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대박 대신 소박" 2014년 2월 28일 새벽기도회 설교
2014-02-2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40228 금요일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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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장 13~15절, 이사야 강해46 (대박 대신 소박)
* 음성 : http://www.4shared.com/mp3/p7843iAkce/20140228_.html
이사야서 마흔여섯 번째 말씀으로, ‘대박 대신 소박’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한 가지 측면은, 그럼에도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당신의 백성 가장 첫머리에 두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이사야 1장을 나누면서 상세히 말씀드린 바가 있는데요, 오늘 본문 역시 그러한 관점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습니다.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지도자들을 심문하시며 그들을 일컬어 ‘포도원을 삼킨 자’라고 지명하십니다. 여기 포도원은, 앞으로 5장 전반부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5의 말씀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직접 언급하신 것처럼, 포도와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과 믿는 성도를 지칭하는 특별한 비유입니다. 그런데 본문 14절에는 이 포도원이라는 말에 바로 이어서,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이라는 구절이 나오면서, 마치 포도원의 포도가 가난한 자들을 지칭하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음을 봅니다. 백성과 가난한 자를 동일시하는 듯한 이러한 표현은 15절에서 더욱 분명해지고 구체화됩니다. 15절에는 ‘내 백성’이라는 말과 ‘가난한 자’라는 표현이 거의 같은 말의 다른 표현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우선적이고 집중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을 당시 지도자들은 가혹하게 대우하였다고 하나님은 변론하십니다. 백성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그들의 집에, 마치 본래부터 그들의 소유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놓여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15절에서는 이러한 그들이 행위가 얼마나 무자비한 것인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는 반문이 그것입니다. 표현 자체로도 참혹하기가 이를 데 없는, 가진 자의 횡포가 그대로 전해지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굴을 맷돌질하다’ 얼마나 가혹하게 수탈하고 또 얼마나 잔인하게 짓밟았으면, 이러한 표현이 나올까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 전체에 맷돌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사용된 경우는 이 본문이 유일합니다. 그만큼 부자와 권세자들의 횡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크고 특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폭력 아래 백성들의 얼굴이 짓밟혔고, 또 가혹한 수탈과 탈취로 인해 백성들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져 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그래서 힘없는 이들과 언제나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철저히 그들의 편에서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따라서 훗날 주님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도 이러한 심판의 모습은 다시 반복될 것이라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가난은 결코 성도가 가벼이 여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시대가 바뀌고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지만, 오늘날도 이러한 모습은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 반복되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고통당하는 북한의 백성들도 있고,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글로벌 거대 기업들에 의해 거의 착취 수준으로 이용당하는 저개발국가의 국민들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위한 많은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지요. 요즘에는 다양한 분야와 많은 물품에 있어서, 생산자를 보호하고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는 이른바 공정무역이 점차 확산되고 있고, 많은 국민들이 이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강조하는 가난의 문제는 그러한 노력보다 더 근본적이고 철저한 대응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성도들의 각성이 필요합니다.
가난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우선 매우 현실적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 잘 믿으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모두가 잘 사는 행복한 세상이 올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15장 11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잠언22장 2절 말씀에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강조하시는 것처럼, 가난은 악한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 가운데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우리의 실존입니다. 이것이 가난에 대한 성경의 일차적인 입장입니다. 가난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며, 가난한 사람 역시 언제나 우리의 이웃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예수를 잘못 믿는 표시가 될 수 없듯, 잘 사는 것 역시 예수 잘 믿는 표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가난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말은 그래서 처음부터 오류입니다.
다만 한 가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꼭 하나 있다고 성경은 여지를 남깁니다. 그리고 그 실제적인 모습을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번 주일 메시지를 통해 자세하게 나누게 되겠지만, 사도행전 4장 34절 말씀과 같이,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든 성도가 예수를 너무 잘 믿어 축복을 받아 다 부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방법으로 가난을 해결했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모든 성도가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하나님 앞에 드렸고, 사도들은 그것을 다시 성도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쉽게 말해 모든 사람이 함께 가난해지고자 애썼고, 그 결과 아무도 가난을 경험하지 않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 안에 가난한 자들이 없게 될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명기 15장 4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아멘. 이 말씀도 오해하기 쉽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얼핏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가난을 면할 것이라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신명기 15장은 면제년, 안식년에 관한 율법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핵심은 말 그대로 면제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빌린 채무들을 다 면제해주고 그들이 담보나 채무로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는 것이 바로 면제년에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향해 어떻게 해야 할지 8절에서 아래와 같이 강조하십니다.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아멘. 이러한 취지의 말씀들이 신명기 15장에 기록되어 있고, 결국 15장 4절의 말씀,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는 말씀의 의미 역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해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가난의 궁극적인 해결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주어지는 거룩의 열매임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모습답지 않은, 참으로 소박한 해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 소박한 비전이 왜 소박한 것이 아닌지가 성경에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도, 또 초대교회 성도들도 다 이와 같은 믿음의 도전 앞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부와 복을 위해 근거도 없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협박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법칙대로 모두가 함께 가난을 이겨낼 것인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둘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듯, 이스라엘 민족은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기는커녕 그들의 얼굴을 짓이겼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모든 소유를 내려놓고 스스로 가난을 자처해 모두가 가난을 극복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핵심은 간단합니다. 성도는 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그 이상, 일용할 양식 그 이상을 포기하고, 남는 것으로 누군가의 필요를 채우는 데 집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자만, 권세자만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짓찧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1서 3장 17절 말씀에,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고 주님 항변하십니다. 내 이웃의 필요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며, 무정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또한 그들의 얼굴에 맷돌질 하는 것임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도의 경제관은 그 사람의 신앙을 그대로 대변합니다. 물질은 세상의 많은 우상들과 달라서 하나님과 정면으로 대치되고, 또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물질에 관하여만,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으로 성경이 규정하는 것을 우리는 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이 땅에 가난한 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 성도는, 우선 자신의 필요 이상을 바라보고, 계획하고, 준비하는 삶의 모습을 버림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장사가 잘 되고, 연봉이 올라가고, 로또에 당첨이 된다고 우리의 삶의 기준을 바꾸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버는 대로 쓰고 버는 대로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아니 엄밀히 말해 그것이 바로 가장 큰 죄이자, 신앙의 적입니다. 과거 그 어느 시절보다 더 풍요로운 세상에 살면서도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물질로 고통당하며, 아파하며 소외당하고, 그렇게 스스로를 가난하다 비하하며 살아갑니까? 어째서 오늘도 교회와 성도 역시 세상과 다를 바 없이 물질의 종이 되어 하나님조차 그 물질의 수단으로 삼는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물질에 관한, 돈에 관한 하나님의 경고를 너무나 경히 여긴 때문이며, 복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때문이며, 가난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오해한 때문입니다. 박노해 시인이 얼마 전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요즘 ‘대박, 대박’ 하는데, 대박은 누군가의 ‘쪽박’이다. ‘나쁜’ 꿈이다. ‘나쁜’의 어원은 ‘나뿐’이다. … 대박 대신 ‘소박’을 되찾자.”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난은 어디에나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도가 가난한 자들의 얼굴에 맷돌질 하지 않을 수 있는 길, 그리고 모두가 함께 가난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부자가 되어 그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가난해지기로 결단하고 서로의 필요를 진심으로 돌아보는 소박한 진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아는 절제를 연습하고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난 구제는 부자도, 임금도, 권세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만이 가난 앞에 맞설 수 있습니다. 부디 가난을 향한 하나님의 소박한 비전에 동참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길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