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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2015년 7월 26일 주일 설교

2015-07-2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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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6 성령강림 열 번째 주일 ---------------------------------------- 마태복음 6장 5~13절,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 강해 4]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 설교 음성파일 : 이번주는 설교 음성이 없습니다. 성령강림 열 번째 말씀으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기도를 잘 하고 계신지요?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시니 아예 입을 닫아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힘이 있다는 말, 기억십시다.] 고대 문명이 발달한 나라마다 거의 예외 없이 발달하는 하나의 문학 장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혜 문학이라는 장르입니다. 시와 같은,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이런 작품들은, “어떻게 하면 세상을 잘 사는 걸까?”라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 문학이라, 일컫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지혜 문학 장르로 분류할 만한 그런 책이 있습니다. (질문) 그렇습니다, 바로 잠언입니다. 물론 잠언은 단순히 세상을 잘 사는 법에 대한 처세술 책은 아닙니다. 잘 사는 것의 기준이 정해져 있지요. 바로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보시기에 잘 사는 인생을 살까, 그에 대한 지혜가 담긴 책이 바로 잠언입니다. 이 잠언을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미쉴레 쉘로모’라 부릅니다. 직역하면, ‘솔로몬의 잠언들’(the Proverbs of Solomon)이란 뜻입니다. 이것을 줄여서 그냥 ‘잠언’이라고 부르는데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잠언의 주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지혜의 왕,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잠언 중에서 솔로몬 아닌 다른 사람이 쓴 장들도 있습니다. 잠언 25-29장처럼, 히스기야 왕이 서기관들을 시켜 솔로몬이 쓴 것을 편집하게 한 잠언들도 있고, 아예 저자 자체가 솔로몬이 아닌 경우도 있는데, 바로 잠언 제일 마지막 두 장인, 30장과 31장입니다. 그 중에서도 30장의 저자는 ‘아굴’이라고 하는 사람인데요, 그게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에 딱 한 번, 여기서만 등장합니다. 많은 구약학자들이 아마도 이방인일 것이라고 추정하는데요, 그런 그가 하나님 앞에 평생 드린 기도가 잠언 3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혹시 그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하시는지요? (두 가지의 기도 제목이었는데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구약성경 944쪽) 잠언 30:7~9, 7.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아굴이 기도한 두 가지는, 먼저 헛된 것과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과, 오직 필요한 양식을 주셔서, 하나님을 모른다고도 안 하고, 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도 않게 해 달라는 것, 이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공감이 가시는 기도인지요? 아굴은, 배가 부르면 인간이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이렇게 될 거라고 말합니다. 어떤 성경(MSG)은 이 부분을, “하나님이라고? 누가 그를 필요로 하지?” 이렇게 번역했는데요, 참 적절한 표현입니다. 물질의 풍요가 결코 세속적인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도 직결된 문제임을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몇 차례 반복해서 말씀드리게 되지만, 돈의 문제, 먹을 것의 문제는 가장 세속적인 문제이자, 가장 영적인 문제라는 점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 수트릿 때 살펴본 대로, 주기도문은 크게 둘로 나뉘고, 그 두 번째 기도의 시작이 바로 오늘 이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에서 그 기도의 내용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이 기도뿐인데요, 다른 모든 기도의 내용이 영적이고, 관계적인 차원이라는 것과 명확히 구별됩니다. 지극히 가시적이며, 지극히 물리적이고 실제적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주기도문의 전체 내용의 허리를 베고 들어간 칼날과도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항상 서늘한 무언가를 느낍니다. 이것은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응답을 받지 못하였으면서도 마치 다 이루어진 것처럼, 허영을 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없는 겁니다. 넘치면 넘치는 것이고, 모자라면 모자란 것입니다. 아주 simple하고 예리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일면 이 기도는 우리에게 별로 어려운 신앙적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 매우 쉬운 기도처럼 느껴집니다. 다른 기도들처럼 많은 설명이 필요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이해하기 어렵고, 이것보다 살아내기 어려운 기도가 또 없습니다. 특히나 오늘 같은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경우라면 더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기도가 좋고, 또 감사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고단함과 어려움을 알고 계시고, 또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계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 그 의미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영어로는 거의 모든 성경이, ‘daily bread’라고 옮겼습니다. ‘매일의 빵’입니다. 헬라어 성경에도 이 ‘빵’이 문장 맨 앞에 있습니다. “빵을 우리에게”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일용할’이라는 말이 사실은 매우 난해한 단어입니다. ‘에피우시온’이라는 헬라어 단어인데, 사실 이 말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성경 외에 헬라 사회나 그리스 문헌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자주 나오면 좋은데, 성경 전체에서도 오늘 이곳에만, 그리고 누가복음의 주기도문 본문에만 딱 한 번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쉽게 말해 주기도문 외에는 그 용례가 아예 없는 단어인 겁니다. 사실 이렇게 어려운 단어를 주님이 사용하신 것도 참 의아한 대목입니다. 그래서 이걸 지금처럼 ‘일용할 양식’ ‘daily bread’ 이렇게 번역하는 것 자체가 매우 신학적인 관점이 내포된 번역입니다. 아래 관주에도 한 가지 추가적인 의미가 나와 있습니다. ‘내일 양식을’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십시오.”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다른 또 한 가지 의미도 있는데요, ‘우리의 필요를 초과하지 않는’ 혹은 ‘생존에 필요한’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의미가 주님의 뜻에 가장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되시는지요?) 어렵기는 하지만 이 세 가지 의미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러 날의 양식은 아니고, 하루, 혹은 필요(needs)에 해당하는 양식,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일용할’이라는 번역이 저는 참 좋습니다. 이것을 완전히 영적인 의미의 양식으로 이해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주님이 바로 뒤에서 먹을 것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데(25절),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했을 가능성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내일의 양식’으로서, 이 땅에서 먹는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서 먹게 될 양식,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은혜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만, 그것은 일용할 양식의 너무 한 부분만 바라 본 것입니다. 먹을 것이 어찌 먹을 것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양식이 어찌 나의 하루 세끼 식량, 이렇게만 한정된 의미이겠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주님이 그토록 먹을 것을 빗대어 많이 말씀하시고, 그 먹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로 복음서가 도배되어 있다시피 하겠습니까? 먹을 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지, 목숨을 위해 먹을 양식만 생각하는 삶이 되지 말라고 하셨지, 그 이상의 의미를 담은 일용할 양식에 대해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일용할 양식’에 대한 바른 기도가 없는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영적 무지임을 주님은 여러 부분에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 기도를 하라고 하신 것이 무척이나 다행스럽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먹는 문제를 먹는 문제로만 이해하는 분들이 아직도 이 땅엔 많기 때문이고, 또 반대로 먹는 문제에만 집착하며 기도하는 분들도 아직은 많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너무 멀리 나아갔고, 또 다른 한쪽은 너무 뒤로 물러났습니다. 주님은 이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 속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사실 오늘 현실이 일용할 양식에 대해 한없이 녹록한 상황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늘날 나름대로 먹고 살만 해졌다고 말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물질의 문제로 인해, 먹는 걸로 인해, 고통을 받고, 또 생명의 위협을 경험합니까? 굶는 사람이 예전보다 줄었는지는 모르지만, 경제적인 문제는 오늘 한국의 높은 자살율의 중요한 원인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송파세모녀법] 일용할 양식은 그저 먹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육체적, 정신적, 관계적 조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필요는 시대마다 동일하지 않고, 역사와 사회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사람이 하루 필요한 열량이야 큰 변화가 없겠지만,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조건은 늘 같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 제일 처음에 나오는 ‘오늘’이라는 부사는 단지 어제와 내일이 아닌 오늘 ‘today’가 아니라, ‘오늘 이 시대’라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어제의 일용할 양식, 과거와 고대의 일용할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일용할 양식에 대해 고민하며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그저 오늘날은 더 많은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오니, 그걸 고려해서 더 많이 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시 기도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어떻게 구할 것인지,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우리는 주님께 기도를 여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참 먹는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사역의 시작(가나 혼인잔치)도 먹는 것, 끝도 먹는 것(성만찬)이었습니다. 부활하셔서도 제자들 아침밥 차려주시는 게 첫 사역이었습니다. 잘 드셨고, 그런 자리의 이야기를 비유로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도 예배 때마다 먹습니다. 식탁을 떠나 주님의 이야기를 할 수 없고, 먹는 것 빼고 주님의 사역을 논할 수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이야말로 주님의 삶과 사역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렇게 먹는 걸 좋아하시는 주님에 대한 성경의 묘사에서, 주님이 홀로 무언가를 드시는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성만찬도 그런 상징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의 출발이 ‘우리’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문제가 결코 나 혼자 먹는 일용할 양식의 문제가 아님을 처음부터 전제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관심사는 언제나 같이 먹는 그 ‘우리’가 누구인가, 어떤 우리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본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식탁은 그저 밥 먹는 자리가 아닙니다. 같이 먹는다는 건, 같은 삶을 공유하는 관계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일용할 양식을 늘 당시의 기준으로서는 이상한 사람들과 함께 먹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세리, 창녀, 빈곤자 등, 당시 사람들이 식탁에 함께 앉는 것을 싫어했던 사람들과 같은 식탁에서 밥을 드었습니다. 요한복음학교에서,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 가족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주님은 그런 가족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주로 모여 사는 베다니 지역,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의 집을 제 집 드나들 듯 하시며, 그들과 같이 먹고 주무셨습니다. 보통은 사람들이 같이 먹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드셔서, 그리고 남들이 한 끼라도 같이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는 한 자리에 있지 않으셔서, 예수님은 불필요한 오해를 자초하셨습니다. 우리는 배부르고 넉넉하며 이미 충분한 사람들과 더불어 이 기도를 하고 싶어 합니다. 집이 있고, 통장에 잔고가 있고, 교양 있고 품위 있는 사람들 속에 섞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기도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의 축사, 주님의 간구는 언제나 그 일용할 양식이 그리 고급지고, 맛스럽지 않은, 그리고 그 밥을 홀로 먹어야 할 사람들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누구와 함께, 어디서 먹느냐, 그것이 우리의 ‘일용할’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것을 주님은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식탁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내가 먹는 밥상이 내가 누구인지 다 말해줍니다. 무엇을 먹고 누구랑 먹는지, 그게 우리 신앙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는 오늘의 양식을 세리와 창녀,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먹는 사람들입니다. 돈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함께 먹을 사람이 없는 이들과 같이 기도하며 먹는 사람들, 그들이 주기도문의 ‘우리’입니다. 우리가 먹는 밥상이, 닫힌 밥상은 아닌가,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와 함께, 우리들의 밥상을 자유케 하여 주시기를, 우리의 식탁을 구원하여 주시고, 식탁 위에 엄연히 존재하는 담들을 다 허물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양식이 아닌 우리의 양식을 구할 수 있는 그런 기도가 우리에게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거기서 주님은,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토당토않은 말씀입니다. 가진 것 없는 제자들이 곧바로 항변합니다.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그러자 주님은 그걸 주님께 가져오라고 하시고, 무리에게는 다 잔디 위에 앉으라 하신 후에, 그걸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셨습니다. 다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주님은 한 가지 놀라운 과정을 보태십니다. 떡을 떼어 사람들에게 곧바로 전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제자들을 향해 주시고, 그걸 다시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주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 앞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항변, 그것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이것이었던 겁니다. 여러분, 이 주님의 행동에 대한 의미가 헤아려지시는지요? 주님이 이 오병이어 사건에서 강조하시려는 바 가운데 하나는, 부족한 일용할 양식에 대한 관점의 차이,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의 차이입니다. 이 장면에서 성경은, 무리를 보내어 각자 필요한 양식을 먹게 하자는 제자들과 너희가 직접 먹을 것을 구해서 그들에게 주라고 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명확한 대립각으로 그려냅니다. 일용할 양식의 문제가 각자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이 있는 반면, 그것이 우리의 문제요, 더 시급하게는 제자들의 문제임을 강조하는 주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말할 때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가 이 부분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나만의 일용할 양식이 아닌 우리의 것을 구하는 기도이자, 더 나아가, 그 양식을 공급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받아들이겠다는 기도입니다. 그들의 가난이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요, 나의 문제인 겁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걱정이 있는 세상의 사람들을 향한 교회와 성도의 책무는 그러니까 선행의 문제가 아니라, 마땅한 의무의 문제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제자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그 양식이 우리의 전대에서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 중 누가 돈을 많이 벌어 그걸 다 하겠습니까? 물론 건강한 기업을 일구어 많은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을 책임져주는 훌륭한 기업인이 될 수도 있고, 주식으로 돈을 많이 벌어 많은 기부를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주님의 초점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 시작이 오병이어임을 잊지 마십시다. 그것의 지극히 작고 일상적인 비루함, 그것의 대단치 않음에 대해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오병이어는 한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었습니다. 아이가 먹을 한 끼 식사, 그게 오병이어입니다. 그걸로 하나님은 성인 남자 오천 명을 먹이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당시 이런 아이는 숫자에 들지도 않는 존재입니다. 오천 명이 먹었다고 성경은 기록하는데, 정작 그 오천 명 속에 그 도시락 소년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수에 끼지도 못하는 이의 도시락이 그 수 전체를 살립니다. 여러분 성인 남성만 오천 명이 모인 자리에서, 그 수에 포함도 되지 않는 어린 아이의 도시락으로 모두가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입니다. 존재의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의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거기서 모두가 함께 먹을 일용할 양식이 열매로 거두어집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걸 믿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요, 주님의 기도를 배워 기도하는 자입니다. 어떻게 모두의 일용할 양식을 해결할 것인가, 그것은 나중 문제입니다. 주님은 그것이 우리의 문제요,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문제임을 먼저 말씀하시고, 그 기도를 믿음으로 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진정으로 믿음이 필요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사람 수에도 들지 않는 이의 일용할 양식으로, 모두의 일용할 양식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대단한 것으로 대단한 일을 이루시지 않습니다. 늘 보잘 것 없는 이의 작은 헌신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놀라운 일들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가진 아주 작은 것을 통해, 나의 일용할 양식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해결하십니다. 여기서부터는 믿음의 영역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서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요. 오병이어의 하나님을 믿기에 기도하는 겁니다. 이 문제가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서 해결될 것이다, 주님의 나라는 반드시 이 기도를 통해 오는 나라일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무에서 모든 만물을 만드신 분이시다. 그분은 반드시 당신의 일을 행하실 수 있다. 지금의 여건과 가진 것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이것을 믿는 사람만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십시오.”라고 담대히 간구할 수 있습니다. 성인 남성의 수가 오천인 그 모임에서 과연 도시락을 싸온 사람이 그 아이 하나였을까요? 저는 아마도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훨씬 더 맛있고 좋은, 그리고 풍성한 도시락을 싸온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 아이만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내밀게 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물론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아이의 일용할 양식이 먼저 주님께 내놓아졌고, 그것으로 인해 쭈뼛쭈뼛 했던 수많은 도시락 keeper들의 생각과 행동도 바뀌게 되었을 것입니다. 혹시 그들이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 회개하고 자신들의 도시락을 오병이어에 보탰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상상이지만, 어쨌든 우리가 내려놓은 나의 일용할 양식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밀알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걸로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떡들이 생기게 하실 수도 있고, 감추었던 부자들의 도시락을 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 일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아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주님은 바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뭐라도 해야 합니다. 도시락을 오픈할 믿음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찾아 나서게 되든, 아니면 누군가의 일용할 양식을 축사하며 기도를 하든, 내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 앞에 내어드리든,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은, 이 땅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합니다. 그 일을 하라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고, 그 삶을 살아내라고 주님은 우리를 이곳에 모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나 하나 더 잘 먹겠다고 날마다 부르짖어 기도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잘 먹고 살기 위해 예수를 쫓아다닌다면,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이 기도를 아무리 외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가 아니라, 오직 주님만의 기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대로 이 일용할 양식의 모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도 그 대목에서 처음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만나를 주시면서, 이상한 말씀을 한 가지 하셨습니다. (구약성경 105쪽) 출애굽기 16: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는지 시험해 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율법의 내용은 뒤에 19절, 20절에 밝혀집니다.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먹고 사는 문제가 그저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인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살아가는지, 아니면 물질을 믿고 살아가는지, 그 여부를 가리는 신앙의 문제임을 만나는 처음부터 보여줍니다. 아시는 대로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이상 만나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주신 땅에서 경작을 하고, 거두어들인 곡식을 저장하여 먹고 살았습니다. 당연히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로부터 그들은 자유로워졌고, 만나의 신앙은 더 이상 그들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의 간구를 요청하셨고, 그것으로 시험하셨습니다. 비록 삶의 겉은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다른 이방 민족들과 똑같이, 그 풍요만을 바라보며, 그 풍요 속에 갇혀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컨대 여러 절기들이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3대 절기,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 등은 모두 그러한 신앙을 다시 가나안 땅에서도 지켜내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곡식을 거두며 드리는 예배, 모든 추수가 마치고, 거둔 것들을 창고에 저장하며 드리는 예배, 그것들은 비록 이제 일용할 양식은 아니지만, 나의 이 땅의 삶이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먹고 마시는 삶임을 기억하고, 살아내기 위한 신앙적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될 것을 염려하신 하나님은, 두 번째 안전장치를 만들어주셨는데, 그것이 안식과 관련된 절기들입니다. 안식일이 그러하고, 안식년이 그러하고, 또한 희년이 그러합니다. 일종의 삶의 브레이크이자 ‘우리’의 양식을 잊지 않게 하시는 표지판과 같았습니다. 삶에 큰 쉼표 하나를 ‘꽝’하고 찍고, 내 삶을 지탱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나의 일용할 양식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시험하게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안식의 초점은 자유와 해방입니다. 빚이 탕감되고 노예와 종이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신이 잃어버린 삶의 터전을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것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이 바로 안식과 희년의 율법입니다.] 오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문제로 시험하고 계시고, 우리로 하여금 누군가의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전체에 ‘일용할’이라는 말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구절이 야고보서 2:14~17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우리의 믿음이 죽은 믿음인지, 아닌지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식탁을 보면 우리의 신앙이 보입니다. 그 일용할 양식을 믿음으로 구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나의 식탁을 위해, 물질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삶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식탁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드리는 기도,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구입니다. [화목 헌금 이야기] 말씀 서두에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혜자라 할 수 있는 아굴이 했던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지혜, 그리고 하나님께 해야 할 지혜로운 기도는 조금 더 적극적이고 보다 더 공동체적입니다. 그저 가난하지도, 무하지도 않아서 하나님을 모른다고도 안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지혜가 아니라, ‘우리’의 식탁을 누구와 어떻게 먹을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보다 책임 있고, 믿음 있는 기도를 위한 적극적인 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부디 우리에게 그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 알면 알수록 기도가 느려집니다. 의미 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머물고, 우리의 삶이 고백되는, 그런 진실한 기도, 느린 기도가 되어 갑니다. 부디 일용할 양식을 위한 우리의 기도도, 진정 주님의 기도를 닮아갈 수 있기를,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식탁이 오병이어 그 풍성하고 너른 잔디밭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 설교 처음으로