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돌아가서, 오래 있으니라' 2016년 5월 8일 주일 설교

2016-05-0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3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60508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 --------------------------------------------- 사도행전 14장 8~28절,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60508.mp3 (사도행전 강해 105) ‘돌아가서, 오래 있으니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지난 월요일 아침, 아내와 식사를 하며 뉴스를 보다가, 중국에서 사역하시는 한 선교사님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1993년, 북한과 인접한 중국 지린성 장백 조선족 자치현 록강위에 위치한 장백교회를 세우고, 오랫동안 탈북자를 도우며 북한 선교를 해 온 한충렬 목사님이십니다. 중국 현지 관계자들에 따르면, 북한에서 넘어온 공작원 3명에게 피살된 것으로 보이며, 이 일이 최근 북한 해외종업원의 집단 탈북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정부는 현재 북중 접경지대 여행 자제를 권고하고, 재외국민 신변안전 유의를 당부한 상태입니다. 사실 저에게도 이 장백교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교회입니다. 기억은 좀 흐릿한, 벌써 20년이 된 이야기이지만, 처음 이 교회가 세워지고 얼마 안 돼서, 저도 이 교회를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외 단기 선교라는 걸 가게 되었는데, 그 방문지가 바로 장백교회가 있는, 중국의 동북3성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복음을 전한다는 마음보다는, 처음 해외에 나가본다는 것, 그리고 북한 땅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다는 것, 또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보는 스케줄도 있다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현지에 도착하고 나니,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중국에 교회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뉩니다. 중국 정부의 승인을 받고 그 통제 하에 운영되고 있는 삼자교회라는 형태와, 정부 몰래 가정이나 소규모 모임을 통해 유지되고 있는 지하교회 형태입니다. 이번 장백교회 같은 경우는 삼자교회인데, 故한충렬 목사님처럼, 그렇게 외부로는 공식적인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여러 독립적 지하교회들을 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갔을 때에도 현지 선교사님의 인솔 아래, 장백교회를 비롯한 여러 삼자교회와 지하교회의 성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 만남 자체가, 마치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진행이 되었습니다. 청년들의 들뜬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모두가 진지하고 심각해졌습니다. 팀의 막내였던 저 역시도,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선택한 목사라는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자연스럽게 고민하게도 됐습니다. 현재 돌아가신 한충렬 목사님 외에도, 목사님을 돕던 장 모 집사님 한 분도 북한으로 납치되어 들어간 상태라고 합니다만,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본문 속 바울 사도의 삶과 같이, 이 땅 어디에선가는, 그렇게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리는 이들이 있고, 여전히 복음을 위해, 신앙을 위해, 그리고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죽음의 위협까지 감내해야 하는 많은 분들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죽다 살아났다는 말 그대로, 돌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바울이 고작 하룻밤을 루스드라 성에서 보내고, 곧바로 바나바와 함께 거기서 100km가 더 떨어진 더베로 향합니다. 여정이 급했다기보다는 바울을 해하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기세등등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피해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전도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이기도 했던 더베로 간 두 사도는, 거기서도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본문은 그 부분을 아주 짧게 단 한 절 안에 요약하고 있는데요, 본문 21절입니다. 그런데 21절에는 더베 그 다음 행선지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바로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되돌아가서, 22절, 그곳의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권면하고 위로했다는 내용입니다. 더베에서 사역을 모두 마치고, 두 사도는 이제 자신들을 파송해 준 안디옥 교회로 되돌아가는 여정을 잡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여정은, 지도에서처럼, 왔던 길 그대로 다시 역순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안디옥이라는 지명에는 주의가 좀 필요하지요. 처음 출발지였던 안디옥, 그리고 중간 전도지로, 두 사도가 쫓겨나면서 발에 티끌을 털어야했던 비시디아 안디옥, 둘을 구별해야 합니다. 어쨌든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이제 출발지였던 안디옥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주 보았던 이 지도를 다시 한 번 봐주시기 바랍니다. 지도 상중앙에 더베가 보이실 텐데요, starting point라고 된 안디옥이 더베 우측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더베에서 동쪽으로 계속 직진하여 이동하는 것이,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최단 귀환 경로인 것입니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짧고 안전하고 경제적인 길입니다. 당시 파선의 큰 위험을 안고 있던 배를 탈 필요도 없고, 바울과 바나바의 적대자들이 여전히 우글거리고 있는 도시들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바울은 특히나,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서쪽 루트가 아닌, 직행하여 갈 수 있는 동쪽 루트를 선택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왜이겠습니까? 바로 더베와 안디옥 정확히 중간에 위치한, 그의 고향 다소 때문입니다. 지칠 대로 지친 바울의 입장에서는 정말 다소에 잠시라도 머물러,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위로받고 싶고, 잠시라도 쉬고 싶고, 질병과 돌로 맞은 몸을 추스르고도 싶고, 부모가 해주는 따뜻한 집 밥도 그리웠을 것입니다. 교회 역사상 최초의 선교 사역에 임한 바울이었기에, 자신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근심하며 염려하는 가족들이 눈에 밟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픈 마음도 간절했을 겁니다. 오는 길에는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 섬을 통과해서 왔으니, 가는 길에는 바울의 고향에 복음을 전하는 게 상식에 맞기도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 길은 충분히 합리적이고,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루트였습니다. 동쪽 길을 택한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자신을 죽이기 위해 도사리고 있는 이리떼가 있고, 위험한 바닷길과, 높디높은 험준한 타우로스 산맥이 기다리고 있는, 서쪽 길을 향하여, 자신의 발을 내딛습니다. 루스드라, 이고니온, 그리고 안디옥, 여기 세 곳 중 한 곳에서는 추방당했고, 다른 두 곳에서는 도망자 신세였는데 말입니다. 어리석고 무모하고 어쩌면 바보 같은 선택이었습니다. 그가 왜 그 길을 선택해야 했는지는 본문에 너무나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22절을 보십시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절,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제자들 때문이었고, 또한 그들을 섬길 사람들을 세우고 권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안디옥으로 되돌아간 바울과 바나바는, 28절 말씀처럼, 가족이 아닌, 그의 제자들과 오래 있게 됩니다. ‘오래’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는 훈련을 하시면서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런데 어린 양이 이리를 피하지 않고, 그 이리떼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오늘 바울이 보여줍니다. 그것은, 그가 돌보고 위로하며 권면해야 할 주님의 자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믿음의 싹을 틔운 여린 성도들, 두려움에 처한 제자들이 그곳에 위태롭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스스로 말한 ‘많은 환난’을 감내하면서도 서쪽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단 하나의 이유, 그것은 거기 주의 자녀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린 양들 가운데는, 자신이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이야기한 디모데도 있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복음을 전한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믿음의 아들로 삼고, 순교하는 그 날까지 서로 돌보며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주중에 함께 하고 있는 QT 본문이 바로 디모데전서였지요. 바울이 디모에게 쓴 편지입니다. 보셨겠지만, 바울은 아예 디모데를 ‘내 아들아’라고 부릅니다. 이 디모데가 바로 루스드라 지역에 살고 있던 청년으로, 바울의 전도 여행을 통해 처음 복음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된 두 개의 편지를 남겼는데, 그것이 디모데전후서입니다. 디모데후서에는, 이 지역에서 바울이 경험한 고난에 대해 디모데가 모두 알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돌에 맞고 고난당하던 현장에 디모데도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3:10~12, 10.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그 편지를 성령의 감동으로 쓰게 하셔서, 오늘날 우리가 읽는 하나님의 메시지, 거룩한 말씀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디모데 또한 바울이 만나고 지켜야 할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디모데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만나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 여기 ‘많은’이라는 헬라어 형용사 ‘폴론’은 단지 수적으로 많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그 종류의 다양성이 내포된 많은 수의 양을 의미합니다. 다양한 고난을 겪게 된다는 것이지요. 또 ‘환난’으로 번역된 명사 ‘틸립시스’는 ‘직접적인 고난과 고통, 스트레스와 ‘피로까지 포함합니다. 그것이 분명 고난이요, 피로요, 스트레스임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게 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그래야만 할 사명과 목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나에게 맡겨진 그 일을 위해, 사람은 주변 사람의 만류도 뿌리치고, 고난이 예정된 그 길을 향합니다. 반대로 사명이 없는 사람은 오직 안전과 속도에만 의미를 두고 살아갑니다. 조금 더 편한 곳, 조금 더 쉬운 길, 조금 더 빠르게 갈 수 있는 길만을 택합니다. 그에게는 그 모든 조건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 보여주는 사명, 그리고 앞서 중국의 선교사님이 보여주는 사명, 그것은 고난에 처한 내 지체를 돌보고 섬기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어떤 누군가만의 사명일 수는 결코 없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바울은 디모데를, 디모데는 또 다른 누군가를 낳고 섬겼고, 그렇게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을 향해, 주님은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해 태어난 연약한 누군가를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영적 아비와 어미가 되는 사명으로 부르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형편없는 모습으로 서 있을 때조차, 그들에게 그 사명 말씀하시기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비록 연약해도, 엉망진창이어도, 너희는 반드시 일어설 것이다. 아니 일어서야 한다. 너희가 돌보고 섬겨야 할 지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지체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하기 위해 너희는 고난도 겪어야 하며, 원치 않는 곳에 가야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한 영혼이 온 우주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그 영혼을 위해 하나님이 스스로 죄인이 되어 저주를 당해 죽어야 했다. 그 영혼을 부디 그렇게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에, 그 영혼을 돌보고 섬기는 일은, 이 땅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성도들에게, “그러한 어려움들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믿음을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7~18) 누군가의 영혼을 위해 당하는 고난과 스트레스, 피로, 그것이 훗날 얼마나 큰 영광일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영광 가운데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실 이 영광은 우리가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 날만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수고를 통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보다 온전하고 보다 아름다운 삶으로 한 발 더 올라서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 일이 무엇을 통해 이루어집니까? 말씀과 기도도 필요하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사명이 필요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누군가를 돌보고 섬기는 실제적인 사명이 없이, 우리의 신앙은 결코 건강하게 자라지 못합니다. 우리는 부모가 되어야 부모다워집니다. 엄마다워지고, 아빠스러워졌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되는 게 아니라, 먼저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인격과 성품에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새겨집니다. (어버이날, 여민이 아빠) 준비가 충분히 되어 부모가 되기로 결단한 부모가 없고, 준비가 안 된 채 부모가 되서, 부모를 포기하는 이도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로서 먼저 서야 비로소 부모다워지고, 누군가를 섬기고 돌보는 수고와 사명이 우리의 신앙을 온전하게 합니다. 내가 엄마라고 치고, 살아야 엄마가 됩니다. 아비임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야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 작은 태도의 차이가 모든 것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엄마가 되어 성장할 것인가, 아니면 성장해서 엄마가 될 것인가, 그 작은 차이가, 그 한 영혼의 일생과 영원한 삶의 영광을 결정합니다. 지금 저희 교회는 새가족이 꽤 오랜 시간 전도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가장 최근의 새가족이 여기 한나 자매인데, 그 등록일이 작년 5월 24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약 1년 간 저희 교회는 새 생명이 태어나지 못한 상태인 겁니다. 물론 목사인 저의 부족함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직 우리가 서로 돌보고 섬겨야 할 어린 모습이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가, 영적으로 부모로, 형제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전도한 새가족을 섬기든, 아니면 우리 서로를 섬기든, 저와 여러분은 영적인 돌봄의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 서로를 섬기는 고통과 스트레스가 나의 거룩한 책무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고, 지체를 이루고 살면서도, 끊임없이 내 이기적인 계산에 매몰되기가 참으로 쉽습니다. 시간과 물질과 감정과 에너지, 모두에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그 계산은 우리 자신을 망치는 계산이며, 영원한 영광을 포기하는 자멸의 길이 될 뿐입니다. 계산을 내려놓고 섬기는 자리에 있을 때, 반드시 하나님이 그를 높여 존귀케 하실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던 가인에게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이 대답합니다. “모르겠는데요,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잡니까?” “Am I my brother's keeper?” 하나님이 이에 대해 뭐라 하셨는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지만, 아마 주님 마음은 그러셨을 겁니다. “그래 이놈아. 네가 아우를 지키는 자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네 아우를 지키는 자란 말이냐?” 가인이 꼭 버리지 말았어야 할 마음은, ‘나는 내 아우 아벨을 지키는 자이며, 그의 보호자요 keeper’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가 만약 그 마음이었다면, 성경의 역사는 많이 다르게 기록되어졌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도 그와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지키는 자이며, 여러분은 저를 지키는 자입니다. 여러분 바로 옆에 있는 그 지체가 여러분이 지켜야 할 여러분의 아우요, 형제이며, 그의 돌봄과 도움이 필요한 것 역시 또한 우리들 자신입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인과 똑같은 항변을 매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가 목사를 지키는 자입니까? 저는 모릅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뭘 하는지, 무슨 고통을 겪고 있는지. 제가 무슨 그의 bodyguard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이런 마음은 아닙니까? 하지만 여러분, 예수가 우리를 위해 친히 지키는 자가 되어 주셨고, 우리 대신 죽었고, 우리 대신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제 다시 서로를 지키는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 그 존귀함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잡니까?” 하는 그 마음이 “주님, 바로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다.”라고 바뀔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믿음의 새 길을 갈 수 있으며, 날마다 조금씩 성장할 수 있고, 훗날 진정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집으로 향하는 동편 길과 고난 가운데 처한 나의 지체와 성도들이 있는 곳을 향하는 서편 길, 늘 마주하는 그 기로에 서서, 부디 오늘 바울과 같이,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선택하고 걸어갈 수 있는, 그래서 주님 예비하신 비교할 수 없는 그 영광에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