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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리라." 2014년 2월 6일 새벽기도회 설교
2014-02-0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8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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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40206 목요일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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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장 1~7절, 이사야 강해35 (물질을 우상 삼는 이유#2. 다스리라.)
이사야서 서른다섯 번째 말씀으로, ‘다스리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해서 본문 3장 1절을 함께 묵상하며 물질을 우상 삼는 우리 신앙의 문제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엊그제 한 방송국 9시 뉴스에서는 기윤실에서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가 방송이 되었습니다. 가장 신뢰하는 종교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에, 응답자의 29.2%가 가톨릭을 꼽았고 불교는 28%였습니다. 개신교는 이 두 종교와 거의 10%의 차이가 나는 3등으로, 21.3%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몇 년 간 계속되어 온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뉴스를 보는 내내 부끄럽고 또 민망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결과가 더 있었습니다. 이제 개신교 하나에 국한하여 다시 질문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개신교 교회를 신뢰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44.6%로 신뢰한다는 19.4%보다 두 배 이상 많았습니다.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또 사람 앞에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
그 뉴스에 거의 연이어 또 한 기사가 방송이 되었습니다. 연예계를 대표하는 기부천사로 알려진 가수 션이 1억 원을 기부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앞선 여론조사처럼 늘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참 귀하고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1km를 뛰고 만 원을 모으는 형식으로 그렇게 1년 동안 모두 만km를 달려 한 어린이 장애우 재활병원 건립을 위해 1억 원을 기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문가들도 힘들다는 철인 3종 경기를 비롯하여 모두 스무 개가 넘는 대회에 참가하여 모은 금액입니다. 병원 건축 예산이 예상보다 좀 더 올라 그 액수를 다 채울 때까지 더 뛸 예정이라고 합니다. 아내가 그러더군요. 개신교인 가운데 유일하게 악플이 달리지 않는 연예인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앞에 나왔던 개신교 신뢰도에 관한 기사와 너무나 대비되며 우리 모두를 다시 한 번 부끄럽게 하고 되돌아보게 하는 그런 기사였습니다.
물질에 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함께 묵상하고 있어서인지 말씀드린 이 방송 기사들은 평소보다 더 무겁게 들려져 옵니다. 기부를 삶의 한 부분으로 체화하여 살아가는 가수 션의 모습을 우리는 단편적으로 보아 알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물질을 다스리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의 수중에 있는 돈은 말 그대로 그의 소유처럼 느껴집니다. 그가 돈을 지배하고 다스립니다. 돈의 힘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주인이 말의 고삐를 잡고 자신의 의지대로 인도하듯, 그렇게 돈을 다스리며 통치합니다. 통치는 언제나 주객관계, 주종관계를 전제하는 개념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다스리면 그 무언가가 나를 섬깁니다. 반대로 내가 그것을 섬기면 나는 다스림을 받습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이지요. 내가 물질을 따르고 그 힘에 순종하면 물질이 주인이며 나는 종이 됩니다. 내가 돈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지요.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돈인 그런 교회 같지도 않은 교회가 요즘 세상에는 참 많이 있지요. 교회 예산이 교회의 실체라는 인식이 팽배하고, "우리 교회는 돈 많은 장로가 없어."라는 소리가 목사들 사이에서 오고갑니다. 교단의 총대와 임원선거에서 돈이 오가는 것은 상식이 되었고, 교회의 직분을 받기 위해서도 물질은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물질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물질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립니다. 아니, 원래부터 하나님은 물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마음 자체가 이미 물질이 그를 다스리고 있다는 반증이 됩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 만물을 다스리고(창1:28), 섬기는 것은 오직 나만을 섬기라고 명령하셨습니다(눅4:8). 사실 이 두 가지는 같은 이야기요, 단지 동전의 양면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요,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 곧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스리라 명하신 것들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만물을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물질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이는 더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아닌 것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기에 반드시 물질을 향한 염려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염려는 통치의 증거입니다. 물질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물질에 대해 염려함으로 그것의 통치를 받습니다. 이것은 가진 물질이 얼마나 많은가, 적은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많은 돈을 소유해도 철저하게 그 물질을 다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록 적은 소유라도 그 적은 소유에 온전히 멍에가 매인 사람도 많습니다. 부자는 더 많은 돈을 향한 갈망에,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는 부족함에 대한 염려에 지배받습니다.
자유하다는 것은 지배받지 않음을 뜻합니다. 역으로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자유하지 못하고 구속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삶을 윤택하게 하고 조금 더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다시 말해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돈을 필요로 하지만, 그 돈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함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있던 자유마저 잃어버리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더구나 돈은 하나님의 여러 경쟁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가장 강력한, 어쩌면 유일한 하나님의 경쟁자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모순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가 있지요.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다른 어떤 우상보다 더 강력한 것이 바로 이 물질이며,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신보다도 더 위대한 신이 바로 돈임을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물질에 대해, 돈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고 스스로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돈을 다스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대응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적극적이고 본질적인 대응입니다. 오늘은 전자에 대해 서 말씀을 나누고 보다 적극적인 대응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묵상하고자 합니다. 소극적인 대응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상대적으로 그럴 뿐이지 결코 덜 중요하거나 쉬운 노력은 아닙니다. 바로 ‘자족’입니다. 아굴의 잠언으로 유명한, 잠언 30장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7~8절입니다. “7.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아멘. 8절 후반부,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채워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라고 옮겨서 더 현실적으로 들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 자족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시대마다 나라마다 다 다르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이 정도 기도를 하며 삽니다. 특별히 부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먹고 살 정도의 경제적 능력을 기도하지요. 하지만 실제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기준들은 천차만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을 서민이라고 생각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중산층은 말 그대로 그 사회의 중간 정도의 삶의 수준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한 언론사가 밝힌 바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중위소득의 50~150%)을 반영하면 중산층은 월 소득 250만~450만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월 250만원을 버는 가장과 그 가족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될까요? 아마 그 가족 역시 조금 더 윤택하고 넉넉한 삶을 위해 늘 염려하고 또 기도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자족이라는 말에는 늘 주의가 필요합니다. 앞서 굳이 소극적인 대응이라고 제가 말씀드린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주변 환경이나 상대적인 평가에 의해 자족의 기준이 언제나 달라질 수 있음을 우리는 늘 인식하면서, 우리 자신의 기준에 대해 항상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아굴과 같이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그러한 자족의 마음을 지킬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디모데를 향해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강조했던 사도 바울 역시 물질의 문제로 인해 스스로 큰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렇게도 말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경건이, 종교가 본인에게 유익하게 된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거꾸로 하면, 자족의 마음이 없다면, 경건이나 종교가 그 사람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주신 바를 감사함으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신앙은 더 큰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는 자족의 기준을 하나님 앞에, 또 말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세상이 말하는 기준이나 세상이 좋아라 하는 기준을 하나님 앞에 요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강조하신 자족의 기준이 무엇인지 기억하십시오.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 그리고 들풀이 그 기준이었습니다. 자족보다 더 중한 것이 자족의 기준을 바로 하는 것이며, 그 기준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지키며 자족함으로, 물질을 다스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물질 사이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한, 보다 적극적이며 보다 본질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