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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서 구하시옵소서' 2015년 8월 30일 주일 설교

2015-08-3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3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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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30 성령강림 열다섯 번째 주일 --------------------------------------------- 마태복음 6장 5~13절,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 강해 7]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830.mp3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지난 여름 수트릿 때부터 시작된 주기도문 강해가 오늘 이 설교로 갈무리됩니다. 많이 바쁘시겠지만,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셔서, 주기도문 말씀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고 묵상하셔서 이 기도가 성경 속 글자로만 남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것은 우리가 입으로 발화를 시작하는 순간, 너무나 많은 생각과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기도입니다. ‘악’이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의 기도를 압도해버리는 느낌인데요,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악의 현실이 우리의 기도를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게 꽉 얽어맵니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어나가는 지중해 난민선의 이야기, 내전으로 인해 하루에 수천 명의 군인이 사망했다고 하는 소식이, 또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을 보이는 우리나라의 이야기도, 역사 속 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현실이며, 구해주시기를 우리가 간구해야 할 현실 속의 악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악은 늘 두렵습니다. 더구나 ‘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이해가 너무나 제한적이라는 것 역시 힘든 문제입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악에 관한 수많은 논의들을 생각하면, 악에 대해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마자, ‘악’ 소리가 날 지경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를 제대로 하려면, 일단은 악에 관한 우리의 이 불리한 입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악에 눌린 채로 이 기도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주문처럼 기도를 외는 데 급급하면 안 됩니다. 일단 하나님은 악을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선악에 관한 하나님의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지, 명확히 하는 것이, 미로와 같은 악의 담론에서 빠져나오는 첫 번째 해결책일 겁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이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언급이 기록된 대표적인 말씀을 먼저 좀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서입니다. 예레미야 2장, 구약성경 1052쪽, 2장 19절, 천천히 함께 읽습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의 직접 인용인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냥 너무 평범하고 당연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경외하지 않는 것, 그것이 악이며, 악의 결과인 고통이라는 가장 원론적인 말씀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런 악으로부터도 우리가 구원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우리의 진실한 회개가 시작되고, 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건 순간이며, 우리 내면의 작은 공간에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든 말든 상관없이 제 멋대로 흘러가는 세상은 그런 우리를 결코 평안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형체 없는 존재에 불과한 악, 사탄, 이런 것들이,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을 얽매려 하고, 우리의 삶을 다시 악의 숙주로 만들려 합니다. 그래서 악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악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도저히 싸울 수조차 없는 한계적 상황 속에서나, 싸움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를 제외하고, 악으로부터 구해진다는 것은, 악과 싸운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악에서 구해지는 것은, 오물 웅덩이에 빠진 어린아이를 아빠가 오직 아빠의 힘으로 잡아 꺼내주는 그런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몸소 가르쳐준 싸움의 기술을 체득해서, 아직도 여전히 제 세상인 줄 아는 악의 현실과 맞서 피터지게 싸우는 것, 그것이 악으로부터 구해진다는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싸움의 기술이 뭔지 잠깐 보실까요? 다시 마태복음 5장 38절입니다. 38절부터 42절입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아멘. 주님은 말씀합니다. 39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여기 ‘대적하다’는 동사 ‘안티오테미’는 反하여 저항하다, 맞서다는 의미입니다. 상대가 취한 같은 방식으로 앙갚음하는 것, 또 그런 방법으로 대항하는 것 일체를 뜻합니다. 39절의 이 ‘악한 자’가 앞서 주기도문에 ‘악’으로 옮겨진 바로 그 단어 ‘포네로스’입니다. 악이라고도 번역이 되고, 악한 자로도 번역됩니다. 방법은 마찬가지입니다. 악이든 악인이든, 그것에 대해 맞서는 방식 자체를 바꿔라, 그렇게 악과 맞서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상대가 오른쪽 뺨을 때릴 때 왼쪽 뺨을 돌려서 대라는 말씀은 조금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먼저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오른 뺨을 맞을 일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른뺨을 때리려면 왼손을 사용해야 하는데, 왼쪽을 부정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은 그렇게 폭력을 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른뺨을 맞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가 오른손 손등으로 나를 공격할 때입니다. 그런데 이 행위는 당시 상대방을 경멸하는 태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당하는 사람을 자신보다 못한 인간으로 여길 때가 가능한 린치입니다. 실제로 같은 신분끼리 손등을 사용해 이렇게 쳤을 때는, 일반 폭력의 100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야 했다고 합니다. 물론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을 손등으로 쳤을 땐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손등으로 오른쪽 뺨을 맞은 사람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에는 똑같은 방식의 보복도 있고, 상대의 경멸에 대한 보복으로 그 이상의 폭력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너의 왼쪽 뺨을 돌려서 대라. 여러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단지 “한 대 더 때리시오, 그것도 내가 참겠소,” 하는 의미 이상의 행위입니다. “당신은 나를 또 때릴 수 있소. 하지만 이건 제대로 알고 때리시오. 나는 당신의 경멸이 정당한 그런 존재가 아니오. 나는 당신과 같은 가치를 가진 사람이며, 당신이 혹 그 사실을 잊었다면, 내 왼뺨을 때려서라도 스스로 확인하기를 바라오. 이것으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누구인지가 분명해질 것이오.” “나는 당신과 같은 방법으로 맞설 생각이 전혀 없소. 왜냐하면 이미 당신의 첫 번째 폭력과 그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악의 현실이 완전히 드러났기 때문이오. 폭력만이 유일한 답이며, 상대를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현실이라는 당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 이제 내 왼뺨을 때리며 당신은 깨닫게 될 것이오. 당신을 얽매고 있는 악에 대해 직시하시오. 당신은 참으로 자유한 상태가 아니오. 당신을 얽어맨 악의 현실을 발견하고, 그것이 당신과 상관없음을 보여주시오. 이제 악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예전처럼 당신을 얽어맬 수는 없을 것이오. 분명 우리는 달라질 수 있소.” 우리의 왼 뺨은 이것들을 외치는 확성기와 같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구절의 ‘구하다’라는 말 ‘뤼오마이’는 본래 풀어서 자유하게 하다, 해방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악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그것에 더 이상 얽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일차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의 방식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유이지만, 그들‘만’의 자유는 아닙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의 자유를 위한 행위이자, 예수를 못 박은 이들의 자유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받았고 그래서 자유하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악의 현실이 세상에 폭로되었다는 의미에서의 새로운 자유의 가능성입니다. 죄 없는 예수를 향한 폭력 속에서 악은 감춰진 자신의 모습이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던 이들의 실존이 어떤 모습인지가, 십자가에 매달린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만천하에 공개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악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숨어서 일할 곳이 없어졌으니, 돼지 떼에라도 들어가 그것들을 몰살시킴으로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드러내던가, 아니면 폭로자를 미치광이나 반역자로 만들어 사람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던가, 하는 정도입니다. 어쨌거나 악은 더 이상 인간의 무지 뒤에 숨어 은밀히 행하는 형체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드러난 악은 여전히 악이지만, 예전처럼 무소불위한 악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드러난 악은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의 대상이 되며, 혹여나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도 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악의 폭로는 악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갑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는, 죄 없는 자를 처참히 밟아 죽이는 인간의 숨은 악을 폭로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믿음을 말하는 거짓 믿음을 폭로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하지 않는, 또 그것이 드러나도 결국은 고집스럽게 자신을 변명하고야 마는 강퍅한 신앙을 고발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까지도 파괴할 수 있는 죄가 우리에게 있음을 증언하고, 내가 만든 신이 나를 만든 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우상숭배적인 신앙을 만천하에 드러냅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예수의 십자가는 그래서 동시에 인간의 죄를 공개하고, 인간이 스스로의 죄를 직시하여 거기서 나오게 하는 고발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고난을 통해 악을 고발하는 예수와 성도들의 이런 삶은, 상대를 향한, 인간을 향한 진실된 긍정과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 고발을 통해 상대는 분명 죄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될 것을, 그리고 만약 이겨낼 수 있다면 스스로 극복하고, 그것이 안 된다면 좌절하며, 예수든 누구든,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게 될 것을, 우리가 믿기에, 우리는 스스로 폭력의 수단으로, 폭력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 믿음으로 십자가에 올랐습니다. 당신의 십자가가 우리를 깨닫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우리의 단단한 마음이 십자가의 피로 녹아내릴 것이라고, 예수님은 확신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가 처한 죄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래서 우리가 진정한 자유함을 갈망하며 주님을 찾게 될 것임을, 예수님은 소망 가운데 보고 계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하실 일들을 그렇게 아들은 믿고 기대했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한 다른 뜻이 혹 아들 예수에게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고백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 십자가를 통해 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을 믿고 순종하며 주님은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믿음으로 우리에게도 같은 길을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는, 그런 십자가의 선의(善意) 자체를 묵살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왼뺨을 때리라고 내밀었을 때, 일말의 재고도 없이, 너 잘 걸렸다, 생각하며 우리가 내민 왼뺨을 후려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이야말로 우리가 십자가를 포기하고, 십자가를 부숴 만든 새 무기를 장착하여 맞서 싸우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러한지, 정말 그렇게 세상이 왼뺨을 후려치기만 하는지, 한 번 제대로 생각해 봅시다. 정말 우리가 십자가를 제대로 지고도, 그런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는지, 우리가 정말 왼뺨을 되돌려 내밀었는데도, 오른뺨을 손등으로 얻어맞을 일만 계속 일어나고 있는지, 정말 그런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혹 그들이 우리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십자가를 가장한 더 큰 폭력이고, 사랑을 가장한 더 큰 경멸이어서,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우리를 손등으로 후려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나라와 무관한 진짜 이유가 정말 그들이 악해서인지, 아니면 우리가 제대로 왼뺨을 돌려대지 못해서인지, 우리는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주님이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는 말씀, 주님이 세상을 이미 이겨서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 그리고 우리를 통해 주님의 나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정말 예수의 십자가를 따라 우리 자신을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살게 되었을 때, 정말 십자가를 지고 악과 맞서지 않았을 때, 이 땅은 분명 조금 더 주님의 나라로 가까이 갈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걸 믿지 못하면 우리는 한 발 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 근처에서 늘 머뭇거리고 늘 두려워하며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뭣도 아닌, 그렇게 비루한 모습으로 악과는 타협만 하고 살게 됩니다. 예수 믿는 이들이 그렇게 살게 되면, 세상은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 모든 이들이 악에서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여전히 그런 모습으로 살다가 결국 심판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돌이키고 회복하기를 원하셔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오직 십자가를 짊어진 성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십자가는 악을 심판하는 것이지 악인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악을 폭로하고 고발하여 거기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십자가는 오늘도 세워집니다. 성도가 ‘살아내는’ 복음만이 그 일을 합니다. 왼뺨을 돌려대는 성도의 싸움이 악인을 악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 6:9~10) 저는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습니다. 성도는 이 자존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1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 그게 성도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여러분? 바울은 또 바로 이어서,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이 땅에 은혜와 구원을 베풀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성도들을 통해 지금도 세상에 베풀어지고, 세상의 악을 이기며,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이루어가고 있음을 잊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저는 지난 몇일 간의 남북한 긴장 관계를 보면서, 악을 향한 하나님의 싸움, 우리의 싸움은, 마치 대북 확성기 같은 그런 싸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북 확성기, 그게 하는 일은 오직 진실을 외치고, 현실을 폭로하는 것뿐입니다. 이미 세상은 바뀌었고, 그들이 믿고 사는 진실이 실은 진실이 아님을 외치는 것, 그뿐입니다. 그것을 외친다고 당장 북한이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바뀌고, 사람이 변합니다. 사람은 살아나고, 그들을 얽어맨 거짓으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확성기는 그거면 족합니다. 그거면 그 어떤 무기보다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이 그 확성기를 두려워하듯, 악이라는 뭔가도 성도의 그 되돌려대는 왼뺨을 실로 가장 두려워할 것입니다. 이미 예수의 십자가에서 크게 한 번 당한 것처럼 말입니다. (북한이 악의 축이라는 이야기에 동의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성도는 이걸 말로 외치는 사람으로 그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짜 뺨을 돌려대야 합니다. 그래서 어렵고, 그래서 아픕니다. 때론 넘어설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아픔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에서 구해주십시오. 주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나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 악과의 이 싸움을, 성도는 멈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 싸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암살’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독립군의 저격수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안옥윤(전지현 분)에게 누군가가, “그렇게 싸운다고 독립이 오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둘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고? 모르지. 그치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우리 역시 알려줘야 합니다. 우리도 맞서 싸우고 있다고, 그 싸움이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십자가로 고난으로 저항하고 있다고, 주님의 나라가 그렇게 지금도 오고 있다고, 보여줘야 합니다.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 마지막 기도는 주님의 나라가 오고 있다는,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의 송영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악에서 구해내기 위해 오셨고, 지금도 그 일을 행하고 계심을, 주의 나라가 이미 왔고, 악을 이기는 권능이 주께 있으며,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역사로 이 세상이 귀결될 것임을, 믿는 성도들만이 이 싸움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부디 주를 경외하는 믿음 위에 굳건히 서서,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 기도를 우리의 삶으로 살아낼 수 있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하길 원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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