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2017년 5월 14일 주일 설교

2017-05-1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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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4 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 설교 ---------------------------------------------------------- 사도행전 27장 33절 ~ 28장 10절 ,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0514.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고 첨부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하실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강해 150) 본문 39절의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주 어버이주일 말씀을 나누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성도의 삶은 결국, 나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차분한 마음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 이 세 가지를 구하고, 살아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지난 한 주, 그 말씀을 의지하여 살고, 또 여러분의 부모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섬기는 한 주가 되셨는지요? (맞습니다.) 부모님 역시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한계 중에 하나지요. 부모 자체를 바꿀 수도 없고, 부모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것 역시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걸 인정하고, 부모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참다운 섬김이 시작되는 자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위해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은,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것으로 족하겠지요. 사실 사람은 누구나 내가 원하지 않는 곳에 던져지고 거기서의 삶을 강요받습니다.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삶이 늘 그런 것만은 아님은, 오래 살아보지 않아도 금방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삶 전체의 몇 % 정도나 여러분 자신의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하십니까? 분명 내가 선택한 삶이고, 또 매순간 선택의 주권이 내게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내가 원했던 그 자리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 와 있음을 느끼신 적은 없습니까? 또 딱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선택지가 단 하나였던, 어쩔 수 없는 선택도 많지 않았습니까?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 참 좋은 말이고, 너무나 중요한 인생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연수가 쌓이고, 예수를 믿은 시간이 더해지며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진리, 인생의 정말 중요한 문제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지만 피할 수 없는 환경이나 조건에 대해 과연 내가 어떤 태도와 마음을 먹느냐, 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가게 됩니다. 엊그제 순례 중인 은영 자매에게서 연락이 왔는데요, 벌써 보름 정도의 순례를 하고 있는 상황에, 생각보다 훨씬 더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서 참 감사했습니다. 얼굴도 너무나 밝고 보내오는 사진이나 영상에서도 주변 사람들을 향한 은영이의 좋은 영향력들을 잘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가 걱정이라고, 기도를 부탁했는데요,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순례자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가 많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숙소와 방의 수가 정해져 있는데 묵으려는 사람은 많으니, 점점 순례가 경쟁이 되어 간다는 겁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묵상하고 기도하며 걷는 순례가 아니라, 어떻게든 먼저 다음 숙소에 먼저 도착해서 방을 잡아야 하는, 원치 않는 생존의 싸움이 되어버린 거지요. 애써 찾아간 순례의 길조차도 우리가 사는 여기의 인생과 다를 게 없구나, 싶은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큰맘 먹고 선택한 순례의 길이지만, 거기서 다시 한 번, 내가 선택하지 않은 생존의 싸움과 마주하게 되는 걸 보면서, 저는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좀 더 고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의 삶 또한 순례이고, 그 순례의 여정 또한 생존의 경쟁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경쟁에 길들여지며 사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신앙마저도 그 경쟁을 위해 사용되는 소모품처럼 되어 버린 삶에서, 과연 우리는 인생의 목적과 의미들을 잘 기억하고 살아내고 있는 걸까요? 어떻게 해야 그렇게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그런 삶의 환경 가운데 처해도 바른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로마로 가는 바울의 이 길고 험한 여정이 말하려는 정말 중요한 메시지 역시 그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의 사명, 바울의 선택은, 곧 자신이 결정하지 않은, 또 결정할 수 없는 수많은 생존의 위험과 위기에 봉착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사명이고, 또 그것을 내가 내 의지로 결정하여 순종한 것인데도, 거기엔 너무나 많은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고난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두 손과 발이 쇠사슬에 묶인 미결수 죄인으로 그 배를 탔다는 사실이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바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겠지만, 바울은 그 배에 탄 276명의 사람들 중 가장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 자유는 없었지요. 그는 선택하는 자가 아니라 선택을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그의 말은 죄인의 변명이었고, 그래서 그가 하는 말들은 번번이 묵살되기 일쑤였습니다. 그의 생명은, 누가 봐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자신의 조언을 듣지 않은 사람들의 결정으로 인해 배는 유라굴로를 만났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살아와, 결국 어느 땅인지도 알지 못하는 한 섬에 던져졌습니다. 겨우 살았나보다 생각한 곳에서, 오늘 본문에 보니, 바울은 다시 독사에 물려 위험에 빠집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정말 하나도 없다고, 인생 참 고단하다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바울의 이런 상황이, 마치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그대로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거친 풍랑을 헤쳐와 겨우 살았나보다 했더니, 더 독한 놈이 기다리는 겁니다. ‘아, 정말 하나님, 왜 저만 가지고 이러십니까?’ 한탄이 나옵니다. (지난 한 주 제 맘도 딱 그랬는데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Talk Bible 시간에 나누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상황을 대하는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와는 다른 그 무언가를 계속 발견하게 됩니다. 두 손 두 발 모두 묶인 가장 부자유한 사람이 자유와 힘과 권세를 가진 사람들의 삶에 강력한 복음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지요. 그 주변의 사람들은 바울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알아 가고, 그분의 살아계심을 맛보고 있고, 또 누군가의 생명과 영혼이 구원을 얻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275명 사람들의 생명이 바울의 손에 달려 있음이 확인되었고, 겨우 도착한 멜리데 섬에서도 보블리오의 가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질병이 치료되며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는 구원, 구조라는 말이 계속 등장하고 있는데요, 34절, 구원 [소테리아], 43절의 구원하려 하여 [디아소조], 44절, 구조 [디아소조], 28장 1절과 4절의 구조 [디아소조]까지, 지금 바울의 여정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성경은 계속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 ‘디아소조’라는 단어는 그냥 몸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 모두의 전인적인 치유를 표현하는 단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바울의 삶이야말로 구원이 필요한 위기와 고난의 연속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정반대로 그 바울을 통해 구원과 생명이 역사하고 있음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가장 부자유한 죄인의 몸이었던 바울을 통해서 말이지요. 본문 39절에는, 바울을 비롯한 276명은 그 멜리데 섬이 처음엔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고 올라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는 그곳을 바울의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지도에는 그날 276명이 상륙한 바로 그 자리를 ‘성 바울 만’[Saint Paul's Bay]이라고 표기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몰타어로는 ‘San Pawl il-Baħar’ [산 파울 일바하르]입니다. 지금도 매년 2월 10일, 바울의 파선과 상륙을 기념하는 행사가 지금도 열리고 있다고 하는데요, 바울이 멜리데 섬에 머무른 그 3개월 동안, 로마의 파견관 보블리오가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그가 훗날 멜리데 섬 최초의 주교가 되어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결국 그곳은 알 수 없는 땅이 아니라,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그런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또한 성경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정말 중요한 건 바로 이 부분인데요, 우리가 아는 바울은 기도도 많이 하고, 말씀도 많이 읽고 했겠지만, 문제는 본문이 그런 바울을 드러내려고 하고, 그래서 바울이 뭔가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말씀하는 게 아니라, 마치 바울이 굳이 그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으려고 해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러한 구원의 능력이 바울을 통해 스스로 나타나 역사하고 있음을 성경이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의지나 노력과 수고가 초점이 아니라, 바울이 누리고 있는, 바울이 맛보고 있는, 어떤 권세와 능력이 본문의 초점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바울이 로마로 가면서 겪고 있는 이 풍랑과 뱀의 문제는, 단순히 자연적인 현상,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당시 유대인들의 문화 속에서 물과 뱀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상징물이지요. 성경에서 물은 곧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의 모습에 대해 성경은 흑암이 ‘깊음’, 곧 ‘큰 물’ 위에 있다고, 묘사합니다. 즉 큰물은 곧 생명 없음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같은 특별히 깊고 큰물은 죽음의 권세를 의미함을 성경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장면이나 요단강을 건너는 것 모두 그래서 죽음의 권세에 대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물에 잠기는 이유도 옛 사람이 죽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지요. 이처럼 물은 죽음과 그 권세를 상징합니다. 바울이 멜리데 섬에서 물린 뱀 또한 우리를 그 죽음에 이르게 하는 어둠의 권세, 죄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선악과의 뱀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용된 불 뱀의 이야기도 그러하고, 예수님이 악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 하신 말씀 역시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사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뱀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로마로 가는 여정에서 바울이 겪고 또 이겨내고 있는 이 일들은, 사실은 인간이 겪는 하나의 고난이나 역경,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 나아가는 성도의 삶 속에는 반드시 다른 힘의 세력, 곧 죄와 어둠의 권세와 마주하게 됨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고난들이 우리의 삶에 상존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그것 때문이지요. 더불어 본문이 강조하는 더 중요한 진실은, 그 권세들 앞에서 성도는 이미 승리한 자로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에게 주신 권세,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그 권세로 이미 성도들은 죄와 사망을 이긴 자들이며, 성도는 그 존재 그 자체로, 이미 오늘 바울이 보여주는 선한 영향력을 내뿜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가 그런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충만한 삶의 자리에서 구원의 능력을 내뿜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밀려오는 죄와 사망의 권세들 앞에서, 나를 둘러싸는 풍랑과 뱀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승리를 선포하고, 수요 강해 시간에 나왔던 아브람이, 빼앗긴 롯과 이웃을 되찾아 오던 것처럼 그렇게, 빼앗긴 주의 자녀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조하고, 되찾아오는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 예수를 믿는 성도가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게, 물도 만나고 뱀도 만나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성도만이, 성도 때문에 큰물을 만나고 독사를 만납니다. 왜요? 그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어, 구원의 일을 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배에 있던 276명 중에서 오직 바울만이, 겨울 직전에 가장 강한 독을 가졌다는 뱀에게 물리는 이유는 재수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에게서 죽음이 감당할 수 없는 생명의 능력이 쉼 없이 내뿜어져 나오기 때문이지요. 생명이 역사하는 사람에게 시험도 오고 도전도 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상황 속에서 바울에게 뭔가를 더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생존의 싸움이 걸린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먹고살기도 바쁜, 생존 그 자체가 문제인 우리의 삶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무언가를 더 하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맞습니다. 생존 자체가 고난의 연속인데 우리가 뭘 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바울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혹시 하나님이 바울을 로마로 부르시며 하신 두 번의 말씀 속의 핵심이 무엇인지 혹시 기억나십니까? (*) 바울이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들에게 매를 맞고 겨우 로마 병사들에 의해 끌려가 목숨을 부지했을 때, 주님이 바울에게 찾아오셔서 하신 말씀을 찾아보십시다. 사도행전 23장 11절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여기 하나님의 명령은 단 하나입니다. “담대하라!” 유라굴로 풍랑을 만난 배 안에서 주님이 바울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가 23장 이후 처음으로 하나님이 등장하시는 장면인데요, 27장 23~24절이지요. 다함께 읽습니다. “23.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바울아,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아멘.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명령은 같습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원하시는 것은 뭔가를 더 하거나 대단한 일을 행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두려워 말고 염려하지 않고 그가 있는 곳에 성도로서 담대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이 담대함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바울도 매순간 두려웠기에 같은 말씀이 반복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두려운 일이 생겼을 때, 누군가 옆에서 여러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고 그 두려움이 사라집니까? 두려움은 본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감정입니다. 용기를 내라고 해서 용기를 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 담대하라,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용기를 내라는 게 아닙니다. 단지 그 말씀을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풍랑과 뱀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모든 것을 주관하고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에게 주목하라는 겁니다. (*) 지난 4월 첫 주에, 이사야 40장을 본문으로 했던 ‘하나님을 보라’는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제 생애 처음으로 했던 스킨스쿠버 이야기 기억나시지요? 믿음이라는 것에 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또 해야 하는 건, 결국 무엇을 볼 것인가를 바르게 선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용기는 내 선택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 능력, 내 선택 밖의 문제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내 시선을 하나님께로 고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분을 응시하고 인정할 때,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할 때, 두려움은 스스로 소멸됩니다. (*) 바울은 그것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라 말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바울이 고백했지요(빌립보서 4:13).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는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용기를 내야지, 두려워말아야지, 다짐하는 게 아닙니다. 초점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분 안에 머물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게 성도의 싸움이고 성도의 실력입니다. 문제를 생각하지 말아야지, 바람과 뱀을 잊어버려야지, 그렇게 고민하고, 다짐한다고 문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미국의 정치 문화를 날카롭게 지적한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이 있지요. 생각하지 마, 염려하지 마, 그러면 오히려 계속 거기에 매이게 됩니다. 생각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담대함이 생기고, 성도의 그 기개와 담대함이 회복되어야 비로소 진짜 문제가 정확히 보이고, 그 상황 속에서의 분별력도 생깁니다. 바울은 자신을 물고 있는 뱀에게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냥 무심하고 시크하게 불에 던져 버립니다. 호들갑을 떨며 난리가 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났고, 그 말씀 안에 이미 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셔서 보내실 때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누가복음 10:19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기억하고 그 안에 머물렀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주님은 똑같이 말씀하셨지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6:17~18) 오늘 바울에게서 일어나는 일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바울은 주님이 하신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주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뭔가 대단한 걸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머물며, 성도로서의 기개를 잃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 바울이 한 가장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어떤 지식이나 교훈으로도 이 담력과 실력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만이, 오직 그분을 바라보고 그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자만이, 죽음 앞에서도 구원의 통로로 담대히 설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닌 저와 여러분의 일상이 바로 이 믿음 안에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여러분이 혼자인 것처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필요하면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반드시 보내십니다. 로마로 가는 여정에는 뱀과 풍랑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도움의 손길들이 함께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마음씨 좋은 백부장을 보내시고, 구조되어 올라간 그 섬의 원주민들 역시 특별한 동정(28:2)으로 바울 일행을 돌보게 하십니다. 그 섬의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도움의 손길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여러분 홀로 안 되면, 반드시 누군가를 통해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 다만 어디에서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비록 내가 모든 상황을 선택하고 책임질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것을 주관하고 계시고,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그 여러 일들을 통해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그를 믿는 저와 여러분이 세상의 복이 된다는 것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고난이 아니라, 우리가 복이 되는 고난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 믿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요셉 형제, 주형 형제가, 낯선 곳으로 떠나게 됩니다. 두 분이 가야 할 그 땅 역시 구체적으로 어떤 땅인지 다 알지 못하지만, 저는 두 분을 통해 거기에도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이 선포될 줄로 확신합니다. 유학생으로 가든 이민자로 가든, 미결수 죄인으로 가든, 그것은 그저 세상이 보는 관점이고, 두 분은 그곳에서도 거룩한 성도이며,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맡겨진 사명자이며, 죄와 사망의 권세를 다스리는 자임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부르심에 늘 초점을 맞추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를 비롯한 나머지 성도들에게도 다시 한 번 권면합니다. 내가 원치 않는 곳,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여 가지 않은 곳, 유라굴로와 같은 인생의 풍랑을 맞아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곳. 가보니 독사가 있어 나를 물어 공격하는 곳. 우리의 인생 어디에서나 성도의 담력과 기개를 잃어버리지 마십시다. 누구 말처럼 우리가 돈이 없지 권세가 없는 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담대함을 잃지 않는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오늘 본문이 반복하여 기록하는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늘 강력하게 역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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