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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기뻐하니라' 2016년 7월 31일 주일 설교

2016-07-3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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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31 오순절 후 열한 번째 주일 설교 --------------------------------------------- 사도행전 16장 24~34절, 크게 기뻐하니라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60731.mp3 (사도행전 강해 117) ‘크게 기뻐하니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기억나시겠습니다만, 바울과 실라 일행이 빌립보라는 이 도시에 들어오게 된 데는 바울의 본 환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막으심이 있은 후, 그들이 아시아의 끝, 드로아라는 항구까지 이르렀을 때였지요. 유럽 마게도니아 지역에서 사람 하나가 바울에게 이리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간청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묵상하면서 저는 그 환상 속의 남자가 바로 이 빌립보 감옥의 간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유한 상인 루디아나 귀신들려 점치던 소녀도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있었겠지만, 우선 환상 속 그 사람이 남성이라 성경이 증언하기에 그렇습니다. 또 16장 전체 이야기가 결국 이 간수의 가정에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나온 바울 일행은 이제 잠시 루디아의 집에 들렀다가 곧바로 빌립보를 떠나게 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빌립보 사역을 통해 바울과 실라는,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 고난, 죽으심과 부활의 과정을 고스란히 다 밟아갑니다. (이환이가 멋지게 표현해 준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마주로서,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오마주 그 이상의 실제적인 재현이 되도록, 그들은 예수의 발자취를 뒤따라가고, 예수님의 영광을 삶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지난 한 주도 저와 여러분은 같은 싸움을 싸웠을 겁니다. 겉으로야 세상의 수많은 청년들의 삶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였겠지만, 그러나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과 권세, 그리고 나라와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여기 다시 모였습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하신 분도 계시겠고, 또 결정적인 한 방을 얻어맞고 오신 분도 계실 겁니다. 혹은 ‘뭐야, 나 그 싸움을 하고 온 거 맞아?’ 하는 마음이 드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괜찮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소한 패배들이 의미 없는 패배, 궁극적인 패배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잠깐의 쉼을 누리며 하나님 안에 안식하고 있지만, 아시는 대로, 하나님은 더 열심히 일하시는 중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모습들이 선한 결말에 이르도록, 그 수고들이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도록,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심을 믿고, 잠깐이나마 주님이 원하시는 그 온전한 쉼을 누리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말씀드린 대로 빌립보 이야기의 절정이 이 간수 가정의 회심이었다면, 그 회심의 절정은 본문 34절, ‘크게 기뻐하니라’일 겁니다. 지진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그 밤에, 이 남자는 바울과 실라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맞은 자리를 치료해주고, 같이 야식을 먹으면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듣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어쩌다 오게 됐는지, 왜 그 지하 감옥에 갇혀야 했는지, 다 들었겠지요. 그런 그날 밤 그 가족들 모두가 세례를 받는데요, 바울과 실라를 씻어준 그 자리에서, 그들은 죄 씻음의 은혜를 맛봅니다. 그리고 34절 말씀처럼, 그 가정에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밤 구원의 그 큰 기쁨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미 누리고 계신 분은 더 충만히 누리시도록, 또 그 기쁨이 소멸되어 침잠해 있는 지체들에겐 다시 채워지도록, 그리고 이 기쁨을 아직 맛보지 못했다면 경험하게 되도록, 오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크게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사실 여러분 여기 나온 이 구절, ‘크게 기뻐하니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그냥 한 단어입니다. 한 단어인데 의미는 ‘아주 크게 기뻐하다’입니다. 그냥 ‘크게’가 아니라, 일부 영어 성경이 옮기듯이, ‘greatly rejoice’, ‘be overjoyed’입니다. 중요한 단어이니까, 여러분 한 번 따라해 보십시다. ‘아갈리아오.’ 발음이 좀 이상하긴 한데요, 외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갈리아오.’ 이 말은 ‘매우’란 뜻의 ‘아간’과 ‘높이 뛰다’라는 의미의 ‘할로마이’가 결합된 단업니다. 그러니까 그냥 기쁜 게 아니라, ‘기뻐서 펄쩍펄쩍 뛸 만큼’ 그만큼 기쁜 겁니다. 어린아이가 기다리던 아빠를 보고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기뻐하고, 강아지가 오랜만에 주인을 만나 좋아서 꼬리를 격하게 흔들며 주인 주위를 빙글빙글 돌 때의 기쁨. 기쁨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 밖으로 다 표출되는 기쁨, 그래서 나 외에 다른 사람들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다 알 수 있는 기쁨. 그 기쁨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아갈리아오’입니다. 빌립보 간수가 지금 그렇게 기쁩니다. 예수 믿어서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단어를 굳이 기억했으면 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 단어 자체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이 단어가 성경에서 쓰이는 맥락이 워낙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기쁘다’라는 헬라어로 보통 ‘카이로’라는 동사가 쓰입니다. ‘카이로’의 명사형이 우리가 잘 아는 ‘카라’입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기쁨, 그러면 거의 다 ‘카라’입니다. 이 ‘아갈리아오’는 아주 드물게 예외적으로만 사용이 됩니다. 제가 이 단어를 조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요, 헬라어로 글을 쓴 고대 그리스의 작가들 역시 기쁨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 호메로스 같은 작가의 글을 비롯해서 그리스 문헌 어디에도 이 ‘아갈리아오’는 찾아볼 수 없답니다. 오직 신약성경에만, 그리고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만, 아주 드물게 등장하는 표현인 겁니다. 감정의 크기와 맥락이 모두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과는 구별되는 그런 기쁨을 가리키는 단어, 그것이 바로 오늘 ‘아갈리아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단어가 사용된 다른 본문이 어디인지 궁금하시지요? 이 단어가 쓰인 몇 군데 말씀을 직접 좀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부터 순서대로 찾아가 볼 텐데요, 여러분은 말씀을 읽으시면서, 어느 때 이 단어가 주로 사용됐는지, 그 맥락을 생각하시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마태복음 5장 11~12절입니다.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카이로’)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다음으로는 누가복음 1장 39~56절까지로,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방문했을 때의 상황입니다. “44.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 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 계속해서 누가복음 10장, 17절부터 21절까지. “17.칠십 인이 기뻐하며(‘카이로’)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 2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에갈리아사토 엔 토 프뉴마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 [요한복음 8장 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카이로’).”] … 또 사도행전 2장 25~27절, 다윗의 시, 시편 16편을 인용한 베드로의 설교인데요,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 혀가 기뻐 뛴다는 말? 찬송의 의미) 다음은, 베드로전서 1장입니다. 사실 이 단어를 베드로 사도가 자주 사용했는데요, 1장 3~9절,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엘 피다 조싼)이 있게 하시며 …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 계속해서 베드로전서 4장 12~13절입니다. “13.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19장 5~8절입니다.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 아멘. 지금까지 ‘아갈리아오’라는 단어가 사용된 경우를 찾아봤는데요, 여러분,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이 단어가 사용될 때의 공통된 맥락 같은 것을 혹시 발견하셨습니까? 우선 이 표현은 어떤 현재의 조건에 의한 기쁜 상태나 감정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1)철저하게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말입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신 그 기쁨이고 또한 예수님과 연관된 누군가의 기쁨입니다. 이 땅에 속한 기쁨이라기보다는 예수님 안에 있는 기쁨을 표현할 때 사용이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기쁨은 2)예수님의 오심과 다시 오심이라는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오신다고 했던 메시아가 오셨을 때, 그리고 그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주님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느끼게 될 기쁨입니다. 이걸 ‘종말론적 기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요, 하나님나라가 임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다스리며 우리를 위로하실 때…. 모든 성도들이 영광 가운데 부활해서, 주님과 함께, 주님의 그 기쁨을 같이 누리게 되는 그 날의 기쁨. 그리고 그 기쁨을 성령의 감동 안에, 오늘 여기서 바라보며 누리는 기쁨. 베드로 사도가 말한 대로, 산 소망 가운데 누리는 기쁨, 그것이 바로 ‘아갈리아오’인 겁니다. 이것은 이 땅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과 당연히 구별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주를 위한 삶을 살았던 이들이 바라보는 기쁨이고, 성도를 향해 약속된 영광스러운 승리를 믿는 이들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의의 심판과 보상을 믿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기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쁨이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같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간절하게 알리려 하셨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단어가 아닌 별도의 단어로, 그 기쁨을 적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주어지는 그런 기쁨들과 함께 섞이기를 원치 않으셨고, 그 기쁨을 우리가 원하고 느끼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간수가 지금 그 기쁨 가운데 있노라 고백합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용례를 생각하면, 이 단어가 여기 쓰인 것이 참 생뚱맞습니다. 실제로 아주 예외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지난주 말씀을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왜 그의 기쁨을 ‘아갈리아오’로 표현해야 했는지를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메시지가 바울과 실라의 삶에 그대로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예수의 오마주였기에, 그 간수가 들은 메시지가 바로 그 주님의 승리와 영광의 메시지였기에, 그는 마치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경험한 것처럼, 그렇게 기뻐했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지하 감옥에서 찬송하며 기도할 때 가지고 있던 그 ‘아갈리아오’가 이젠 그 가정의 ‘아갈리아오’가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기쁨이 주어졌고, 동일하게 삶 속에서 누려지며, 고백되고, 더 나아가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져야 하지만, 우리는 사실 그런 소망, 그런 기쁨에 너무나 무관심하게 삽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주시는 기쁨, 구원의 그 기쁨이 사그라들어도 별 문제로 여기지 않고, 더 중요한 것은, 종말의 때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루실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세상이 누리고 원하는 똑같은 기쁨을 하나님께 요구할 뿐, 이 ‘아갈리아오’의 기쁨을 사모하지도, 소망하지도 않으며 살아갑니다. 카라의 기쁨이 우리가 가진 기쁨의 전부인 것입니다. C. S. 루이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이 당당하게 약속하는 (종말의) 보상, 예수님이 약속하시는 그 엄청난 (천국의) 보상들을 생각하면, 주님은 우리의 (기쁨을 향한) 갈망이 너무 강하기는커녕 너무 약하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이 무한한 기쁨을 주신다고 해도 우리는 술과 섹스와 야망에만 집착하는 냉담한 피조물들이다. 마치 멋진 해변에서 휴일을 보내자고 말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도 이해하지 못해서, 빈민가 한구석에 모여 앉아 진흙 파이나 만들며 놀려는 철없는 아이와 같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만족한다. 우리의 실수는 기쁨을 향한 우리의 갈망이 강한 데 있는 게 아니라 너무나도 약한 거기에 있다.” 여러분, 우리는 동물적인 기쁨에만 만족하도록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존재이기에,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이 누리시는 기쁨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기쁘고 행복할 때가 언제인지가요? 잘 자고, 맛있는 것 먹고, 남녀가 육체적인 관계를 나눌 때도 기쁘지만, 인간만이 가진 기쁨의 근원은, 내가 정말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존중받을 때입니다. 나의 존재에 대한 인정, 그것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기쁨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타인의 인정과 칭찬을 갈망하며 삽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이기적인 존재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존귀한 존재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 욕구, 그 기쁨은 하나님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기뻐하십니다. 예배에서도 수많은 찬송을 부릅니다. 예전에 인화 자매가 하나님은 참 노래를 좋아하신다, 그랬습니다만, 그 노래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기뻐하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칭찬하고 praise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인정할 수 있는 존재가 우리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장 존귀하게 지어진 저와 여러분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찬송을 원하시는 것은, 그가 마땅히 그것을 받으실 만큼 존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존엄이 인정될 때 가장 기쁩니다. 어떤 다른 기쁨들과 비교할 수 없이 기쁩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박수를 받을 때 우리는 진짜 내가 되어 깊은 기쁨과 위로를 느낍니다. 특별히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이가 인정해줄 때 더 기쁩니다. 사랑하는 강아지가 나를 향해 꼬리를 흔들며 인정의 메시지를 보내올 때, 물론 잠시 기분은 좋겠지만, 그것으로 깊은 만족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이지만, 회사의 사장이, 나를 가르치는 교사가, 나를 진정으로 인정해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면, 그것이 온 세상 가운데 선포되고 드러나게 된다면, 여러분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기쁨이 되겠습니까? 그게 바로 ‘아갈리아오’의 본질입니다. 성도의 영광에 주어지는 기쁨, 우리의 모든 수고와 인내에 주시는 그 영광의 감격, 그것이 바로 ‘아갈리아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기쁨을 늘 누리고 계셨고, 또 우리도 그것을 누리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성령이 예수님께 충만히 임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기쁨 가운데 이 땅을 사셨고, 그 인정 속에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아들,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 하나님의 기쁨인 아들로서 늘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그 사랑이 끊어졌을 때 그토록 절망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내 기쁨이 그들 속에 차고 넘치게 해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들이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십시오.”(요한복음 17장) 주님은 주님이 아버지 안에서 누리는 그 기쁨이 우리 안에도 있고, 우리의 기쁨이 그렇게 충만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 사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랑의 고백을 받았고, 여러 차례 사랑의 징표도 받았습니다. 스바냐라는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쁨이 ‘아갈리아오’임을 말씀하신 겁니다. 주님은 그 기쁨 안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기쁨 안에 우리도 함께 거하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기쁨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기쁨 안에 우리도 와서 거하라고 하시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그분은 ‘바로 지금’ 이미 그 기쁨 가운데 계시며 우리로 바로 그 기쁨 안에 거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 기쁨을 누리고 계신 이유는, 하나님은 그 영원한 승리에 거하고 계시며, 거기로부터 우리를 향해 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의 시간만을 보고 있지만, 주님은 부활하셔서, 다시 영원 가운데 계십니다. 영원은 이 땅의 모든 시간에 잇대어 있다고,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 먼 미래에 영원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은 ‘이미 와 있고’, 현재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모든 죄와 사망은 소멸되었고, 성도들은 거기서 약속된 영광을 누리고 있고, 승리의 축제를 즐기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미 그곳에 있음을 주님은 바로 지금, 이곳의 우리와 동시에, 보고 계시고, 누리고 계십니다. 바로 그 종말과 심판의 때 누리게 되는 그 모든 완전한 영광과 기쁨 속으로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현재에 속한 우리가 그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성령 하나님이, 모든 죄와 사망을 이겨내신 그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을 영원과 잇대어 살게 하십니다. 영원의 기쁨을 오늘 이곳으로 끌어오는 힘 소망을 부어주십니다. 성도와 세상이 구별되는 가장 큰 자리는 믿음,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아닐 뿐 세상 사람들도 뭔가를 믿고 살아갑니다. 과학을 믿든, 이성을 믿든, 자기 자신을 믿든, 돈을 믿든, 사람은 믿음에 근거하지 않으면 선택과 결정이 반복되는 삶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세상과 정말 구별되는 것은, 소망입니다. 그가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사느냐, 그에게 진정 소망이 있는가, 거기에서 성도는 구별됩니다. 성도는 완성된 미래의 나라, 하나님나라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소망합니다. 그 나라가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고 있고, 지금 이곳을 향하여 오고 있음을 믿고 바랍니다. 종말, 그러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단어이지만, 믿는 성도에게는, 그보다 아름답고 그리운 말이 없습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마주하게 되는 날, 이 땅의 모든 눈물과 슬픔이 끝나고 주님이 우리를 온 우주 앞에서, 모든 존재 앞에서 인정해 주시고 상 주시는 그 날, 우리의 모든 수고를 위로하시며 칭찬하시는 그 날이 바로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이 없다면 성도는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종말의 소망이 지금의 기쁨이 되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아무 힘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 날이 반드시 온다고 믿고, 그 나라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매순간의 선택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세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반드시 독립이 온다고 믿고 소망하는 사람들이 독립운동가가 되는 겁니다. 독립운동가가 아닌 조선 백성이 모두 그 희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모든 독립운동가는, 그 희망으로 오늘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 속에 꿈틀거리며, 그 희망 속에 역사에 작은 틈을 내고, 희미한 금이 가게 만들었습니다. 그 종말에 대한 소망이 있는 자들만이 역사를 움직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도, 주님의 나라도 그렇게 옵니다. 오늘 우리 역시 그런 삶을 살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의 독립운동가처럼 살기를 바라셔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 일으키신 바로 그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지금 여기서 누리며 소망 가운데 천국을 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그 미래를 오늘 여기로 가져오는 자리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런 서로의 존귀함을 함께 인정해주고 받아들여주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그 인정하심을 미리 맛보는 곳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미리 경험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각자 다 흠이 있고, 부족하지만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에는 이 모양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성된 것으로 믿고, 봐 주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실제 그렇게 변화되어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C.S 루이스가 그랬습니다. 우리가 대하는 더 없이 우둔하고 지루한 사람들, 그들은 모두 언젠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미래의 그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싶어질 존재가 되거나, 악몽에서나 만날 소름끼치고 타락한 존재가 되거나,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옆의 지체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훗날 어떤 모습으로 여러분 앞에 나타나겠습니까? 악몽에서나 보게 될 소름끼치고 타락한 존재이겠습니까? 아니면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싶어질 존재이겠습니까? (*) 그걸 인정해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서로의 모습에 합당한 경외심과 신중함을 갖고, 우리는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평범함이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 옆에 있는 이들은, 그저 죽어 사라질 존재가 아니라, 불멸의 존재들이며, 영원한 광채가 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다윗은 그 영원한 기쁨이 자신 안에서 소멸될 때마다, 그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 기쁨이 언제나 우리에게 충만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낙심하고 또 슬퍼할 일이 생깁니다. 의로운 고난만 있는 게 아니라, 의미 없어 보이는 고난도 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항변하며, 마라나타, 탄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다시 이 기쁨을 향해 싸워야 합니다. ‘아갈리아오’가 없다고 세상의 아무 기쁨이나 덥석 물고 만족해버리면 안 됩니다. 소멸된 기쁨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 하면 안 됩니다. 그 기쁨만으로는 성도가 이 땅에서 성도답게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들로는 십자가를 지는 데까지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들은, 하나님나라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고, 또한 하나님나라를 오게 하는 기쁨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기쁨을 명령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명령합니다. 기쁨의 감정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쁨을 선택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아갈리아오’의 기쁨이 있는지, 섬세히 살피며, 다른 기쁨을 분별하고 절제함으로, 다시 가난한 영혼으로 내려가 주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부디 ‘아갈리아오’의 이 기쁨을 향한 갈망이 우리 안에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 고백교회가 서로에게 그런 천국을 맛보게 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종말의 때가 영광의 때로 소망케 되기를, 그 소망이 우리를 날마다 ‘아갈리아오’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잠깐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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