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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2)' 2016년 5월 22일 주일 설교
2016-05-2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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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60522 삼위일체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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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 6~21절,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2)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60522.mp3
(사도행전 강해 107)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2)’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에 보면, 이런 권면이 나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 한 번 같이 외워보실까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아멘) 성령이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이 말씀 안에는, 두 가지 중요한 표면적인 메시지와 두 가지의 이면적인 메시지가 각각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도의 사귐과 연합의 주체가 되신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켜가는 데는, 우리 지체들 각자의 노력과 수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이 두 가지는 겉으로 드러나는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또 이 말씀 속에 포함된 내적 메시지는 이런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 됨을 지켜내지 못할, 충분한 어려움과 상황의 문제들이 교회 안에 늘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하나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연합하고 하나가 되는 데 얼마나 취약한 공동체인지는 아마 한국 교회와 성도들만큼 뼈저리게 경험하는 예도 없을 겁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의 교단으로 분열되어 있는 곳이 한국이고, 그나마 교회의 일치를 향한 전 세계의 노력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도 한국 교회이며, 매주마다 갈라지니, 나뉘어지니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곳 역시도 바로 이 땅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다 이상한 교회 이야기라 여기는 마음이 실은 가장 위험한 함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태어날 때부터 교회는 그 위험에 처해 있었고, 오늘 우리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표면화되지 않았을 뿐, 이미 우리 안에 그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첨예한 대립에 필요한 사회, 경제적 차이가 우리 안에 나타나기 시작하면, 언젠가 우리 교회도 심각한 분열의 상황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초대교회의 갈등과 논의의 모습을 우리는 주목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주 살펴본 것처럼, 이방인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이 문제는 당시로서는 정말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비단 신앙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로마 식민지 시대를 살던 유대인들이었기에, 민족적 구별과 신앙적 정체성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고, 당연히 그런 민족 감정을 앞세우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고 영향력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도들이 기본적으로 유대인의 민족적 특수성을 지지하는 소위 히브리파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할례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 머리로는 어떻게 이해가 될지 몰라도, 실제 히브리인들의 삶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좋다는 사도들마저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명확한 입장을 보이기가 힘들었던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 사도가 갈라디아 지역에서 겪은 일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오늘 이 예루살렘 회의가 있기 바로 직전에, 갈라디아 지역,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한 비시디아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 이런 곳이 포함된 지역이 갈라디아지요. 그곳에서 베드로가 바울에게 크게 책망을 듣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요.
사건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갈라디아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출신의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그곳에 도착하자 베드로가 돌연 이방인과 같이 먹던 식탁에서 일어나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의 식탁으로 가서 거기 앉아 식사를 했습니다.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러기 전에는 그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할 수 없다고 하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의 비판을 두려워했고 또 그들의 아직 여린 신앙과 양심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성경엔 이 때 자리를 옮긴 사람 중에는 심지어 바나바도 함께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바울은 그런 베드로와 바나바의 모습이 명백한 외식, 신앙적 위선이라 규정했습니다. 복음의 의미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일뿐만 아니라, 교회의 리더인 그들의 그런 행동은 결국 훗날 교회를, 히브리 교회와 이방인 교회, 둘로 분열하게 만들 중요한 씨앗이 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를 면전에서 심하게 나무랐고, 베드로는 아마도, 그 책망을 아무 대꾸 없이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심각한 사건이 있고 얼마 안 가서, 오늘 본문의 사도 회의가 예루살렘에서 열린 것이었습니다. 자칫 분열도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때였습니다.
길고 고통스러운 토론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교회는, 모든 사람이 합의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뜻 앞에 모든 사람이 함께 기꺼이 순종하는, 최종적이고 공식적인 결론에 함께 이르게 됩니다. 본문 26절에는 이러한 결론이 ‘만장일치로’ 내려진 결정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어떤 그룹이나 개인의 소외도 없이,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놀라운 결론이었습니다. 향후 300여 년간 더 이상의 이런 회의는 열리지 않게 되는데요, 오늘의 이 결정이 얼마나 온전한 것이었는지, 충분히 가늠케 만듭니다.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만, 오늘은 그 논의 과정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세 부분을 좀 더 살펴보고, 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 그 의미와 방법에 대해 함께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회의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발언은 베드로에게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발언을 이어 받은 바울과 바나바의 말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고넬료의 가정에서 경험한 것, 즉 성령이 임하시고 역사하신 그 일에 대한 경험을 고백했고,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디아 지역에서 경험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고백하면서, 이미 그 사건들을 통해 명확해진 하나님의 뜻에 대해 분명하게 증언했습니다.
이처럼 성도 각 사람의 신앙적 경험은 성령 하나님의 중요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민하기 전에 미리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실 때가 많습니다.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 우리가 마치 고아처럼 홀로 고민하며 결정하도록 만드시지 않습니다. 고민하기 전에, 삶을 통해 성령이 하시는 일을 경험하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앞서서 일하십니다.
우리 각 사람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가득히 채워져서,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을 풍성히 경험하고, 예민하게 분별해서, 그것을 서로에게 충분히 나누는 것은, 그 자체로 교회가 건강하게 자라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런 성령의 경험과 간증이 부족한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 계속 차갑고 건조해집니다. 특히나 어려운 갈등의 시기에는 기댈 언덕이 없어 쉽게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 대신 사람의 생각과 경험만 난무하면서 배가 산으로 갑니다. 교회에게 필요한 경험은, 사회적 지위나 역할이 주는 그런 경험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제와 만남의 경험, 그리고 거기서 얻은 소중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발견과 같은, 거룩한 경험이라는 것을 교회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이 교회에서도 리더가 되는 일이 많은 교회는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합니다. 많이 배우고 지위가 높고 재물이 많은 사람의 입김이 강한 교회가 아니라, 오늘 예루살렘 교회처럼, 성령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영향력이 강한 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모두가, 각 지체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건들, 삶에서 만나는 성령의 일하심들에 대해, 가능하면 많이 나누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경험한 하나님의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각 사람에게 주신 그 경험이나, 하나님의 은사, 선물로 주시는 능력에 대해서도 무시하지 말고, 깊이 존중해야 합니다. 고넬료와 있었던 베드로의 경험, 갈라디아에서 있었던 바울의 경험처럼, 성령의 역사하심을 맛보는 놀라운 경험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늘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본문에서 두 번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부분은, 13절 이하에 기록된 야고보의 발언입니다. 베드로, 바울, 바나바의 발언이 끝나자 야고보가 발언을 이어가는데요, 이 야고보가 지금 실제적인 이 회의의 의장입니다. 예수님의 친동생이기도 하고, 신약성경의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람이기도 한 이 야고보는, 베드로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동안, 예루살렘 교회의 실질적인 리더의 역할을 이어받게 됩니다.
어쨌든 야고보가 일어나서 하는 말이 14절 이하인데요, 잠시 보시면, 먼저 14절에서 야고보는 베드로를 일컬어 ‘시므온’이라는 말로 부릅니다. 베드로를 베드로, 게바, 이런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베드로의 예전 이름 시몬의 구약식 표현인, 시므온이라 부르는 것은, 이 야고보가 구약의 전통과 율법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라는 성경책 역시도 바로 그런 구약적 율법이 강조된 책이지요. 믿음은 반드시 실제적인 행위를 수반해야만 살아 있는 믿음이라는 메시지는, 마태복음과 함께 가장 구약적인 성경책으로 분류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는 이방인이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위 히브리파 성도들의 실질적인 좌장이자, 그들의 대변자였던 것입니다.
구약에 능통한 사람답게, 야고보는 15절 이하에서 구약의 한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말을 대신하는데요, 놀랍게도 그 내용은 히브리파의 입장과 정반대인 말씀입니다. 16절부터 18절인데요, 구약의 예언서 아모스서 9장 11~12절의 말씀으로, 그 내용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될 날이 곧 올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인용한 후 야고보는 회의의 의장으로서 하나의 결론을 제시합니다. 할례를 받게 하는 괴로움을 이방인들에게 주지 말자고, 아울러 유대인들에게 명백하게 혐오스러운 습속이나 행동은 억제하도록 해서 이방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 사이의 위화감을 최소화하자고 제안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은, 야고보가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금의 상황을 분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베드로가 경험한 그 일들이 그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확증했다는 것, 그것이 정말 중요한 점입니다.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적인 진리의 빛으로 조명함으로써, 그것을 교회와 성도 공통의 경험으로 승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야고보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나 공동체가 결정해야 할 일,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분별해 내는 것을 가리켜, 성경은 예언이라 하고, 그런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받았을 때,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평소에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억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누군가의 경험을 깊이 공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이 예언의 은사가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무릇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성령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당연히 사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영적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험은 언제나 과장되고 왜곡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한 성령의 증언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신비한 경험이 덜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경험을 바르게 해석하고, 모두를 위한 경험으로 고양시킬 진리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공동체가 하나가 되려면 이 부분에서 성도들이 함께 자라고 성숙해져가야 합니다. 목사에게만 말씀을 의존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한국 교회가 산 증인입니다.
저는 우리 공동체 모두가 이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하고, 더 나아가,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며 기도했으면 합니다. 물론 세상적인 언어로 공감하고 서로를 위로해도 좋겠지만, 주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증언으로 서로를 섬긴다면,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그를 통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주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를 가득히 채우셔서, 나와 지체와 공동체를 바르게 세워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한 가지만 더 강조하고 마치겠습니다. 개인의 경험과 말씀의 진리와 더불어, 본문이 제시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연합의 키워드는,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것은 앞의 두 가지처럼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까지 해 왔던 이야기들을 잘 정리해보면, 성도들의 인격 안에 맺혀지는 성령의 열매 자체가 성령의 증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는 지금 갈라디아에서 있었던 그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지가 못합니다.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바울의 책망을 듣고, 이제 막 예루살렘에 와서 이 회의에 참석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책망을 당한 베드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논쟁에서, 바울의 입장과 경험에 일치하는 편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 발언합니다. 잠잠하게 가만히만 있어도 될 상황이지만, 괜히 자신의 실수를 다시 떠올리게 할 필요가 없지만, 베드로는 진리 앞에 겸손하고 사람 앞에 온유합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나의 체면이나 사람들의 이목, 인정받는 것, 그런 것들에 대한 지향 자체가 없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할 곳이 교회임을 믿는 믿음과 그 일을 위한 충성의 열매가 그의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것은 야고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이 평소 선호하던 방향, 그런 신념에 묶이지 않고, 오히려 반대편의 입장에 서서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 또한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야고보를 따르고 야고보의 입장과 같다고 느낀 추종자들에게는 엄청난 실망과 배신감을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 역시 그런 정치적인 문제보다 하나님의 뜻에 우선순위를 두었고, 그래서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고,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공적으로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의 발언이 그런 배경에서 나왔기에, 사람들은 두 리더의 말을 더 신뢰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역사하는 것이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의지임을 본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성령이 우리의 인격과 생각 가운데 하시는 일들, 곧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인격과 성품과 삶 속에 맺혀지는 열매들을 통해서, 성령은 스스로를 증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증언을 통해 공동체는 더욱 긴밀하게 하나가 됩니다.
우리의 타고난 성품이나 인격이 변하는 게 너무나 어렵다는 것,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이 늘 당신의 열매를 맺기 위해 기도하시며, 권면하시며, 우리를 인도해 가고 계시다는 것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실입니다. 열매 없는 껍데기 신앙이 모인 공동체는 결국 다툼과 분열로 끝날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가장 중요한 전제는, 무엇보다 그 성령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믿는 것입니다. 나의 형편없는 모습과 매순간의 넘어짐 속에서도, ‘너는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이야’ 외치는 사탄의 음성 가운데서도, 우리는 성령이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내 인격과 의지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택하시고 임하셔서 구원받았던 것처럼, 열매 또한 그러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데도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운 문제 앞에서, 어떻게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분명한 결론에 만장일치로 도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주 안에 하나임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우리가 함께 외운 에베소서의 말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이미 우리를 하나님이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셨다는 선언을 믿으시냐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힘을 합쳐 하나가 되자, 이게 아니라, 이미 주님이 우리를 하나로 연결하셨다는 그것, 이미 우리의 하나 됨이 성령에 의한 완료형임을 믿는가, 하는 것이 모든 연합의 시작점입니다.
부부는 하나님이 한 몸이라 하셨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힘들지만 그 하나 됨을 지켜갈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가장 잘한 것은, 철저하게 그 성령을 믿고 신뢰한 것입니다. 사람의 증언이 아닌, 성령의 증언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라는 성령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끝까지 버티며 대화를 이어간 것입니다. 이 사람들과 내가 하나라는 사실을 먼저 믿고, 하나의 결론을 향해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있었기에, 초대교회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지켜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라는 것은, 우리의 증언이 아니라 성령의 증언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이 이미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억지로 하나가 되려는 노력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부분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세상의 친목 공동체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인지, 지금 우리의 사유와 상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고, 또 보이지도 않지만, 그러나 그 말씀을 믿고 그 믿음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할 부분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신앙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위해, 믿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서로를 바라보며 과연 우리가 하나 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 계산하고 판단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믿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임을 믿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고백교회가, 세상의 좋은 친목 공동체에 머물지 않게 하십시다. 긴 변론과 다툼과 싸움이 있다 하여도, 기어이 주님이 말씀하신 한 몸이 되는 교회로 자라갈 수 있음을 믿고 소망을 가집시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그것을, 그냥 내버려두지 말고, 힘써 지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그러기 위해 성령이 하시는 세 가지의 증언이 늘 풍성하기를 사모합시다.
저와 여러분이 내리는 삶의 결정들,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고민하며 내리는 결정 하나 하나가, 인간의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성령의 증언 그 자체가 될 수 있도록,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서로를 위해 그렇게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