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수요 성경 강해 (창세기 4)
2016-10-2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61026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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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 1~3절, 창세기 (4)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gen4.mp3
질문 한 가지를 드리면서 오늘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세상을 몇 일 동안 창조하셨습니까? (/) 6일입니까, 7일입니까? 우리는 당연히 6일로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 저는 이번에 본문을 묵상하면서, 본문의 표현 가운데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기록하면 보통 어떤 뉘앙스인 건가요? 6일 동안 일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7일간 하셨다는 겁니까?
우리가, 오늘 일을 다 마쳤다, 일을 끝냈다, 말하게 되면, 보통은 말을 하고 있는 그 날까지 포함하여 일한 날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일곱째 날 하시던 일을 마치셨다, 이렇게 본문을 읽으면, 분명 하나님은 7일째 날까지 일을 하셨고, 그날 일을 마치신 셈이 됩니다. 우리의 평소 이해와는 다른 결과입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이 구절의 모호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관심이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는 것을,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학자들과 주석가들이 이 문제로 고민을 했고, 그래서 심지어 어떤 성서학자들은, 원문의 ‘일곱째’를 ‘여섯째’로 바꾸는 일까지 추진했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온전히 쉬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말 새번역이나 공동번역 같은 다른 한글성경들은, 이 구절을 강하게 의역합니다.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여섯째 날까지 다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이렇게, 본문에는 없는 여섯째 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옮긴 것입니다. 둘 다 동일하게 그런 번역을 택했습니다. 원문은 명확히 일곱째 날에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말입니다. 물론 읽는 사람들의 오해를 염두에 둔 번역입니다.
그러나 2절에 나오는 이 ‘마쳤다’는 동사 ‘칼라’가, 강한 완료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하면 안 됩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다른 본문들(창17:22, 출 40:33 등)은, 이 단어의 행위가 과거의 일로 이미 완료된 것임을 나타냅니다. 일곱째 날까지 하다가 그만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만둔 상태로 일곱째 날을 맞은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영어 모든 성경이 이 문장의 시제를 과거 완료로 번역했습니다. 이미 일곱째 날 전에 모든 창조 사역이 완료된 상태이고, 일곱째 날에는 그렇게 해 오던 일이 완전히 중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2절과 3절 끝에 계속 반복되는 이 ‘안식’이라는 단어 ‘솨바트’가 그런 식으로, 일이 다 끝나서 중단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런 내용들이, 별 것 아닌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만, 아시는 대로 성경의 구절구절에 대한 너무나 많은 오해와 의도적인 오역들, 그리고 왜곡이 많은 시대이고, 또 그것으로 인한 피해가 성도들에게 너무 크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어서, 경계하는 차원에서 한 번 언급을 해드렸습니다.
흔히 이단들의 성경 해석이, 전체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한 절에 집착한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합니다만, 그런 오류를 최대한 조심하고, 또 그런 잘못된 해석을 분별해내는 것 역시, 오늘 우리에게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기에, 더욱 바르고 정확하게 성경을 읽어낼 수 있도록, 말씀을 듣고 고민하는 데 게으르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모두 마치시고 7일째 되는 날에 안식하십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 편히 쉬셨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집니다만, 다시 강조하지만, ‘솨바트’는 단순히 일을 멈추었다는 의미입니다.
피곤해서 일을 멈추면 그 멈춤은 재충전과 쉼이 될 것이고, 뭔가를 계속하다가 더는 못하겠어서 그것을 멈추면 그건 포기가 될 것입니다. 반면에 모든 것을 다 이루고 멈추었다면 그것은 완성이 되겠지요. 본래 히브리어 ‘솨바트’는 결국 이런 내용을 다 담을 수 있는 그런 중립적인 말입니다.
하나님은 피곤치 아니하시지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는 시편 121편 4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피곤하셔서 쉬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중간에 창조 사역을 포기하신 것도 물론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안식한다는 것은, 말씀드린 대로,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는 의미이고, 이제 그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시기를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엿새 동안 하나님은 이 땅의 혼돈과 공허와 어둠을 질서와 충만과 빛으로 완전히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라 할 수 있는, 사랑과 거룩과 생명이 모두 드러나는 그런 피조물들이, 질서 있게 세상에 나타났고, 그것을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도 구별되어 만들어졌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창조의 6일 간의 과정을 완성이라 하지 않고, 새로운 한 날이 추가되어 그 7일의 전 과정을 창조의 완성으로 기록합니다. 다시 말해 이 우주는, 총 6일로 이루어진 창조의 결과물이 아니라, 총 7일로 이루어진 창조의 결과입니다. 일을 다 끝내는 것이 완성이 아니라, 그 일 뒤에 뭔가 다른 한 날이 더해져야 완성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세상이고, 창조이고, 만물의 역사입니다.
글쎄요, 이런 비유가 적당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밥이나 스테이크 같은 것 조리할 때, 특별히 음식을 찌거나 삶아서 익힐 때, 뜸을 들인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열을 계속 가해서 익히다가 이제 불을 끄고, 뚜껑을 덮어서, 한동안 그대로 내버려 둡니다. 조리기구 안에 있는 열이 음식 안으로 모두 골고루 스며들도록, 그래서 전체적으로 맛이 깊어지고 숙성되도록,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만드는 과정을 일컬어 뜸을 들인다, 표현합니다.
특별히 뭔가를 더하는 행위는 없지만, 분명히 그 휴지(休止)의 시간 역시 요리에는 대단히 중요하고, 실제로 요리를 완성하는 마지막 터치, 화룡점정(畵龍點睛)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뭔가 부족하고 설익은 것 같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것이 잘 된 비유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마지막 날은 그렇게 하나님의 성령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스며들고 가득 차서, 만물을 온전케 하는, 그래서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그런 과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창조의 모든 과정이 7일째 날로 완성이 된다는 것,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제가 여러분께 드렸던 질문, 하나님이 세상을 몇 일 동안 창조하셨느냐는 질문의 답은, 다시 7일이 되는 셈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행하는 일들의 완성도 쉼을 통해 마침표가 찍힙니다. 일을 다 끝냈을 때 우리는 완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마무리를 하고, 잠시 쉬며,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복기하고, 누리는 시간이 있어야 그것이 완성입니다. 취업이나, 결혼, 출산 등, 여러분 개인의 삶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그러하고, 또 교회의 일도 그러합니다. 다 했다고 끝이 아니라, 그 다음 잠시 쉬는 시간이 포함되어야 완성입니다. 그리고 그 쉼은 오롯이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쉬는 것입니다.
저희가 주일 예배 후에 잠시 3~4분 정도 묵상하며 쉽니다. 예배 순서가 다 끝났으니 이제 그냥 예배를 마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뜸을 들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삶에 잘 스며들 수 있도록, 몸과 영혼이 쉼을 누립니다. 그래야 비로소 예배가 완성된 것이지요.
하나님이 정하신 일곱째 날을 통해, 우리가 그 일곱째 날의 안식에 참여함으로 인해, 우리는 고단한 우리의 삶의 의미와 방향과 목적을 새롭게 깨닫고 이해하게 됩니다. 나에게 복이라 여겼던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목도하게 되고, 반대로 내가 화라 여기던 일들이, 엄청난 하나님나라의 씨앗이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그 쉼의 자리는,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의 대리자로 바로 서게 되는 자리인 것이지요.
너무 바쁘고 분주해서 우리는 쉼 없이 끝내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쉼을 마치 다음을 위한 준비로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지금의 완성’입니다. 삶의 매순간마다, 중요한 고비마다, 이 7일째의 안식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하심을 맛볼 수 있고, 내 삶의 의미와 방향도 인지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설익은 삶이 아닌 정말 제대로 익어서 맛이 나는 그런 성도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하나님 안에 쉬는 그 시간을 잘 누려서, 우리의 일상을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게 완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성경이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을 ‘일’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입니다. 본문 2~3절에서 세 번이나 ‘일’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일’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믈라카’인데요, 한 번 따라해 보실까요? (*)
이 ‘믈라카’는 어떤 특별하고 대단한 업적이나 과업, 또 그것의 성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 보통 하는 일반적인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루 종일 했던 그 모든 육체적, 정신적 일들이 다 ‘믈라카’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행하신 창조의 사역, 이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일을, 고작 우리 인간이 매일 행하는 노동에 해당되는 단어로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참 깊은 울림을 느끼게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인간의 일과 같은 단어로 기록한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단순한 노동으로 깎아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이 이 땅에서 해야만 하는 일상의 모든 일과 노동을 더욱 존귀하게, 하나님의 관점으로 규정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시간에도 계속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인간에게 주어진 매일의 노동과 일상의 일들은 결코 비하되거나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이 하는 일이든, 평범한 주부가 하는 일이든, 학생이 하는 공부든, 그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인간이 이 땅을 다스리는 명확한 의미와 방향을 가진 것으로, 적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행하신 그 창조 사역과도 크게 다르지 않는, 정말 중요하고 영적 가치가 있는 일임을, 본문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
사실 나중에 모세를 통해 안식일의 율법을 주실 때, 안식일을 제대로 구별하여 지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가, 그 이전 엿새 동안 힘써 일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9.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신명기의 말씀에서도 똑같이 반복됩니다(5:13). 힘써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행하는 것,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첫 걸음입니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일하신 것처럼, 모든 것이 보기에 심히 좋은 그런 모습으로 한 주를 살아내는 그것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한 주를 엉망으로 대충 살아놓고 주일에 예배만 잘 드린다는 건, 아예 처음부터 잘못된 예배인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나머지 날을 통해서 안식일은 더 거룩하게 구별되는 것이지요.
비록 어렵고 고되지만, 그래서 때로 너무나 그만두고 싶고, 쉬고 싶지만, 그럼에도 저와 여러분이 하는 일들을, 주님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그런 은혜와 힘이,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살펴볼 내용은, 하나님이 이 안식하는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도 아니라, ‘하루의 날’에게 그런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본문 3절이지요. 다같이,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아멘.
본래 이 창세기 1, 2장의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의 ‘복’은 생명을 가진 존재들만을 향해 선포됩니다. 1장 22절과 28절이 그 말씀입니다. 22절에서, 다섯째, 여섯째 날 창조된 바다와 하늘의 생명체들을 하나님은 복 주십니다. 그리고 28절에는 사람을 복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두 생명을 가진 존재로 동물이나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대부분,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해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이 동물들의 먹을거리로 주신 풀과 나무 채소,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셔서 확실히 구별을 하셨습니다. 또 빛이나 궁창, 이런 대상 역시 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복을 받는 대상이 어쨌거나 그 복을 인지하고 누릴 수 있는 생명체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신기하게도, 하나님이 ‘날’에게 복주십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대단히 낯설고, 성경 안에서도, 다른 구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경우입니다. 원래 고대 근동, 특별히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매월 일곱 번째, 열네 번째, 스물한 번째, 스물여덟 번째 등, 7의 배수가 되는 날을 불길한 날로 간주했습니다. 아마도 달의 차고 기우는 흐름과 연관된 이유였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로, 이 날들을 거룩하고 복된 날로 선포합니다. 달의 위상이나 기타 다른 이유로 어떤 날이 불길하고, 또 어떤 날은 복되고 좋은 날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그 날이 복된 날입니다.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도 또 평일 손 있는 날로 정해서 이사를 했는데요, 그 날이 싸고 일정 잡기도 수월합니다. 무슨 귀신이 없는 날이 복 있는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시고 택한 날이 은혜와 축복의 날입니다. (*)
아울러 하나님은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시는데요, 이것 역시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사실 이 ‘거룩’이라는 단어 자체가 창세기 전체에서 이곳에 단 한 번 등장합니다. 그 말은, 성경 전체에서 ‘거룩’이라는 단어가 여기에 처음 등장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다고 따로 말씀하신 게 이 ‘날’ 하나뿐입니다. 하나님, 하면 가장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가 ‘거룩’인데, 창세기에서는, 오직 여기에만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닌, 땅도 아닌, 날, 시간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일곱 번째 날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만드신 최초의 피조물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하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거룩해지는 겁니까? 거기에 무슨 거룩함의 표를 붙이는 겁니까, 아니면 …. 이 날만 해가 서쪽에서 뜹니까? 아니면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습니까? 아니지요.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동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생각해볼수록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아시는 대로 ‘거룩’은 구별되고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구별되었을 때, 우리는 보통 ‘거룩하다’ 말합니다. 사실 ‘거룩’이 어떤 것이다, 딱 규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피조물 안에서 나온 속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아주 쉬운 의미이기도 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에게 속한 어떤 것의 속성이자, 하나님께 속했다는 의미 그 자체입니다. 안식일은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구별하셔서, 당신의 날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따로 구별하여 취하시면 거룩합니다. 그런데 이 일곱째 날이 그렇게 하나님께로 구별되었습니다. 레위기 말씀(19:30, 36:3)이나 이사야의 말씀(58:13~14)에 보면, 안식일을 향해 하나님께서, ‘내 안식일’ 이렇게 부르시는 걸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이고, 그것이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이 거룩한 것도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라고, 밝혀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속한 자로, 주님의 것으로 구별되어서 우리는 ‘거룩’이라는 말이 붙는 존재가 됩니다. 성도(聖徒), 거룩한 무리, 참 무서운 말인데,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 날을 너희를 위해서 보내지 말고,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나를 기억하며 발언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안식일은 ‘시간의 선악과’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모든 자유를 인정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하나님의 날을 인정하고 구별해야 하는, 그런 날이 안식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7일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것처럼, 나중엔 공간에 대해서도 같은 일을 행하시는 걸 보게 됩니다. 바로 성소, 성전의 개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공간을 택하시고 그것에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셔서 당신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던 성막, 성전이 그런 것입니다. 땅이, 공간이, 거룩하게 된 것이지요. 오늘 안식일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과 동일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축복하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말씀드린 대로, 당연히 우리로 하여금 그곳으로 들어와, 그 복과 거룩함에 참여하라는 것이지요. 그곳에 와서, 그 시간 가운데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생명의 기쁨과 회복을 누리라는 초청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저 참여하면 됩니다. 더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날을 복주셨습니다. 복은 선언되었고,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거룩해졌고, 구별되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 뭔가 특별한 다른 것을 하지 않고, 주님이 행하신 것에 참여하는 겸손함이 요구됩니다. 잠잠히 주님 안에 거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계획과 생각을 내려놓을 따름입니다. 특별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것이 더 대단한 일이 된다는 것을, 오직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사람들만이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셔서 거룩하게 하신 그 날이 나중에는 엄한 율법이 된 이유는 결국, 우리의 성정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뭐든 더 하려 하고, 뭐든 내가 주인이 되어 다른 걸 해보려고 할 겁니다. 아닙니다. 계획을 멈추고, 주님이 이루신 것들을 보며, 함께 누리고, ‘심히 좋다’ 함께 고백하면 족합니다.
거룩하고 복 됨은 이미 이루어졌으나, 그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그 날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날에 참여하는 자들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날 뿐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율법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아내는 주일이, 세상이 볼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며, 그 쉼이 세상이 볼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안식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의 일상이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을 대변하고, 우리의 쉼이 하나님의 안식을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삶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