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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하여 기도하더라' 2015년 10월 25일 주일 설교

2015-10-2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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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5 성령강림 스물세 번째 주일 --------------------------------------------- 사도행전 12장 1~17절, [부활의 현실 살기 #79]  그를 위하여 기도하더라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1025.mp3 ‘그를 위하여 기도하더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작은 질문 하나로 설교를 엽니다. 여러분, ‘기도’라는 말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성경, 구약에는 시편. 신약에는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150편까지 있는 시편보다 단 4번 적게 등장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사도행전을 기도행전이라고도 부릅니다. 사도행전이 28장까지 있는데, 기도라는 말은 서른세 번 언급되니까, 최소한 한 장에 한 번 이상, 기도가 언급된 셈입니다. 사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기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기도 합니다.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의 두 배 이상 기도에 대해 언급할 만큼, 기도는 누가가 강조하는 신앙의 원리입니다. 아시는 대로 누가는 원래 직업이 의사로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글쓰기를 보여주는, 그런 성경 저자인데요, 그런 그가 기도를 가장 강조한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그의 이야기가 더욱 큰 도전과 울림이 있다고도 여겨집니다. 적어도 누가를 통해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메시지는, 모든 하나님의 일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 그것입니다. 하지만 메시지는 분명해도, 오늘 본문의 속내는 그리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본문의 상황이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 안에 명확하게 맞아떨어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붙잡혀서 이제 내일이면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렇게 감옥에 갇힌 채 인생의 마지막 밤일지도 모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정작 베드로는 천하태평이고, 기도했다는 내용도 없이 그냥 푹 자고 있습니다. 기도는 오히려 밖에서 하고 있구요. 베드로가 얼마나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본문의 묘사를 좀 보십시오. 6절에 보니, 베드로의 양 옆에 병사들이 지키고 있고, 두 쇠사슬에 묶인 채 누워 자는데, 얼마나 숙면을 취하고 있는지, 7절에 천사가 와서 그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다고 기록합니다. 여기 옆구리를 ‘쳤다’는 동사 ‘파타쏘’는 그냥 가볍게 치는 게 아니라, 엄청난 힘과 치명적인 가격을 포함하여 내려치는 걸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장면에서,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이었던 말고의 귀를 칼로 내려칠 때, 바로 그 ‘내려치다’는 단어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강한 힘으로 내려쳐서 깨워야 할 만큼, 그는 아주 잘 자고 있었습니다. 8절에, 천사가 베드로에게,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말하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옷은 물론, 신발도 벗고, 벨트도 풀고, 제대로 잠을 자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본문은 그런 베드로를 오히려 천사가 급히 채근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줍니다. 아직 잠이 덜 깨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베드로, 느리고 마지못해 움직이는 베드로를 천사가 다급히 몰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떤 성경은 6절 이하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헤롯이 그를 끌어내어 처형할 때가 다가왔다. 그날 밤, 베드로는 양쪽에 한 명씩 두 병사 틈에 쇠사슬로 묶여 있으면서도, 아기처럼 잘 잤다.” 아기처럼 잘 잤다, 참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는 집의 침대에서도 아기처럼 잘 자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감옥 안에서, 그것도 좌우에 병사들이 지키고 있고, 쇠사슬 두 개에 매여진 채로 자는데, 베드로는 아기처럼, 엄마 품이나 요람에 누운 아기처럼, 그렇게 깊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공개 처형이 이루어지기 바로 전 날 말입니다. 본문에 그런 베드로가 기도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다만 기도는 밖에 있는 사람들, 교회 성도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 역시 이해가 안 가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히 5절은 그들이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다고 했음에도, 그들은 정작 베드로가 돌아왔을 때, 그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로데라는 소녀를 통해 나타나는 그들의 모습은, 베드로의 구출을, 단지 의심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부족했다고 단정하는 오류를 쉽게 범하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사도행전에서 보여준 그들의 신앙과 삶을 생각할 때, 오늘 그들의 이런 모습은, 뭔가 다른 의도와 목적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기도는 열심히 했는데, 실상 믿음은 없었다, 이렇게 단순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그래서, 정반대 방향의 극단으로 갑니다. 다시 말해 성도들은 베드로가 ‘잘 죽기’를 기도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당연하게, 자랑스레 여기며, 그가 순교하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기를, 다시 네 번째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온전히 믿음을 지키며 죽기를 기도했지, 살아 돌아오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야고보 역시 같은 상황에서 구해지지 못하고, 먼저 허무하게 죽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이렇게 기도했을 가능성을 아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6·25 전쟁 당시 순교하셨던 손양원 목사님이, 일제 강점기 당시 감옥에 있을 때, 사모님이 면회를 가시면 항상 그런 말씀을 하셨다지요. “만일 당신이 신사참배 하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 죽음 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피하지 말라는 말일 겁니다. 물론 당시 성도들도 그런 마음으로 베드로의 순교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비겁하게 살아 돌아오는 것보다, 꿋꿋이 순교하기를 바라며 기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베드로여 죽으라, 그렇게 기도하기만 하지는 않았겠지요. 가능하면 살려주시기를, 가능하면 살 길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고, 또 로데에게, 너 미쳤다고까지 말했다는 것은, 하지만 분명 그런 상황이, 그들이 생각한 기도의 응답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베드로를 구해줄 줄은 미처 몰랐던 거지요. 다른 보다 합리적인 방법, 보다 상식적인 방법으로 일하실 거라고 예상했었던 겁니다. 그런 방법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당사자인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있는 옥중에 빛이 비춰지고, 그를 쳐서 깨우고, 빨리 나가자고 재촉하고, 두 곳의 파수를 통과해 시내로 빠져나오기 전까지, 베드로는 이 일이 생시인지, 꿈인지, 또 하나님이 하시는 건지 뭔지, 도통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죽음을 앞두고도 평안한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을 초월할 만큼, 이미 죽음은 다 넘어설 만큼, 그의 신앙이 완전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푹 잔거라고 말하는 것도 너무 많이 나아갔고, 반대로 하나님이 반드시 나를 구해주실 것이라고, 절대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 믿어서 그렇게 푹 잤을 거라고 설명하는 것도, 역시나 지나침이 있어 보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위기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지만, 정작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런 우리의 평안마저도 깨뜨릴 만큼, 놀랍고 기적적일 때가 많습니다. 사실 그런 내용이 본문의 중심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본문이 이 내용을 통해 정말 강조하려는 바는 뭔가 다른 데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도대체 하나님은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걸까요? 야고보는 죽고 베드로는 사는 이 과정 속에서, 또 기도는 하지만 다른 생각과 예상으로 기도한 성도들 속에서,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메시지를 후대의 성도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걸까요? 본문 속에 담긴 여러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도, 또 그 결과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흐릿한 뭔가만 발견하게 될 따름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에 가서 닿으려면, 우리는 일단 이 12장이 어떤 이야기의 연장선인가, 그리고 그 결론은 무엇에 연결되어 있는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여기 12장에 나오는 박해의 상황은, 앞선 11장 마지막 부분,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부조를 들려 보내던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울과 바나바가 부조를 들고 온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지금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또한 12장 마지막이 분명하게 강조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12장 끝은 다시 부조 이야기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돌아갔다는 것, 그것이 12장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12장은 이런 걸 강조하는 겁니다. 지금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은 안팎으로 너무나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긴 가뭄과 기근이 이어지고 있었고, 헤롯의 교활하고 변덕스러운 폭력이 그들의 생명을 옭죄고 있습니다.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갔고, 위기는 일상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그런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구원해가고 계십니다. 먼 다른 교회의 전혀 예상치 못한 도움을 통해서,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도들의 죽음과 구출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름 아닌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을 구해내고 계십니다. 안디옥의 도움을 통해 구원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사도들의 체포와 죽음과 구출을 통해 구하고 계시다는 말은 좀 어폐가 있어 보이지요? 수십 번 넘게 11장과 12장을 묵상하며 제가 얻은 결론은, 12장에서 정말 구원받은 자들은 다름 아닌 예루살렘의 성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구원을 얻은 것은 표면적인 사건에 불과합니다. 구출된 베드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17절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임한 일들을 성도들에게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를 야고보와 다른 성도들에게도 전하라 한 뒤, 곧바로 어딘가로 사라집니다. 정말 말 그대로 ‘사라집니다.’ 참으로 의아한 일이지만, 이제 베드로의 이름은 성경에서 사라집니다. 15장에 예루살렘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어 그때 잠깐 베드로가 참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제 더 이상 사도행전에 베드로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이 본문의 핵심이 아닌 겁니다. 야고보는 죽고, 베드로는 구출 받았지만, 본문 이야기의 초점은 그들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며, 죽어야 할 때 죽고, 살아야 할 때 삽니다. 베드로가 어디로 갔고 어디에서 죽었는지, 더 이상 성경은 아무 말씀도 없습니다. 그게 사역자의 길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야고보와 베드로를 조심스레 걷어내고 나면, 하나님의 관심은 지금 환난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음이 드러납니다.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구출되어 어딘가로 피신했지만, 헤롯이 보기엔, 그저 탈옥수일 뿐입니다. 비겁하게 야반도주한 탈옥수, 그게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도망가자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헤롯의 관심이 급격히 사그라듭니다. 베드로를 지키지 못한 파수꾼들을 죽인 헤롯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자신의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로 되돌아 가버립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그곳에서 죽습니다. 위협의 이유가 되던 베드로도 사라지고, 교회를 위협하던 힘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소멸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12장을 보면, 12장은 다름 아닌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구해내는 하나님의 또 다른 출애굽입니다. 문지방에 그 피가 발라진 어린양처럼 야고보는 죽고, 그들을 핍박하던 유다의 파라오 헤롯은 하나님의 징계 속에 허무히 사라집니다. 그들을 이끌던 베드로는 모세와 같이 자신의 소명을 마치고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집니다.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백성을 먹이셨던 하나님. 그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도움의 손길, 바로 안디옥의 성도들의 물질을 통해, 백성들의 생명을 광야 같은 삶에서 지켜주십니다. 이러한 출애굽의 그림 속에서, 오늘 바나바와 사울과 베드로와 야고보는 그저 한 명의 사역자요, 종이요, 도구에 불과합니다. 지난 주 헤롯의 손과 사울의 손을 비교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저 주님의 도구로, 운반하는 존재에 불과한 사울, 오늘 베드로와 야고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백성을 살리고, 성도를 구하는 주님의 일을 위해,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들은, 무명하게 죽거나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젖먹이는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고, 내 손에 새겨 넣고, 너를 기억하겠노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을 택배 기사로 불러서라도, 야고보를 허무히 죽이시고, 베드로를 사라지게 하셔서라도, 헤롯의 왕위를 무너뜨리셔서라도,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보존하고, 지키고 계십니다. 그것이 성경의 말씀이며, 오늘 역사의 현실임을, 부디 여러분이 잊지 않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조금 더 나아가 주님의 뜻을 구하고 찾는 기도, 그 한 가지 뿐입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 기도가 결국 자신들을 살린 기도였음을 강조하여 말씀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도들이 베드로의 구출을 믿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이 베드로를 위해 드린 기도, 그것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일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5절에서, 성도들이 기도했다는 언급이 있은 직후에, 6절에서 바로 베드로를 구하는 기적이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구출되는 모든 일이, 단지 하나님의 계획이나, 베드로의 신앙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기도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겁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풀려나와 성도들을 찾아갔을 때를 묘사한 12절 이후에서도 동일하게 강조되는 바입니다. 풀려난 베드로가 성도들이 있는 마가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도 성도들은 동일하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다 기도였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이 정말 하고픈 두 번째 이야기는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성도 자신을 살리는 기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어떤 방식으로 구해내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우리의 기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통해 일하시는지,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본문은 강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은, ‘교회가’ 그를 위해 기도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성도 몇 사람이, 베드로와 친한 누군가가, 베드로의 가족이 기도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함께 기도했음을 의미합니다. 몇몇은 마가의 집에서, 또 몇몇은 누가의 집에서, 이곳저곳에 모여 함께 기도한 겁니다. 12절에 나오는 로데라는 어린 여자 아이, 그 아이가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런 소녀까지도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파이디스케’(여자 하인) 정말 말 그대로 온 성도들이, 교회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교회가, 바로 초대교회였던 겁니다. 그들이 베드로를 위해 어떤 모습으로 기도했는지, 5절을 보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고 기록합니다. 간절히 기도하더라. 여기 ‘간절히’(에크테노스)라는 부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실 때,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에서,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기도를 묘사합니다. 성도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 그렇게 기도하며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나를 구해내시고, 인도해 가시는 주님을 깊이 신뢰함으로, 무엇보다 주님을 간절히 구하고 바라며, 나를 위해, 그리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저는 이 말씀도 여러분의 귀가 받고 말까, 염려가 됩니다. 부디 손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손으로. 여러분, 제가 아는 한, 또 저의 경우를 볼 때, 기도라는 것은 결코 우리의 본성에 부합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스스로 주체가 되려하지, 주체로서의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것, 그래서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을 안전하고 편하게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내 뜻을 굴복시키는 행위이고, 나의 의지와 노력과 행동이 멈추는 것이기에, 우리의 본성에 거스르는 일입니다. 더구나 그걸 아까운 시간을 내서 해야 하기에,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기 전에는, 오늘 현대인들은 더 더욱 기도를 어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말씀이 강조하는 것처럼, 모든 하나님의 일은 성도의 기도에서 시작해서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런데 기도가 우리의 본성과 맞지 않기에, 그래서 교회가 ‘함께’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 홀로 기도하기 너무 힘드니까, 같이 결단하고, 같이 기도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교회가 함께 기도한 것처럼 말입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하며, 그렇게 함께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고 너무 바쁩니까? 그럼 생각을 조금 바꿔 보십시오. 여러분이 할 일을 다 하고 기도하려고 하지 말고, 기도부터 하고 다른 걸 하려고 해 보십시오.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이 마음이 정말 중요합니다. 먼저 기도의 시간을 정하고, 나머지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걸 원칙으로 삼고 당연히 여기는 것, 그게 성도의 힘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순서의 우선순위가 내용과 결과의 우선순위를 결정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뭐든 거룩한 걸 먼저 하고 나머지로 사는 것, 그게 ‘경건’입니다. 그래야만 경건의 자리를 지킬 수 있고, 사탄의 교묘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기도의 시간을 먼저 구별하면 기도도 할 수 있고, 더불어 생활도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 가난해도 돈을 모으는 방법이 있습니다. 적게 벌어도 돈을 모으는 방법이 뭔지 아십니까? 먼저 떼어 놓고 쓰는 겁니다. 소득이 얼마나 되었든 떼놓고 쓰면 사람은 살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희 집도 우리 적금을 조금 늘려보자, 부부가 서로 말을 하면서도, 그게 가능하냐, 싶어도 일단 얼마를 미리 정해 떼어 놓으면 이상하게 또 한 달이 살아집니다. 그런 것 없이 그냥 다 쓸 때도 한 달이 살아지고, 미리 적금하고 살아도 또 살아집니다. 그게 사람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것들도 다 같은 원리입니다. 시간이 없어 보이고, 물질이 없어 보이지만, 아닙니다. 사람 사는 게 다 계산으로만 되는 게 아닙니다. 원래 바빴는데 연애도 하고 여행도 가며 다 해내고 살아갑니다. 내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사느냐, 거기서 모든 게 다시 자기 자리를 잡고, 삶을 이어갑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여러분의 뜻대로 그렇게 살면 행복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잇대어 살지 않고 그렇게 살아도 정말 행복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처럼, 여러분을 돌보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 없이, 그분을 구하는 기도 없이, 여러분이 진정으로 안전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정말 진정한 행복에 닿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닐 겁니다. 그게 안 될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목사님이 그런 말씀 하신 게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돈을 많이 벌고, 건강해지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걸 다 가지게 되어도 왜 진실로 행복하지 않느냐. 잠깐은 기분 좋고, 잠깐은 행복한 것 같아도, 왜 물질이나 명예나 건강이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느냐. 설사 천하를 다 가져도 왜 행복은 별개의 문제이냐. 그건 우리가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천하보다 존귀한 자로 이 땅에 왔으니, 당연히 천하를 가져도 행복할 수가 없는 거다, 이야기했습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고 평안해지려면, 천하 너머의 존재와 잇대어 살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그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를 위한 시간과 에너지를 먼저 구별하여 떼어놓고 다른 일을 시작하십시오. 기도를 위한, 시간과 장소와 열정을 미리 떼어놓고, 하루와 한 주와 한 달을 살아내십시오. 그래도 충분히 살아지고, 그래도 넉넉히 살아집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 진정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갈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아울러 여러분 자신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기도를 하십시오. 예수 믿으며, 평생 기도의 빚쟁이로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남을 위한 기도는 없고, 남이 해 주는 기도로 사는 사람들, 그게 기도의 빚쟁이입니다. 아예 기도의 파산자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한 주 동안 여러분은 누굴 위해 기도했습니까? 여러분, 교회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우리 지체들을 위해 여러분은 ‘간절히’ 기도합니까? 여러분의 부모와 형제를 위해 기도합니까? 지금은 안 해도, 나중에 본문의 이런 위험에 처하면 기도하시겠습니까? 정말 이런 어려움, 죽음 앞에 서셔서 기도를 하고 싶습니까? 여러분, 본문에서와 같이, 결국 누군가를 위한 여러분의 기도는 여러분 자신을 살립니다. 그걸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성도의 간절한 기도를 결코 가벼이 보시지 않습니다. 그걸 통해 그 사람은 물론, 기도자의 삶까지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더 큰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네 기도가 실로 놀라운 방식으로 응답되었음을 문득 깨닫는 날이면, 그동안 기도를 많이 하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하게 되리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부디 그 후회하는 날이 오늘 여기로 끝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세계적인 경영학 구루로 인정받는, 오마이 겐이치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을 바꾸는 방법은 세 가지뿐이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 이 세 가지 방법이 아니면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행위이다.” 기도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습을 바꾸는 것 역시, 시간을 달리 사용하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을 살리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기도, 지금도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그 기도, 이젠 결단하지 말고, 작정하지 말고, 곧바로 실행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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