조차 할 수 없습니다. 밧세바를 범하며 엄청난 시험에 빠진 다윗을 보십시오. 게으르고 나태해지자 시험을 분별조차 못합니다. 게으름이 그래서 무섭습니다. 게으름은 영혼의 무장 해제입니다. 얼마나 큰 시험에 노출되고 그 시험의 참혹한 결과를 맞게 될지 전혀 모르는, 말 그대로 암담한 상태가 되게 합니다. 시험을 시험으로 분별하는 것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험을 분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시험을 찾아 반겨 맞이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시험은 우리의 삶에 어디에나 있습니다. 가정과 직장, 그리고 교회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시험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을 여러분 스스로 시험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시험한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시험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얼마나 좋고 얼마나 나쁜지를 스스로 점검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기도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물질로부터 자유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가? 스스로 점검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시험이 가장 우리에게 중요한 시험입니다. 내가 스스로 시험의 자리에 설 때, 시험의 모든 양상이 다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하는 시험이 아니라, 내가 다스리는 시험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말씀이 정말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왜 기도하고 왜 묵상합니까? 이유는 내 스스로 자진해서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낸 문제를 내가 직접 풀어보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우리가 치르는 영적인 시험은 서프라이즈 테스트라고 했습니다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전혀 서프라이즈 하지 않은 시험입니다. 내가 자원해서 스스로 단계를 높여가며 내 의지로 치르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기본적으로 시험거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주에 나눈 말씀, 내 필요를 컨트롤하고, 그 필요를 늘리지 않는 것, 내 모든 소유가 다 하나님의 뜻이니 그분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는 그 말씀, 얼마나 시험거리입니까?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신앙에 따라, 그리고 그 말씀을 얼마나 경외함으로 받느냐에 따라 그것은 정말 어려운 시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냥 흘려버리면 시험이 되지 않지요. 그러나 시험이 없다면 결국 성장도 없고, 더 중요한 사실은, 언젠가 그가 반드시 내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뜻이나, 사탄의 유혹을 통해 그 시험대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 자체로 이미 시험거리입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셨던 그 성령님은 오늘도 말씀의 광야로 저와 여러분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 광야에는 오직 하나님의 음성과 나의 실존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 광야를 찾아가, 내가 그것을 시험으로 인정하고 스스로 준비하여 시험을 실제로 치러낸다면, 분명 그 시험은 내게 유익이 될 것이며, 말씀드린 것처럼, 그 시험을 통한 새로운 하나님의 일이 내 삶 속에 시작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대하는 바른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은 피할 것이 아니라, 누리고 즐겨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방식입니다. 고린도후서 13:5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실전모의고사를 치르는 것입니다. 이 시험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주체적으로 정하고 준비하고 치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지 않은 시험보다 훨씬 더 제대로 준비하고 임할 수 있습니다. 시험 날짜만 내가 정할 수 있어도 얼마나 유리합니까? 이제 사탄에게 끌려 다니는 시험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곳으로 사탄을 끌어와서 거기서 시험을 치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주도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그래서 언제나 성령을 경외하고 그분의 음성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 그는 시험의 주도권을 잃지 않습니다. 사탄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곳, 나의 홈그라운드에서 성령의 강력한 도우심과 함께 시험을 받습니다. 결과야 더 볼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주님이 시험을 이기시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시험의 구도 자체를 주님이 끌고 가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의 주도권을 잡으십시오. 사탄에게 질질 끌려 다니며 동네북처럼 늘 당하지 말고, 내가 사탄의 머리채를 잡고 말씀의 광야에서 싸우십시오. 끌려 다니면 백전백패입니다. 말씀의 링에서, 기도로 맞서야 시험을 이깁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이겨야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시험에 져도 그곳에 성령이 계시기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도우십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제가 했습니다만,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향해 베드로는 자신이 정한 시험을 치릅니다. 물론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지만,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내가 만든 시험지, 답이 틀리고 점수가 별로 좋지 않았다면, 잠깐 스스로에게 창피하고 말면 그만입니다. 다시 보면 됩니다. 시행착오의 기회를 벌었으니 얼마나 유익한 것입니까? 시험에 대한 태도를 바꾸면 시험의 모든 결과가 내게 유익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를 결코 넘어뜨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와 그 시험을 통해 더 성숙하게 만드시고 그래서 주님의 새 사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물론 시험은 결코 쉽거나 만만하지 않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함”(마26:41)을 알기에 사탄은 참으로 집요하게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든든한 코치가 계시지 않습니까?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는”(히 2:18)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계십니다. 그 주님을 의지하고 당당히 시험에 맞서십시오. 스스로의 의지로 시험을 내고 치르십시오. 거기 비로소 주님과의 더 깊은 화목의 사귐이 있고, 놀랍게 우리의 삶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비전이 있습니다. 부디 시험을 피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그 시험을 마땅히 여기며 스스로 반겨 맞아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시험, 너 잘 만났다!”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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