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구브로에 가서' 2015년 12월 6일 주일 설교

2015-12-0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51206 대림절 두 번째 주일 --------------------------------------------- 사도행전 13장 4~7절, [부활의 현실 살기 #85]  구브로에 가서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1206.mp3 ‘구브로에 가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방인 전도를 향한 최초의 항해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장면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성경은 그런 순간조차도 담담하고 간결하게 묘사합니다. 본문 4절, 5절 말씀처럼 말입니다. “4.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지명과 인명, 장소만 있을 뿐, 주관적인 감정이나 감흥은 뺀, 담백한 기록입니다. 본문 1절부터 3절까지 말씀에서, 안디옥 교회와 성도들이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안수하여 파송하는 사전 절차가 나오고, 이어지는 4절은 이렇게 곧바로 두 사람이 어디로, 어떻게 갔는지, 그 여정이 등장하고 있지만, 사실 3절에서 4절까지의 실제 과정은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3절과 4절 사이 그 행간에는, 바나바와 사울이 취할 수 있는 수많은 옵션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와 함께 할 것이며, 어디를 최종적인 목적지로 삼을 것이며, 얼마의 기간 동안 사역할 것인지, 그리고 그 첫 사역지는 어디로 할 것인지, 또 이동 경로로 육로를 택할지, 아니면 바닷길을 택할지, 등등…, 3절에서 4절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운 결정들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단호하게 이 부분에 대해 말씀합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그들이 움직였다고 말입니다. 본문 4절이 그 말씀입니다. 3절에서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낸 것은 안디옥 교회라고 이야기하고, 또 어쨌거나 이 사역의 리더는 바나바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이끌고 간 실제적인 인도자는 성령 하나님이셨음을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은 그들을, 바닷길을 통해 구브로로 가는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지도에서 보면, 4절과 5절에 나오는 여러 지명이 어디인지 구별이 가실 겁니다. 실루기아는 안디옥에서 지중해 바닷길을 이용할 때 사용하는 항구이고, 살라미는 구브로 섬의 동쪽 연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살라미는 당시에 구브로 최대의 도시였습니다. 항해의 요충지기도 했고, 또 그 이름 살라미(Salamis)가 헬라어로 ‘소금’을 뜻하니, 아마 소금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상업도시임을 짐작케 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지도에는 제목이 없습니다. 뭐라고 붙여야 할 지…, 보통 이 지도 안에 그려진 이 여정을 일컬어 ‘바울의 제1차 선교 여행’이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13장과 14장까지 그 내용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바울이 그 리더십을 가진 여정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2차, 3차, 4차의 여정을 이어가기 때문에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일 뿐, 표면적인 리더십은 바나바에게 있었고, 실제적인 리더십은 성령께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여러분이 14장까지의 말씀을 읽을 때 기억해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도의 제목은 ‘최초의 이방인 전도 여행’, 이 정도가 될 겁니다. 어쨌거나 주후 45년부터 47년경까지 약 2년 간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첫 번째 전도 여행은, 그 지역에 따라 크게 두 개의 사역으로 구분됩니다. 바로 1)지중해의 구브로 섬과 2)내륙의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도시들, 지도에, 버가, 또 다른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 등등의 도시가 보이실 겁니다. 지금의 터키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구브로와 소아시아 내륙, 이렇게 둘로 구분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여기서 한 가지 의문에 빠지게 됩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구브로를 그들의 최초의 사역지로 삼으셨는가, 기독교 역사의 첫 이방인 전도 여행의 목적지가 왜 구브로여야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수많은 옵션들 가운데, 어째서 하나님은 굳이 구브로였는가…. 곧바로 소아시아로 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사울의 구브로 전도는 오늘 이 한 번으로 끝납니다. 더 이상 성경에 구브로에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입니다. 안디옥에서 구브로가 그리 멀지 않고, 또 바나바가 구브로를 잘 알고 있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바로 그런 측면이 이 선택을 더욱 의아하게 만듭니다. 아시는 대로 구브로는 오늘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또 바나바와 사울이 수행원, 쉬운 말로 조수로 데리고 간 마가 요한 역시도 이 구브로 태생일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열방을 향한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지금 낙향을 하라 명하시는 겁니다. 해외 선교사로 서원하고, 기름부음을 받아 아프리카 땅 끝까지 갈 준비가 다 된 사람에게, 고향으로 내려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교회의 상식과는 맞지 않는 선택입니다. 나중에 13장을 읽어보시면 알게 되시겠지만, 사실 구브로에서의 사역은 생각만큼 큰 열매나 부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브로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로마의 총독이 복음을 믿게 되기는 하지만, 사도행전에 흔히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회심이나 뜨거운 부흥의 이야기는 전무합니다. 교회가 세워졌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굳이 수로 치자면, 그 총독 서기오 바울 단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 뿐입니다. 당시 구브로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던 도시들을 방문하고, 6절 말씀처럼, 온 섬을 가로질러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구브로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나라를 위해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만날 흥분과 기대 가운데 있던 세 사람을, 고향으로, 집으로 보냅니다.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곳, 그렇지만 그래서 영적으로는 더 부대끼고 힘든 곳으로 되돌려 보냅니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이웃에게, 동료에게로 보내십니다.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민족을 향한 주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동쪽의 거라사라는 도시에서, 많은 귀신에 들린 자를 고쳐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예수님을 따라나서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그리고 그 사람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고향 도시 데가볼리, 곧 열 개의 도시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예수를 전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가 누구를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됩니까? 바로 동생 안드레를 통해서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전한 동생을 통해 베드로는 주님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제자 빌립도 예수님을 만나고 제일 먼저 자신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복음을 전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 그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다.” 증언합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 같은 촌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항변하자, 빌립이 말합니다. “네가 직접 와서 봐라.” 예수를 만난 흥분과 감격에 주님을 따라 나서고, 주를 전하기 위해 어디든 가겠노라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우선 네 집으로 돌아가라고, 먼저 네 고향으로 가서, 부모와 형제와, 이웃과 친구들에게 너의 본 것을 증언하라고 강권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먼저 진정한 복음의 전도자로 서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맥이 좀 빠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고향이라는 곳, 집이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허세가 통하지 않고, 그런 ‘척’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목사는 사라지고 남편, 아들, 오빠만 남습니다. 내 옛 모습을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내 밑바닥을 다 꿰뚫어보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거룩’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 그곳이 바로 우리의 일상이요, 우리의 고향이요, 우리의 구브로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그곳으로 보내십니다. 우리를 ‘따로 세워서’ 보내십니다. 거기서 우리가 누구를 만났는지, 그가 우리를 어떻게 바꾸셨는지, 우리가 어떻게 구별된 존재인지를 스스로 선언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도 예배를 마치면 모두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구브로로 갑니다. 그러나 그냥 가는 게 아니라, 그것도 따로 세워져, 구별된 존재로 갑니다. 그저 가는 게 아니라, 보냄을 받는 겁니다. 그게 주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구브로에서 전도자로 살지 못하면, 구브로에서 성도로 구별되지 못하면, 그 다음으로 가는 스텝을 밟아갈 수가 없습니다. 구브로를 건너뛰고, 버가가 있는 밤빌리아로 갈 수가 없습니다. 건너 뛰고 가도 소용없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안 되는 게 거기서 될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 여러분의 집과 고향에서 ‘따로 세워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여정은 늘 구브로를 맴돌다 끝납니다. 가장 먼 곳으로 가는 게 선교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 내 발 밑을 복음으로 구별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복음 안에서는, 가장 먼 곳이 가장 가까운 곳이요, 가장 가까운 곳이 가장 먼 곳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이 다가가야 할 열방이 아니라, 여러분의 바로 옆 직장 동료들이 가장 먼 열방입니다. 선교를 위해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익히는 것보다, 여러분과 끊임없이 갈등하고 부대끼는 사람들, 언어는 통하지만, 말과 마음은 통하지 않는 그들을 이해하고 섬기는 그것이, 더 급하고 더 어려운, 더 중요한, 최우선의 일입니다. 사울에게 다소의 칩거가 필요했던 것도, 오늘 바나바의 구브로행이 필요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물론 그 일은 너무나도 어렵고 긴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서 무시당하며 비웃음 당하신 것처럼, 사울이 다소에서 주눅 들어 산 것처럼, 바나바가 고향 구브로에서 큰 열매를 거두지 못한 것처럼, 우리들 또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결코 그 싸움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이 구브로에서 전도자로 사는 걸 말함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도 않고, 전혀 복음의 영향력이 없으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세상의 환호와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정받고 산다고 구별되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어딘가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과 비슷해지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모습, 그들이 추구하는 모습에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뜻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따로 세워졌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정받은 게 아니라 외면당했습니다. 선지자, 예언자, 주의 성도, 다 그랬습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 자체가 인정받는 것, 존중받고 존경받아 우러러보이는 것이 아니라, 구별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았지만, 그 절대 다수는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라 소리치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잠깐의 환호는, 그들이 원하는 소리만을 듣고, 그들이 원하는 일들만을 보던 짧은 순간의 환호였음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우리는 인정받기 위해서 구브로로 가는 게 아니라, 구별되기 위해서, 그리고 증언하기 위해서 우리는 구브로로 가는 겁니다. 보냄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 그것이 구브로로부터 시작하게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구브로 선교는 성공보다 실패의 가능성이 높은 사역입니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매주 그 일에 실패하고 이 자리로 돌아온다고 하여도, 주님은 포기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또 보내고, 또 보내고, 다시 보내십니다. 교회가 아닌, 저 먼 이방이 아닌, 구브로 내 삶의 자리에 십자가가 세워지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를 따로 세우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 난 일상을, 우리의 연약한 구브로의 삶을 결코 포기하거나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될 때까지, 그것이 거룩한 예배로 회복될 때까지, 주님은 우리의 삶을 선교하십니다. 우리의 실패가 더 처절할수록 주님의 방법도 더 처절해지고, 우리의 상처가 깊을수록 주님의 위로도 그러해집니다. 우리의 실패보다 하나님의 위로와 용서가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깊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선교자의 힘인 줄 믿습니다. 본문에도 그런 주님의 사랑과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오늘 구브로의 살라미에 도착한 바나바와 사울이 제일 먼저 찾아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5절에 나오는 대로, 그곳은 바로 유대인의 여러 회당(synagogue)입니다. 유대인들이 모여 구약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유대 땅도 아닌, 구브로 같은 이방 땅에 유대인의 회당이 여럿 있다는 것도 이상하고, 또 이방인 전도라는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간 바나바와 사울이 고작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유대인을 일부러라도 피하며 이방인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방법은 비단 구브로만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사도행전에서 계속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그들이 방문하게 되는 도시마다, 지역마다, 언제나 그들은 유대인의 회당으로부터 복음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13장, 14장, 16, 17, 18, 19장 모두 같은 방법입니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하나님은 마치 열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찾아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을 정도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여러분, 주님의 그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울, 곧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전도자로 알고 있지만, 그건 절반만 옳은 말입니다. 지난주에도 잠시 언급했었는데요, 하나님이 사울을 처음 부르시며 그에 대해 제자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내 그릇이다.”입니다. 단지 이방인에게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들 역시 그의 전도의 중요한 대상이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복음은 민족의 경계 너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선교의 시대가 왔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잊지 않습니다. 비록 주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마다한다 하여도, 한 번 자녀로 택한 백성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방 땅에 있는 이 회당이 언제, 어떻게 세워졌겠습니까? 언제 유대인들이 그렇게 대대적으로 흩어져 살며 자신들만의 종교적 공간을 만들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완전히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던 그 때, 그 억압을 피해 열방으로 흩어졌고, 흩어진 그곳에 회당이 세워진 겁니다. 유대인들에게 회당은 그들의 처참한 실패와 새로운 회복의 소망이 어우러진 회한의 장소인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회당으로 바나바와 사울을 보내십니다. 가장 먼저 회당으로 보내십니다. “너희들을 내가 잊지 않았다, 너희의 실패를 결코 잊지 않았고, 너희들의 삶을 늘 기억하고 있다.”고 주님은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다시 한 번 고백하고 계십니다. 선교는 언제나 회당에서 시작됩니다.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 그것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을 향한 찰거머리 같은 사랑의 동력으로 움직였음을, 초대교회 역사는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스라엘 지역을 벗어나 지중해 연안의 두로라는 도시에 잠시 머무신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피해 조용히 한 집에 들어가 쉬기를 원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의 사역이 너무 힘들고 또 많은 논쟁으로 인해 지치셨기 때문인지, 성경은 예수님의 두로 행을 일종의 리트릿과 같이 기술합니다(마가복음 7장). 하지만 이미 그곳에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있었고, 또 예수님이 혼자 다니시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금방 이목에 노출되고 맙니다. 본격적으로 병자들과 사람들이 주님께로 모여들게 되지요. 그중 어린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린 한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와 주님 발아래 엎드립니다. 성경은 이 여인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그 출신지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녀는 헬라인, 곧 이방인이었고,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수로보니게’라는 명칭은, 시리아를 뜻하는 ‘수로’와 ‘페니키아’를 뜻하는 ‘보니게’가 합쳐진 말입니다. 두로와 인근 시돈 지역을 포함한, 이스라엘 북부 지역인데, 여러분 그곳에 어떤 도시가 있습니까? 맞습니다, 다름 아닌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 나오는 안디옥이 바로 그 지역입니다. 어린 딸이 귀신에 들렸으니 어머니의 다급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반응은 싸늘합니다. 예수님이 단 한 마디도 그녀에게 대꾸하지 않으신 겁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없고, 여인의 소리는 이어지자 주변의 제자들이 먼저 나서 주님께 말합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주님도 쉬셔야 하고, 우리도 시끄러우니, 얼른 주님이 해결해 주시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고 제자들과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온 것이지 이방인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차갑게 말씀하신 겁니다. 주님 스스로 두로라는 이방인 지역까지 가셔서 말입니다. 딸의 어미가 그대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 외치며, 이번에는 예수님께 계속 절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녀요, 이방인은 그 자녀들이 집에서 기르는 개라고 칭하신 겁니다. 분명한 거절이자, 그 여인의 자존심마저 짓밟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더 단호하게 주님께 이야기합니다. “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밥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주님, 그 부스러기라도 제게 주십시오.)” 그제야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다니,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주님이 왜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는지에 관해 오늘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주님은, 복음의 우선적인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이었음을, 분명하게 천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 그들이 주님의 일차적인, 최우선의 관심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이 따로 세워 구별한 그 백성, 구약 4천 년 동안, 주님이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인도해 오신 바로 그 백성, 지긋지긋하게 교만하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끝끝내 거절하고, 결국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밥 먹듯 먹고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그 백성을 포기하거나 버리신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바나바와 사울이 파송의 명령을 받은 곳 안디옥은, 바로 그 수로보니게 여인이 있던 땅입니다. 주님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말씀으로, 당신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셨던 바로 그 땅에서, 이제 열방을 향한 주님의 선교가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한 그 선교는 오늘 21세기까지도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택하신 백성, 따로 세운 하나님의 일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의지를 여러분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고집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고향, 우리의 구브로에서, 우리가 구별된 예배자로 설 때까지, 주님은 우리의 삶을 집요하게 선교하십니다. 우리의 실패가 더 처절할수록 주님의 방법도 더 처절해지고, 우리의 상처가 깊을수록 주님의 위로는 더 깊고 진해진다는 것을 여러분 부디 온전히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주님이 포기하지 않은 사람을 여러분 마음대로 포기하여, 복음 전하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버리지 않은 사람을 우리가 먼저 정죄하고, 먼저 버려버리면 안 됩니다.]  성령은 오늘도 우리를 다시 우리의 구브로, 우리의 발밑 그곳으로 보내십니다. 거기서 진정한 주님의 증인이 되기를, 주님의 거룩한 예배자로 서는 여러분 보기를 주님은 고대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이 여러분과 동행하시며, 말씀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혹시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영향력이 나타나지 않아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대단한 열매가 없는 것 같다고 고개 숙이지도 마십시오. 가까운 이들에게 미쳤다고 외면당하신 이가 우리가 믿는 우리의 주인이시며, 섬을 다 돌아도 단 한 사람 회심할 뿐이었던 이가 우리의 믿음의 대선배이십니다. 우리의 싸움은 보이는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싸움입니다. 결과와 열매는 주님께 맡기고, 다만 그분의 종으로, 그분의 증인으로, 담대히 서십시오. 무엇보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십시오. 내 힘으로, 내 인격으로 맞서려 하지 말고, 보내시는 이의 능력으로 맞서게 하십시오. 사모하면 반드시 충만함을 주시고, 충만하면 반드시 주님이 통치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혈관 속에 흐르고, 주님의 인격이 내 뼛속에 새겨지기를 기도하십시오.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의 그 질긴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 채워지기를 간구하십시오. 한 순간도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새롭게 된 존재이며,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날마다 새 힘을 공급받는 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승리를 위해 우리를 부르셨고, 주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찰거머리처럼 우리의 구브로를 붙들고 계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