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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2016년 7월 24일 주일 설교
2016-07-2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60724 오순절 후 열 번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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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장 19~34절,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60724.mp3
(사도행전 강해 116)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지난주에 잠시 언급했던 거라사 광인의 치유 이야기와 오늘 본문의 한 귀신들린 여종의 치유 이야기는, 시작은 서로 비슷했지만, 결국 상반된 결말에 이르고 있습니다.
기억나시겠습니다만, 거라사 광인에게서 나온 수천의 귀신들은 돼지 떼를 몰살시켜서, 결국 예수님을 그 마을 밖으로 쫓아내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예수님에게는 어떤 다른 위해나 폭력이 가해지지는 않습니다. 또 돼지 주인의 엄청난 재산상 손해에 대해서도 아무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여종을 고쳐준 바울과 실라는, 그 대가로 모욕과 심각한 폭력을 마주합니다. 점치는 여종이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게 돼서, 주인들의 돈벌이가 이젠 끝장났기 때문인데요, 16절에 기록된 ‘큰 이익’이 이천 마리 돼지 이상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들은 거라사 사람들과는 달리, 바울과 실라 일행을 순순히 보내 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빌립보를 다스리고 있던 당시 로마의 집정관에게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실컷 화풀이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두 사건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 일들이 일어난 장소와 거기 있는 사람들의 구성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빌립보는 아시는 대로, 로마의 직할 식민지로, 많은 로마 시민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로마의 퇴역 군인들이 주로 그곳에서 노후를 보냈는데요, 자부심 높기로 유명한 로마 시민인 것도 모자라서, 로마 군인들 입장에선, 자신들의 재산과 자존심에 흠집을 낸, 나그네 주제밖에 되지 않는 유대인들 그냥 성 밖으로 내보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본래 로마인들이 유대인을 대단히 거리껴 하고 불편해하며 무시했다는 기록이 역사 문헌에 자주 등장합니다. 아예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는 말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헬레니즘 세계의 주인이던 로마 사회에게, 이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문화와 종교적 편협성은 하나의 미스터리이기도 했지만, 원시적 야만성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바울과 실라를 로마 관리 앞에 끌고 가서 제기하는 고발 내용도, 그런 민족적 문제와 차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그들의 고발장 첫머리에 ‘유대인’이라는 말을 앞세우고, 21절에는, 자신들을 ‘로마 사람’으로 한 데 묶어 규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그러한 고발에 대해 빌립보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호했다고 22절은 말씀합니다. 상황이 교양 있는 로마인과 소동을 일으키는 이방 유대인의 갈등으로 비화된 것이죠. 물론 두 사람 모두 실은 로마 시민이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속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이 어떤 쪽 방향으로 흐르겠습니까? 예수님과 같이 사람들이 우리를 두려워하며 그들 옆에서 얌전히 떠나가 주기만을 바라겠습니까, 아니면, 바울과 실라 경우처럼, 어떤 공동체의 왕따로 만들고, 여러 형태의 폭력과 손해를 가하려고 하겠습니까?
물론 아직은 한국 기독교가 기득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이 당시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사회에서 당한 고난을 경험할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큰 비극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상황은 점점 바뀌고 있지요. 이제는 공동체의 개별적인 성격과 구성원에 따라서는, 충분히 빌립보와 같은 상황들도 가능해지고 있습니다. 한 대학의 교수가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제목의 책을 낼 정도니까요. 만약 우리가 바울과 실라가 경험한 그런 상황 속에 처하게 된다면, 또 그럴 가능성이 있는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하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의 존귀함을 드러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선 기억해야 할 것은, 두 사람이, 빌립보 사람들과의 유일한 연결 고리이자,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보호막인, ‘로마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굳이 숨긴 채, 이 모든 상황을 겪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낯선 타지에서 그들이 비빌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 그 정체성 하나뿐이었지만, 두 사람은 웬일인지, 그 안전장치를 스스로 제거했습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말입니다. 로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 속 그 유대인 정체성으로 그들 앞에 섭니다. 물론 나중에는 로마 시민이라는 것을 밝히고, 당국 관리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오지만 말입니다.
지금은 감춰서 어려움을 다 당한 뒤에, 나중에 그들이 로마 시민임을 밝히게 되었다고 해서, 바울과 실라가 일부러 매를 맞고, 어떤 보상을 기대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입니다. 뒤에 그들이 로마 관리들에게 요구한 건 정당한 인격적 대우였을 뿐, 어떤 보상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복음을 전하거나 그런 기회를 요구하지도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로마 시민권은 복음을 전하는 데 유용한 도구일 수 있었습니다. “아, 나도 로마시민인데, …”라고 말을 걸며 관계를 시작하기에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습니다. 더구나 이런 위기 상황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또 아직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겐 관계적 우위에 설 수 있는 무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전하는 데, 1)관계와 2)세상의 부러움을 살 만한 힘과 능력, 이 두 가지는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빌립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그들에게 부러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제시한 뒤, 맨 마지막에 복음의 결정타를 날려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설득하는 작업을 하려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소 전도하고 선교하는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뭔가 다른 데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하나는, 내가 너에게 이만큼 희생했으니, 이만큼 손해를 감수했으니, 이제 당신이 내 이야기, 내가 전할 복음을 들을 책임이 있다, 하는 희생과 보상심리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내가 도움을 줘서 기회를 얻는 겁니다. 당신에게 이런 도움을 줬으니, 이런 여러 혜택을 베풀었으니, 이번엔 당신이 내 말을 들어주고, 복음을 믿어줄 차례다, 하는 태돕니다. 우리보다 객관적으로 나은 조건에 있는 사람에게는, 손해와 희생을 대가로, 또 반대의 경우에는 자선을 대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런 방법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조금 더 유리한 기회를 더 많이 만들어줄 수도 있습니다. 또 그런 노력 자체는 참 귀하고 대단한 일입니다. 그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성도의 삶과 인격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지 않는다면, 복음의 열매는커녕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수 있음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는 희생은 이미 희생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억울하게’ 지셨기에,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으신 게 아닙니다. 오늘 바울과 실라도 억울한 옥살이를 대가로 복음을 믿으라 하지 않습니다. 그냥 억울하게 갇혔지만,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일 뿐, 오히려 로마 시민임을 밝힌 이후에는 복음을 믿으라는 권면이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수동적인 모습에 그치고 있습니다. 나는 억울해지고, 상대는 굳이 악으로 만들고, 그 대가로 복음을 전하려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함과 겸손함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낮아짐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복음을 전할 때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때 복음은 이미 하나의 강력한 힘이 되고,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그냥’ 먹이셨습니다. 먹이신 대가로, 설교 시간을 버신 게 아닙니다. 도움을 주는 대가로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잘못된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서 종교적 갈등이 폭발하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다닐 때는 둘씩만 다니라 하십니다. 수가 많아지고, 대형화되어, 그 자체로 하나의 힘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비처럼 내리고, 이슬처럼 맺혀서, 세상 속에 조금씩 스며드는 것이지, 위에서 누르고 베풀어서 억지로 감동시키는 게 아닙니다.
사실 구제를 대가로 복음을 전할 때 생기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결국 빵, 돈, 물질이 복음의 결과인 것처럼, 예수 믿으면 물질적으로 더 넉넉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오해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를 전하는데, 십자가의 본질 자체가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오해는 긴 세월 쉽게 고쳐지지 않고 더 견고해집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설교하고 말씀을 가르쳐도, 삶은 점점 십자가와 멀어지기만 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사도들의 삶, 성도의 삶, 그 어디에서도, 그런 방식의 전도와 선교를 발견할 수가 없는 이유입니다.
다시 바울과 실라 이야기로 돌아와 봅시다. 그들이 로마 시민임을 굳이 드러내지 않고 고난과 마주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스스로 유대인 됨을 포기하거나 부정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들은 엄연히 유대인이었고, 그로 인한 손해를 피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서신서를 통해서, 복음이 유대인을 통해서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강조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유대인이셨습니다. 그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 민족적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자부심과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로서,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만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당하는 고난 또한 ‘당연히’ 여겼습니다. 로마 시민이라는 정체성보다도, 유대인이라는 자부심이 그들에게는 더 먼저였던 겁니다.
로마의 반유대주의에 대해 그들은 힘으로 저항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늘 옆에 칼을 차고 다니던 그때의 제자들이 아닌 겁니다. 유대인들에게 주신 사명,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사명이 그런 저항과 정치적인 독립이 아님을 이제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금 싸우는 싸움이 어떤 종류의 싸움이고, 복음을 세상에 전하고 산다는 것이, 어떤 종류의 삶인지를, 이젠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또한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를 믿고 조금 더 복을 받고,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으려고 사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싸움을 하려고 늘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게 아닙니다. 어제 QT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는 그 부르심은, 그리스도가 누리신 그 영원한 영광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삶을 살고, 그리스도가 하신 싸움을 싸우고, 그리스도가 당한 죽음을 당하고, 그리스도가 받으신 부활과 영광을 누리는 부르심인 것입니다.
주중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왜 주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할까, 내가 왜 주님의 음성을 온전히 분별하지 못할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주님이 사신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이 가신 길을 가지 않고, 흉내는 내면서, 그 옆에 난 곁길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신 삶을 살아야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고, 주님 걸으신 길을 똑같이 걸어야 주님이 하신 기도를 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삶을 잠깐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에 맞서서 항변하고, 시시비비를 가리고 싸우며, 설득하셔서 승리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걸 베풀고, 일상의 필요들을 채워주시며 인기를 얻으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정권을 무너뜨리고, 제국을 허물기 위한 삶도 아니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의 그런 기대와 다른 삶이었기에 주님은 결국 십자가에 이르셨습니다. 주님이 정말 하시려는 일, 주님이 싸우는 싸움이 그런 것이 아니어서, 주님은 결국 외면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지금 그 길을 가는 겁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제자들이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훨씬 더 큰 규모의,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고 본질적인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와 직접 맞서셨고, 이 땅을 다스리고 있는 어둠의 영들과 맞서서,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온유함으로 싸우셨습니다. 귀신들려 점을 치고 놀아나는 소녀를 꾸짖는 게 아니라, 그 안의 귀신들을 꾸짖고 내쫓는 싸움에 뛰어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사람들과’ 싸우고, ‘사람들을’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님을 증언하는 나무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그들이 얼마나 법과 절차도 모르는 무뢰배인지를 보여주려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고 복음을 한 번 들어보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닙니다. 인간들을 그렇게밖에 살 수 없게 만드는 존재들, 그들을 철저하게 얽어맨 채, 사망으로 끌고 가고 있는 그 진짜 적을 드러내시고, 내쫓고, 승리하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누구와 싸우고 있고, 이것이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가 분명하기에, 주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까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죄와 사망을 깨뜨리되, 모든 사람을 지키고 살리는 유일한 싸움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과 실라가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셨던 그 길, 주님이 사신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반복하려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싸우신 그 큰 싸움을 실제로 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스승이 가르쳐주신 대로, 그 십자가의 길을 직접 가보려는 것입니다.
빌립보를 다스리던 귀신들을 내쫓고, 어린 소녀를 자유하게 해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 의해 수치와 모욕과 폭력의 자리로 질질 끌려갑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저항하지 않습니다. 권력에 항변하지 않고, 고소에 변명하지 않고, 내가 가진 힘으로 저항하지 않고, 그들은 그저 담담히 깊은 옥으로 내려가 갇힙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 그대로입니다.
24절에 그들이 갇힌 옥을 성경은 ‘깊은 옥’이라 말합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깊음’이라는 말은, 음부나 스올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또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서 “그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어려운 말씀에 사용된 ‘옥’이라는 말도 사용됐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이 묻히신 그 사망의 깊음에 두 사람이 갇힙니다.
비록 죽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곳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진짜 죄인들이 있습니다. 정말 죄로 인해 갇힌 자들이 거기 있습니다. 죄인이 갇혀 있다가 죽는 곳,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죄와 죽음이 다스리는 곳, 주님이 내려가셨던 바로 그곳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던 때, 어떤 일이 땅에서 있었습니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린 것처럼, 두 사람이 깊은 곳으로 내려갔을 때, 그곳의 땅이 흔들리며, 그 문이 열립니다. 빌립보를 다스리고 있던 사탄의 권세가 깨뜨려지고, 그곳을 지배하는 맘몬의 질서가, 그 토대가, 그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두 사람 때문에 말입니다.
성경은 바울과 실라의 매인 것만 풀어진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던 모든 죄수들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다고, 26절에서 말씀합니다. 바울과 실라에게 임한 하나님나라가 똑같이 그들에게도 임했습니다. 이것이 나라와 나라의 싸움, 권세와 권세의 싸움임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구원하시는 데 전념하셨던 것처럼, 바로 옆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는 물론, 로마의 백부장이 십자가 아래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처럼, 오늘 바울과 실라 역시, 그곳에 같이 있던 죄인들에게 찬송과 기도로 복음을 전합은 물론, 자결하려는 그 간수에게까지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구원이 그 가정에도 임합니다. 그 간수는 두 사람이 싸워야 할 대상, 적이 아니라, 지키고 구해내야 할,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임이 그렇게 드러나게 됩니다.
성도가 자신이 가진 권리를 포기하고, 유일한 안전장치를 풀어버리고, 깊은 데까지 내려갈 수 있는 이유, 성도가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이유, 성도가 어떤 자리에서도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지금 내가 싸우고 있는 이 싸움이, 예수께서 싸우신 그 십자가의 싸움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가, 지금 내가 세상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얼마나 존귀히 여김을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 삶이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또 다른 예수의 삶이 맞는지의 문제, 다른 이들에게 그 천국을 보게 하는 존귀한 삶이 맞는지의 문제임을 믿고 있기에, 우리는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성도는 내 차꼬가 벗어지고, 내 감옥 문이 열린 것으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원래부터 우리를 얽맬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위해가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는, 내가 당하는 고난이, 내가 당하는 이 삶의 어려움이, 내 버거운 일상이, 다 주님이 먼저 걸어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싸우신 그 존귀한 싸움을 우리로 하여금 또한 싸우게 하시고, 주님 하신 일을 우리도 하게 하시고, 주님이 받으신 그 영광을 우리도 함께 받게 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바울과 실라를 지키던 로마의 간수가 두 사람에게 말합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스스로 복음에 대해 물어옵니다. 사실 여기 간수가 두 사람을 향해 부르는 ‘선생들이여’ 이 말의 헬라어 단어는, ‘퀴리오스’의 복수형 ‘퀴리오이’입니다. 어느새 두 ‘죄인’의 모습이 ‘퀴리오스’가 된 것입니다.
간수가 했던 질문,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이 물음은, 오늘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뭘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뭘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가겠습니까?, 이런 뜻이 아닙니다. 지금 그런 심오한 종교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닙니다. 그 질문을 쉽게 풀어 한 마디로 말하면 그냥, 당신들의 정체가 뭐냐, 하는 겁니다. 도대체 당신들은 왜 여기서 나가지 않고 가만히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두려워하며, 세상 말로 완전히 쫄아서 이 모양, 이 꼴인데, 당신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어떻게 매를 맞고도 기뻐하며, 어떻게 감옥에서도 자유하며, 어떻게 나갈 수 있는데 나가지 않느냐, 그걸 묻는 질문이,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도는, 사람들로부터 바로 이 질문을 받기 위해 사는 겁니다. “당신네들, 정체가 도대체 뭐요? 당신들이 믿는 게 도대체 뭐란 말이요? 뭐가 그리 대단해서 돈 앞에서도, 명예 앞에서도, 권세 앞에서도, 심지어는 자유를 준다 해도, 당신들은 그처럼 당당하고 평안한 것이요?” 세상이 우리에게 던질 그 질문을 향해 우리는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시시한 걸로 인정받으려 하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로마 시민이어서 놀라지 않습니다. 돈이 많고, 좋은 데 살고, 복 받아서 놀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 주고, 희생한다고 해서 놀라지 않습니다. 그건 어지간한 인격과 인품을 가진 사람이면 다 합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그런 선행을 하고, 그런 복을 자랑하며 삽니다.
우리가 혹 세상의 인정을 받는 때가 온다면, 아마 저 깊음의 자리에서 일 것입니다. 고난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좋은 곳에 오를 수 있는 그 기회마저도 기꺼이 내려놓는 곳에서, 진정한 성도의 존귀함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그 말을 하게 되는 자리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세상이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결코 이 땅의 영혼들이 아님을, 우리의 상관들이나, 우리에게 해를 가하는 폭력자들이 진짜 원수가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그들은 모두 우리의 지체들이 될 것이며, 주님이 차려놓으신 한 상에서 같이 먹고 마실, 우리의 영원한 가족이 될 것임을 우리는 매순간 상기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한 간수는 그들 모두와 함께 만찬을 나눕니다. 그리고 34절 말씀처럼, 그들 모두가 함께 크게 기뻐하며, 구원을 노래합니다. 다윗이 쓴 시편 23편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신다, … 그러나 오늘 바울과 실라는 그 노래를 넘어서서, 더 큰 노래, 더 아름다운 노래로 바꾸어 부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나와 원수가 함께 먹을 그 상을 원수가 차리게 하신다!”고, 그래서 원수 됨 그 자체를 모두 무너뜨리고 계신다, 노래합니다. 지금 부르는 이 노래가 오늘 저와 여러분이 불러야 할 구원의 노래임을 잊지 마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내는 삶이 보잘 것 없고, 우리의 일상이 한없이 연약해 보이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미 마귀에게 진 것입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과 우리가 싸우는 이 싸움이 사소해보이고, 세상이 감당하는 싸움과 똑같이 허무해 보이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미 실족한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바울과 실라는 결코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살아낸 삶, 사도들이 걸어갔던 그 길, 성도라 불린 사람들이 싸웠던 그 싸움, 그것을 위하여 우리도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이 받으신 그 영광을 향해, 그 십자가의 자취를 우리도 따라가고 있음을 성령은 다시 한 번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 곁에 설 때까지, 바울과 실라의 곁에 설 때까지, 주님의 영광에 이를 데까지, 그 십자가의 길을 온전히 순종하며, 세상이 주를 바라보게 하는 삶 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