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말씀이 나를 찌를 때" 2014년 2월 2일 주일예배 설교
2014-02-0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40202 주현절 후 네 번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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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 37~41절, 말씀이 나를 찌를 때
명절 연휴를 보내고 있습니다만, 여러분 고기 많이 드셨지요? 저도 처가댁에서도, 또 저희 친가에서도 내내 고기가 주 메뉴에 올랐습니다. 등심에 갈비에 또 LA갈비까지, 아주 호강을 하고 왔습니다만, 우리가 그렇게 부위별로 고기의 맛이 다르고 또 육질도 다르기 때문에 생긴 직업이 식육처리기능사라는 직업입니다. 도축한 가축을 부위별로 잘 분리, 해체하는 일을 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작업을 전문 용어로는 발골, 정형이라고 하는데요, 영화 ‘식객’ 같은 데 보면 예리한 두 개의 칼로 엄청난 크기의 소나 돼지를 아주 세밀하고 정밀하게 해체하는 모습을 보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 기능사의 능력에 따라 같은 고기라도 그 값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부위별로 작업을 했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전문적인 지식과 체력, 그리고 오랜 경험이 필요한 어려운 작업이 바로 식육처리기능사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마치 내가 말씀이라는 칼에 베이는 듯한 경험 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일치하는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 생각이 납니다. 여러분도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인데요, 한 번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아멘. 이 부분을 공동번역은 이렇게 옮깁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조금 더 실제적인 표현들이 많아서인지, 더 쉽게 와 닿는 번역입니다. 어쨌거나 이 말씀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종이에 적힌 문자가 아니라, 성령이 친히 현현(顯現)한 ‘살아 있는’ 칼로서 나를 진단하고 고치고 회복시키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묵상에 있어서의 주체가 내가 아닌 말씀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말씀을 내가 읽는다.”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표현합니다. 하지만 묵상의 어느 단계에 이르면 이 관계가 역전됩니다.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내가 말씀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의 삶을 읽습니다. 나의 삶을 scanning 하고 진단하며 판단하시기 시작합니다. 나의 삶의 표면만이 아니라, 말씀은 나의 마음 깊은 곳까지 읽어내려 갑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고 있었던 내 내면까지도 나에게 보여주시지요. 마치 병원에서 MRI 같은 것으로 몸을 진단할 때, 나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던 부분이 의사의 눈에, 또 나의 눈에 낱낱이 드러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말씀이 나를 읽고 그 말씀에 내가 비추어질 때, 비로소 터져 나오는 고백이 바로 “어찌할꼬?”입니다. 이 지점이 바로 묵상이 기도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른 묵상은 언제나 자연스러운 기도로 이어집니다. 또 이 기도는 궁극적으로 다시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의 해결을 갈구한다는 점에서 다시 묵상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기도입니다. 요컨대 모든 묵상은 기도를 지향하고 기도는 다시 말씀으로 회귀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함께 할 첫 번째 리트릿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이와 같았습니다. 구약의 오랜 메시지들 속에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것과 죽임 당하실 것, 그리고 부활하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었고, 선포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는 그와 같은 일들이 바로 오늘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삶 가운데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역사 속의 누군가가 아니라, 또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율법도 모르는 이방인의 손을 빌려 죽였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듣는 너희가 예언된 그 사건의 범죄자이며, 현행범이라는 말씀이 그들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는 이제 부활하시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최종적 심판의 기준이 되셨다고 선포합니다. 이제 관계가 역전됩니다. 말씀과 성령을 판단하고 조롱하던 이들이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혀지고 판단됩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했고, 그 결과 어떤 심판과 절망 가운데 처해 있는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밝히 드러납니다. 결국 그들은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7절 말씀과 같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탄식입니다.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죄인이 처한 절망의 순간 앞에서 회개의 탄식이 그들의 입술에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옵니다. “어찌할꼬?” “What shall I do?” “What shall we do?”
탄식으로 귀결되는 이 찌름이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사실 설교를 듣고 말씀을 묵상하는 거의 모든 순간마다 말씀은 나를 찌릅니다. 하지만 이 찌름이 언제나 ‘어찌할꼬?’ 하는 자기 고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찌름에 대한 반응은 내 마음의 밭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이들 역시 마음의 찔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과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54절에 보니 그들이 이를 갈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스데반이 설교하자 귀를 막은 채 돌을 들어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말씀이 동일하게 마음을 찔렀지만, 그 반응은 달랐습니다. 어떤 이는 ‘어찌할꼬’ 탄식했지만 어떤 이는 이를 갈며 마음이 더 강퍅해졌습니다. 말씀이 나를 찌를 때 탄식하며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도 큰 은혜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기 전에, 그리고 주일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기 전에 언제나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내 마음을 부드럽게 갈아엎으시도록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마음이 부드럽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는 자신을 찌르는 말씀의 칼을 자신의 내면 깊숙이 받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 내면의 아픈 고백을 토해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지 벌써 2천 년이 지났건만, 내가 예수를 찌른 장본인이며, 나로 인해 예수가 죽었다는 마음의 음성을 듣습니다. 로마의 병정도, 유대인들의 외침도 아닌 나의 죄가 예수를 죽게 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스스로에 대한 감당할 수 없는 절망과 탄식,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죄송스러움과 안타까움이 우리의 온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눈물이 흐르고 마음이 무너집니다. 내가 지은 죄와, 그 죄악으로 가득한 내 마음이 싫어지고, 혐오스럽게 됩니다. ‘어찌할꼬?’ 하는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인간의 모든 회심과 성도의 모든 변화가 다 이 찌름의 은혜를 통해 시작됩니다. 하지만 말씀의 찌름이 은혜의 전부는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자, 최근의 여러분의 경험을 되돌아보십시오. 근래에 여러분의 마음을 찔렀던 말씀이나 설교가 있었습니까? 그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찌른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는 것이었습니까? 적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었습니까? 아내나 남편, 혹은 친구 등 주변의 누군가와 그에 대해 함께 나누며 은혜를 고백하는 것이었습니까? SNS와 같은 곳에 그 은혜 받은 느낌과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었습니까? 말씀을 통한 성령의 찌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변하지 않고 새로워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나를 찌르고 나를 해체하실 때,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바로 우리의 신앙 전체를 좌우하는 갈림길입니다. 오랜 세월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과거와 달라진 삶을 살지도 못하고, 세상과 구별되지도 않는 성도들에게서 보이는 공통된 특징, 그것은 말씀이 나를 찌를 때, 1)그곳에 머물러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혹은 무언가를 하기는 하는데, 2)잘못된 방향으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찔림의 상태에 머무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은혜 받은 것 같은 느낌에 안주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마치 암 진단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지나간 세월을 안타까워하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암 진단을 받았지만 그냥 모든 것을 덮고 살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통증이 오니 진통제만 맞고 견디겠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세상 가운데 요즘 힐링이라는 말이 참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여행도 예술도 음식도 독서도 운동도 다 힐링이 붙습니다. 그런데 힐링이 결국 문제를 덮는 것이면 안 되는데, 세상이 말하는 힐링은 딱 여기까지인 것 같아 우려가 됩니다. 유행하는 책만 보아도 이런 현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청춘은 원래 아픈 거다, 그러니 그냥 감내하고 살아라.”는 의미 같습니다. TV에 나오는 힐링의 이야기들도 다 그 지점에서 만납니다. 그냥 위로로 때우는 것입니다. 이런 질병이 있는데, “참 안타깝다. 너무 속상하고 가슴 아프다. 그래 그 마음 내가 안다. 나도 그렇다. 그렇지만 마음을 다잡고 다시 힘을 내자.”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청년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에 직면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장을 봅니다. 문제의 원인을 밝히고 기어이 해결하겠다는 의지입니다. 무엇이 힐링인지 제대로 생각해 보아야 하는 시점입니다. 원인도 해결책도 딱히 없는 그런 식의 미봉책은 진정한 치유가 아니라, 그저 싸구려 입방정입니다. 아마 몇 년 전 웰빙 열풍이 불다 이제 시들해진 것처럼, 그런 가짜 힐링의 열기 역시 곧 사그라들 것입니다. 성경은 ‘위로를 받으라, 복 받으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복이 되라’ ‘위로하라’ 명하고 선포합니다. 성장하고 자라나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라고 명하십니다. 나를 찌르는 말씀이 바라보고 계신 곳, 그곳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말씀의 찌름은 힐링으로 결론나지 않습니다. 감동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습니다. 여기가 바로 도축되어 해체된 가축의 고기와 말씀으로 해체된 저와 여러분이 구별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찔러 거기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십니다(베드로전서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다시 따라해 보십시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능력입니다. 말씀의 칼은 옛사람을 죽게 하는 칼이지만, 동시에 새 사람을 창조하는 칼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 말씀은 새로운 창조 가운데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로 죽은 채로 칼날을 받아 해체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칼은 여러분을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하며 다시 생명으로 일어나 의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십니다. 죽은 가축이 다시 새 몸을 입어 일어나 풀을 뜯고 꼴을 먹으로 들판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에 대한 확증이 바로 오늘 본문의 ‘세례’입니다.) 성령은 ‘어찌할꼬?’ 탄식하며 거기 마른 뼈들과 같이 절망가운데 있는 이들을 의에 대하여 살도록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그리고 이제 찌름 그 다음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본문 38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아멘. 여기 처음으로 선포되는 명령이 바로 ‘회개하라’입니다. 아시는 대로 회개는 돌이킴입니다. '회개'는 원어로 "메타노이아"라고 합니다. ‘메타’는 ‘바꾼다’는 뜻이고, ‘노이아’는 ‘마음과 의지’를 의미하지요. 마음과 의지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가 본래 군사적 용어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군대가 진군을 할 때, 가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다른 길로 갈 때, 이것이 바로 ‘메타노이아’입니다. 가던 길에서 그저 멈추어 서는 것만이 아니라, 방향을 틀어 발걸음을 옮겨 ‘전진’하는 것이 바로 회개의 본래 의미인 것입니다. 회개는 어떤 정지된 상태를 일컫는 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매우 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나의 삶을 읽어내려 가면서, 어느 순간 나의 허물과 죄를 드러내고, 그 심각한 영혼의 질병을 도려내고자 할 때, 그래서 “어찌할꼬?”라는 탄식이 터져 나올 때, 하나님의 대답이 임합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성령이 이끄시는 새로운 길로 전진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멈추어 감동에 젖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나의 삶을 고치는 것입니다. 돌이켜 새 길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는 탄식도 아니며, 눈물도 아니며, 감동도 아니며, 평안도 아닙니다. 새 길을 향한 전진이고, 움직임이며, 새로운 싸움이며 도전입니다. 바로 이 새로운 싸움이 성령이 말씀으로 우리를 찌르시는 진정한 목적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말씀을 통해 기도하지 않음에 대한 성령의 찌름을 경험합니다. 메시지를 듣고 기도 없는 내 삶이 얼마나 위험하고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내 기도 없음이 초래한 내 영혼의 질병과 내 삶의 문제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가 됩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그래, 기도해야지, 다시는 기도 없이 살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주님이 위로를 주시며 평안함을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안 되는데 대부분의 경우 여기서 멈춥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찌름을 눈물 한 웅큼과 퉁 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일시적인 평안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바로 이어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럼 제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주님?”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 되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더 예리한 말씀이 다시 나를 찌릅니다. 더 깊이 찌릅니다. 나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기도의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내 삶의 분주함들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얽어맨 삶의 습관들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지만, 중요한 것처럼 인식되어버린 삶의 습관들, 그래서 그것들을 다 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다고 말하게 하는 결코 양보 못할 것들을 보여주십니다. 다시 scanning 합니다. TV 시청이나, 운동이나 독서나 사람들과의 교제나 또는 설교 준비와 같은 영적이라고 여겼던 것들과 같은, 하지만 실상은 중독적 행위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전에는 결코 문제라고 의심해 본 적도 없는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해체됩니다.
삶의 분주함으로, 영적인 열정으로 포장된 부패한 내 모습과 내가 섬기는 우상들이 드러납니다. 여기서도 멈추지 않고 더 깊이 칼을 받습니다. 다시 ‘어찌할꼬’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왜 나는 그러한 일들에 쉽게 마음이 끌리는가? 왜 나는 그 일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며 기도를 포기하기까지 하는가?” 다시 말씀에 비추어봅니다. 이제 그 칼날은 하나님을 향한 근본적인 불신과 기도의 능력에 대한 나의 본질적인 불신을 향해 돌진해 옵니다. 내 믿음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내 신앙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지,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내 신앙의 허구가 낱낱이 드러납니다. 이젠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으로 칼날이 들어옵니다. 온 영혼이, 나의 삶 전부가 그 칼날 앞에 산산조각 납니다. 이처럼 내 마음을 찌른 그 칼날은 한 번 찌르고 난 뒤 바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대로 아직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계속되는 탄식 속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행하시는 생명을 향한 새로운 창조를 향해 한 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나의 삶에 무엇을 하시려는지 귀 기울입니다. 하나님이 마음껏 나를 고치실 수 있도록 삶의 모든 부분들을 제로베이스에 놓고 다시 고려합니다. 단지 기도의 시간 얼마를 늘이고 줄이고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시간표를 통째로 바꾸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직면합니다. 나의 꿈이며 비전이라는 허울 속에 분주해진 삶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재배열합니다. 나의 삶의 방향을 바꾸고, 삶을 고칩니다. 기도의 시간을 늘리는 것뿐만 아니라, 삶 전부가 기도가 되기로 결단합니다. 단지 기도 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까지 나를 향한 음성으로 듣고 기도에 삶을 조율합니다. 여기까지 이르면 거의 다 왔습니다. 마지막 畵龍點睛 하나만 찍으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지금 당장 그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임의로 계획했던 일들을 지금 취소하고,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금 취소하며, 바로 지금 위약금을 물어주고 계약을 없던 일로 합니다. 지금 당장 기도의 시간을 갖으며 모든 것을 멈추고 더 깊이 기도하기 위한 시간을 만듭니다. 바로 여기까지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의 실체입니다. 최소한 이 지점까지 와야만 회개가 일어난 것이며, 그 회개에 합당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다다르기 전에는 여러분의 수술이 끝나면 멈추면 안 됩니다. 그 과정에 나타나는 눈물에 속고 감정에 속으면 안 됩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속으로 외칩니까? ‘주님, 그래도 안 됩니다. 주님, 그래도 저는 못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시는 거죠?’ 이렇게 위선적인 눈물로 하나님의 은혜를 무마시키고 맙니까? 내 마음 전체의 지도를 말씀이 밝히 드러내고 거기 썩어가는 삶을 고치는 데까지 전진해야 합니다. 아울러 그와 같은 고침은 오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시는 일이시기에, 말씀이 여러분을 찌르는 그 순간이 바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나중에 마음이 좀 진정이 되면 해야지’, 이런 마음은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이 유혹에 넘어가면 결국 지금까지의 찌름이 다 무의미해집니다. 말씀이 나를 찌를 때 하지 못하면 영영 삶을 고치지 못합니다. 그 찌름 이후에도 사탄이 그 상처를 무마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불의를 합리화하고 둔감하게 만듭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되었다고 말합니다. 눈물을 흘리고 위로가 되었으니 족하다고 말합니다.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대가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고 사탄은 유혹합니다. 결국 기어이 또 한 번 치료제가 아닌 진통제에 만족하도록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이 찌를 때 결판을 보십시오. 말씀이 찌르는 심판의 때를 여러분의 결단으로 사십시오. 말씀의 찌르는 은혜가 우리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월을 아끼라고 바울 사도이 강조하였고, 오늘 본문에서는 ‘패역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으라’고 베드로 사도가 강조한 것입니다. 세월이 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너무나 쉽게 주신 그 은혜와 회개의 기회를 잃을 수 있기에, 주어진 그 기회를 사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말씀이 찌르는 그때가 바로 유일한 기회입니다. 찌름에 대해 제대로 반응하여 온전한 치유에까지 나아가지 못하면 결국 그 자리에 말씀의 굳은살이 박이게 됩니다. 당연히 더 깊은 찌름이 필요하게 되고 결국 습관적인 미봉책들은 아예 말씀에 대한 인이 박히는 최악의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찔림이 있을 때 결판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은혜를 받은 말씀을 몇 번이고 다시 먹고 씹는 되새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고대와 중세의 영성가들은 늘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혼잣말을 하는 것에 익숙했다고 합니다. 같은 말씀을 다시 꺼내어 씹고 또 씹는 이른바 반추의 묵상을 반복한 것입니다. 같은 말씀을 수없이 반복하여 묵상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를 드러내시고 그 깊은 의미와 뜻을 묵상자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추의 묵상이 그 찌름의 기회를 사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만큼 귀히 여기며 아껴야 하는 것이 이 ‘찌름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해체된 죽은 고깃덩이처럼 아무 힘도 능력도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는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 안에 새 사람을 덧입고 매순간 구원을 이루고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이 우리를 찌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늘 겸비하고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를 찌를 때, 그 찌르는 말씀의 은혜를 가벼이 여기며 값싼 은혜로 치부하지 않고 여러분을 찌른 말씀이 여러분을 고치도록 여러분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값싼 힐링에 취해 자신의 질병과 문제들을 다 덮어놓고 살아가는 이 패역한 세대 속에서 진정한 구원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부디 여러분을 찌른 그 말씀이 여러분을 다시 일으키고 새롭게 하여 언젠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저와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