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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성경 강해 (창세기 3)

2016-10-19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3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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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9 수요 성경 강해 --------------------------------------------- 창세기 1장 20~31절, 창세기 (3)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3.mp3 다섯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 내용을 함께 읽었는데요, 다섯째 날은 물에서 사는 생명체들과 하늘의 새들에 대한 창조이고, 여섯째 날은 땅에 사는 동물들, 그리고 인간까지 창조하신 내용입니다. 이 부분에서 계속 반복되는 표현 중의 하나가, ‘그 종류대로’입니다. 11절, 12절에 풀과 채소, 나무 이런 것들을 만드실 때에도 그 표현이 나오고, 21절에서 어류와 조류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땅의 생물을 기록하는 24~25절도 그렇습니다. 모든 생물이 ‘종류대로’(‘로 민’) 창조됩니다. 질서로서의 창조가 강조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떤 하나의 생명에서 우연의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면서, 여러 생명으로 변화되어 이 땅의 모든 종(種)들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처음부터 ‘종류대로’ 만들었다고 성경은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인간이 그러한 종들을 임의로 혼잡스럽게 만들지 말아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엔 사자와 호랑이가 교배된 라이거 같은 그런 새로운 종들이 탄생하고 있습니다만, 그 유용성이나 어떤 다른 목적은 차치하고서라도, 창조의 질서와는, 질서로서의 창조와는 배치되는 일이라는 것, 그보다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 ‘보존하고 지켜내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 창조하신 것들을 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지키는 것’으로서의 사명은 2장에서도 다시 반복이 되는데요, 그 부분은 잠시 후에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문제는, 21절에 ‘창조하시니’라는 동사인데요, 1절 이후에 이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바라’라는 히브리어 동사인데요, 그 이전에도 계속 창조의 사역이 이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언급되는 것에는 나름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 21절에, 그 창조의 대상으로서, 가장 먼저 언급된 동물이, ‘큰 바다 짐승들’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조금 사족과 같이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냥 바다짐승이라고 통칭해서 말씀하셔도 되는데, 굳이 그 중에서 ‘큰 바다 짐승들’이라고 별도로 언급한 겁니다. 딱히 어떤 정해진 어류 종도 아니고, 뭔가 막연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사실 이 단어 ‘탄닌’은 ‘바다 괴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탄닌’은 당시 매우 크고 강한 바다 생명체들을 가리키는 말인데요, 악어나 아나콘다, 또 상상이 깃든 용과 같은, 엄청난 크기의 해양 포식자를 묘사할 때 쓰던 단어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리워야단’ 이런 말 기억나시는지요? 욥기나 시편, 이사야서에서 주로 두려운 이방 세력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힘세고 악한 존재를 가리킬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리워야단’이 바로 이 ‘탄닌’(바다 괴물)의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그래서 나중엔 애굽이나 앗수르, 바벨론과 같은 나라를 비유할 때도 쓰였습니다. 여담입니다만, 17세기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 같은 사람은 이 단어를 써서,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리바이어던’이라는 말로 표현이 되지요. ‘비틀다’, ‘꼬다’라는 뜻에서 나온 이 ‘리워야단’은 뱀처럼, ‘몸이 길어 휘감는 동물’을 지칭합니다. 아마도 악어와 같은 수중 생물에다가 종교적 상상력이 결합되어 나타난 동물일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요, 어쨌든 인간이 쉽게 제압할 수 없는, 두려움과 어둠의 존재로서 이 말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숭배하고 신앙화하는 많은 고대 신앙이 존재했는데요, 특별히 가나안 땅에 그런 전통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어쨌든 이러한 말이 굳이 창조 기사에 등장하는 이유는, 결국 그러한 거대한 생명체조차, 악을 대변하는 존재조차도, 하나님이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 괴물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존재마저도 직접 만드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라는 명령과 권한을 받은 인간이, 결코 그것을 숭배하거나,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강조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시편 148편 같은 곳에 보면, 시인은 용들을 향해서 명령하지요.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외치기까지 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신으로 숭배하는 그런 존재지만, 성경은, 그것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인간의 다스림 아래 존재할 뿐임을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QT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하나님의 자녀가 결코 두려워하지 말 것을 야곱에게 가르치십니다. 딸 디나의 일로 인해, 시므온과 레위가 히위 족속을 몰살시킨 뒤 야곱은 두려움에 떨지요. 인근의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이 힘을 합쳐 온다면 꼼짝없이 보복을 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야곱을 벧엘로 가서 당신께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디 가서 숨어 있거나 전쟁을 준비해도 모자란 판에, 세겜에서 벧엘까지, 상당히 긴 거리를 이동해서, 하나님께 예배나 드리고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이 순종하지요. 자신은 물론 모든 식솔들을 다 끌고, 또 그들이 섬기는 모든 우상들을 다 땅에다 묻고,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벧엘로 내려가 예배합니다. 이때 야곱을 노리던 주변의 모든 가나안 족속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다. 뭐가 그리 두렵고 또 왜 그랬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처음엔 야곱이 두려워했는데, 나중엔 적들이 야곱을 훨씬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공격을 나서지 못하고, 야곱은 무사히 벧엘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축복의 말씀이 오늘 1장에서 아담과 하와를 향해 하신 말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하나의 백성이 너에게서 나오고, 왕들이 너의 허리에서 나올 것이다. 그 땅을 네게 주고, 네 후손에게도 줄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려라, 하시는 28절 말씀 그대로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외에 두려워할 것이 없는 존재로, 하나님 외에 예배할 것이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어떤 것도,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 그것과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경외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움에 휩싸인 겁니다. 다시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온전히 인정하고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리워야단도, 탄닌도, 그 무엇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 여러분, 오늘날의 가장 강력한 리워야단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돈입니다. 맘몬이지요. 우리를 늘 두려움에 떨게 하고, 또 섬기게 하는 것. 그러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예배하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 돈입니다. 그 또한 분명히 다스려야 할 대상이지만, 우리가 그걸 자꾸 잊어버립니다. 그때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꾸짖어야지요. 시편 148편의 시인처럼, 명령해야 합니다. “돈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돈아, 여호와를 예배하라.” “돈아, 내 통치를 받아들여라. 너는 나를 두렵게 하지 못한다.” “나는 너를 다스리는 자다.” 선포해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목사인 저도, 교회 이전하고 하는 문제 속에서 매번 느낍니다. 저도 그게 잘 안 됩니다. 목사라고 맘몬이 만만하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벧엘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더 겸손히 무릎 꿇어야 합니다. 야곱에게 행하신 그대로 하나님이 맘몬을 두렵게 하시고, 하나님이 내 마음을 담대하게 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성도가 세상에서 너무 창피하고 속된 말로 쪽팔립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대리자가, 두려워서 벌벌 떨게 되고, 세상이 웃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작은 이익에 신앙을 팔게 됩니다. 정말 목사가, 성도가 아주 초라해집니다. 왕이 쪼잔한 것만큼 수치스러운 게 없습니다. 정말 우리 그렇게는 살지 마십시다. 없을 때 없고, 가난할 때 가난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 딸답게, 당당함을 잃지 말고, 명령하고 선포하며 버텨내십시다. 믿음으로 정복해 버립시다. 다스리는 권세와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며,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아는 삶을 사십시다. 욕심은 두려움의 뒷면입니다. 욕심이 있다는 것은 다스리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에 의해 내가 정복당한 것입니다. 욕심이 모든 죄의 근원이 된다는 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 함은, 그것이 나를 이미 정복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모든 죄를 짓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욕심 내지 않고, 있는 바를 감사히 여기며, 매순간 예배하는 자로, 다스리는 자로 서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인간의 창조에 관한 여섯째 날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인간이 창조의 정점이라는 사실은 계속 언급해 드린 바가 있는데요, 인간은 먼저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이 있었지요. ‘우리’라는 복수형 대명사 주어가 함께 상의하고 계획하며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창조만이 가지는 유일한 특성입니다. 거룩한 계획에 의해서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창조의 거룩한 틀이 존재하지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빚어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빚어지는 것이지요. 아무런 기준이나 틀이 없이 그냥 종류대로만 창조되는 다른 피조물과 명확히 구별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모양이라는 거룩한 틀에 따라 창조됩니다. 이 말은 결국 인간을 보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우리에게서, 우리의 삶에서 그런 향기, 그런 위엄이 보여야 합니다. 아울러 타인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평등하게 존재합니다.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그 형상은 주어져 있고, 그것은 누군가의 의도나 의지에 따라 훼손될 수 없는 존엄함입니다. 비록 지금은 그런 모습이 아니더라도, 겉으로는 그런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시선으로, 우리는 서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이제 얼마 안 있어, 한 가족 안에서도 그 형상을 훼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거룩한 계획, 거룩한 형상, 여기에 더불어 거룩한 목적이 별도로 주어집니다. 다른 생명체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는 것’만을 위해서 창조되지만, 인간은 거기에 더해서 별도의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됩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28절인데, 땅을 정복하는 것과 다른 피조 생물을 다스리는 것, 두 가지가 인간에게만 주어진 고유한 목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거룩한 계획에 따라, 거룩한 형상대로, 거룩한 목적을 향해 창조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명확하게 구별되어 세워지는 것입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다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밝히면서, 그 형상이라는 것이, 결국은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것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동물에게 없는 무슨 특별한 지성이나 이성이 있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라고도 볼 수 있는데, 사실 성경이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다스리는 것입니다. 정복과 다스림, 그러면 대단히 폭력적인 뭔가를 생각하게 되지만, 성경이 말하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2장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잠깐 2장 15절을 보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아멘.     하나님이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셔서 그것을 다스리게 하시는 장면인데요, 성경은, 그 모습을 경작하고 지키게 했다고 묘사합니다. 여기 두 단어, 경작하고 지키는 것, 그것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경작한다는 말 히브리어 ‘아바드’는 본래 의미가 ‘섬기다’, ‘노동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이 그냥 모든 것이 풍성한 그런 낙원만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것을 가꾸고 섬겨서 그렇게 이루어 가야하는 대상이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합니다. 우리는 에덴동산 그러면 다 완벽한 뭔가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는 아바드, 일하고 섬겨야 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쉽게 수확이 가능했겠지만, 그러나 경작해야 하는 땅, 그것이 에덴이었고, 그 수고와 일상의 노고가 바로, 이 땅을 다스리는 중요한 부분임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일상에서 살면서 우리가 감당하는 노동과 수고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섬기고 헌신하는 것, 그것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세상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위에서 군림하고 명령하고 시키는 것만 다스리는 게 아닙니다. 아래에서, 시키는 대로, 순종하고 섬기는 자리도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당신의 수단으로 삼으십니다.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에덴을 다스리라 하실 때 나오는 두 번째 동사가 ‘지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솨마르’인데요. 이 단어는, 목자가 양 떼를 보살핀다는 데서 유래한 말로, 방심이나 나태함 없이 철저히 주의하고 살펴서 지키고 보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다스림입니다.     사실 이 ‘솨마르’는 나중에 하나님의 이름이 되기도 합니다. 창세기 16장에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임신하게 되었을 때, 사라를 멸시하다가, 결국 사라의 학대에 못 이겨 도망가게 되지요. 광야에서 헤매고 있을 때,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하갈에게 말합니다. “하갈아, 사라에게로 돌아가서 그녀에게 복종해라.” 말씀하지요. 그러면서 하갈과 그의 아들이 될 이스마엘을 축복합니다. “그 족속이 번성하여 수가 많아져 셀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하갈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쉠 야훼’라 합니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나의 목자로서)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이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명명하지요.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다스림이란, 목자의 보호와 지킴임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보호자가 되는 것, 그것이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 다스린다는 말 ‘라다’ 자체가 ‘살게 하다’입니다. 살게 하는 것, 살리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다스림의 정의인 것이지요. 잘 살 수 있게 보호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못살게 굴다’라는 말이 있는데, 참 희한한 말이지요. 살지 못하게 괴롭히다, 이런 뜻이니까요. 실제로 우리 인간이 지금 다른 생명체들을 못살게 구는 것이지요. 그건 다스리는 게 아니라, 파괴하고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책임을 지고 돌보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명령이자, 하나님의 형상의 가장 핵심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킨다, 보호한다는 것은 당연히 뭔가 노리는 세력, 공격하는 세력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위험이 있다는 겁니다. 에덴 역시도 그러했고,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먹고 노는 곳으로 부른 게 아닙니다. 일해야 하고, 지켜야 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담이 에덴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도 없고, 또 뱀의 유혹으로부터 에덴을 지켜내지도 못한 것이,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스리라는 이 명령에 아담이 얼마나 진지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임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결과는 실패였음이 곧 드러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하고,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다스리는 길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그렇고, 가정과 교회도 그렇습니다. 죄가 사람을 다스리기 전에도 세상은 일해야 했고, 지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더욱 그렇습니다. 방심하고 대충 살다가는 결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하며, 말씀 앞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일해야 하고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양을 맹수로부터 지키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졸지도 않으시며 감찰하시듯이, 우리도 내가 감당해야 하는 삶의 지경을 그렇게 지켜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 사명을 기억하지 못하면, 않으면, 결국 아담과 하와처럼, 다스림을 받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다스려야 할 대상, 거기엔 나 자신은 물론, 내 가족, 내 지체, 내 이웃도 있고, 때론 동물과 식물도, 환경도 다 포함이 됩니다. 그 사명이 다름 아닌 저와 여러분에게 있음을 우리가 기억하고, 바다 괴물이든, 리워야단이든, 맘몬이든, 뭐든, 다스리고 통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그러려면 오늘 야곱처럼, 조금만 더 주님께로 가까이 다가서야 합니다. 삶의 자리에 벧엘의 제단을 쌓고, 늘 주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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