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해를 받고(1)' 2016년 8월 21일 주일 설교
2016-08-2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60821 오순절 후 열네 번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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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1~9절, 해를 받고(1)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60821.mp3
(사도행전 강해 120) ‘해를 받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한 종교의 상징물이나 어떤 아이콘, 어떤 像, 이런 것들 가운데, 그 종교가 믿는 신의 모습이 고난으로 얼룩져서 형상화 된 것을 보신 적 있습니까? 그 종교를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물이 신의 고난을 담고 있는, 그런 종교, 혹시 기억하십니까? 아마 쉽게 보기는 힘든 듯 합니다.
기독교는 참 신기한 종교입니다. 고난이 상징물입니다. 신이 해를 받고 죽었다는 것, 그것을 상징하는 형틀이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무언가입니다. 당연히 그 십자가 위에 매달린 신은 웃을 수도, 자비한 얼굴을 할 수도 없습니다. 지구상 가장 잔혹한 형벌 가운데 하나였던 십자가형 위에서 신은 모든 고통을 감내했고, 수치와 저주에 몸부림치며 죽어 가야만 했습니다. 십자가 위엔 오직 어둠과 고통밖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아는 십자가는 고대 로마의 실제 십자가와는 많이 다릅니다. 이스라엘 땅에선 그런 곧고 강한 나무가 자라지를 못하기 때문에, 영화나 그림에서 보는 그런 매끈한 나무로 된 십자가는 없었습니다. 뒤틀리고 휘어진 나무 하나를 땅에 박고, 죄인의 양팔을 고정시킨 또 다른 나무 하나를, 거기에 연결하여 묶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사형수들의 피와 체액으로 범벅 된, 대단히 흉물스럽고 기괴한 형태의 나무, 그게 십자가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십자가가 기독교의 심장입니다. 그 위에서 해를 받고 고통당하며 죽은 신, 그것을 믿고 고백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것 전하는 걸 모두의 사명으로 여깁니다. 지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도착해서 그곳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바로 그 내용입니다.
유대인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과 경건한 헬라인들에게, 바울이 구약 성경을 풀어 설명합니다. 바울이 풀어내는 구약성경은 한 마디로, 오시기로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반드시 해를 입고, 십자가 위에서 죽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 부활, 그것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 성경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3절이지요,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라는 이 표현에는 사실 한 가지 애매히 번역된 부분이 있습니다. 이 문장에는, 그리스도가 해를 받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불가피하다’, ‘필연적이다’, 하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영어 성경은, “Christ must suffer,”처럼, 그 의미를 살려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반드시 해를 받아야만 했다, 필연적으로 메시아는 고난의 메시아이다, 이것을 지금 바울은 풀어 설명합니다. 메시아는 고난과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메시아가 온다면 그는 반드시 해를 당하여 죽어야 합니다. 자연사가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죽음도 아닙니다. 누군가로부터 해를 받아 죽습니다. 그렇게 죽어야 메시아요,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메시아가 바로 얼마 전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라는 남자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인구가 고작 100명 미만이었던, 그래서 마을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더구나 십자가 사형수로 삶을 마감했던 한 청년이, 바로 수천 년 간 이스라엘 민족이 기다린 메시아, 그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영광에 참여케 하는 존재라고 예언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자 시작점입니다.
실제로 이 부분은 초대교회 모든 사도들, 성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언하신 ‘해를 받아 죽기로 된 그리스도’가 마침내 오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것, 그것이 복음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과 모세의 율법이 다 그것을 가리키고 있었다고 사도들은 구약을 ‘풀었습니다.’ 정말 놀랍고 충격적인 풀이였습니다. 구약 전체를, 인간을 위해 해를 받아 죽어 부활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로 읽어낸 것입니다.
베드로는, 심지어 구약의 선지자들이 했던 일도 같은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율법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필 때, 성령 하나님이 훗날 주가 받으실 고난과 영광을 미리 증언해 주셨고, 그것이 누구이며 또 언제인지를 그들이 상고”했다고 말합니다(베드로전서 1:10~11).
같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은, 끊임없이 십자가를 말씀하시고, 그것의 의미를 묵상하게 하시고, 그것을 증언하며 살게 하십니다. 교회와 성도는 그 무엇보다 이것에 대해 말해야 하고, 그것을 전해야 하고, 거기 담긴 메시지를 살아내야만 합니다. 십자가 외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해 받으신 하나님, 그것이 전해질 수 있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아멘이십니까?
이건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메시지였습니다. 구약에 능통했던 수많은 랍비들조차 그런 신을 기다리지 않았고, 더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 안에서 그런 메시아를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이방인들에게도 낯설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인간이 당해야 할 죄 값을 대신 짊어지는 신, 그리고 처절한 고통 속에 죽은 신, 이런 신은 그들의 God List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는 익숙해져 있고, 나름 그 의미를 이해하고도 있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십자가 위의 매달린 하나님’, 그것이 얼마나 생경한 것인지를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자칭 메시아라고 외치며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시대, 그리고 그 전후 몇 십 년 동안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 같이 고난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고난 없는 메시아, 승리와 영광만 존재하는 메시아, 금욕은 있어도 고난은 없는 메시아, 그렇게 세상은 십자가 없는 메시아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가 메시아이고, 또 메시아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런 소위 이단들에겐 고난이 없습니다. 화려한 집에 살고, 성도들을 수족처럼 부리며, 십자가와 무관한 삶을 삽니다. 그들이 메시아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결국 해를 받아 죽는다,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팔려서, 찢겨서, 저주 받아 죽는다, 그리고 죽은 후에 부활한다, 이것을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중요한 삶의 모습만을 담아 놓은, 비교적 짧은 공관복음서 안에, 당신의 고난에 대한 예수님의 그 이야기가 세 번씩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여러 번 그 말씀을 반복하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은, 정말 같은 이야기를 때마다 강조하여 말씀하신 겁니다. 제자들이 잊을 만하면 늘 당신이 어떻게 될 것을 되새기게 하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그런 주님의 말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고 감당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해를 받아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시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 계속 살펴보았던 대로, 제자들은 어느새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그대로 뒤쫓아 갔고, 오늘 우리가 읽은 것처럼, 그 해 받으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자리에서, 본인도 계속되는 해를 받으며, 거기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메시아는 해를 받아야 합니까? 왜 오시는 그리스도는 반드시 고난을 겪고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합니까? (*) 우리 인간의 죄가 하나님께 그런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인간이 영원한 죽음을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한쪽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한쪽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새겨져 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신명기 21:23의 말씀은, 십자가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쏟아진 나무임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된 피조물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부하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삶이 만들어내는 모든 열매들이 다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 십자가가 외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한 것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우리와 마찬가지로, 별로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한 그 수많은 말씀을 늘 읽고 외우면서도, 해 받으시는 메시아를 이해할 수조차 없었던 이유가 그것입니다.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크고 중한 것인지, 구원을 위해 얼마나 큰 대가가 필요한 것인지, 그들은 전혀 몰랐던 겁니다.
이것이 죄의 가장 무서운 부분입니다. 우리의 가장 무서운 부분입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드는지, 그것에 우리가 얼마나 둔감하고 무심할 수 있는지를, 메시아를 결국 저주의 나무에 매다는 데 성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억하며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대신 짊어진 수많은 소와 양이 내장과 가죽 하나하나까지 다 해체되어 불살라 재가 되어버리는 제사를 수천, 수만 번 반복하던 그들조차 죄에 대해 그런 감각으로 살아갔을진대,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성령 안에 깨어 있지 못할 때 어떤 모습일지를, 우리는 근심하며 애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매다는 데 필요한 모든 죄가 매일매일 우리의 삶에서 일어납니다. 이번 한 주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하나님을 팔았고, 넘겨주었고, 부인하고, 저주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보려 하셨습니까? 그를 진정 나의 주인으로 여기며 그가 원하는 삶을 살고자 수고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그를 증언했습니까? 그를 위한 헌신이 있었습니까?
(그를 위한 헌신에도 우리는 계산하고 머리를 굴립니다. 저 가련한 여인이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옥합을 깨뜨릴 때, 우리는 그것을 계산하며, 그 가치를 환산하느라 바쁩니다. 수많은 가난한 인간들을 생각한다는 핑계로, 이 땅의 정의를 생각한다는 변명으로, 우리는 이미 모든 소유의 주인의 자리에 올라 있습니다. 순수한 은혜와 감격 속에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지도 못하고, 남의 헌신과 신앙을 판단하기에 바쁩니다. 그 헌신의 효과를 먼저 생각하고, 유다와 같이 사용처에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행조차,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영광과 의로움이 다 나의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폭로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 합당한 저주를 낱낱이 보여줍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라고, 결국 이렇게 될 거였다고 외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리스도가 해를 받아 죽어야 할 일을, 우리가 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하지만, 십자가는, 우리가 그렇게 예수를 팔아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죄를 미워하시나, 죄인들을 미워하시지 않음을, 신이 죽는 사실과, 그 최종적인 결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를 팔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할지라도 그의 은혜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 팔아넘기는 행위로 인해, 우리는 그의 은혜로 곧장 나아갑니다. 배신하고 팔았기에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 손으로 해를 가하고 매달았기에 우리에게 구원이 임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우리의 죄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결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죄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길,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길,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로 귀결되게 하는 길,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길, 십자가였습니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이 죄뿐임을 아시기에, 스스로 죄의 제물이 되어 해를 당하신 것,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매순간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저주해도, 그것이 다시 우리의 구원이 되게 하는 길을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가 친히 길이 되어 오셨고, 해를 받아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 참혹한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표징, 기독교의 표징, 우리의 표징임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고난과 해를 받음이 이 땅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필연적인 길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아울러 이 땅에서 사는 우리의 삶이 고난과 해로 얼룩져 있다고 해서 너무 좌절하거나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고난과 함께 살고, 그 고난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다 마치고, 주님께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에서 벗어난 그 개운한 느낌, 천하태평의 그 맛을 늘 그리워하며 삽니다. 그 평안을 향해 매순간 땀 흘리며 살아갑니다. 할 수만 있다면 고난을 피하고 밀어내며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의 증언이 정말 그런 것입니까? 성도에게 주어진 삶이, 요구하시는 삶이, 정말 그런 것입니까? 주님이 따라오라는 좁은 길, 너희도 짊어지라고 하신 그 십자가가 정말 우리가 원하는 평안을 보장해줍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이 땅에서 모두 제거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기로, 그렇게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게 싫지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게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없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함이 없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받으실 참 영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세상이 당하는 고난으로부터 자유할 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전과는 다른 고백과 찬양을 드릴 수 있음에 영광 받으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또 우리가 어떤 고난을 기꺼워해야 하는지 우리가 온전히 알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십자가가 실패가 아니라 영광임을 드러낼 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때, 하나님은 가장 온전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고난은 성도에게 유익하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고난이 특별히 성도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합니다. 몸에 유익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영원한 생명에 유익하다고 합니다. 육체가 아니라 영혼 때문에 고난을 주십니다.
결국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의 목표와 우리의 목표가 다른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과 인격과 삶에 관심을 가지는데, 우리의 목표가 육체요, 외모요, 세상의 자랑이어서, 늘 평행선을 달리며 괴롭습니다. 하나님의 목표와 나의 목표가 일치해야, 성도는 비로소 행복해집니다. 내 고집보다 하나님의 고집이 비교 못하게 더 세고 질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위한 일을 하시지 육체를 위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초점에 맞춰 사십시오. 그래야만 신앙이 여러분에게 유익하고, 역설적이지만 그래야 고생도 덜합니다.
모든 사람은 고난으로 죄를 발견하고, 죄를 이깁니다. 사실 고난이 죄를 드러냅니다. 고난이 드러난 곳에 죄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해’ 드러난 그 죄가 다시 고난을 통해서 이겨집니다. 여러분, 혹시 고난이라는 방법 외에 우리의 영혼이 정결해지는 법을 알고 있습니까? 저를 보니, 제 수준에서는, 그런 건 없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죄를 그치는 일이 고난에서 일어난다고, 그리고 고난을 대하는 주님의 마음도 그랬다고 증언합니다. 우리 역시 그런 주님의 마음을 우리의 갑옷으로 삼아, 고난을 기뻐하라 권면합니다(베드로전서 4:1~3).
여러분, 고난당할 때 죄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몸이 원하는 것, 육체의 욕망이 고난 속에 생각납니까? 그게 정말 그에게 고난이라면, 그냥 간단히 피할 수 있는 수고나 통증이 아니라, 정말 고난이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몸만 조금 아파도, 육체의 모든 정욕을 잊어버립니다. 식욕과 물욕, 쾌락과 음란, 방탕 이런 것들은 고난과 같이 갈 수가 없습니다. 고난이 있는 자리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자신이 주인으로 섬기던 것들, 자신이 중독되어 버린 죄에서 잠시나마 분리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 고난에서 벗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다시 죄를 생각하고, 다시 죄에 눈을 뜨게 되는 때, 고난에서 벗어난 겁니다.)
아울러 고난은 우리의 진짜 실력을 그대로 다 드러냅니다. 내 위선의 껍데기를 고난이 다 벗겨냅니다. 우리가 어떤 수준인지, 고난을 당해보면 다 나타납니다. 고난의 팔할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지를 드러내는 데 쓰이고, 나머지는 반대로 우리가 그나마 이만큼 자랐구나, 하는 걸 드러내는 데 쓰입니다. 믿음 좋은 줄 알았지만, 고난을 겪으며 아직 아닌 걸 알게 되고, 또 반대로 내 믿음이 이제 이 정도는 되는구나, 이만큼 자랐구나, 그것도 고난이 알게 합니다.
저와 여러분 중에 고난 없이 기도할 사람이 정말 몇이나 되겠습니까? 기도, 정말 어려운 그것이 고난 속에서는 자연스레 나옵니다. 영혼의 호흡이라는 기도가 고난 없이는 나오지 않습니다. 목사인 저도 고난을 통해서 기도를 배웠지, 다른 건 없었습니다. 다윗 같은 사람도 그랬습니다. 시편 30편에서, 자신이 형통할 땐 스스로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 말했었다고 고백합니다. 형통했다면, 고난이 없었다면, 구제불능이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어디 다윗만입니까? 히브리서 말씀에는,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고, 그래서 온전하게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는, 그 받으신 고난이 순종을 배우게 했고, 비로소 온전하게 되셨다,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고난이 결론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광과 생명도 이 땅의 이 모습이 다가 아닙니다. 성경이 증언(골로새서 3:1~4)하시는 대로, 우리의 진짜 생명은, 우리의 진짜 삶은, 우리의 영광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지금은 감춰져 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마저도, 하나님 안에 ‘아직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광은 잠시 비밀 가운데, 감춰져 있고,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드러날 때가 곧 올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감춰진 그 생명과 영광이 얼마나 존귀하며 아름다운 것인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될지, 지금 우리는 다 가늠할 수 없지만, 주님은 부활하셨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승리자로, 통치자로, 왕으로, 거기 계십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 영광이 어떠한 것인지, 그는 지금 살아 계셔서 보여주십니다. 해를 받는 것 그것이 결론이 아님을 부여주시고, 지금 우리의 고난이 결코 혐오스런 무언가로 끝나지 않게 되는 길로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 주님이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그 땐 모든 감춰진 것들이 드러나고, 밝혀지고, 현실이 됩니다. 위, 아래가 바뀔 것이고, 부와 가난이 바뀔 것입니다. 주를 위해 감내한 모든 고난이, 이 땅에서 예수 때문에 아파했던 모든 것들이, 그저 해소되는 게 아니라, 영광 가운데 성도를 드러낼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그때 진정’ 영화롭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진짜 모습이, 우리의 진짜 생명이 드러나게 될 때, 부디 우리가 가난하고 고난 가운데 있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분이 영광 가운데 오실 때, 슬피 울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감춰졌던 모든 것이 드러나고, 우리의 모든 인내와 기도와 소망이 다 드러나게 될 때, 부디 저와 여러분이 웃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 해를 받으신 주님, 우리의 고난을 당신의 고난이라 말씀하시는 그 주님이, 부디 해 받을 일 천지인 우리의 삶을 친히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