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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2016년 6월 26일 주일 설교

2016-06-2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2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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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6 오순절 후 여섯 번째 주일 설교 --------------------------------------------- 사도행전 16장 1~10절,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60626.mp3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제자 디모데가 합류한 바울 일행은 본래 계획했던 대로 여러 도시를 두루 다니며 교회와 성도들을 돌보고 섬깁니다. 그 사역의 결과에 대해서 본문 5절이 한 줄로 정리하고 있는데요,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성숙해지고, 외적으로는 성장하는, 아주 건강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제자로 세워져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도 그랬으면 좋겠고, 또 우리 고백교회도 그렇게 더욱 건강하게 자라가게 하실 줄 믿습니다. 사실 이번 전도 여정은 여기 5절에서 마무리가 되었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습니다. 본래 목적이 1차 때 세워진 교회를 돌아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5:36,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처음 목표는 다 이루어졌고, 이젠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는 예고편에 불과하고, 진짜 본방이 이제부터, 본문 6절 이하부터 제대로 시작합니다. 여러분 본문 6절을 다시 보십시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성령이 못하게 하신 것만 보이지만, 여기 기록되지 않은 행간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바울 일행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고 싶어 했다는 겁니다. 할 일을 다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한 게 아니라, 아시아로 가서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이, 하나님의 인도하심보다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시아 입구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들은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습니다.’ 그들이 멍 하니 있다가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게 아니라, 뭔가 계획하고 애쓰고, 노력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합니다. 바울은 이 시점에서 뭔가 다른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냥 돌아가지 않고, 거기서 뭔가 그 다음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가만 나두지 않았고, 그의 마음에 계속 새로운 소망이 꿈틀대도록 흔들었습니다. 주보에 있는 빌립보서 말씀대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을 고민했습니다. 계획했던 일들이 다 마무리가 되었는데도, 거기서 새로운 소망이 다시 그를 움직이게 했습니다. 사랑은 그(녀)가 기뻐하는 것을 염원하고 행하는 것이지요. 그(녀)가 즐거워하고 웃게 하기 위해, 지혜를 짜내고 시간과 열정을 쏟습니다. 일반적인 것, 의무나 책임보다 뭔가 ‘더’ 하게 하는 것, 그게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도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 오늘도 고민하고, 내일도 일하시지요. 서로 사랑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아도 기쁨이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더 큰 기쁨을 향해 뭔가를 궁리하여 움직이게 합니다. 성도에게 이 마음이 있는가, 하는 건 너무나 중요한 문젭니다. 신앙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내 안에 있는가, 하나님의 웃음을 위해 뭔가 꾸미고 계획하는 게 있는가…. 그 자체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열망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오늘도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제자의 믿음과 순종에 대해 묵상했습니다만, 제자라 해서 그냥 짐승의 코뚜레 꿰듯,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새로운 소망이 되고, 그 소망이 다시 우리의 자유와 의지 가운데 역사하여, 주님의 발걸음을 뒤따라가도록, 그렇게 인도해 가십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힘든 여정에서도 제자가 늘 기쁘고 행복할 수 있는 건, 그 사랑과 소망이 우리를 매순간 살아 숨 쉬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자도’는 그냥 뒤따라만 가는 수동적인 삶이 아닙니다.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하라는 말씀이 들릴 때까지 멍 때리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꿈꾸며, 계획하며, 이루는 삶, 그게 제자의 길입니다. 지금도 충분히 괜찮지만, 가만 있어도 별 문제가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더 좋아라 하실 것을 고민하며 사는 삶, 그게 제자의 삶, 저와 여러분의 삶인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 아시아를 향한 바울 일행의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는, 그걸 막으시는 하나님을 본문이 어떻게 표현하고 묘사하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에,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이라 되어 있고, 7절에는,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말씀합니다. 둘 다 막으시는 것이긴 한데, 그 강도는 확연히 구별이 됩니다. 7절은 허락하지 않았다는 일반적인 부정의 표현인데 반해서, 6절에는 우리말 성경에는 없는 동사 ‘콜뤼오’, 번역하면 ‘방해하셨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6절을 직역하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성령이 방해하셔서,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그냥 지나쳐갈 수밖에 없었다.”입니다. 말이 좀 이상합니다만, 하나님이 나서셔서 바울 일행이 에베소 쪽, 아시아로 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으시고 방해하셨습니다. 그래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에서조차 아무 것도 못하고 그냥 지나치기만(passing through)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막으심이 그토록 강력했다는 것은, 아시아를 향한 바울 일행의 소망이 또한 그만큼 컸음을 반증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거절하심과 막으심이 도드라져 보이지만, 실은 아닙니다. 거절하고 막으실 뭔가가 있었다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게 없었다면 방해도, 막으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당신의 계획을 바울 일행에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부정적인 명령 말고, 처음부터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냥 빌립보로 가라,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순종하지 않을 제자들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과 디모데의 의지와 뜻이 결정될 때까지 침묵하시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다 두 사람이 어디로 갈지 결정을 내린 후, 비로소 하나님은, 거기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런 표현이 좀 그렇습니다만, 무슨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똥개는 원래 훈련의 대상이 아닙니다. 저도 똥개를 키워봤습니다만, 훈련은 그냥 재미삼아 몇 번 할 뿐, 별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훈련은 그럴 만한 존재, 그 훈련이 가능하고, 그렇게 될 수 있는 존재를 향해서 쓰이는 단어입니다. 아마추어의 훈련과 프로의 훈련은 의미 자체가 다릅니다. 아마추어는 훈련이 선택이지만, 그 일을 업으로 삼는 프로에게 훈련은 생존입니다. 훨씬 더 존귀한 대상에게, 훨씬 더 자격 있는 자에게 어울리는 말이 훈련입니다. 제자라는 말, ‘disciple’의 어원이 ‘discipline’ 훈련인 걸 아실 겁니다. 오직 주님의 제자가 주님의 훈련을 받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망이 있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 그를 하나님이 훈련시킵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훈련이 가능하다 여겨지는 사람, 그를 연단하는 겁니다. 스스로 제자로서의 인식이 없고, 하나님을 위해 아무런 계획도 꿈도 없는 사람에게는, 훈련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실 신앙의 침체란 다른 게 아니라, 내 안에 그 소망이 없는 겁니다. 기도도 하고, 말씀도 읽지만, 내 안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할 그 소망이 없다면, 신앙은 금방 풀이 죽어 버립니다. 사랑이 식은 커플은 환경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열정 없는 제자는 절대로 고난을 이기지 못합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그저 먹고 살기 위한 것, 그저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면, 그게 무슨 일이든, 금방 지루해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꽃이 삶의 열망으로 옮겨 붙어야만, 인간의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진정으로 ‘새로운’ 일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자신의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내려놓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뭔가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내려놓을 게 있어야 내려놓든 말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결단하고, 드리기 위해 뭔가를 들어 올려야 내려놓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려놓을 뭔가를 찾고 품는 게 우선인 겁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열정을 꺼뜨리는 종교가 아니라 그 불꽃이 더 강렬하게 타오를 수 있도록, 쉼 없이 새로운 에너지와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는 종굡니다. 내 욕망을 채우는 열정을 하나님을 위한 열정으로 새롭게 하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뜨거운 열정으로 삽니다. 나를 위한 욕심이 점점 사그라들면서,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더 뜨거워지고 강력해지기 때문입니다. (장모님 사진, 필리핀 고등학생 83명에게 한국어를 가르칩니다. 아버지는 거기서 더 오지로 들어가실 계획을 다시 세우고 계십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한다”(빌립보서 1:20)는 바울의 고백처럼,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더 또렷이 주님의 원하시는 길만을 쫓아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때론 길을 잘못 들 때도 있습니다. 오늘 바울 일행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괜찮습니다. 주님이 곧바로 개입하셔서 수정해주시고, 더 섬세하게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길을 잘못 들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까지, 어마어마한 주의 제자들이 한 팀을 이루어도 몇 번씩 하나님이 수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시행착오를 당연히 여기고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주님은 실수하는 우리를 별로 개의치 않아 하십니다. 주님은 한 순간도 우리를 홀로 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깐 바울이 나중에 복음을 전하게 되는, 지금은 가지 못하게 막으시는 에베소에 관해 바울이 기록한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훗날 세 번째 전도 여행에서 비로소 에베소에서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요, 2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거기 머물며 수많은 주님의 제자를 길러냅니다. 그런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서 바울이 나중에 감옥에서 쓴 편지가 에베소서인데, 거기서 바울은 바로 그 메시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러분, 5장 10절부터 18절까지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10.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15.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어떻습니까? 처음엔 에베소에 올 수 없었던 바울 자신의 경험이 그대로 묻어나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제 자신이 걸어 온 제자의 길을 똑같이 걸어갈 믿음의 후배들에게, 자신이 이곳 에베소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를 회상하며, 간곡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우선,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을 시험해보라 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길을 잘못 들어설까 염려하지 말고, 자꾸만 그 일들을 시험하라 합니다. 크고 대단한 것에서만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삶의 소소한 결단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들을 생각하고, try해 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나의 소망을 통해 일하시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이 내가 생각하지 못한 열매를 맺는 것을 실제로 경험해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집에 돌아가셔서, 일상 속에서, 꼭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15절 말씀처럼, 나에게 시간이 많은 것처럼, 술에 취하여, 아무 생각 없이 살지 말고, 자세히 주의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때가 악해서, 깨어 있는 것 자체가 힘든 시대니까, ‘조금’ 주의하지 말고, ‘자세히 주의하여’ 세월을 아끼라 말합니다. 세상이 하는 말 다 듣고, 흔들릴 대로 흔들리며 그렇게 살지 않도록, 정신을 바싹 차려서 세월을 아끼라 말씀합니다. 성경은 어떤 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이라 말합니까? 지금의 삶이 바쁘고 부지런해서 세월을 아끼는 게 아니라, 17절 말씀처럼,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거라 말합니다. 깨어 주의하며, 주님의 뜻을 이해하며 살아야 세월을 아끼는 겁니다. 여러분, 아멘이십니까? 무엇보다 성령으로 충만하라 말씀합니다. 조금 채워지는 게 아니라, 가득 채워지라고 합니다. 세월을 아낄 지혜가 내게 없으니, 성령이 나를 채워,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일행의 발걸음을 막으신 것을 성경은 성령이라 명확히 밝힙니다.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 것은 성령(‘휘포 투 하기우 프뉴마토스’)이라고, 무시아 앞에서 비두니아 행을 막으신 것은, 예수의 영(‘토 프뉴마 예수’)라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우연히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방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해져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일이 막히고 방해가 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막히면 더 분명한 길로, 가야 할 온전한 길로 나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막으심은 더 큰 뜻을 향한 인도하심입니다. 정말 큰 문제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해서, 주님의 그 방해를 느끼지 못하는 겁니다. 성령이 방해하시는데, 그걸 모르고 가면 결국 그것 역시 세월만 허비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제자는 결국 방황하다 끝납니다. 여러분, 우리 성령으로 가득 채워져서, 방황하지 말고, 푯대를 향해 곧바로 나아가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주님의 음성에 늘 귀를 기울이려고 해야 합니다. 1년에 한두 번 리트릿 오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기도를 호흡처럼, 말씀을 네이버처럼 가까이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훈련이라 여기고 제자답게, 프로답게, 자신을 연단해야 합니다. 여러분, 남은 2016년은 그렇게 살아가십시다. 아시아에도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바울 일행의 이 소망이 얼마나 놀라운 결실을 맺게 되는지, 이제 우리는 곧 보게 됩니다. 오늘날의 터키 지역까지만 머물던 복음이, 에게해를 넘어 드디어 유럽으로, 지금의 그리스로 확장되기에 이릅니다. 4천 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만, 근동에만 갇혀 있던 복음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단 몇 년 만에 수백 수천 km가 떨어진 다른 대륙에까지 나아가게 되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결실이 당장 이번 여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성령이 인도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 시발점에 있던 작은 소망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아시아에도 복음을 전해야겠다, 에베소에도 꼭 가고 싶다,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내가 해야겠다, 그 마음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됐다는 걸,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고백교회의 다음 스텝을 위해 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교회의 앞길도 오늘 말씀처럼 이루어질 겁니다. 아무 생각 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으로 각자의 삶에서 계속 시험해보고 그렇게 연단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가야 할 길도 밝히 보일 거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열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열망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면, 다시 성령이 그 불길을 일으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새로운 소망으로 움터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을 발견하고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의 기쁨을 위한 삶이 가져오는 뻔한 결말이 아니라,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결말이, 우리가 걸어가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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