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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2017년 4월 16일 주일 설교

2017-04-1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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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6 부활절 설교 ------------------------------------------------- 요한복음 11:1~44,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0416.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고 첨부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본문 16절에 나오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저와 여러분의 삶의 고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중에 장로회 신학대학교에서 있었던 고난주간 예배 중, 기도 인도를 하셨던, 세월호 희생자 단원고 2학년 5반 이창현 군의 어머니의 기도문을 먼저 잠깐 읽고 설교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창조주이시며 전능자라고 불리우는 당신께 기도드리는 건 쉽지 않습니다. 3년 전 우리 아이들의 살려달라는 마지막 기도를 외면했었으니까요. 당신께 등 돌리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 당신이 계시더군요. 더 이상 울 힘조차 없어 그저 멍하니 앉아 바다만 바라보던 팽목항에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하늘을 보며 잠을 청해야 했던 국회에도, 내리 쬐는 땡볕을 피할 그늘 하나 찾기 어려웠던 광화문에도, 하수구 냄새에 시달려야 했던 청운동사무소에도, 침몰지점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동거차도에도, 그리고 병든 몸을 이끌고 세월호가 누워 있는 목포신항에도, 당신은 계셨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몰랐던 분들이 눈물가득 고인 눈으로 다가와서 안아주시며, 같이 울어주시는 따뜻함에서 당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당신께 기도할 때 그 기도 좀 들어주시지, 왜 우리 아이들이 없어진 지금, 모르는 사람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나요?/ 고난주간이면 우리 죄를 대신해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신 그 사랑에 감격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지를 묵상하고, 죄 짓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 고통에 가 닿으려고 노력했었지만, 우리 아이들이 없어진 이후엔 그런 노력하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이 고난주간이고 십자가와 세월호는 동일시되고 있으니까요.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신 십자가와, 수학여행 가던 단원고 아이들을 태우고 가다가 침몰당한 세월호를 동일하게 여기는 것이 불경스러우신가요?/ 2천 년 전 오늘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세 시간 동안 어둠이 덮치고,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다는 기록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아픔을 느끼게 해줍니다. 같은 아픔을 나눌 수 있는 분이 하나님 당신이셔서 다시 당신께로 향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으면서도 자신을 못 박은 사람들이, 몰라서 저지른 일이라며,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 모습을 닮기란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렇게 기도하신 예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가장 잘 섬긴다는 큰 교회들은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하기보다는, 애써 외면하거나 오히려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처럼 모르고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쌓아 올린 바벨탑이 너무 높고 견고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저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저들을 불쌍히 여기실 분은, 하나님 당신 밖에 없습니다. 저들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예수님이 짊어지셔야 했던 십자가의 고난이, 십자가의 용서가, 저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세요./ 낮은 곳으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당신의 임재와 사랑을 기다립니다. 팽목항에서, 국회에서, 광화문에서, 청운동사무소에서, 동거차도에서, 목포신항에서 만났던 당신을 닮은 사람들이 오늘 이 곳에 가득합니다. 부디 이들에게 청결한 마음을 주셔서 당신을 보게 하시고, 세미한 당신의 음성이 들려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7년 4월 12일 장신대 채플 기도) 저는 이 기도를 들으면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리고 이 땅에서 부활을 산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통해서야 비로소, 부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소망이 그리 절실하지도, 간절하지도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부활이 있어야 한다고, 그리 믿고, 또 바라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은 세월호 유가족들과 마찬가지로, 부활의 기적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던, 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조금 떨어진 베다니라는 마을에 사는 한 3남매 가정이었습니다. 큰 오빠 나사로, 또 언니 마르다와 막내 마리아. 주님이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그 가정에서 머무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늘 그들이 직접 주님을 영접하고, 섬긴 걸 보면, 이 세 사람은 부모 없이 한 가정에 함께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어머니 마리아를 자신의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예수님과 그 가정도 일찍부터 아버지 요셉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신과 비슷한 환경의 가정이어서인지, 주님은 나사로의 가정을 특별히 사랑하고 또 의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여러 번 그런 내용들이 반복이 되지요. 멀리 있는 주님께 나사로의 병듦을 알리러 온 사람도, 나사로라는 이름 대신,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말합니다(3절).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사랑하시는 자’ 그러면 누군지 아셨던 겁니다. 5절에서도 이런 내용은 반복되고, 또 주님은 나사로를 향해 ‘우리 친구 나사로’라고 직접 친근히 말씀하시기도 하지요(11절). 그래서 나사로의 병듦과 죽음은 그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주님이 특별히 사랑하시고, 또 주님을 특별히 사랑하는 가족이었는데, 나사로는 주님을 제대로 한 번 만나보지도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아직도 너무나 젊고 아름다운 나이에 말이지요. 그걸 보며 사람들은 수군거렸지요. 온갖 기적을 베풀었던 사람이, 그가 사랑하는 자는 죽지 않게 고칠 수 없었나보라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자마자 제일 먼저 했던 말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녀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물론 주님이 나사로의 소식을 접했을 땐 이미 나사로가 숨을 거둔 뒤였음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마 하룻길 거리에 계시는 주님께 기별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곧바로 나사로의 집으로 향하지 않으시고, 그 계신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6절). 뒤늦게 가서 보니 이미 나사로는 장례가 다 끝나 무덤에 안치되어 있었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웃과 함께 슬픔을 나누는 애도의 한 주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마르다, 마리아를 차례로 만나시고, 나사로가 누운 무덤에 함께 갔습니다. 무덤에 이르니, 이미 시체는 더운 팔레스틴의 날씨 아래서, 벌써 부패하여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무덤을 막은 돌을 치우라 하신 주님은, 눈을 들어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은 나사로를 향해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은 지 나흘 되어 몸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한 자가 예수님의 이 말씀에 반응하고 순종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그가 무덤 밖으로 나왔고, 주님은 나사로를 묶은 수의(壽衣)를 풀어주어, 그가 돌아다니도록 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남습니다. 주님이 어째서 이틀이라는 시간을 중간에 허비(?)하시고,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야 오셔서 되살리신 것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많은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사로가 완전히 죽었을 때, 그래서 더 이상 살아날 소망이 없다고 유대인들이 믿는 그때가 되기를 기다리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 죽으신 지 사흘째임을 생각해보면, 이 또한 정확한 답변이 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기적으로 이 사건이 기록되었다면, 차라리 주님은 나흘이 아닌, 사흘 만에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 나사로의 이 사건은 그 외에도 매우 특별한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사로가 되살아난 것이 부활입니까?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부활은 아니지요. 예수님의 부활 때를 생각해보면, 주님의 몸은 다시 죽을 수 있는 몸이 아니라 부활하신 ‘다른’ 몸,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자유한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사로의 몸은 아니지요. 언젠가 다시 병들고, 다시 죽게 될 그런 몸입니다. 부활한 것이 아니라 소생한 것이라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하지만 소생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부족함이 있습니다.  주님이 죽은 자를 소생시키신 사건은 나사로 외에도 두 번 더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었을 때 주님이 그의 손을 잡고 다시 살리신 일이 있었고(막5장, 눅8장),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을 때,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이 관에 손을 대셔서 그 청년 아들을 다시 살리신 일도 있었습니다(눅7장). 모두 부활이 아닌 소생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나사로의 기적이 특별한 것은,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그의 몸이 이미 썩어 냄새가 나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살리셨던 다른 두 번의 소생 기적과는 명확히 구별이 됩니다. 주님이 이틀을 지체하시고 나흘 만에 나사로를 살리신 것에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은 굳이 나사로의 시신이 완전히 죽어 부패하기 시작하는 때까지 일부러 기다리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왜 그러셨을까요? 본래 요한복음의 기적은 다른 세 개의 공관복음에 기록된 기적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갖지요. 단순히 초자연적인 현상으로서의 ‘기적’이라는 말 대신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고 배웠습니다. (?) 맞습니다, ‘표적’이라고 합니다. 영어에서도 ‘miracle’ 대신에 ‘sign’으로 표기하지요. 단순히 놀라운 현상이라는 의미를 넘어, 그 안에 중요한 의미와 앞으로의 일을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기적을 볼 때 늘 우리는 그 부분을 생각해야 하지요. 이것이 무엇을 예표하는 표적일까, 고민하며 말입니다. 이 사건이 다른 두 번의 소생 기적과 달리 부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가 부활의 몸으로 부활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소생은 분명 부활과 연관이 있습니다. 본문에 마르다의 입에서, 그리고 주님 자신의 입에서 부활이라는 단어가 직접 언급되고 있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본문 21절부터 27절까지 우리 다시 한 번 교독하여 읽도록 하겠습니다. “21.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아멘. 이 대화에서 우리는, 나사로의 소생이 예수님의 부활의 예표라기보다는, 저와 여러분, 우리들의 부활의 예표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사로의 그 ‘나흘’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의 그 ‘사흘’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이 죽어 부활하기 전까지의 그 모든 시간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나사로의 몸이 썩어 냄새가 난다는 말은, 모든 죽은 육체의 부패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뿐만 아니라 우리의 부활을 예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본문은, 그리고 나흘의 시간은 대단히 특별하고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주님과 마르다 모두 부활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가장 강조가 되는 차이점은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그 부활을 대하는 동사의 종류이고, 다른 하나는 그 동사의 시제입니다. 먼저 마르다는 이 대화에서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를 말합니다. 또 주님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셔도, 마르다는 그것이 지금이 아니라 먼 미래, ‘마지막 날’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성도들의 그 먼 미래의 부활을, 그리고 주님이 없어 실패한 과거를, 지금 여기, 현재로 가져오십니다. 엄밀히 말하면 가져오시는 게 아니라, 예수의 현존이 곧 부활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내가 앞으로 부활할 것이다, 이렇게 미래적으로 말씀하지 않고, 25절에서와 같이, “나는 (지금) 부활이요 생명이다.” 말씀합니다. 이 표현에 사용된 술어가 모두 현재형입니다. “Ε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나는 지금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아직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지도, 그리고 사흘 후 부활하시지도 않았는데, 주님은 이미 당신께서 부활이시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부활은 현재에 역사하는 능력임을 의미합니다. 또 한 가지, 부활에 관하여 마르다는 ‘아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구하는 대로 하나님이 주실 것을 ‘안다’고 말하고(22절), 마지막 날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도 ‘안다’고 말하지요(24절). 그런데 주님은 네가 ‘믿느냐’고 물으십니다(26절). 주님은 부활이 앎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부활이 무엇이고 그것이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라는 앎에 머물지 말고,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그분이 곧 부활의 현실임을 지금 여기서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부활은 과거나 미래의 일이 아니며, 현재의 일이고, 그것을 지금 믿는 그것이 곧 부활임을 주님은 강조하십니다. 먼 미래에 부활할 것을 알고 있는 것과 지금 주님이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믿는 게 무에 그리 다릅니까? 어차피 부활을 믿는 것인데, 왜 주님은 당신이 지금 부활이며 생명임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본문은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합니다. 부활을 믿어야 부활을 볼 수 있고, 부활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나사로의 소생, 그 자체에만 초점을 두고 계시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사로를 살리실 마음이 별로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은 죽은 나사로 자체보다, 나사로 주변에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매우 큰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이 일로 제자들이 믿게 되는 것이 기쁘다고 하십니다(15절). 그리고 시간을 지체하며, 제자들은 물론, 슬픔에 잠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도, 이 믿는 문제에 대해 계속 강조하십니다. 나사로를 살리시기 직전에도 다시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고(40절), 시신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도 이 일로 주님을 믿도록 하심에 아버지께 감사하셨습니다(42절). 죽은 나사로가 아니라, 그 일로 인하여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 초점을 맞추십니다.  주님은 굳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집 밖에서 만나 주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대화를 통해 마르다가 믿음의 고백을 한 뒤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 동생 마리아를 불러 옵니다. 그리고 같은 이야기가 다시 마리아에게도 반복됩니다. 그녀들은 믿고 난 후에야 부활을 봅니다. 이것이 부활의 순서입니다. 살아난 나사로를 보고 믿게 하시지 않고, 믿고 보게 하십니다. 나사로가 살아나면 당연히 사람들은 더 쉽게 부활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리 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믿어 고백하게 하시고,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예수가 부활이며, 생명이심을 믿는 자,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자만이 이 땅에서도 부활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부활을 믿고 증언하는 자들을 통해 세상은 부활을 맛봅니다. (*) 믿고 부활을 본 자들은 부활을 증언함으로써 부활을 삽니다. 마르다는 마을 어귀로 주님을 마중하러 갔다가 주님과의 대화로 인하여 믿음의 고백을 한 뒤, 곧장 동생 마리아에게로 향합니다. 주님과 마르다가 집으로 가서 마리아를 만나는 게 상식이지만,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마르다를 ‘보내어’ 마리아에게 ‘증언하게’ 하시고, 그 마리아가 다시 주님 앞으로 인도되어 오게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한 번에 모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본 소수의 여인들을 통해서, 이른 새벽 주님의 무덤에 갔던 소수의 여인들을 통해서 전해지게 하십니다. 여인들의 입술을 통해 제자들에게 증언되게 하시고, 그렇게 듣고 믿게 된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곧 복이며, 부활을 전하는 자가 곧 부활을 사는 겁니다. (*) 세상은 나사로와 같이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부활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사람들,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믿음의 증언자들의 입술을 통하여 세상은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오직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만 보이셨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이들에게 주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 바리새인들에게, 빌라도에게 나타나셨더라면 정말로 유쾌, 상쾌, 통쾌했을 텐데, 주님은 그리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당신을 믿고 소망하는 이들에게 오셨고, 그들을 삶과 입술을 통해 당신의 부활을 세상에 증언하여 믿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부활을 낳고, 또한 부활은 반드시 증인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증인이 다시 누군가의 믿음을 낳습니다. 이것이 오늘 나사로의 표적이 전하려는 메시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믿음의 증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하나만 더 기억합시다. 믿고 증언한다는 것은, 그저 입으로가 아닙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처럼,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사는 것, 내가 부활이요 생명임을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부활을 사는 것, 곧 십자가를 지는 것까지 말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소생하여 다시 살아 움직이게 되던 바로 그 시각은 사실 주님이 죽음을 향해, 또 무덤을 향해 마지막 여정을 출발하신 시각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나사로의 집에 오셔서 그를 일으키신 그때부터 주님을 죽이려는 본격적인 모의가 시작되었다고 본문 53절이 기록하고 있지요. 실제로 주님은 이 기적을 마지막으로 모든 사역을 종료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며칠 후 바로 이 나사로의 집에서 주님의 장례를 의미하는 향유가 주님의 몸에 부어지기도 했지요. 나사로는 무덤에서 나오고, 주님은 무덤으로 향하십니다. 죽음의 경계선에서 마치 나사로와 주님이 그 자리를 바꾸시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다만 부활을 믿고 증언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길을 지금 살아내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안전을 위해 나사로가 있는 마을로 가지 마시기를 권하지만, 주님은 기꺼이 당신의 사랑하는 벗을 위해, 당신의 무덤이 될 곳으로 향하여 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함께 울며 애통해 하십니다. 부활을 사는 그것이 십자가이며, 십자가를 사는 것이 또한 부활임을 주님은 그곳에서 먼저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세상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믿고 살아내는 사람들,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고, 부활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다. 죽을병에 걸렸다가 나음을 입어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듬뿍 받아, 아무 고난도 질병도 없이 건강하게 살아서, 세상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도 같은 그 고난의 시간을 소망으로 바꾸기 위해 성령과 함께 몸부림치는 사람들, 누군가의 죽음과 함께 하고 진심으로 애도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까이 가는 사람들, 그들로 인하여 세상이 예수를 보게 되었음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을 믿고 증언하며, 부활을 사는 거기까지 우리가 함께 가십니다. 안다고 교만하지 말고, 믿고 증언하며 삶으로 보여주는 데까지 꼭 함께 가십시다. 믿는 자가 영원히 죽지 않음을 꼭 보여주십시다. 죽음의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이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그들과 함께 울어줍시다. 비록 거기가 우리에게 고난이라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십시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간에는 우리가 잘 아는 도마라는 제자의 이야기가 짧게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었지만 너희로 믿게 할 것이니 나사로에게로 가자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 도마는 제자들을 향해,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조금은 동문서답 같은 말을 합니다. 굳이 도마의 입장에서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도마는, 죽은 나사로가 잔다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잠들어 쉬는 그 죽음을 가리켜 그리 말했을 겁니다. 그런 죽음이라면 우리도 감당하자, 이런 의미로 제자들을 독려했겠지요. 물론 잘 모르고 한 말이지만, 오늘 요한이 굳이 그 말을 이곳에 기록한 이유는, 그의 이 말이 참으로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도마와 요한 자신을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그렇게 성령을 받고, 주님의 뒤를 따라 부활을 믿고 증언하며, 살아내는 십자가의 삶과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기 때문이죠. 아시는 대로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옆구리에 자기 손가락을 넣어 보고서야 믿었습니다. 그 도마의 이야기를 직접 말씀에 기록한 유일한 사람도 역시 사도 요한이었지요(요한복음 20장).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말했던 이가 도마이고, 그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늦게 믿은 것도 참으로 놀랍지만, 결국 주님은 그렇게 부족하고 의심 많은 제자들을 모두 믿음의 자리로 이끄셨고, 그들이 주님과 같이, 이 땅에서 부활을 살아내고 증언할 수 있도록,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그 성령 하나님이, 무지하고 의심 많던 제자들을 새롭게 하신 그 성령 하나님이, 오늘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심을 믿으십니까? 그 성령 하나님을 힘입어, 먼 미래의 부활이 아니라, 오늘 이곳에서 부활의 현실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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