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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 2015년 12월 27일 주일 설교

2015-12-27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2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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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7 성탄절 후 첫 번째 주일 --------------------------------------------- 사도행전 13장 13~14절, [부활의 현실 살기 #88]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1227.mp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요즘 피아니스트 조성진 씨의 인기가 대단합니다만, 클래식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아주 익숙한 이름 가운데, Gerald Moore(1899~1987)라는 영국인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클래식 라디오 방송을 듣다 보면,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듣게 될 정도로 자주 언급되는 연주자입니다. 아마 모든 연주자 이름 가운데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주 이 피아니스트의 이름이 회자되는 이유는 그가 당대 최고의 유명한 연주자여서가 아닙니다.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를 코앞에 둔 1899년에 태어나 1987년 3월 13일 88세로 생애를 닫을 때까지, 그는 오로지 누군가의 조연으로만, 그러니까, 누군가의 반주자로서의 삶만을 살았습니다. 피아니스트 가운데 그런 예가 더 없을 정도로, 반주만으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라는 명성을 얻은 사람은 그가 유일하지 싶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음악인들은 그를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제럴드 무어 역시 청년 시절에는 독주자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다 영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며 지휘자였던 랜든 로널드 경의 진지한 권유를 받아들여 반주자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1925년 테너 존 고스의 독창회를 시작으로, 1967년 은퇴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오로지 반주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가 처음 반주자로서 데뷔할 때만 해도 반주자의 지위는 너무나 하찮았다고 합니다. 반주자의 이름이 브로셔에 인쇄되는 일도 없었고, 그저 ‘with pianist'라고 인쇄되는 정도였습니다. 1930년 대 초 그가 한 러시아 성악가의 반주자로 활동할 때, 한 레코드 회사가 제럴드 무어의 이름을 그 성악가의 이름과 함께 인쇄해 넣었는데, 그 성악가가 이를 매우 불쾌히 여겼습니다. 하지만 제럴드 무어와 깊은 예술적 교감을 나눈 후 나중엔 오히려 그런 무례를 사과하고, 그때부터 비로소 앨범들 안에 반주자의 이름이 기록되기 시작됩니다. 그 흔한 독주 앨범 하나 없이 늘 누군가를 위한 음악을 했던 무어가 유일하게 주연으로 연주 무대에 섰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마지막 은퇴 연주였습니다. 1967년에 열린 이 고별 연주회에는,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Dietrich Fischer-Dieskau) 같은, 이름만 들어도 클래식 애호가를 설레게 하는, 수많은 스타들이 앞 다투어 그와 함께 무대에 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평생 반주를 해준 제럴드 무어를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들의 목소리로, 무어의 반주를 위한 ‘반주’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연주 프로그램의 마지막 피날레 순서는, 제럴드 무어의 독주였습니다. 짧은 고별사 후에 그는 무대 위의 피아노에 앉았습니다. 프로그램 진행자의 소개가 이어질 동안 사람들은 상상의 나래를 폈습니다. “과연 저 대가가 누구의 곡으로 피날레를 장식할까. 베토벤 소나타일까, 아니면 바흐일까. 슈베르트의 가곡 전부를 반주한 연주자로서 슈베르트의 피아노곡일까?” 하지만 이런 기대와 예상을 뒤엎고 무어는 슈베르트의 피아노곡이 아닌, 가곡 중 가장 짧은 소품인 ‘음악에 부쳐’(An die Musik)를 연주했습니다. 연주 시간 1분 30여 초, 체르니 30번을 조금 친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연주할 수 있는 정도의 그런 곡입니다. 다들 귀를 의심할 정도로 충격적인 선곡이었습니다. 평생을 조연으로 살았지만, 그날만큼은 좀 더 스스로를 돋보이게 할 노래를 연주해도 될 텐데, 제럴드 무어는 그렇게 평생 하던 대로, 소박하면서도 가장 쉬운 곡을 조용하게 연주하고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모두가 솔리스트가 되려하는 연주자들 틈에서, 더군다나 반주자가 익명으로 처리되던 그 시기의 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던 그가, ‘솔리스트’라는 직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끝내 반주자로서의 긍지를 지키며 일생을 걸어간 그가 남긴 자서전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그가 평생 스스로에게 자문했던 한 마디, ‘am I too loud?’, ‘내 소리가 너무 큰가?’, ‘내가 너무 세게 쳤나?’입니다. 모든 사람 안에 가득한 돋보이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고 또 억누르며, 다른 누군가를 세우는 삶을 산 연주자의 인생이 묻어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am I too loud?’ 우리는 오늘 읽은 짧은 두 절 속에서, 사도행전 속 사역에 있어서의 독주자가 바뀌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리더이자, 안디옥 교회의 최고 리더로서, 그리고 초대교회 선교 사역의 실질적인 개척자로서, 지금까지 가장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한 사람의 이름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새로운 이름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바로 바나바와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의 이름이 열거될 때, 그 이름의 순서는 리더십의 순서와 일치합니다. 그런데 오늘 13절은, 구브로 바보에서 밤빌리아의 버가로 가는 여정에 있는 선교팀을 소개하며,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고 적습니다. 13장 2절을 다시 보시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여정이 시작될 때의 리더는 분명히 바나바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구브로에서의 사역을 통해 변화의 계기를 맞습니다. 13장 9절에 보면, 지난 주 설교 때 묵상한 대로, 처음으로 바울이라는 이름이 사울이라는 이름과 병기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사역을 위해 구브로를 떠나는 시점에서는 바울이 사역의 전면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이름은 아예 없어졌습니다. 이젠 무슨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바나바는 그저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 속에 묻혀 있을 따름입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전면적인 변화입니다. 실제로 바나바의 이름은 앞으로 철저하게 바울에 종속되어 성경에 등장합니다. 바나바 홀로 사역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언제나 바울 옆의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이름의 순서도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바나바와 바울’보다 ‘바울과 바나바’가 훨씬 더 익숙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하나님은 이제 시작되는 사역의 리더로 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이제 바울이라는 독주자의 반주자로서, 그 옆에 조용히 세워두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바나바의 마음이 어땠을까, 상상하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신앙의 연수로도 한참 아래인 사람, 나의 멤버였던 이의 멤버가 된다는 것,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만약 저라면 어땠을까, 아마 적당한 이유를 대고 사역에서 발을 뺐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 교회에서 선배들을 통해 여러 악기를 이것저것 배운 저는 실력은 일천하지만, 고등학교 시절까지 찬양할 때 늘 리더 역할을 했습니다. 워낙 작은 교회였고, 대신할 다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저와 같은 나이의 새가족이 한 명 들어왔고, 금방 친해져서, 방학 때면 같이 아예 교회에서 먹고 자고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습니다. 기타를 제가 가르쳐줬는데, 이 친구는 하나를 알려 주면 정말 열을 아는 겁니다. 제가 가르친 기간은 고작 한 달, 한 달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제가 배워야 하는 수준이 된 겁니다. 저는 5년을 걸렸는데 말입니다. 기타만이 아니라, 베이스, 일렉, 드럼 등 손만 댔다 하면 가르쳐 준 사람들을 가뿐히 넘어서는 겁니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교회의 찬양 관련 사역이 모두 그 친구를 통해 주도되기 시작했습니다. 제 안에 교회의 찬양 사역은 물론 음악 자체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사라지게 된 시점이 정확히 그때 즈음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다면 모를까, ‘고준석과 아이들’이면 몰라도 누군가의 아이들 중 하나로는 도저히 있고 싶지가 않았던 겁니다. 처음엔 ‘바나바와 그 일행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역 중간에 리더십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멤버였던 바울, 바나바의 도움으로 태어나고 자란 바울, 바나바가 없었다면 지금 이곳까지 결코 올 수 없었던 바울에 의해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말이 좋아서 청출어람이지, 이창호 9단의 스승 조훈현 기사의 말, “이창호 9단만큼은 반드시 이기고 싶었다.”는 말처럼, 그렇게 뒤로 물러가는 것이 결코 기쁜 일일 수만은 없었을 겁니다. 본문 13절 후반부에 보면, 버가에 이르러, 마가 요한이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나옵니다. 바나바의 사촌인 마가가 왜 중간에 사역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그가 그 선교 일행의 리더십이, 바나바에서 바울로 옮겨간 것에 대해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촌의 마음이 그러했다면, 바나바야 더 말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는 여전히 주님의 일을 위해 그 자리에 있습니다. 바울의 곁에서, 그의 조연으로 끝까지 자리를 지킵니다. 그가 사역의 전면에 리더로 있을 때나 조력자로 섰을 때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이름 없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후의 바나바 모습을 보면, 꼭 ‘Am I too loud?’라 말하던 제럴드 무어 같습니다. 조용히 뒤로 물러나와 자신의 소리가 커지지 않을까,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진 않을까, 마음 쓰는 반주자 같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을 끝까지 읽어보다 보면 참 신기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바나바가 중요한 말도 하고, 설교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에 대한 직접 인용은 단 한 구절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바나바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 구절은 있지만, 바나바의 육성이 인용된 구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바나바이지만, 자신의 사촌의 이름으로 된 성경책은 있어도 바나바가 쓴 기록은 아예 없습니다. 바울은 수많은 성경을 기록했는데도 말입니다. 신기함을 넘어 기이하기까지 합니다. 결코 우연은 아닐 겁니다. 철저하게 성령의 반주자로, 또 누군가의 반주자로 살고자 한 그의 분명한 삶의 목표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도가 이렇게 조용히 물러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뒤에서 조용히 그를 세워주는 일이, 절대로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라질 때도 ‘나 사라진다’ 꼭 드러내며 사라집니다. 희생할 때 조용히 희생하는 게 아니라, 꼭 희생하는 티를 내고, ‘나 여기 있다’고 큰 소리를 냅니다. 무슨 일의 리더로서 세워졌을 땐 너무나 책임감 있게 일을 잘하지만, 누군가의 멤버로 들어가 조용히 옆에서 그 리더를 세워줘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땐, 세워진 새 리더는 물론 그 공동체와 팀 전체를 망가뜨리는 경우를 우리는 정말 자주 보게 됩니다. 수많은 교회와 공동체의 리더십이 온전히 세워지지 않고, 분열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데는, 오늘 바나바와 같은 멤버가 없기 때문입니다. 10여 년 넘게 사역을 하면서, 리더십의 자리에서 물러나 멤버십을 통해 리더와 공동체를 온전히 섬기고 세운, 그런 성숙한 바나바는 몇 번 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그런 형제를 한 명 알고 있습니다. 리더일 때도 훌륭했지만, 자신보다 어린 리더십의 멤버로서 세워졌을 때, 훨씬 더 빛을 발하던 형제, 훗날 그 공동체의 멤버들 전원이 리더로 세워지는 걸 봤습니다. 한 사람의 온전한 섬김이 그토록 위대한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리더가 되려고 하면 나만 리더로 남지만, 내가 온전한 멤버가 되려고 하면, 모두를 리더로 세웁니다. 그것이 바나바가 전해주는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성령의 능력이며, 참된 신앙의 열매입니다. 오늘 본문에 비록 바나바의 이름은 없지만, 우리는 이 여백에서 다름 아닌 바나바의 위대함을, 그리고 그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님의 위로와 능력을 보게 됩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에서 우리는 바나바가 보입니다. 그는 사울이 바울 될 수 있게도 했고, 오늘 실족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마가 요한 역시도 포기하지 않고, 끝내 주님의 성숙한 일꾼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돕는 모습으로 거기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오늘도 그런 바나바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겁니다. 가까이엔 가족들, 특히 어머니들이 그런 바나바들입니다. 당신들의 이름은 사라지고, 누구 엄마로 남기를 기뻐하며, 조용히 조연의 자리로 물러난 어머니들이 계시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또 앞으로도 우리의 삶에 그런 바나바들이 있다면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되겠습니까? 좋은 멤버를 가진 리더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런 멤버로서 온전히 서십시다. 나의 이름이 사라지고, 내 존재감이 약해지고, 나의 영광이 흐려지는 그 자리에서도 변함없이, 그와 동행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어 주십시다. 억울하고 치사해서 못 해 먹겠다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지 말고, 내 이름 남기기 위해 싸우지 말고, 잠잠히 사울을 바울 되게 하는 데까지 낮은 마음이 되십시다. 조금이라도 높아지려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이 여러분의 신앙과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사라지고, 섬기며 낮아지는 그 일이 여러분에게 기쁨이요, 자랑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의 칭찬과 인정이 없어도, 주님의 위로와 칭찬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넉넉해지기를 축복합니다. 그런 여러분을 기뻐하시는 성령의 만족이 여러분에게 항상 넘치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내 지체를 섬기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습니까? 그건 다 자기 기만일 뿐입니다. 지금 바나바는 바울을 섬기기 이전에,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채워져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나바와 바울 모두 성령의 조연이자 반주자일 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이, 우리로 다른 사람도 섬기고 사랑할 수 있게 만듭니다. 내가 나서지 않고, 주님이 나서실 때 우리의 삶도 빛이 납니다. 내가 성령의 조연이 되어야 선한 영향력이 흘러가지, 성령보다 내가 앞서면 결국은 죄의 열매만 맺습니다. 부디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더욱 충만해져서, 하나님의 뒤로 물러나고, 사람의 뒤에서 좋은 바나바로 서 계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이름을 드러내는 싸움을 싸우고, 성도는 자신의 이름을 숨길 싸움을 싸웁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은 이름에 집착하며 살기 쉽습니다. 하지만 잘 살면 죽어서도 이름이 남지만, 이름을 남기기 위해, 명예를 목적으로 두고 살면, 제대로 잘 살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이 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남겨야 할 그 이름은, 사람의 기억이 아닌, 하나님의 기억에 새기는 삶이어야만 합니다. 은영이, 인화에게서 들은 말인데, 요즘은 안개꽃이 다른 꽃들보다 더 비싸다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주님 나라에선, 안개꽃이 가장 존귀하고, 가장 비싼 꽃일 겁니다. 우리 고백교회가 목사부터 아이들까지, 안개꽃 천지이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장미는,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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