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성령이 이르시되' 2015년 11월 22일 주일 설교
2015-11-2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51122 성령강림 마지막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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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장 1~3절, [부활의 현실 살기 #83] 성령이 이르시되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1122.mp3
‘성령이 이르시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한 엄마의 자궁에 두 명의 아기,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묻습니다. “출산 이후의 삶을 믿어?” “왜? 당연하지. 출산 이후에는 분명히 뭔가가 있어. 아마 우리는 이곳에서 그 이후의 삶을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닐까?” “헛소리 마! 출산 이후의 삶 같은 건 없어. 대체 어떤 종류의 인생이 있겠어?” “잘은 몰라, 하지만 여기보단 꽤 밝을 거야. 어쩌면 우린 두 다리로 직접 걷고, 입으로 음식을 먹을지도 몰라. 우리가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감각들을 얻을 수도 있겠지.” 첫째가 반문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이야. 걷는다는 건 불가능해. 입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웃기는 소리! 탯줄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영양분을 공급해주잖아. 그렇지만 탯줄은 너무 짧아. 그러니까 출산 이후의 삶이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둘째는 주장합니다. “내 생각엔 여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은 걸? 아마 탯줄이 필요하지 않게 될지도 몰라.” 첫째가 말합니다. “또 헛소리. 그리고 출산 이후의 삶이 있다고 치자. 왜 아무도 거기로부터 돌아오질 않는 거지? 출산이 결국 인생의 끝이야. 출산 이후에는 그저 어둠과 침묵, 그리고 완전한 잊혀짐만이 존재한다고. 출산은 우릴 어디로도 데려가지 않아.” “음, 나도 잘 모르겠어.” 둘째가 다시 말합니다. “하지만 우린 분명히 엄마를 만나게 될 거고, 엄마가 우릴 돌보실거야.” 첫째도 지지 않고…, “엄마? 너 진짜 엄마를 믿어? 웃기는 소리야. 만약 엄마가 존재한다면 지금 어디에 있는데?” 둘째가 대답합니다. “엄마는 항상 우리 주변에 있어. 우리는 그녀에게 둘러싸여있지. 우리는 그녀의 일부야. 엄마 안에 우리가 살아간다고. 엄마 없이 이곳의 세상은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었어.” 첫째가 말합니다. “나한텐 엄마가 안 보이는 걸, 그러므로 결론은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야.” 둘째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만약 조용히 집중해서 들으려고만 한다면 엄마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릴 부르는 엄마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도 들을 수 있겠지.”
인터넷에 떠돌던 한 글이었는데요, 아마 여러분은 제가 이 이야기를 어떤 의도로 말씀드렸는지, 아마 다 아실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저와 여러분의 전쟁터 같은 일상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그분의 음성도 들리지 않는 것 같은 때가 참 많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목사라고 늘 주님의 음성이 잘 들리고, 그분의 손길이 잘 느껴지는 건 아닙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얼마나 답답하고 또 얼마나 외로웠게요.
그런데 둘째 아이의 이야기처럼, 조용히 집중해서 들으려고만 한다면, 그리고 조금 기다릴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둘려 싸여 있고, 또 주님이 말씀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계신 말씀, 얼마나 하실 이야기가 많으면, 하나님은 당신을 말씀이라 하셨을까요. 이번에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소설로 노벨상을 받은, Svetlana Alexievich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을,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라고 의역했는데요, 말씀, 목소리이신 하나님은 지금 이 예배 가운데서도, 저와 여러분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고 계실 겁니다. 부디 그 주님의 음성이 잘 들려지고, 분별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 말씀을 나눈 것처럼, 안디옥 교회는 주님을 섬기고 금식할 때, 다시 말해 금식하며 함께 예배할 때, 하나의 중요한 새 미션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이제 주님이 계획한 일을 위하여, 사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고, 이방 지역으로 보내라는 것입니다.
이 음성을 교회 공동체가 어떤 방식을 통해 듣게 되었는지, 성경이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지는 않은데요, 그럼에도 우리는, 이 미션이 인간의 계획이나 고민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 그것이 분명 하나님의 음성이었다는 것을, 넉넉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결정이란 인간이 보기엔 너무나 비합리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대로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바나바와 사울이 함께 사역한 교회였습니다. 11장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바나바가 잊혀진 사울을 고향까지 찾아가서 데려 와, 1년 간 성도들을 가르치며 섬긴 결과,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 교회의 자타 공인 기둥입니다. 그런 두 사람을 미지의 땅으로 파송한다는 것은 교회로선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바나바를 떠나보내야 하는 것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11장을 읽어보면 바나바가 얼마나 안디옥 교회에 중요한 사람인가가 잘 드러납니다. 바나바 없는 안디옥 교회는 상상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안디옥 교회의 부흥을 위해 바나바의 신앙과 인격을 중요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실질적인 산파로서, 오늘로 치면 개척 목사나 다름이 없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다른 리더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지난 주 살펴본 것처럼, 안디옥 교회는 쟁쟁한 리더들이 많았습니다. 보통은 이럴 때 바나바가 다른 리더들을 파송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를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교회가 성장했는데, 교회가 회의를 하더니 개척한 그 목사님을 먼 타국에 선교사로 보낼 결정을 내린다는 것, 여러분 현실성이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제 개인적으로는 아직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저 역시 60세까지는 끈질기게 고백교회를 섬기고, 그 후에 선교지로 가겠다고 마음먹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제가 이 사건이 사람의 계획이나 고민, 또는 회의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보통의 생각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메시지가 안디옥 공동체에 선포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의 머리를 모으고, 긴 회의를 통해 이런 결정이 나올 가능성은 지극히 낮습니다. 함께 기도하며, 금식하고, 함께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자 할 때 비로소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가능한 것이지요. 이것은 공동체만이 아니라, 여러분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합리적 상식 그 너머의 일들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은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삶의 발걸음마다 흥미롭고 도전적인,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2절과 3절에 모두 금식했다는 말이 나오는 게 당연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론 아닌 것 같으니까요. 이럴 리가 없다고 여겨지니까요. 내 뜻, 우리의 뜻과 다른 하나님의 메시지 앞에서, 안디옥 교회는 함께 금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절대 안 된다는 사람들도 많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함께 기도하며 금식했습니다. 흔들리고 있고, 당황했지만, 그럼에도 ‘주님 앞에서’ 흔들리고, ‘주님과 함께’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교회가 한 몸, 한 마음으로, 그 주님의 음성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 공동체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똑똑한 사람들의 똑똑한 결과물이 아니라, 기도 외에는 가능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나올 수 없는, 그런 일들 가운데 우리가 함께 순종하고, 함께 일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 그런 성도, 그런 교회가 되십시다. 맑고 예리한 영적 감각으로, 오늘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여 듣고, 함께 순종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우리 고백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와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일이 너무나 급작스러운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그것이 오랜 계획이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로 2절인데요, 다시 한 번 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아멘.
여기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이라는 구절을 한 번 보십시오. 지금 우리말 성경으로는 이것이 마치 이렇게 들립니다. “지금 너희에게 맡길 일이 있는데, 거기 바나바와 사울이 적합하겠다. 둘을 따로 세워라.” 하지만 이 문장의 동사 시제를 보면 내용이 달라집니다. 여기 ‘불러 시키다’라는 말이 하나의 동사, ‘프로스칼레오마이’인데요, 여기서는 이 동사가 현제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르는 것은 현재이고, 일을 맡기는 것은 미래인데, 실제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 과거입니다. 이것이 즉흥적인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두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오랜 계획의 결과임을 여줍니다.
이런 미묘한 느낌을 공동번역 성경이 잘 살려 번역을 했는데요, 이렇습니다. “그들이 단식을 하며 주님께 예배드리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기로 정해 놓은 일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여기 ‘내가 그들에게 맡기기로 정해 놓은 일이 있다’는 표현이, 이 부르심의 성격을 잘 말해줍니다. 오래 전부터, 어쩌면 두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 일들은 이미 주님의 계획 가운데 현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주님을 처음 만났던 때를 묘사한 9장에서도 이미 밝혀진 바가 있습니다. 사울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시력을 상실하던 그때,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기도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직가라 하는 거리의 유다라는 사람 집에 있다. 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해라.”(9:11) 사울이 누구인지 잘 알고 당황하는 아나니아에게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9:15) 사울을 향한 주님의 계획이 이미 오래 전에 세워지고 준비되어 왔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저와 여러분을 향한 부르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역시 어느 순간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으면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머리에 떠오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고, 또 내가 해야 할 일도 정하신 것이 감사하고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엔 이런 생각도 있습니다. ‘왜 내 인생을 하나님은 멋대로 하시려고 할까. 내 선택과 내 결정이 중요한데, 어째서 하나님은 미리 그걸 결정해놓으셨을까?’, 하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걸 너무 단순화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의지와 생각을 무너뜨리며 일하시는 전제군주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듯, 모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으로, 상대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기쁘게 하기 위한 마음이 아니면 그 일은 시작되지도 않습니다. 철저하게 우리의 인격과 의지, 우리 안의 소망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앞에서 꺾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도 한다는 것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사실 좀 복잡한 이야기긴 하지만, 한 가지 여러분이 참고하실 만한 내용을 보태자면, 헬라어만의 특별한 동사 형태가 있습니다. 바로 중간태라는 문법입니다. 사실 우리말이나 영어에는 두 개의 태만 존재합니다. 능동태는 주어가 동사의 주체가 되는 것이고, 수동태는 주어가 동사의 목적어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헬라어에는 그 둘 사이의 중간태라는 게 있습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하긴 하지만, 그 동사의 목적어가 되는 대상과 그 일의 결과로부터 나 역시도 영향을 받는 수동적 입장임을 동시에 표현할 때 중간태를 사용합니다. [예, 가족을 위한 요리]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 동사 ‘프로스칼레오마이’가 중간태로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두 사람을 부르시고 계시는데,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도 그 부르심에 의해 깊은 영향을 이미 받으셨고, 앞으로도 섬세하게 그 영향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일에 참여하십니다. 말은 어렵지만 사랑하는 관계가 다 이런 중간태입니다. 결정과 행동의 주체여도, 이미 나는 상대방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있고, 내 결정은 상대방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사람이 사랑의 상태에 빠지면 거의 모든 행동이 중간태가 됩니다.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마음이 내 것이 아니니 주어와 목적어가 뒤죽박죽이 됩니다. 나의 주체적인 의지가 실은 상대방의 의지이고, 상대방의 뜻에 대한 내 순종이 실은 내 깊은 속마음이자, 내 진짜 기쁨이 됩니다. 내가 원하는 이것이 내 뜻인지, 상대방의 뜻인지, 잘 모릅니다. 아니, 아무래도 좋습니다. 상대의 음성을 듣고, 상대의 마음을 느끼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예: 나를 위해 나를 사랑하고 - 나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 하나님을 위해 나를 사랑하는 것)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드리는 기도가 가장 대표적인 중간태적 행위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기도하지만, 실은 그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반대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듣고 알게 되는데, 사실 그것은,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의 소망일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로나 이러저러한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내 마음을 내가 잘 모를 때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바른 선택의 길이 있긴 한데, 때론 두려움 때문에, 때론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그 길이 자꾸만 흐려집니다. 그래서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을 찾지 못하고 여기저기 헤매게 됩니다. 기도는 그 흐려진 길을 분명하게 해주고, 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결정하지만, 실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길을 비로소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그래서 굴종이 아닙니다. 이미 내 소망 안에 하나님의 소망이 있고, 하나님의 소망 안에 내 소망도 있습니다. 그게 복잡한 지금까지의 이야기의 소박한 결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온전한 연합에서 가장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진실한 소통입니다. 지속적이고 온전한 소통이 없다면, 말씀드린 이야기들은 모두 헛것입니다. 소통 없는 가족이 남보다 못한 것처럼, 성령의 말씀도, 그것에 응답하는 기도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란, 실은 남보다도 못한 관계로 전락합니다. 성령이 이르시면 기도하고,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이 다시 말씀하시는 관계, 그것이 오늘 이 말씀에 감춰진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지난 11월 8일 주일에 ‘흥왕하여 더하더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누면서, 저희 집 옆의 공터에 대해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주 금요일 저희 단톡 방에 한 영상을 올려드렸는데요, 아마 다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전에도 가끔씩 그렇게 그 공터를 기계로 정비한 걸 본 적이 있어서, 저도 반신반의했습니다. 이제 곧 겨울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계속해서 중장비가 들어오고, 건설 자재들이 날라지더니, 이제는 제대로 된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공사가 시작되니 예상했던 대로 소음과 진동이 장난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저희 집 창문은 모두 공터 쪽으로만 나 있어서, 이제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면, 날아오는 먼지 때문에 환기도 어렵게 됩니다. 다른 상황이었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참고 넘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엔 상황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설교한 바로 그 다음 날 공사가 시작된 것이 우연이 아님을 직감합니다.
여러분은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우연의 일치 아니겠나,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창문을 열고 공사장을 보며 며칠 동안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게 많이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서 기도하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궁금하고, 제게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입에서 이런 기도가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제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주님, 제가 여기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면 말씀해 주세요. 지금 여기가 하나님의 목적지는 아닐 텐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시는지, 주님 말씀해 주세요. 제가 더 기도하며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게요.’
저는 11월 8일, 제가 대언한 설교가 제 개인의 인간적인 소리가 아니라는 걸 백퍼센트 확신합니다.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을 묵상했고, 제 마음에 주신 감동으로 한 자, 한 자 적어내려 갔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주신 말씀이, 지금의 상황을 주목하게 만들고 있고, 저는 이 상황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에 빚을 더 내어 오른 전세값을 주고 다시 계약을 연장하면서,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교회 공간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시기는 아닐까, 집을 더 줄이기 위해 이동을 해서라도 변화를 택해야 하지 않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그 고민을 하던 시간이 제게는 너무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 모든 변수들을 고려할 여유와 능력이 제 안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 뒤로 하고 덮어놓고 떠밀리듯 그렇게 일단 1년 재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사장 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면서, 제 안에 한 가지 강하게 상기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의 말씀이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은 주님의 음성에 따라 자신이 살던 갈대아 우르라는 땅을 떠나 아버지 데라, 또 일찍 죽은 동생 하란의 아들인 조카 롯과 함께 가나안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가다 말고 중간에 하란이라는 도시에서 이동을 멈추고 아예 거기에 정착해서 살아갑니다. 가나안까지 가야 하는데, 멈춘 겁니다. 일찍 죽어 마음에 묻은 작은 아들 하란 때문인지, 아버지 데라는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습니다. 가장인 데라가 멈추니 아브라함도 달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습니다. 아들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아버지 데라가 죽고, 그렇게 아브라함이 그 가족의 가장이 되자,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시지요.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여기 한 문장 안에 ‘너’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오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 말씀에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드디어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스스로 주체가 되지만, 역설적으로 이제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객체가 되기도 합니다. 말씀드린 중간태의 모습이 된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스스로 순종하며 하란에서 떠나는 아브라함. 그의 모습이 제 모습과 대비되면서, 제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대하는 제 마음에 조금의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보였습니다. 멈추고 머무르며 더 나아가지 못하는 제 모습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하는 제 안의 여러 이유도 보였습니다. 두렵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때가 되었다.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너를 복으로 삼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 음성을 따라 나아가라.’ 말씀합니다.
그렇게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기도하고 있는 저를 향해 아내가 어느 날 아침, 지나치듯 그런 말을 하더군요. “당신과 하나님이 마치 소꿉놀이 하는 것 같아.” 맞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소꿉놀이 같은 겁니다. 주님은 우리 옆에서 정말 섬세하게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섬세하게 다가가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너희 중 두 사람을 정해서 보내라’가 아니라,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바로 어제, 터 닦기가 다 끝난 그 공터에서 기공식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이제 공식적으로 공사가 시작되는 걸 기념하는 건데요, 토요일 새벽에 잠깐 잠이 깨서 바깥 공기를 좀 쐬려고 창문을 열었습니다. 아직 어둑어둑한 시야에 그 기공식 준비를 위한 삽과 자재, 그리고 큰 간판이 땅에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무슨 글자도 쓰여 있었는데요, 여기에 무슨 건물이 올라갈 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거기 쓰인 글자를 보고 제 눈을 의심하게 되었는데요, 이게 꿈인가 했습니다.
여러분, 그 공터에 무슨 건물이 올라가는 줄 아십니까? 저는 당연히 이런 주거 시설 건축물이 들어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나중에 확인한 거지만, 그 대지가 저희 오피스텔 부지의 두 배가 넘습니다. 그 넓은 땅에 다른 용도가 생각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 기공식 간판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경축,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신축 공사 기공식’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우리가 몰몬교로 알고 있는 바로 그 교단의 정식 명칭입니다. 물론 그들의 교리와 이단성에 대해 지금 말씀드리려는 건 아닙니다. 이 일련의 일들을 통해 제 안에 들려주시는 성령의 메시지가 점점 더 분명해져 간다는 것, 아울러 그럴수록 저는 더 겸손히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것, 주님이 더 깊고 섬세한 메시지를 말씀하시기 원하심을 더 확신하게 된다는 것, 그런 마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을 따름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나, 하나님의 일들이 소꿉‘놀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만큼은 소꿉놀이 하듯 사랑하는 두 사람의 깊은 관계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더 은밀하고,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시고, 하나님의 뜻과 여러분의 뜻이 한 데 어우러진, 그런 일들을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루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신구약 성경 66권 가운데, 도대체 이 책이 왜 성경에 들어와 있는 건가, 수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져왔던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바로 아가서입니다. ‘노래 중의 노래’, ‘Song of Songs’, ‘가장 탁월한 노래’라는 뜻입니다. 그 내용은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과 결혼, 갈등과 아픔에 관한 시와 노래로 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하나님과 성도의 사랑과 연합에 관한 메시지로 이해하고 묵상해 왔습니다.
아가서의 많은 아름다운 시 중에 솔로몬이 사랑하는 여인을 향해 이렇게 노래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둘만의 달콤한 속삭임을 그리워하는 남자의 마음이자, 우리와 함께 나누는 은밀하고 진실한 기도와 간구, 그리고 응답의 이야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잘 묻어납니다.
지금 여러분의 귀에는 주님의 이 노래가 들리고 있습니까? 여러분도 주님처럼, 주님과 함께 속살거리는 그 시간들을 간절히 바라고 원하십니까? 혹시 우리는 하나님 없이 우리 스스로 너무 잘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거야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 수 없고, 하나님의 가장 큰 슬픔 중의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다 해결되고, 절박하게 하나님을 구하지 않아도, 여러분의 삶이 아무 이상이 없다면, 여러분, 금식하십시오. 스스로 절박함의 자리로 내려가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있어야 할 자리에서, 너무 멀리, 너무 높이 나아오신 겁니다.
성도는 주님의 은혜와 말씀을 사모하는 간절함, 그 절박함이 있어야만 진짜 기도를 드릴 수 있고, 진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도의 겸손함과 담대함이 모두 그 절박함에서 나옵니다. 주님 안에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주님 없인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그 절박함. 그것이 우리의 진짜 신앙이요, 영성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노래하십니다, 기도하십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서 너의 소리를 듣기 원한다. 나는 너를 원한다. 그리고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나와 함께 하자.” 말씀하십니다. 이 음성에 대한 여러분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잠깐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