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아부는 우상의 언어입니다." 2014년 2월 4일 새벽기도회 설교

2014-02-0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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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4 화요일 새벽기도회  ----------------------------------------------------- 이사야 2장 22절, 이사야 강해33 (아부는 우상의 언어입니다.) 이사야서 서른세 번째 말씀으로, ‘아부는 우상의 언어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한때 칭찬에 관한 찬사가 이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계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칭찬의 힘을 칭찬하면서 칭찬을 하나의 처세 방법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 교회 안팎으로 칭찬을 독려하곤 했습니다. 성도 간에 칭찬의 말을 하라고 권면하고 또 관계 전도를 위해서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반복하라는 이야기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칭찬은 참 좋은 언어의 한 표현 방식입니다. 상대방의 좋은 점이나 착하고 훌륭한 일을 높이 평가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칭찬은, 보상과 인정에 대한 본능적 욕구를 가진 우리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삶의 윤활유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작은 칭찬 한 마디가 백 마디의 설교보다 더 큰 동기부여가 되는 경우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칭찬에 담긴 진심입니다. 모든 인간의 언어가 다 그러하지만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은 차라리 하지 않음만 못합니다. 조금 뜬금없기는 합니다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선과 미보다 진이 더 상위인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선한 마음, 아름다운 언어 모두 진실이 빠진다면 아무 것도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칭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칭찬에 진심이 담기지 않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칭찬이 습관이 되어 아무 느낌도 없이 오직 칭찬을 위한 칭찬이 되는 경우와 나에게 유익이 되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거짓된 칭찬을 하는 경우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두 가지 경우 칭찬의 궁극적 목적이 칭찬을 듣는 상대방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에서 동일한 문제를 가집니다. 그것은 결국 나를 위해 상대방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는 점에서 진심 없는 칭찬은 아첨과 아부에 불과합니다. 하기야 요즘 세상은 성공을 위해, 그리고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대가도 치른다 하는 결과 지향의 세상이기에, 아부 역시도 꼭 필요한 하나의 기술이라 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습니다. 아부의 효과와 그 기술을 설명하는 많은 책들이 그와 같은 분위기를 방증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진정 그러한 교묘한 아첨과 능숙한 아부의 대상이 되길 원하십니까?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그렇게 포장된 언어를 듣고 싶으십니까? 누군가의 처세를 위한 수단이 되시겠습니까? 분명 아니실 것입니다. 관계와 전도를 위해, 또 복음과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연습하는 칭찬이 아첨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우리말 성경은 이 구절의 앞부분을 이렇게 옮깁니다. “사람 높이는 것을 그만두라.” 사람 높이는 것을 그만두라. 참 적절하고 또 곱씹게 되는 번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힘과 권세를 가진 사람들, 그래서 그들의 편이 되는 것이 나의 유익으로 직결되는 사람들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높이기 마련입니다. 거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어느 공동체에서나 어떤 모임에서나 다 마찬가지이지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구성원들의 힘의 서열을 간파해냅니다. 누가 강자이며 누가 약자인지, 굳이 무슨 계급의 표식이 없어도, 바로 알아차립니다. 힘 있는 자와 친하게 지내 해로울 것이 없다는 논리가 우리를 비굴하게 만듭니다. 그 힘이 나의 직장에서와 같이 나와 내 가족의 생사여탈권을 틀어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소위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것이 줄을 잘 서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사람을 높이는 일은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나 빈번하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진실이 담기지 않은 아첨과 아부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단호합니다. 시12편 3~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이 엄중한 말씀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부는 그 본질 상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 직결되어 있으며, 그것은 다시 우상을 향해 갈린 우리의 두 마음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성경에 아첨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의 상당 부분이 바로 우상숭배와 연관되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겔12:24 등).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의 호흡과 생명이 고작 작은 코에 있는 연약한 인간, 그래서 아무 보잘 것 없어 수를 셀 필요조차 없다 말씀하시는 인간. 그 인간을 예수 이름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높이고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지켜줄 것 같고 우리를 이롭게 할 것 같은 그 사람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내 유익을 위해 새겨 만든 우상을 향한 오늘 유다 백성들의 마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나 자신이 목적인 모든 아첨은 우상숭배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아첨과 찬송도 구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목적이 된 찬송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 영생의 방법에 대하여 물으며 이렇게 주님을 부릅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였습니다. 주님이 선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칭찬하는 그 호칭 안에 진실함이 없으며, 그 부름의 목적이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어떤 아부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책망이 될 뿐입니다. 하물며 인간을 향한 아첨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든 진실함이 없는 칭찬은 하나님 앞에 엄연한 죄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과의 관계와 복음과 전도를 위해서라고 변명해도 소용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하여 언급하는데요, 함께 찾아 읽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3절로 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살전2:3~6, 3.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6.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아멘. 바울은 단언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그리고 바울은 그 어떤 순간에도 아첨의 말을 통해 복음을 전한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감언이설로 사람을 높이는 자들은 이단들의 짓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들이 실상은 “자기네 뱃속을 채우고 있으며 그럴 듯한 말과 아첨하는 언사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고 있는 것”(롬16:18)이라고 경고하고, 그렇게 아부에 길들여진 사람을 멀리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과 그들에게 아첨하는 것은 다릅니다. 마음에 없는 말로 사람을 전도의 수단으로 삼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복음을 들고 열방을 누빈 성경의 그 어떤 전도자도 누군가를 칭찬하여 전도의 문을 열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진정 그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더더욱 주의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잠29:5,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아첨을 받는 상대방도 망하게 하는 일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부의 말을 건내는 이들이 누구입니까? 거의 대부분 우리보다 강자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더 아부와 아첨을 미워하십니다. 약하고 힘이 없는 이들의 편이 되어 주시며 늘 그들을 변호하신 주님. 그리고 우리를 부르시며 그 소자 하나를 위해 편들어주라고 명령하신 주님. 그 주님의 마음속에 아부는 그저 우상의 언어일 뿐입니다. 옳은 것은 옳다, 좋은 것은 좋다 하십시오. 아닌 것은 아니라, 싫은 것은 싫다 하십시오. 그 작은 진심의 소리가 바로 복음의 소리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의 소리입니다. 한갓 수에 칠 가치도 없다는 인간을 바라보며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만물의 주인이시자, 모든 찬송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고 바라보며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디모데후서 1장 7절의 하나님 말씀입니다. 경청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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