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듣고 데려다가' 2016년 11월 6일 주일 설교
2016-11-0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61106 오순절 후 스물다섯 번째 주일 설교
---------------------------------------------
사도행전 18장 24~28절, 듣고 데려다가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61106.mp3
(사도행전 강해 131) ‘듣고 데려다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지난주까지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의 과정을 모두 살펴봤는데요, 안디옥으로 되돌아가는 여정에서, 잠깐 에베소에 들러 짧은 사역을 감당하고 곧바로 예루살렘과 안디옥으로 향했었습니다. 바울은 그때 강한 의지를 피력하면서 에베소를 떠납니다. 에베소의 많은 사람이 바울이 더 오래 머물기를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는 말만 남긴 채 에베소를 떠납니다. 고린도에서 긴 시간 머물며 충분한 사역을 감당한 것을 아는 우리로서는, 또 바울이 조금 더 필요했던 에베소의 성도들로서는, 충분히 당황스러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에베소에서 그렇게 사역을 끝낸 바울이 안디옥으로 되돌아간 이후에, 에베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에 남겨둔 채 함께 가지 않았던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의 모습을 보게 되고, 또 전혀 새로운 한 사역자의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아볼로(아폴로스)라는 사람입니다.
본문 24절이 소개하는 대로, 아볼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었던 그가 이집트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특이합니다만, 알렉산드리아가 워낙 큰 도시입니다.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이지요. 수많은 민족과 인종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국제적인 대학 도시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했다’고 성경은 그를 묘사하는데요, 여기 ‘언변이 좋다’는 말(‘아네르 로기오스’)은 그냥 말을 유창하게 잘한다는 뜻이 아니라, 당대의 ‘지식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런 교사였거나, 아니면 그 과정을 밟아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 그가 성경에도 능통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성경’은 주로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것인데요, 아볼로는 이 구약성경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능통했다’는 말 ‘뒤나토스’는 본래 뭔가를 잘 안다는 의미 이전에 ‘강력하다’(powerful)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강력한 것이 아니라, 정말 ‘초강력’한 경우입니다. 사실 이 단어는 본래 하나님의 능력이나 권능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권능’, ‘능력’이라는 단어로 잘 알고 있는, ‘뒤나미스’와 서로 맞바꾸어 쓰입니다. 그냥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다는 정도가 아니라, 깊은 통찰력으로 성경을 꿰뚫어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25절에 보니, 그가 주의 도를,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일찍이 배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배움(‘카텤세오’)은 책으로가 아니라, 사람의 말을 통해 배운 경우인데요, 많은 그리스도인이 일찍부터 알렉산드리아에 이주해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아마도 고향에서 이미 예수를 영접하고 믿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가 에베소에 온 이유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그러하듯, 그 역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님에 관한 것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방향은 달랐지만,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던 사명의 사람들이 에베소에서 함께 만나도록 하나님이 이끄십니다. 비록 바울은 에베소를 떠났지만, 남아 있는 브리스길라 부부가 아볼로가 전하는 메시지를 회당에서 듣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능통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볼로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허점이 있었습니다. 25절 마지막 부분인데요, “…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26절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설명해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요? 또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나요, 여러분? 요한의 세례 말고, 그럼 또 어떤 세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일까요? (*)
일단 ‘요한의 세례’라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겠지요. 여기 요한은, 당연히 세례 요한을 의미하고, 요한의 세례는 그가 요단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었던 세례를 말합니다. 원래는 침례지요. 강에 가서 물에 잠기게 하는 그런 방식의 예식입니다.
이런 세례는 구약의 정결 예법에 그 기원을 둡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막, 회막에 보면, 놋으로 만든 물두멍을 제단 앞에 만들라고 하십니다. 아론과 같은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반드시 그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도록 하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사 도중에 죽게 됩니다. 비록 손과 발을 물로 닦아내는 행위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행위를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이, 지금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또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여기시는지를 분명하게 알기 원하셨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정결 예법을 조금 더 발전시키고 확장해서 회개의 세례로 발전시킵니다. 예전에는 상징적으로 손과 발만 씻으면 되는 거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게 될 것이기에, 요한은 몸의 깨끗함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요구하는 그런 세례를 베풀게 된 겁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도 합니다. (Re)
실제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한에게로 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겉으로만 예배하고, 겉으로만 정결하게 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요한을 통해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그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때 요한이 사람들에게 선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내 뒤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지만,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는 세례를 베푸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요한처럼 세례를 베푼 것이었는데요, 그때도 목적은 회개와 함께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언제 성령의 세례를 베푸셨습니까? 또 여러분은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 곧 성령의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혹시 언제 받으셨습니까? 그 증거는 있으십니까? 또 교회에서 받은 세례, 그것은 성령 세례와 어떻게 구별되고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실제로 우리가 교회에서 물로 받은 세례는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라기보다는, 정확히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장, 28장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지금까지 교회가 성도들에게 같은 방법으로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건 또 다른 세례, ‘교회의 세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도 포함된 세례이니까, 이것도 예수님의 세례이기는 하겠습니다만,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주시는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 성령이 우리 가운데 부어지는 보이지 않는 세례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서 성령을 받아야 예수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보통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에 교회의 세례를 받습니다. 간혹 교회의 세례를 통해 성령의 세례가 임하는 경우도 있고, 교회의 세례를 받은 후에 나중에 성령에 대한 강한 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엄밀히 말하면 성령의 세례가 있고 난 후에, 우리는 교회의 세례를 받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세례를 받기 전에, 여러 번의 교육과 문답을 거칩니다. 이 사람이 정말 성령의 세례를 받았는가, 확인하고 돕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거의 모든 성도님들이 성찬식에 참여하시는데요, 그 이야기는, 여러분이 모두 다 교회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받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좀 심각해지는 것이지요. 경우가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오늘 아볼로와 같은 상황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성도님들이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 곧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에, 혹은 충분히 그 세례를 느끼기 전에, 먼저 교회의 세례를 받습니다. 형식적인 교육과 문답을 거쳐서 일단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강하게 만지시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성령의 터치, 성령의 세례가 부어지게 됩니다. 저희 성도 가운데도 그렇게 성령의 세례를 받으신 분이 있습니다.
비록 충만하게는 아니어도, 내가 성령의 세례를 받았는지의 여부는 아주 간단하게 확인이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이심을, 내 마음으로 믿어지고 인정이 된다면, 그는 이미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방언이나 환상이나 예언이나, 특별한 외적 현상이 나타나지 않아도, 내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딸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영원한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인임이 인정된다면, 그에게는 이미 성령의 세례, 예수의 세례가 부어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고백 역시 내 신앙의 상태에 따라 그 확실함이 수시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 땐 내가 죄인 중의 죄인으로 인정이 되다가도, 또 하나님과 좀 멀어지면, ‘내가 무슨 죄를 그리 지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또 사탄은 우리의 지금 이 부족한 모습을 자꾸만 강조하면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정죄합니다. “네 모습을 보고 좀 말해라. 네가 무슨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냐. 예수가 너의 주인이라고? 아니잖아, 솔직히 네 주인은 너 자신이고, 돈이고, 정욕이고, 그렇잖아. 너 자신을 속이지 마. 너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야!” 계속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마치 성령을 다시 받아야 할 것처럼, 뭔가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성령의 세례는, 오직 한 번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잘못하고 죄를 지을 때마다 씻고 제사 드리고 해야 했던 그런 세례가 아니라, 성령의 세례는 단 한 번만으로, 우리 안에 영원한 구원의 징표를 새깁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져 그 확신이 희미해질 수는 있어도, 그것을 성경은, 성령을 소멸한다고 어렵게 표현합니다만,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한 일시적인 것일 뿐, 한 번 부어진 성령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거나 번복되지 않습니다. 한 번 임재하신 성령은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약속이셨습니다. 단 한 번의 영원한 세례가 예수님의 세례, 성령 세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령의 세례를 ‘은혜’라 말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세례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습니다만, 여러분, 성령으로 다시 충만해지시기를 바랍니다. 혹 아직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또 받았지만 그것이 내 안에 확신으로 바로 서 있지 못하다면, 하나님께 이 시간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간구하십시오. 다른 것이 아니라 성령을 내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반드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른 어떤 일이나 어떤 신앙적 행위보다도 그것이 더 급한 문제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성도는 빈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무엇을 해도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부디 오늘 이 말씀과 예배를 통해, 성령을 향한 진실한 사모함과 성령의 충만한 임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성령은 언제 처음 오시고, 성령의 세례는 언제 우리 가운데 부어집니까? (*) 맞습니다. 복음을 들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리고 그 말씀을 의지하여 구할 때 우리 가운데 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도의 삶에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지구상에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하나도 없다면, 이 땅 어느 누구에게도 성령은 찾아오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증인이 없는 곳에는 성려의 세례도 없습니다. (without witness, without Spirit!)
오늘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 곧 회개의 세례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성령의 세례를 아예 받지 못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미 복음을 전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5절에,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한다, 이 표현이 마음에 걸립니다. 왜 이것이 문제겠습니까? 만약 그가 성령을 받은 것이 100% 확실했다면, 이 문장은, “‘예수’를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이렇게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주로 영접하지 못해도, 성령을 받지 못했어도, 예수에 관한 것을 말할 수 있고, 심지어 예수에 관한 학자나 전문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전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통로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없기 때문이고, 그가 전하는 그 말을 통해서 성령은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를 전할 때에만 임재하십니다. 성령은, 오직 내가 만나고 경험하고,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만 역사하십니다. (*)
그래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에게는 엄청난 영적 책임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들, 성령의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영적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의 입술에 온 백성의 생명과 구원이 오롯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들의 입술에만, 성령의 세례가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입이 예수를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 외에, 그 어떤 방법으로도 성령은 이 땅 누구에게도 찾아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
18장 5절, 6절이었지요. 바울이 고린도의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할 때, 유대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니까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로 다시 읽어드리면)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너희에게 예수를 전했으니, 이제 할 일을 다 했다, 하는 것입니다. 이제 믿지 않아 당하는 모든 멸망은 너희의 책임이고, 나는 더 이상 책임이 없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바울은 그러한 책임감에 시달리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누군가가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그 피가, 나에게로 되돌아올 것을 염려하며 예수를 전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령의 사람들이 예수를 증언하는 것 외에는, 성령이, 구원이, 이 땅에 임할 길이 더 이상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약 성령을 받으셨다면, 예수를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흘릴 피의 호소가 쌓여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삶이 성령을 가로막고 훼방하고 있지는 않은지, 제대로 분별하고 회개하십시오. / 또 아볼로와 같이 예수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이에게, 정확하게 예수를 증언할 수 있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성령의 일꾼이 되십시오. (*)
여러분이 탁월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어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더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면 뭐합니까? 결국 천막 만드는 한 부부의 도움이 없이는 예수를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을 적당히 알고 믿으려는 내면의 소리를 밀쳐내십시오. 복음의 진수를 정확히 깨닫고 이해하고 전할 수 있는 데까지 저와 여러분은 자라가야 합니다. 제대로 기도하고, 제대로 말씀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만 노력하고 우리만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사탄도 열심히 노력하고, 계획을 세워 우리를 공격해 옵니다. 그들의 약점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우리와 달리, 그들은 우리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그곳을 찔러 옵니다. 그래서 성령이 줄줄 새게 만들고, 복음이 우리 자신의 삶에만 고여 썩게 만듭니다.
여러분, 나 홀로 누리고 나 홀로 믿는 믿음은 결코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남을 섬기고 남을 유익하게 하는 데까지 자라야만 합니다.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자기의 신앙 하나만 지키기에도 버거워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역설적으로 남에게 유익을 주는 신앙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만 믿고, 그냥 나만 좋으면 되는 그것이 신앙인 줄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한 신앙은 결국은 나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남을 위한 신앙일 때에만, 내 신앙도 자라고 열매가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유익하게 합니다.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제때에 정확하고 바른 방법으로 공급해 줍니다. 26절 중간 부분을 보십시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회당에서 아볼로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조용히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여기 우리말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원문에는 다 듣고 ‘자신들에게로’라는 재귀대명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용히 다른 곳으로 부른 건데 그것이 자신들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부부는 일단 아볼로의 말을 끝까지 경청합니다. 잘 듣지도 않고 내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듣고, 그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안내합니다. 아볼로가 회중 앞에서 창피를 당하거나 무안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예의와 배려를 갖추어 그를 도와줍니다.
그런 배려 속에서 아볼로가 성령의 세례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정말 놀라운 성령의 일꾼이 되어 다시, 다른 누군가를 유익하게 하는 데 쓰임 받습니다. 27절 이하에 보면, 아볼로가 바울이 떠난 고린도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는 데 매진한 것입니다. 다 이런 과정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누군가를 돕는 데까지, 우리의 신앙은 계속 자라고 전진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모두 복음의 빚을 졌고, 누군가로 인해 성령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 중의 그 누구도 누군가의 증언 없이 예수를 믿은 사람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과 유익 없이 우리 스스로 이곳에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빚쟁입니다. 다시 다른 성도에게 유익을 주어야 하는 복음의 채무자인 것입니다. (*)
우리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 예수 믿는 삶을 거절하십시오. 그런 신앙에서 이젠 벗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남이 알아주고,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고, 그런 것 때문에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그런 수준에서 이젠 벗어나십시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줄 수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내 교회와 성도들에게 정말로 영적인 유익을 줄 수 있는 그런 신앙의 장성한 모습을 소망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하면 다른 사람을 결코 도울 수 없습니다. 내 지식과 능력과 돈과 내 마음으로 남을 섬기는 게 아닙니다. 나는 돕는다고 도왔는데 그것이 남을 망하게 하는 길로 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이 말씀하시고, 주시는 감동대로, 그렇게 남을 섬기고 교회를 섬길 때, 거기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섬기려 할 땐 더욱 주님의 음성 앞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이름은 등장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의 숨겨진 섬김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아시는 대로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에베소에 왔던 바울은 무슨 일인지, 부부를 남겨두고 본인만 귀환 길에 오릅니다. 같이 가거나 같이 남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면 부부만 보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바울은 그 부부만 남겨둔 채 홀로 안디옥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면서 말하지요. “I will be back! If God will.”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역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발견하며, 거기에 순종하며 일한 겁니다. 그가 나중에 찾아올 아볼로를 생각하고 부부를 남겨둔 것은 아니지만, 왜 그런지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두 사람을 그곳에 남겨둡니다. 기도할 때 그런 감동과 지혜를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얼마나 큰 결과로 이어집니까? 바울이 남겨둔 브리스길라 부부를 통해 성령으로 충만해진 아볼로는 고린도로 넘어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성경에 능통했던 아볼로가 이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져서, 유대인들을 말씀으로 논박합니다. 아직 흔들리던 유대인들이 더 온전히 예수를 믿을 수 있도록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히브리서) 그래서 나중에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잘 자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물과 양분을 공급한 이가 아볼로라 한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나중에 아볼로를 사도라 부릅니다(고전 4:9). 아볼로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겸손히 아볼로를 높여 주었지만, 그런 아볼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바울의 정확한 판단으로 인해 세워진 열매였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이들의 삶은,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이 그를 통해 역사하시고, 인도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과 무관하게 살다보면, 분주하고 피곤하고 바쁘고 힘을 다해도, 열매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과 무관한 것에 늘 헛힘을 사용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부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사십시오. 내가 어디를 떠나가고 남는 일 하나까지도 기도하며 결정하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자연스럽게, 나도 모르게 할 수 있도록, 더 성령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립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유익을 줄 때, 그것을 감사함으로 겸손하게 받으십시오. 아볼로가 잘한 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은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아무리 예의를 갖춘 말도, 내 부족함을 언급하면 마음이 닫히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끝까지 귀담아 듣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타인의 섬김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것도 브리스길라, 당시엔 가르치는 자로서 인정받지도 못하던 여성의 이야기인데도 말입니다.
섬김을 잘 받는 것도 또 다른 큰 섬김입니다. 내 부족한 것 창피해 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완전하지 않고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 겁니다. 남이 채워주려 할 때, 기분 나빠 하지 말고, 그것을 성령의 음성으로 인정하고 경청하십시오. 그것이 그 사람이 잘나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은혜로 하는 것이고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27절). 섬김은 감사로 받을 때 비로소 열매가 됩니다. (*)
저와 여러분은 모두가 각각의 은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을 유익하게 할 수 있도록 성령이 주신 은혜로운 능력들이 은사입니다. 그것이 잘 발휘되고 받아들여지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 건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함께 그런 교회를 만들어 가기를 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서로에게 정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는,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성령의 통로요, 주님의 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