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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2015년 7월 30일 새벽 설교

2015-07-3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50730 목요일 새벽기도회  ---------------------------------------------- 이사야 40장 1~2절,  이사야 강해 314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 설교 음성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730.mp3 이사야서 삼백열네 번째 말씀으로,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설교자로서 제가 자주 사용하는 말들 중에는, 원문의 의미가 어떻고,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어떻고, 썩 좋은 번역이 아니니,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교만한 말이기도 한데요, 한 본문을 깊이 묵상해야 하는 설교자로서는,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말 성경을 이렇게 읽다 보면, 참 그 번역하신 분들에게 고마움 이상의 경외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러한데요, 설교의 제목이기도 한, 2절의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라’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마음에 닿도록 말해라…, 앞의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과 어우러져, 참 절묘한 어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원문의 표현은 짧은 전치사구입니다. 뭔가의 표면 위에를 뜻하는 ‘알’이라는 전치사에, 마음을 뜻하는 ‘레브’가 데쉬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마음 위에’이지만, ‘마음까지 다가간다’는 의미가 있으니까, 오늘 말씀처럼, ‘마음에 닿도록’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다른 성경들은, ‘다정하게’ ‘부드럽게’ 뭐 이런 식으로 의역했지만, 원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는 부족함이 있어 보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백성의 귀가 아닌, 마음까지 닿도록 전하기를 원하신 하나님의 중심이 이 구절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그 메시지를 전하도록 명함을 받은 ‘너희’라는 복수의 존재가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일 수도 있고, 또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까지 전달되게 그 말씀을 전하라고 그들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사실 이러한 말씀은,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참으로 부담스럽고 어려운 말씀입니다. 저도 당연히 마음에 닿도록 전하고 싶지만, 얕은 영성과 부족한 능력 때문에, 그게 참 쉽지 않음을 매일, 매순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마음에 닿는 그런 일들은 제 역할이 아닌 하나님의 역할이 아닌가, 그렇게 반문하고 핑계하기도 합니다. 설교 후 찾아오는 매번의 고통과 안타까움 속에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마 설교자들은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오늘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위로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이기에, 저도 한참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그 마음에 닿는 위로를 전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제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한 것인지,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제게 그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네가 그 마음이면 되지. 네가 그들의 슬픔을 같이 느끼고, 같은 마음을 가지면 되지.’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본문의 말씀이 조금 더 다르게 다가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대언했을 이사야는 아마 백성들과 같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간 어떤 예언자도 마찬가지였을 거구요. 모두 백성들과 함께 그 고통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함께 아파하며, 바벨론 강변에서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위로는 당연히 백성들의 마음에 닿는 위로였겠지요. 이미 그들의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이었을 테니까요.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헤셀은 그의 책 ‘예언자들’에서, 예언자의 본질 중의 본질이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하는 것, 심지어 그분의 마음을 동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마음에 닿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는 존재, 그리고 역으로, 고통당하는 백성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존재, 그것이 주의 말씀을 전하는 종의 모습이어야 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러한 정체성은 비단 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한 여러분 모두가 주의 말씀의 대언자들이요, 이 땅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상처와 연약함이 많은 우리들이지만, 그래도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세상을 향한 주님의 위로의 증거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또 얼마나 아파하며 안타까워하시는지,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의 마음에 닿도록 이야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 일은, 내가 그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결코 할 수 없는 그런 일입니다. 세상이 당하는 고난과 시험을 우리가 당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할 수 없고,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고통 없이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 우리가 간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함께 충분히 고난당해야 하며, 또한 그들과 함께 충분히 슬퍼하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마음과 주님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길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아내와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를 안 보신 분들께는 죄송한 스포일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람의 마음 속 여러 감정들을 의인화해서, 어떻게 인간의 감정이 성숙해가고, 또 어떻게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영화에서 사람의 마음이 잇대어지는 데 가장 중요한 감정으로 강조한 것이, 바로 슬픔이었습니다. 기능을 멈춘 인간의 모든 감정들이 되살아나고,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고,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일이, 모두 슬픔이라는 감정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짐을 영화는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갈망하는 만큼, 세상의 고난과 슬픔 앞에서도 같은 마음이어야 하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아픔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음에 감사하고, 그 아픔을 통해 그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다. 아울러 마음에 닿기는커녕, 마음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이 땅의 교회와 설교자들을 위해서도, 무엇보다 이 말씀을 전하는 저를 위해서도, 여러분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부디 주님의 마음에 닿고, 사람의 마음에 닿는, 그런 목사로 세워져갈 수 있도록, 여러분 기도해 주십시오. 부디 저와 여러분의 삶이, 세상의 마음에 닿는 주님의 위로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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