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담대하라' 2017년 3월 12일 주일 설교
2017-03-1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70312 사순절 두 번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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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2장 30절 ~ 23장 11절, 담대하라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031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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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144) 사도행전 23장 11절에 나오는 ‘담대하라’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 사도행전 21장에서 23장으로 이어지는 본문의 내용은, 장 수로는 3장의 분량이나 되지만, 시간적으로는 단 2박 3일 간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펴본 대로 바울은 그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유대인들에 의해 목숨의 위협을 받을 만큼 얻어맞기도 했고, 로마 병사들로부터 채찍질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힘겨운 하루가 지나고 오늘 바울은 산헤드린 법정에서 다시 한 번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말 그대로 첩첩산중의 고난이 그를 기다렸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고난이라는 걸 겪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고난을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실상 고난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고난이라도 다 같은 고난인 건 아니지요. 소망이 있는 고난, 꿈이 있는 고난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실상 뭔가가 소망이 되고 꿈이 되는 이유는, 그것에 이르기까지 고난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겪는 고난도 그걸 견딜 수 있는 힘을 부여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 이웃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은 그 자체로 하나의 소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지요. 요즘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 있는 에베소서[3장 1절, 금요일]에서 바울은 자신이 옥에 갇힌 이유가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서라고 분명히 고백합니다. 그가 고난 가운데서도 늘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고난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도들을 위한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다 그런 의미 있는 고난만은 아니라는 것이, 또 아닌 것 같은 생각에, 고난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대통령이 자신의 허물로 인해 탄핵을 당한 것, 분명 본인에게는 고난일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그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생긴 고난으로, 마땅히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돌이켜보면 저(우리)도 그런 것 같습니다. 주를 위한 고난, 남을 위한 고난, 성도들을 위한 고난보다는, 그저 내가 부족하여 스스로 자초한 고난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에 더 고통스러운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교만이 만들어낸 불필요한 고난이 참 많지요. 정작 주를 위한 고난, 사람을 위한 고난, 뜻을 위한 고난은 별로 없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민초들의 삶이,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의 삶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의 자녀들이 감당하는 삶의 무게 또한,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의 무게보다 또한 결코 작지 않다고 여깁니다.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더 적은 대우를 받지만 불평할 수 없고, 늘 ‘갑질’에 시달려야 하지만 미소를 잃을 수 없는 오늘의 성도들이 결코 본문의 바울보다 덜 위대하다 여기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한 가지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울이 성경에서 보여주는, 뭐랄까요, 성도의 당당함이나 아우라 같은, 무언가 강한 존재감과 무게감을 정작 우리는 잘 느끼지도 못하고, 또 세상 앞에 잘 보여주지도 못하는 그런 현실에 대해서입니다. 성도라고 하지만 우리는 별로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 같지도 않고, 특별히 고난 앞에서의 모습도 그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고 성경은 그런 우리에게 어떤 위로와 답을 주고 있을까요?
□ 여러분,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이렇게 시작합니다. 바울은 지금 공회,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최고 회의인 산헤드린 공회에 불려나와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가 인정하는 유대인의 최고 자치 기구입니다. 입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가진, 말 그대로 이스라엘 최고 회의체였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곳 역시 이곳 산헤드린이었지요.
대제사장이 의장이 되고, 그 구성원으로는 귀족을 대표하는 사두개인들, 또 평민들의 대표자 격인 바리새인들, 그 외에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까지 모두 망라되어 있습니다. 전체 인원은 구약[민수기 11장]의 모세가 조직한 70인의 장로회를 모델로 해서 총 70명인데요, 지난 수요 예배 때 강조한 것처럼, 이는 하나님나라 백성 전체의 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산헤드린의 모든 의결은 이들 70명의 투표로 결정이 되고, 그 방법은 언제나 만장일치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 공회는 대제사장이 소집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천부장이 주재하는 회의였습니다. 바울이 왜 유대인들로부터 고발을 당하고 있는지 그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였지요. 천부장이 바울을 공회원들 앞에 세우고 발언 기회를 주자, 그때 나온 바울의 첫마디가 바로 오늘 23장 1절입니다. 자리가 자리이지라 바울도 대단히 긴장한 채 말을 시작했을 텐데요, 그 첫마디를 우리 다함께 합독하시겠습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사실 이 1절은 조금 세밀한 독해가 필요한데요, 먼저 공회를 ‘주목했다’는 말은, 단지 응시했다는 것보다 훨씬 강한 의미입니다. 어떤 성경은, “똑바로 노려보고 말했다.”(MSG)고 번역하기도 했는데요, 눈에 힘을 주고 매섭게 쳐다보는 거지요. 재판 받는 죄인의 눈빛, 자신을 애써 변명하는 그런 눈빛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신념과 진리에 관해 말할 기회만을 기다린 한 선구자의 눈빛입니다. 비록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자신의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법정에 불려나왔지만, 나의 생사여탈권은 당신들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웅변하듯, 바울은 그렇게 당당하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비록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친근하고 겸손하게 부르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 그가 내뱉은 첫 마디는, 다름 아니라, 자신이 지금까지 모든 일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거였습니다. 범사에, 그러니까 모든 일에, 양심을 거스르지 않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가 바울의 당당함이 나오는 근거이지요. 정직한 사람, 선한 양심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만의 특권, 그것이 바로 담대함이지요. 여러분, 이 고백을 저와 여러분도 꼭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겼노라’는 이 구절에는, 1)이라고 표기가 되어 아래 주석이 하나 더해져 있습니다. 아래쪽을 보시면, [헬] “하나님께 백성 노릇 하였노라.”고 되어 있지요. 의역하지 않고 헬라어를 직역하면,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께 백성 노릇을 하고 있다.”라고 옮겨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란 결국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삶에 향해서, 그 삶 전부가 ‘하나님의 백성 노릇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범사에, 모든 일에 대해서 말입니다. 내가 사는 평범한 일상이 보잘 것이 없고,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대단한 열매가 없어도, 오늘 이 유대인들 앞에서와 같이, 사실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바울은, 그 순간순간이 다 내가 지금 ‘하나님 자녀 노릇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멈추지 않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고, 또 우리가 꼭 기억하고 살아내야 할,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결국,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감당함으로써, 이 땅이 하나님의 땅임을 증언하는,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여기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만이 하나님 백성 노릇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일상 매순간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감당하는 그 수고와 싸움이 진정 하나님 백성 노릇하는 것임을 오늘 바울은 우리를 매섭게 응시하며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백성 노릇을 한다.”에서, 이 ‘노릇’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그 자체로 감춰진 수고와 헌신을 담고 있습니다. 부모 노릇, 아들 노릇, 딸 노릇, 집사 노릇, 성도 노릇, 목사 노릇 등등,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때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 역할과 수고를 감당해야만 한다는 ‘숙명의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식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모 노릇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래서 늘 버겁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님은, 그 노릇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중요한 것인지는, 그 자식도 부모가 되 보면 다 알게 되지요.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그 ‘노릇’으로 인하여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노릇하는 것,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은 그냥 우리를 보며 그들과 똑같은 삶이라고 여기겠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기록된 대로, 성도의 그 노릇을 한 번 해보려고 하면, 금방 알게 됩니다. 범사에 하나님 백성 노릇을 감당하는 그것이 얼마나 힘겨운 싸움인지. 또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며, 하나님이 그것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 하나님 백성 노릇을 해 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본문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바울의 모습들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의 백성 노릇하는 모습입니다. 성도 노릇으로서의 그 싸움의 본질과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고, 그 노릇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그와 동행하시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그런 배경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1절의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대제사장인 아나니아가 더 들어볼 필요가 없다는 듯이, 바울의 입을 치라고 공회원들에게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 대단히 격정적이지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종교적 위선을 책망하실 때 쓰셨던 ‘회칠한 담’이라는 강한 표현을 아나니아에게 사용하면서, 율법을 심판하는 법정에서 율법을 어기고, 적법한 심문과 재판도 없이 무조건 폭력을 가하려는 당신을, 오히려 하나님이 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울은 그가 그저 한 사람의 공회원일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 공회가 대제사장이 주재하는 정식 공회가 아니라, 로마 천부장의 주도하에 갑자기 소집된 임시 공회였기에, 아마도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의장석에 앉지도 않았고, 또 공식적인 복장을 입지도 않았었던 것 같습니다. 20년 동안 예루살렘에 거주하지 않고 공회에 와 볼 일도 없었던 바울의 입장에서 충분히 혼동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신이 말한 상대가 대제사장임을 알게 된 바울이 즉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합니다.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정말 몰랐다.”고 말하면서, 이것과 관련된 율법의 내용까지 스스로 언급하며, 자신의 언행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합니다. 이에 관해 기록된 말씀이 출애굽기 22장인데요, 거기에는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고 분명히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2:28).
사람들을 매섭게 노려보며 자신의 말을 시작한 바울로서는, 이렇게 바로 사과를 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분명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공정한 법정의 모습도 아니고, 그저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들만이 모인 무법천지와 같은 그런 공간이었기에, 더욱 바울에겐 그 인정과 사과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 율법을 말하며, 그것을 지키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아무 법적 근거나 증거도 없이 자신을 죽기 직전까지 매질한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차림새로만 판단하여 성급히 채찍질을 하려고 했던 로마의 천부장 앞에서, 바울은 홀로 법 앞에 자신을 구속하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자신을 변호하는 말 한 마디를 이제 고작 시작했을 뿐임에도, 그 입을 매질하라고 명령하는 상황, 이미 법과 합리적 이성이 작동되지 않는 그곳에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바울은 그곳에서도 하나님 백성의 노릇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이런 게 우리에겐 참 어려운 싸움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적 행위보다 이것을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신앙적 거룩’입니다. 나에게 불리한 법을 지키는 것도 어렵지만, 이미 법을 무시한 채 달려드는 상대방에게, 내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성도의 노릇’입니다. 실수를 인정하는 순간 감당해야 하는 많은 처벌과 불이익이 먼저 보이는 한, 이 길은 선택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상황을 핑계 대며, 어떻게든 자신을 합리화 하고, 중언부언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우리가 가장 온전하게 성도의 노릇을 하는 때임을 본문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물론 법과 질서가 무시되는 그 자리에서, 또 열심히 자신을 변호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오히려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법과 공의에 자신을 구속하는 그것이야말로, 내가 성도로서 누구를 섬기며, 누구를 두려워하며 사는 존재인지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이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리와 상대하지만 이리가 되지는 않으며 우리의 믿음을 살아내는 길, 실패가 있고 손해가 있어도 양심에 따라 묵묵히 법과 말씀에 순복하는 그 길을, 저와 여러분이 성도로서 매일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 노릇의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오늘 바울은 보여줍니다.
그 백성 노릇의 결과와 효력이 때로 곧바로 나타남을 본문은 말씀합니다. 나중에 바리새인 가운데 몇몇 서기관이 바울을 향해 이렇게 말하지요. 본문 9절입니다. “크게 떠들 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라며 오히려 바울을 두둔하는 말을 하고 있지요.
이것이 방금 전까지 바울을 죽이겠다고 달려들던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물론 부활과 관련한 논쟁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적어도 바울이, 그들이 중시하는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 결과이기도 합니다. 성도로서 이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얻은 최고의 호응과 열매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날 밤, 전쟁 같던 하루가 다 끝나고, 바울이 안토니우스 요새에 구금되어 있던 그 밤에, 주님이 바울을 ‘찾아’ 오십니다. 본문은 그냥 하나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냥 저 멀리 위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내 옆에까지 찾아 오셔서, 내가 선 이곳에서, 직접 나에게 말씀해주셨다는 뜻입니다.
참고로 ‘곁에 서서’라는 이 말은 성경에, 바울과 연관되어서만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 바울이 로마로 가는 뱃길에 풍랑을 만나 죽기 직전에 이르렀을 때에도 주님은 바울 곁에 오셔서 거기 ‘서서’ 바울에게 말씀합니다. 하신 말씀도 오늘 본문과 거의 똑같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황제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사도행전 27:23~24) 말씀합니다.
훗날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말씀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도) 건짐을 받았느니라.”(디모데후서 4:17) 바울은 항상 주님이 자신의 곁에 서서 힘을 주심을 경험하고 맛보았습니다.
성경에서 ‘곁에 선다’는 말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내 편에 서서 나를 위해 변호해주시며, 나를 위해 증언해 주시며, 나의 말을 대신하여 주시고, 내가 하는 말과 내 행동의 결과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책임지셔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홀로 서서 힘겹게 하나님 자녀 노릇 하는 그 자리 가운데 주님이 오셔서 함께 서 주십니다.
사형을 논하는 엄중한 법정에 변호인 하나 없이 들어간 그곳에서, 더구나 1:70의 너무나 비겁하게 기울어진 그 운동장에서, 그 누구도 내 편에 서서 변호해 주거나 증언해 주지 않는 거기서, 너무나 답답하고 억울하게 주의 백성 노릇하는 그 자리에서, 주님이 반드시 내 곁에 서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곁에 서서 말씀하여 주시는 것을 맛보는 그 자리까지 결국 이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쓴 『유대고대사』(Andtiquities xx, 9.2)에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 아나니아에 대한 매우 상세한 기록이 전해져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약 10년 간 대제사장의 직위에 있으면서, 성직을 가장 더럽힌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요, 가난한 일반 제사장들에게 돌아가야 하는 성도들의 십일조를 가로챈 것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는 아나니아의 욕심과 탐욕에 대해서 속담이 만들어질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그 기록 말미에 보면, 그는 주후 66년 일어난 유다의 독립전쟁 당시, 한 수로에 숨어 있다가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그의 형제 히스기야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이 사건이 있은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생긴 일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라는 바울의 그 말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국 주님의 말씀대로 로마에 가서 황제와 귀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합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이 공회 자리가 어쩌면 바울이 치른 가장 중요한 모의고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더욱 힘든 싸움이 될 로마. 더욱 권위적이고, 더욱 기세등등한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하기 위한 마지막 시험 무대가 오늘 이 공회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작은 무대, 작은 일상, 작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 백성 노릇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 순서를 바꾸어서 우리를 사용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내 일터에서, 때로 고독의 자리에서, 하나님 백성 노릇을 하기 위해 양심에 따라 살아가지 않는 그 성도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노릇을 감당하라고 부르시지는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를 잘 아실 겁니다. 그가 하루는 하나님께 이런 말을 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셨지요. 그런데 오늘 한 가지 공정하지 못한 일에 대해 어려운 질문을 하겠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 그러면서 그 시대의 부정한 모습에 대해 쭉 열거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레미야야, 만일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해도 피곤하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네가 조용한 땅에서만 안전하게 살 수 있다면, 요단강의 큰 물속에서는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느냐?”[예레미야 12장]
조금 뜬금없는 것 같은 말씀인데, 그러고선 이상한 명령을 하나 하십니다. 예레미야에게, 너는 가서 새 허리띠를 사서 허리에 차고 물에도 적시지 않게 잘 보관하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니, 다시 하나님은, 그 띠를 가지고 강가로 가서 바위틈에 감추라 말씀합니다. 명령한 대로 행하니, 며칠이 지나 다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지요. 가서 그 감추어둔 띠를 가지고 와라. 그런데 예레미야가 그곳에 가서 띠를 확인해보니, 어느새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물에 닿지도 않고 잘 보관한 것인데 말입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할 것이다.” 너는 지금의 상황을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노릇, 하나님 백성의 노릇, 이 땅의 예언자의 노릇을 잘 감당해라. 사람과 경쟁하며 피곤하다 하지 마라. 너를 네가 감당할 수 없는, 말과 경주하게 하려고 내가 너를 택했다. 거기까지 가야한다. 평안한 땅에서가 아니라 강물이 넘치는 그곳에서 나의 택한 백성으로서, 네가 견고하게 서 있어야 한다. 담대해라. 내가 네 옆에 서 있다.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나를 봐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그저 사람이 아닌, 말과 경주하고, 평탄한 곳이 아니라, 강물이 넘치는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백성 노릇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살아내는 매순간, 그리고 매일의 일상이, 그저 어쩔 수 없는 하루하루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의 거룩한 노릇을 감당하는 최고의 예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