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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긴한 것들' 2016년 6월 5일 주일 설교
2016-06-0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60605 오순절 후 세 번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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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 22~29절, 이 요긴한 것들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60605.mp3
(사도행전 강해 109) ‘이 요긴한 것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청년들로만 구성된 저희 교회에서는 하지 않고 있는 사역입니다만, 일반적인 교회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 두 번 정도, 대심방이라는 것을 합니다. 말 그대로 성도 각 가정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는데, 좀 크게(大) 합니다. 전 교인을 대상으로 해서 몇 개월에 걸쳐 진행이 되는데, 하루에 대략 열 가정 이상 방문하는 강행군이 이어집니다. 아마 저희 교회도 조만간 하게 되겠지요.
대심방 기간이 되면, 목사들은 여러 가지로 긴장을 합니다만, 무엇보다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합니다. 가정에 방문해서 먼저 예배를 드리고 나면, 가벼운 다과나 식사를 하면서 그 가정의 기도 제목이나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 가정이 다 나름의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시기 때문에, 목사들은 일단 잘 먹어야 하는 의무가 생깁니다. 아무리 사전에 성도님들께 조금씩만 준비하시길 부탁을 드려도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손님 대접을 중시하는 문화인데다가, 1년에 많아야 한두 번밖에 없는 큰 일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대심방 기간에는 늘 소화제를 가지고 다닙니다. 열 가정 넘게 심방을 하면서, 준비하신 음식들을 먹다 보면, 목사는 어느 순간 ‘먹사’가 되고, 저 같이 위장이 별로 강하지 못한 사람은, 속에 문제가 생기기 일쑤입니다. 그래도 목사들은, 최대한 열심히 먹어서, ‘먹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접해 주시는 음식을 잘 먹는 것만큼, 그 성도와 가정에 위로와 힘이 되는 것도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개인적으로 잘 먹지 못하는 음식이 나왔을 때입니다. 먹는 양이야 어떻게든 조절할 수도 있고 하지만, 아예 잘 못 먹는 음식에 대해서는 어떤 대책이 있을 리 없습니다. 물론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먹지 못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거의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겉으로 말은 안 하셔도, 그런 목사의 모습에 실망하시고, 속상해 하시는 게 결국은 드러나곤 합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따로 말씀을 안 드리고 최선을 다해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콩국수를 못 먹습니다. 콩도 좋아하고, 국수도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콩국수는 못 먹습니다. 유전도 아니고, 뭣도 아닌데, 그런데도 소위 ‘콩국수 맛집’이라는 데를 가도 거의 입에도 대지 못합니다. 입에 넣는 순간, 몸에서 이상 반응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심방을 간 가정에서 콩국수가 나온 겁니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 집사님 혼자 사시는 집이었는데, 지금도 그 집의 구조까지 생각날 만큼 당시의 상황이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예배를 먼저 드려야 하는데, 식탁 위에 올려놓고 신문지로 덮어놓으신 콩국수 때문에, 벌써부터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렸습니다. 저걸 어떻게 먹나, 큰일이다, 생각을 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드디어 식탁에서 담임목사님과 저, 또 심방을 함께 간 성도님들과 함께 국수를 먹게 됐습니다. ‘아,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먹을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기도를 간절하게 하고, 국수를 한 입 베어 물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사실 나이가 좀 젊은 성도님 가정이었다면,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 사정을 말씀드렸을 겁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 속으로 실망은 조금 하셔도, 충분히 이해를 해 주십니다. 하지만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은 얘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사실 그분들께 심방이란, 목사가 성도의 가정을 이해하고 살피면서, 그 가정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에서 듣고 위로를 얻는 그런 시간이 아니라, 내 목사님이 오셔서 내가 차린 밥을 맛있게 먹고 힘을 얻는 것,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당신 역시도 흐뭇하게 힘을 얻는 그런 시간입니다.
주시는 하나님 말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건 하루면 기억에서 다 사라집니다. 대심방에서 유일하게 남는 건, 우리 목사님이 이번에 얼마나 맛있게 식사를 하셨는가, 그 것 하나뿐입니다. 목사가 밥을 두 그릇 먹었다면, 은혜도 두 배요, 목사가 벨트까지 풀고, 배터지게 먹었다면, 그분의 심령 또한, 배터지게 은혜를 받습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이기 이전에, 어머니의 마음이기에 그렇고, 교회에서 무언가 더 이상 섬기고 봉사할 힘이 없어진 연약한 성도, 아무도 먼저 찾아와 밥을 얻어먹고 가는 이가 없는 외로운 성도의 마음인 거지요.
콩국수 한 입을 입에 베어 문 순간, 기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먹은 것처럼, (지금도 그때 생각만으로도 속이 조금 울렁거리는데요) 제 위장은 콩국수를 강하게 거부했습니다. 일단 거의 씹지 않고 그냥 삼켜 아래로 밀어 내렸습니다. 속에서는 벌써 전쟁이 시작되었고, 한 젓가락 더 먹었을 땐, 이러다간 정말 무슨 일이 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집사님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울렁이는 속을 물 한 컵으로 제압하고, 옆에 있는 소금을 왕창 뿌려서, 정신없이, 아무 생각하지 않고, 입에 넣기 시작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에스더의 마음, 정말 그랬습니다.
제 인생 최초로, 콩국수 한 그릇을 다 먹게 되었을 때, 저는 정말이지 처음으로 순교라는 단어를 생각했습니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됐고, 이미 목까지 다시 차오르는 국수를 힘을 다해 밀어 넣느라 숨도 제대로 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일단 그 성도님께는 너무나 잘 먹었다고, 제 인생에서 먹어 본 콩국수 중에 최고였다고, 말씀을 드리고, 저는 조용히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사실 목사들은 심방을 가서 화장실에 거의 들어가지 않습니다. 혹시 모를 성도들의 불편을 생각해서, 미리 다른 곳에서 필요한 일을 다 보고 심방을 하거나, 참고 나와 다른 곳에서 일을 보는 게, 목사들 사이의 불문율입니다. 그러나 그땐 그런 게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때 화장실에 들어간 저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지, 여러분 상상에 맡깁니다.
훗날 제가 그 교회를 사임할 때까지, 저는 그 집사님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누구를 만나든, 당신이 심방 때 대접하신 그 콩국수가, 고 목사님 인생 최고의 콩국수였다고 자랑을 하셨고, 그때 그 대심방이,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심방이었다고, 그 심방 이후로 하나님이 복 주신 거라고, 늘 말씀하고 다니셨습니다. 물론 그때 들으신 하나님 말씀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셨지요. 오직 당신의 맛있는 콩국수를 먹고 힘을 얻었다는 젊은 부목사의 기특한 모습만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계셨습니다. 그 교회를 떠날 때까지 집사님은 늘 저를 볼 때마다, 집에 오셔서 콩국수 한 그릇 더 드시고 가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그러지 못하고 온 것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목사의 잘 먹는 모습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가장 중요한 통로라 여기는 집사님께, “집사님, 그건 연약한 신앙입니다. 잘 먹은 콩국수를 기억하시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목사가 국수 잘 먹는 게 중한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집사님이 드시는 게 정말 중한 것입니다. 지금의 그런 신앙은 기복신앙이고, 건강한 신앙이 아니니까, 이젠 그렇게 하시지 말고,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목사가 있다면, 아마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차라리 한 번이라도 더 찾아가서, 한 끼라도 더 같이 식사를 나누는 게 그분의 신앙에는 더 유익한 일일 겁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연약한 지체의 믿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내가 거기에 맞춰서 기다려주는 그 일을 일컬어 ‘요긴한 일’이라 말씀합니다.
할례 없이 오직 믿음만으로 이방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결론과 함께 예루살렘 회의는 더 이상 어떤 짐도 이방인들에게 지우지 않을 것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다소 모순이 되는 내용이 추가로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전달되었음을 본문은 말씀합니다. 네 가지의 내용을 말하면서, 그것들을 이방인 스스로 삼갈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29절에 기록된 대로,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그리고 음행 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3대 죄악은, 우상 숭배, 간음, 살인, 이 세 가지입니다. 유대인 랍비들은, 유대인이 만약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가운데 처했다면, 이 세 가지를 제외한 다른 율법의 규정들은 파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우상, 간음, 살인, 이 세 가지는 어떤 경우에도, 생명의 위협이 있는 경우라 해도 해서는 안 되는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요긴한 네 가지 내용은 이 셋 중에 우상과 간음, 이 두 부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네 가지 요긴한 것 중, 음행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먹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음행이란 주로 레위기 17장에 나오는 근친 간의 성적 행위에 대한 금지를 어기는 것을 주로 말하는데요, 기본적으로 유대인들보다야 그리스 문화권의 헬라인들의 성적 문화가, 동성애나 근친혼에 대해 훨씬 개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고린도전서에서 문제로 대두된 것처럼, 자신의 계모나 과부가 된 아버지의 부인, 그게 결국 어머니인 건데요, 그렇게 아버지와 결별한 어머니를 자식이 아내로 삼는 일이 초대교회에서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고, 특별히 그런 일을 율법으로 강하게 금지하여 살아온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이런 문제는 오늘날 우리 정서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정도이니 말입니다.
나머지 세 가지는 모두 음식과 관련된 것인데요, 먼저 우상의 제물이라는 건 따로 설명 드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우상의 신전에 바쳐지고, 거기서 제사에 사용된 고기나 음식을 먹는 행위는 삼가라는 말입니다. 저도 어릴 적 외가에서 드리던 제사에 참석도 하고 또 제사 음식을 맛있게 먹기도 했습니다만, 아마 여러분들 대부분도 그런 음식에 대한 거부감은 별로 없을 겁니다. 하지만 단순한 제사 음식과, 다른 우상 신에게 직접 제사를 통해 바쳐진 음식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실제로 제가 전도사 시절 네팔에 잠시 갔을 때, 힌두의 한 신에게 수백 마리의 닭을 잡아 바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 때 그렇게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먹는 건, 저에게도 큰 거부감이 생기는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제사가 일반화 된 이방 땅에서 살아가던 유대인들의 입장 역시, 우상의 제물은 아마도 큰 거리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한 식탁에서 먹을 때, 그런 음식은 피해달라는 것입니다.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삼가야 한다는 것은, 사실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피를 먹지 말라는 것, 그리고 피를 제거하지 않은 채, 목매어 죽은 동물을 그대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오늘날도 그대로 우리가 적용해서 육식을 하고 있는데요, 가축을 도축할 때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하게 되는 것이 바로 고기의 피를 제거하는 ‘방혈’이라는 작업입니다. 이것은 본래 모세의 율법보다도 더 오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창세기 9장에 이 말씀이 나오는데요, 대홍수 직후에 노아와 그의 후손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었으니까, 사실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창세기 9장에는, 에덴에서는 없던 육식에 대한 언급이 나오면서,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사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라 하시고, 모든 걸 다 먹되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말씀의 구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노아에게도 하나님은 똑같이,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후에, 모든 동물을 먹되 그 생명 되는 피째로 먹지는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마치 제2의 창조와 위임에 관한 말씀 같습니다. 그리고 훗날 이 말씀은 모세의 율법을 통해 더 구체화되고 강조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문화적 차이로 가볍게 넘기기 쉽지 않은 문제인 이유입니다.
이처럼 음식에 관해 유대인들이 예민한 것은, 그들 입장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수천 년 이어져 온 신앙과 문화의 복합체가 그들의 몸과 마음과, 그들의 DNA 속에까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정한 대로 가려 먹는 그 일이야말로, 그들의 정체성 그 자체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디모데전서 4:4)는 바울의 권면은, 아직 삶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방인과 한 식탁에서 먹는 것도 여전히 힘들어하는 유대인 성도들이 많은 상황에서, 우상의 제물과 피에 대한 주의는, ‘요긴한 것,’ ‘꼭 필요하고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 예루살렘 회의의 최종 결론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어려운 마음을 그 정도만이라도 헤아리고 살펴서,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하기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내용인 것이지요.
사실 오늘 28~29절은 명령형이 아닙니다. 개역개정 성경 29절은 ‘멀리할지니라’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고, 다른 우리말 번역이나, 다수의 영어 성경들도 대체로 그렇습니다만, 실제 헬라어 문법은, 28절의 “옳은 줄 알았다.”는 평서문이 29절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다음과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짐 지우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다.). 헬라어는 명령형이 아주 발달되어 있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평서문으로 표현한 것은, 사도들이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의 입장 역시도 충분히 존중하고 그 자유를 인정했음을 보여줍니다. 어쨌거나 먹고 안 먹고의 문제는 그들의 양심의 문제일 뿐, 선택의 자유가 없는 율법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한 편으로, 그러한 자유,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그 자유를 스스로 삼가는 일이, 요긴한 것(에파낙테스)이라 합니다. ‘에파낙테스’는, 필수적(necessary)이며, 본질적인(essential)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먹을 것을 제한하고 절제하며 타인의 신앙을 배려하는 것이 공동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신앙에 있어서도 ‘본질적인’ 부분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렇게 삼가지 못했을 때, 아직 연약한 다른 성도들의 신앙에 큰 걸림돌이 되어 그로 인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교회의 연합을 망가뜨릴 수도 있게 되기 때문이고, 본인의 신앙 역시도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기이한 모습으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더 오래 믿고, 더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율법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시고, 성령을 주시는 차별 없는 사랑의 새 법을 선포하심으로, 상황은 완전히 역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에서 자유할 수 없었고, 늘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 양심의 거리낌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율법에 대한 지식이 본래 없던 이방인들은, 믿음 하나만으로 상대적으로 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거리낌 없이 먹고, 거리낌 없이 즐겨오던 생활에, 예수님이 주신 자유와 새 계명은 너무나 편하고 좋았습니다. 다 먹을 수 있고, 다 누릴 수 있으며, 더 이상 복잡한 희생의 제사 없이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복음은, 정말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 복음. 그러니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먹고 마시며 누리고 살다가, 죽어서도 천국에 가는 것을 복음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생활에 거리낌이 없는 자유인이며, 성경이 말하는 신앙적인 강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에는 두 가지의 큰 오해와 문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진짜 자유는, 율법에 기록된 내용들을 모두 무시할 자유가 아니라, 율법에 기록된 것 그 이상을 지향하는 자유라는 사실입니다. 아시는 대로 율법은,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너무나 제멋대로이고, 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지킬 수 있는 한에서의 최소한을 정한 것이 율법입니다. 그것만이라도 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그 존귀하고 거룩한 모습을 지켜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그 최소한의 율법이 무시되는 게 아닙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지요. 또 주님은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을 가장 잘 지킨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율법으로부터 자유하지만, 율법을 파기하는 삶이 아니라, 그것을 모두 이루고, 그 이상의 거룩함도 살아낼 수 있도록 하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구원이며, 은혜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해집니까? 율법에 대하여 자유한데, 율법을 지키고도 남는 힘이 어디서 옵니까?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우리를 당신의 성전으로 삼고 계시면서, 우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거룩한 존재인지를 선언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매순간 동행하시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갈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지,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행할 힘을 허락하십니다. 아멘이십니까?
성령은 우리를 법과 형벌의 관계 안에 묶어두시고, 강요하거나 협박하시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고, 이미 그 법이 정하는 모든 형벌을 예수님이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사랑의 자유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사랑하기에 기쁨으로 동행하고 순종하는 가장 존귀한 모습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이제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율법 외의 것을 마음껏 누리는 자유가 아니라, 율법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모든 율법을 넉넉히 지켜 행하는 진정한 자유가 된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은 육체의 소욕으로부터 점점 더 자유해져갑니다. 예전엔 정말 즐겁고 좋았던 것들이 별 게 아니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은,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삶이 아님을 배워갑니다. 세상이 하는 염려가 아닌 다른 염려로 살고, 세상이 비는 기도가 아닌 다른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거룩한 정체성이 조금씩 회복되어 갑니다.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사귐을 통해서 말입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 먹고 마시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요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요즘 여러분 스스로 배워가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이 하시는 건강한 다이어트나, 인화 자매가 나눈 그 훌륭한 고백들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배워가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육체의 소욕을 다 누리고 사는 일이 결코 하나님나라가 아니며, 성령의 열매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로마서 14:17)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마지막 열매가 절제입니다. 스스로 삼가며 절제하는 그 일은, 우리에게 ‘에파낙테스,’ 곧 긴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인 것입니다.
자유하니 다 누리는 그것이 신앙이 아니라, 법 이상의 노블리스(noblesse)를 살아내는 것이 신앙임을 잊지 마십시다. 내가 누리는 자유가, 율법이 말하는 그 거룩함 이상의 인격과 삶으로 이어지도록, 성령 하나님과 깊은 사귐 가운데 살며, 그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가 하시는 메시지에 기쁨으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자유는 언제나 내 지체들의 양심을 배려하는 자유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자유와 사랑은 복음의 큰 두 기둥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어서 우리에게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자유까지 주셨고, 우리는 그 자유가 있기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결국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사랑으로 바꾸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때론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자유 가운데 계시지만, 죄인으로 추락해버린 인간을 향해, 그 자유를 사랑으로 바꾸십니다. 제 멋대로 망가진 인간을 향해, “이제 넌 나와 상관없어. 너 아니어도 나는 완전해. 네가 뭘 하든 관심 없어. 너의 죽음과 불행, 난 신경 쓰지 않아. I don't care.”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무슨 동물이나 노예처럼 만들어 순종하게 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당신의 자유를 먼저 제한하심으로 구원을 시작하셨습니다. 인간으로 낮아지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너는 나와 상관있다고, 너의 연약함을 내가 감당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존해주시면서도, 우리의 의지로, 우리의 자유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기다리시며 인내하시는 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말씀드렸던 대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그 모습, 사랑으로 자유를 제한하는 그 모습을 닮도록 인도해 가십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나에게 있고, 믿음이 연약하고 진리를 제대로 모르는 이들의 신앙에 주의하며 살 필요도 없는 나만의 권리가 있지만, 지체의 그런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믿음이 상처입지 않도록, 오히려 나 스스로의 자유를 절제하며 그를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도록 우리 각 사람을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디에는 강하지만, 또 어디에는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신만이 가진 삶의 역린(逆鱗), 신앙의 역린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보, 예배 순서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갈라디아서 말씀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다같이 합독하고 기억하고, 삶으로 외우십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노릇’은 사랑으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지체를 상전이라고, 나는 종이라고 여기고, 사랑으로 섬기고 돌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자유가 나아갈 방향입니다. 지체가 부족하든 넘치든, 자유한 신앙이든, 율법적인 신앙이든, 그가 상전이고 내가 종이라면,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너는 왜 그것도 자유롭게 먹지 못하느냐고 비난할 수도 없고, 반대로 너는 왜 절제하지 못하느냐고 비판할 수도 없을 겁니다. 그가 정말 상전이요, 내가 정말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사람이라 믿는다면 말입니다.
교회는 내 자유를 헐어 지체의 자유를 세워주는 곳입니다. 지체의 연약함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도록, 그 짐을 나눠지는 저와 여러분이기를 소망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우리 공동체 나름대로의 ‘요긴한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십니다. 내 지체가 실족하지 않고, 믿음의 자유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의 신앙이 율법 이상을 살아내는 온전함에 이르도록, 하나님은 그 요긴한 일이 무엇인지, 우리 각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권면하십니다. 부디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그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함으로, 우리 모두가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갈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